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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덫
장하준 지음 / 부키 / 2004년 8월
평점 :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이 글을 읽기 쉽게 쓸 능력까지 갖추었다는 건 금상첨화라 할 만하다. 캠브리지 교수로 있는 장하준이 바로 그런 사람인데, 그는 <개혁의 덫>을 통해 미국의 제도들을 글로벌 스탠더드로 칭송하며 미국화를 부르짖는 사람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다.
외국에 나가있는 탓에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어서 그런지, 그의 발언은 시종 거침이 없다. 자본에 국적이 있다는 주장이나 민영화가 만능이 아니라는 주장은 좌파의 주장과 일맥상통하지만, 재벌체제의 장점을 인정하고 재벌을 옥죄는 각종 제도들을 해체하자는 말은 조선일보의 주장과 비슷하다. 그가 조선.동아일보와 오마이뉴스, 문화일보 등 매체를 가리지 않고 글을 기고할 수 있는 비결이 거기 있을텐데, 이 책은 그가 각종 매체에 기고한 글들을 모은 것이다. 칼럼으로 쓰던 게 책으로 묶여져 나오면 아무래도 시의성이 떨어지게 마련이지만, 아직도 그의 말이 유효한 대목들이 많고, 그의 정확한 예측력을 확인하게 해주는 효과도 있다. 예컨대 주식이 상한가를 치던 99년에 장하준은 이런 주장을 했었다. “주식시장에 들어있는 거품이 미국 주식시장의 하락 가능성 등 경제불안 요인들에 의해 터지기라도 하면...경제가 다시 침체에 돌입할 수도 있다(105쪽)” 그리고 새롬 기술 한주가 80만원을 넘었던 2000년에 그가 했던 주장, “대부분의 인터넷 회사들은 지금까지 한번도 이윤을 낸 적이 없다. 그런데도...상상할 수도 없는 주가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미국 경제가 조만간 조정기에 들어가게 되면 인터넷 주들이 가장 먼저 타격을 입게 될 것...(108쪽)” 그의 말을 사람들이 귀담아 듣지 않은 것이 벌써 4년째 계속되는 경제불황의 원인이 아닐까.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이 많은 책이지만, 여기저기 기고한 칼럼을 모은 탓에 중복되는 부분이 굉장히 많다. 그의 이전 저작인 <사다리 걷어차기>와 비슷한 내용이 나오는 거야 그렇다 쳐도, 한 책 내에서 겹치는 대목이 나오는 것은 분명 옥의 티다.
-“우리나라 기업들의 부채비율이...국제적 기준으로 볼 때 높은 것도 아니다...한국 기업들의 부채비율은 366%...일본(369%), 프랑스(361%)와는 비슷하고, 이탈리아(307%)....(100쪽)”은 156쪽에 나오는 다음 대목과 겹친다. “우리나라의 부채비율이 366%였던 1980년대에...프랑스(361%), 이탈리아(307%)도 우리와 유사한 부채비율을...”
-미국의 보호무역을 이끌었던 해밀턴 관련 부분은 4번이나 언급된다.
“해밀턴은...관세와 보조금을 통해 유치산업을 보호.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60쪽)”
“영국 경제학자들의 자유무역 이론에 대응해 해밀턴이 유치산업 보호론을 처음 제기한 이래...(124쪽)”
“미국의 초대 재무장관 해밀턴이 이러한 주장의 선구자였는데, 그는 세계 최초로 유치산업 보호론을 창시한 인물..(140쪽)”
“유치산업 보호의 원조가 사실은 미국이라는 것.. 유치산업 이론을 처음 체계화시킨 것이 바로 미국 초대 재무장관 해밀턴이었고...(148쪽)”
-“미국도 ...은행의 안정성이 위협받게 되자...국내총생산의 3%에 해당하는 막대한 공적 자금을 투입해 일부 은행을 국유화하기까지 하면서 사태를 수습(96쪽)”
“미국 정보는 필요하다면 시장에도 적극 개입한다...1980년대 후반...국내 총생산의 3%에 해당하는 공적자금을 투입해..(124쪽)”
이런 대목들이 워낙 많이 나와 열거가 힘들 정도다. “독일의 벤츠 그룹이 미국의 크라이슬러를 인수했을 때, 처음에는...이사회를 동수의 독일인과 미국인으로 구성했지만 합병 후 4년이 지난 지금은 이사 14명 중 미국인이 2명 뿐”이라는 대목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리던 사람이 159쪽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읽으면 어떤 생각을 할까.
“독일의 벤츠 그룹이 미국 크라이슬러를 인수했을 때...처음에는 이사회에 독일인과 미국인을 동수로 내세웠지만 합병 후 4년이 지난 지금 이사 14명 중에 미국인은 2명뿐”
중복과잉투자가 우리나라 외환위기의 원인이었다면, 각종 사례들의 중복과잉 기재는 이 책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중요한 요인이다.
통계상의 오류도 있다. “1996년-97년 우리나라 기업들은...118조의 외부자금을 조달했는데, 1998년-2001년에는 이것이 불과 31% 수준인 49.4조원 수준으로 줄어들었고(158쪽)” 49.4조원은 118조의 31%가 아니며, 내가 다시 계산해 보니 대략 42%에 해당한다. 이게 틀렸다고 해서 저자의 논지가 위협받는 건 아니지만, 이런 사소한 실수는 없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저자의 주장에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별 네 개를 줄 수밖에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