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큐픽션이란? 다큐와 픽션이 마구 뒤섞여 뭐가 진실인지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장르를 말하며, 특히 다큐가 비율이 높은 걸 다큐픽션이라고 해 픽션다큐와 구분하기도 한다.
모르는 사람에게서 메일이 왔다. 확 지워버리려다 멈칫한 것은 발신자 이름이 여자였기 때문. “김선경? 누구지? 써클 후배던가?”
클릭을 해본 나는 씩 웃고 말았다.
[선생님의 책을 읽고 메일을 드립니다...저는 문예창작과 학생인데요, 기생충을 가지고 소설을 쓰려고 합니다. 만나서 조언을 좀 들었으면 좋겠는데 시간 내주실 수 있는가요?]
‘내 책을 읽고도 내게 연락할 생각이 들다니, 무지하게 기특한 학생이군!’
난 거기 적힌 번호로 다이얼을 돌렸다.
“여보세요?”
앳된 목소리를 들으며 난 대충 그녀의 모습을 상상했다. 쥐어 뜯느라 풀어헤쳐진 머리, 앉아만 있어서 비대해진 하체...그런 것들이 내가 생각하는 작가의 모습이었으니까. 난 그녀와 월요일에 만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월요일 아침, 그녀로부터 메일이 와 있었다.
[저 김선정인데요, 저는 선생님 얼굴을 알지만 선생님은 제 얼굴을 모르실 것 같아 사진을 보냅니다]
첨부된 사진을 보는 순간 난 너무 놀란 나머지, 히프가 의자에 끼여 버렸다.
“이, 이렇게 이쁠 수가!”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에 광채가 날 정도로 이쁜 여인이 웃고 있었다. 더 놀라운 건 그녀가 밑에 써놓은 말이었다.
“실물이 더 나아요”
그때부터 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면도를 안하고 온 것, 그리고 옷을 대충 입고 온 것을 후회했고, 만나서 뭘 먹을까, 2차는 어디로 갈까에 대해 고민하다보니 어느새 약속 시간이 다 되버렸다. 대학로에 도착한 나는 긴장을 풀기 위해 책을 폈다. 하지만 책이 통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 같은 줄만 반복해서 읽고 있는데, 사진에서 본 것과 비슷한, 아니 그보다 더 뛰어난 미모의 여인이 웃으면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난 나도 모르게 허리를 90도로 굽혔다.
“아, 안녕하세요”
그녀는 그 동네를 잘 안다면서 깔끔하고 우아한 음식점으로 날 안내했다. 우리는 밥과 생맥주 한잔을 시켰고, 내 잔이 비자 한잔을 더 추가했다. 밥을 먹고 난 뒤 난 그녀와 소설 얘기를 했다. 그녀는 올 신춘문예에 응모할 예정으로 소설을 구상 중인데, 내 책을 보는 순간 기생충에 대해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거다.
“... 그러니까 돌연변이에 의해 기생충이 커져 지구를 공격하는 거죠. 주인공은 기생충학자인데, 그가 특수한 약을 개발해 기생충을 막구요..”
난 진심으로 감탄해 마지 않았다. “아니 어쩜 그리 깜찍한 생각을 다 하세요. 소재가 워낙 좋으니 조금만 열심히 쓴다면 꼭 될 거예요”
나의 칭찬이 멋쩍었는지, 그녀는 엷게 웃었다. “흐흐흐”
그 뇌쇄적인 미소에, 난 한참을 멍한 기분으로 있어야 했다.
난 그녀를 대학로의 자랑, 레드망고로 안내했다. 이건 내가 얼마나 사심이 없는 인간인지를 보여 주는데, 대부분의 남자라면 빙수만 먹고 헤어질 레드망고 대신 술집에 끌고 가 오랜 시간을 붙잡아 두기를 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빙수를 먹으며 또다시 문학 얘기를 했다. 그녀는 자신이 구상하는 또다른 소설-애인을 파라과이에 두고 온 여자가 다른 남자와 파라과이를 다시 간다는-얘기를, 나는 이전에 썼던, 식인 캥거루가 전국을 돌면서 사람들 피를 빨아먹어 죽게 만든다는 얘기를 했다.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보니 어느덧 9시가 되었다.
헤어지길 원한 건 아니었지만, 난 그녀가 그전에 일어날 것으로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왠일인지 그녀는 전혀 갈 의사가 없는 듯, 긴 다리를 꼬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참다못한 내가 물었다.
“집에 안가세요?”
그녀가 슬픈 표정으로 대답했다 “왜요? 무슨 약속 있으세요?”
그녀의 눈빛에 마음이 흔들린 나는 맥주를 마시러 가자고 제안했고, 그녀는 흔쾌히 그러마고 했다. 어딜 갈까 머리를 굴리는데 그녀가 자기가 아는 곳이 있다며 그쪽으로 날 인도한다.
“사실은 제가 오늘 어디어디 갈까 미리 다 생각해 두었어요. 밥집은 어디가 좋고, 맥주집은 어디로 가고...”
그 말에 놀라지 않았다면 인간이 아니리라. 그때부터 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생맥주와 안주를 시켜놓고 술을 마셨다. 갑자기 그녀가 내 옆에 앉았다.
“이, 이러면 안되는데...”
나랑 놀기엔 그녀는 너무 젊었고, 너무 이뻤다. 하지만 그녀를 뿌리칠 힘이 내겐 없었다. 우린 그 자세로 얘기를 나누며 술을 마셨다. 그녀가 살포시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 자세로 십분쯤 있었을까. 난 화장실에 간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변을 보면서 왜 하필 이럴 때 소변이 마려운 건지 스스로를 원망했다. 다시금 자리로 가서 약간의 고민을 했다. 그녀와 반대쪽에 앉을 것인가, 원래 내 자리로 앉을 것인지. 전자의 경우 그녀를 무시하는 게 될지도 몰라, 원래 내 자리에 앉았다. 맥주를 두 번, 그리고 안주를 한번 더 시켰을 무렵, 시간을 보니 밤 11시 반이 넘어 있었다. 그제서야 벤지 생각이 났다. 내가 언제 오나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벤지가.
“저, 집에 안가세요?”
그녀가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꼭 가셔야 해요?”
마음이 흔들렸지만,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슬픈 표정으로 가방을 챙겼다.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고 난 내 허벅지를 꼬집었다. 그녀가 말했다.
“다음주에 또 만나줄 수 있으세요?”
난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럼요!!”
“제가 연락 드릴께요”
그녀의 집 근처에 택시를 내려줄 때, 그녀는 다시금 애처롭게 날 바라봤다. 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가요” 집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계속 창밖을 보았지만,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의 144번째 술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