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올시즌 159번째 술을 마셨다. 오늘 저녁에 또 커다란 술자리가 있으니, 11월까지 마신 횟수는 160번이 될 전망이다. 술일기를 쓴 이유는 올해 술을 180번 이하로 마시는 거였지만, 술자리가 많은 망년회 특수를 감안한다면 목표 달성이 빠듯할 것 같다. 내 휴대폰의 12월 스케줄을 보니 조금은 어지럽다. 이번주는 1일 하루만 술을 마시지만, 다음주에는 6, 7, 8, 9일 4연전이 있고, 10일을 건너뛴 뒤 11일에 마셔야 한다. 아무리 그래도 31일 중 20일을 마실 것 같지는 않으니, 목표를 달성할 확률이 더 많기는 하다. 그렇다 해도, 목표를 달성했다고 환호하고 싶지는 않다. 목표가 너무 널럴했으니까. 세상에, 이틀에 한번씩 술을 마시는 게 목표가 될 수 있을까?
나에게는 두가지 모습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근무를 마칠 때까지의 나와 그 이후의 나. 전자의 나는 대충대충 사는 사람이다. 십중팔구 지각을 하고-물론 이건 머나먼 출근길 탓도 있다-근무 시간에는 딴짓을 더 많이 하며, 출근은 남보다 늦게 하지만 퇴근은 훨씬 빨리 한다. 내가 스스로 말하는 장점 중에는 “직장이 먼데도 남보다 더 빨리 집에 와있다”는 것도 있을 정도. 하지만 저녁 타임이 되면 난 180도 다른 모습이 된다. 술자리 약속에는 거의 늦지 않으며, 매우 진지한 자세로 술을 들이킨다. 술자리 분위기를 ‘업’시켜가면서. 근무를 이렇게 열심히 했다면 하는 생각이 안들 수가 없고, 뭐가 본업인지 헷갈리기까지 한다.
내가 술을 자주 마시는 건 순전히 방대한 조직 탓이다. 점조직으로 이루어진 수많은 조직들을 관리하려면 이틀에 한번 정도는 술을 마셔야 하는 게 당연하다. 선을 볼 때마다 이런 말을 했다.
“제가 조직 관리를 하는 게 있거든요. 그래서 술을 좀 자주 마시는 편이어요”
난 매일같이 술을 마실테니 각오하라는 소리일 터, 그러니 여자들이 날 좋아할 리가 있겠는가. 난 왜 이렇게 방대한 조직을 만들었을까. 아마도 그건 어린 시절의 반작용 때문일 것이다. 친구도 없이 혼자 지내고, 학교에서 하루종일 말 한마디 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내가 동경한 삶이 어떤 것이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내가 10세 이전의 삶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다고 회상하는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 비롯된다. 대부분의 의대생들이 본과에 올라온 이후 친구들을 정리했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시간과 돈을 대부분 조직을 관리하는 데 썼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외로움을 인정한다 해도, 난 너무 많이 온 것 같다. 어느 책에 의하면 독신의 조건 중 하나는 함께 있어줄 친구가 다섯명 이상이어야 한다는 거다. 바꾸어 말하면 술을 마셔줄 친구가 다섯명 이상 있다면 가정 생활을 할 수가 없다는 얘기, 내가 다른 누군가의 남자가 되려면 이 방대한 조직을 정리하지 않으면 안된다. 난 26세 미녀에게 “조직을 정리하겠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건 쉽지 않다. 조직은 끊임없이 자기 증식을 해나간다는 파킨슨의 원칙은 내게도 적용되어, 어찌된 게 갈수록 조직이 커져만 간다. 규모 면으로 비교하자면 96년께 내가 관리하던 조직보다 지금의 그것이 족히 세배는 클 정도. 어떻게 해야 할까. 막상 정리를 하자니 슬픈 표정을 지으며 “우리 이제 못만나는 거야?”라고 내게 말을 할 친구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싫은 소리를 못하고, 남과 대면하면 내가 미안해해 버리는 소심한 성격으로 어떻게 정리를 할까. 그래도 해야 한다. 26세 미녀를 얻기 위해 그정도도 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그래서 오늘 아침 기차에서 내 조직의 현황을 그려보다가, 엄청난 규모에 놀라 잠이 들고 말았다. 그래, 줄이자. 비단 26세 미녀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내 연구인생을 위해서도, 내 건강과 돈을 위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