
* 이 책의 제목은 본문 내용과 대략 관계없음.
자기 전에 습관적으로 TV를 켰더니 케이블에서 젊은 영화감독들이 나와 토크를 한다. 가장 이쁜 배우가 누구냐는 게 주제다.
A: 조명도 안좋아 어두컴컴했는데, 갑자기 저쪽에서 광채가 나는거야. 딱 보니까 고현정이 저기서 걸어오더라고. 사람한테 오로라가 있다는 게 뻥이 아니었구나 싶더라구.
B: 난 화장실에서 줄을 서고 있는데, 뒤가 환해지면서 뜨거운 느낌이 나더라고. 뒤를 보니까 글쎄 심은하가 서있지 뭐야.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화장실 순서를 양보하는 것밖에 앖았어.
A: 와, 대단하다. 그거 양보하는 게 쉽지 않은데....
난 눈이 낮은 편이다. 그래서 내 눈에 이뻐 보이는 여자가 너무 많다. 너무 많은 여성에게 ‘미녀’를 남발했기 때문에 내게서 미녀 소리를 듣는 건 칭찬이 아니다. 어떤 미녀분의 말이다.
“절 이쁘게 보신다면 제발 제게 미녀라고 부르지 말아 주세요. 99.99%의 여자에게 해당되는 ‘미녀’라는 말을 제게 하는 건 저를 두 번 죽이는 겁니다”
생각을 해본다. 난 왜 눈이 낮을까. 젊은 시절 TV를 보면서 미녀에 대한 안목을 기르지 못한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특히 한국의 표준화된 미를 전국 방방곡곡에 강요하는 미스코리아 중계를 단 한번도 안본 건 결정적이다. 또 뭐가 있을까. 좀더 심사숙고를 해보니 의대를 다닌 것도 중요한 이유일 수 있겠다. 미에 대한 안목이 형성되는 중요한 나이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라는 점에서, 그런 민감한 시기에 의대를 다닌 건 치명적이다.
대학에 원서를 낸 뒤 면접을 보러 갔다. 돌아오면서 내가 심난했던 것은, 예상은 했지만 우리과 여학생들의 미모가 별로 뛰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이 학교를 다니다 보니 이쁜 여학생이 제법 눈에 띄었다. 흙속의 진주를 찾은 건 물론 아니었고, 내 눈이 그들에게 맞춰진 결과였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과 여학생의 대부분이 이뻐 보이기 시작했다.
2년 아래학년에 굉장한 미녀가 들어왔다. 사람에게서 광채가 날 수도 있다는 걸 난 그녀 때문에 알았다. 어쩌다 그녀가 지나가는 걸 볼 때면 난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봤고,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면 턱밑에 고인 침을 닦으며 탄식했다.
“왜 하늘은 나를 낳고 또 저렇게 이쁜 여인을 보내셨단 말인가!”
써클 후배가 그녀와 과커플이었던 관계로 난 그녀와 방송 드라마용 슬라이드를 찍는 영광을 안기도 했었는데, 그때 너무도 눈이 부셔 안그래도 작은 눈을 더 가늘게 떠야 했다.
친한 친구가 병원일 때문에 우리학교에 놀러왔을 때, 난 도서관 앞에서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던 그녀를 친구에게 자랑했다.
나: 쟤 이쁘지 않냐? 우리 학교 최고의 미녀야.
친구: 어디? 누구?
나: 저기 저 빨간옷 입은애!
친구: 쟤???? 쟤가 뭐가 예뻐!
바깥 세상에서 살다 온 친구의 눈에는 내게 여신같았던 그녀가 하나도 이쁘지 않았단다.
한번 낮아진 내 눈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내 친구들은 늘 내 눈을 비웃고, “니 눈도 눈이냐”는 말까지 한다. 그러니까 내 낮은 눈은 유전적인 게 아닌, 후천적으로 습득된 결과다. 그래도... 눈이 지나치게 까탈스러워 미를 미로 보지 못하는 사람보단, 좀 남발하는 경향은 있어도 대부분의 여자를 미녀라고 불러주는 내가 더 좋은 사람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