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얼마 전에 주문했습니다. 은희경은 제가 '무조건 산다'는 파일에 있는 작가입니다.
공중보건의로 복무하던 시절, 난 그야말로 날라리였다. 낮에는 낮술, 밤에는 밤술을 마셨고, 허구한 날 테니스만 쳤다. 그때 나만큼 한가한 친구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사법연수원에 다니던 K였다. 어디나 그렇지만 사법연수원도 판.검사가 되려는 사람은 공부를 열심히 하고, 변호사가 되겠다는 사람은 탱자탱자 논다. 성적이 안좋아 변호사를 지망해야 했던 K는 나와 같이 테니스를 치곤했는데, 그가 테니스를 치다말고 갑자기 기침을 한다. 기침이야 할 수 있지만 기침에 피가 섞여 나왔으니 놀랄 수밖에. 우리나라에서 객혈을 한다면 아직까지는 결핵을 생각해야 하는데, K 역시 결핵이었다. 결핵은 9개월 정도 약을 먹어야 완치가 되지만, 며칠만 약을 먹으면 금방 증상이 좋아져 환자들이 약 복용을 중단하는 경우가 많다. K는 내 말을 쫓아 약을 열심히 먹었다.
고시공부에 시달리느라 만년 솔로였던 K에게 여자친구가 생긴 것은 그때였다. 눈이 다소 높은 그의 뜻대로,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여성이 그의 앞에 나타난 것. 둘은 열심히 사귀었고, 결혼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K가 내게 물었다.
“나 결핵인 거, 말 해야 하니?”
난 말하지 말라고 했다. 결핵이라는 게 무슨 결격사유는 아니지만, 몇 달만 더 약을 먹으면 완치가 될 거 굳이 말할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내 말대로 K는 여친에게 그 사실을 숨겼다.
그에게는 길게만 느껴졌을 9개월이 지났다. 하지만 K는 완치되지 않았다. 그에게 병을 일으킨 건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는 결핵균이 아니었고, ‘비전형(atypical) 결핵’이라는 걸 유발하는, 약에도 잘 안듣는 균이었다. 병원에서는 약을 바꾸고 별짓을 다했지만 결핵은 낫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결혼 날짜는 다가왔고, 그는 결국 결핵에 걸렸다는 사실을 털어놓아야 했다. K의 부인이 된 그 미녀는 K 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해야 했고, 결혼 후 일년 반이 지났을 무렵에야 K는 지긋지긋한 결핵과의 전쟁을 마칠 수가 있었다. K의 부인은 그때 일을 이렇게 회상한다.
[이젠 우리 서방님 아프다고 울던 일들이 옛 기억이 되었으면 합니다. 작년 크리스마스 때 서방님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저는 6개월된 바다(가명. 애 이름)을 업고 병실로 도시락을 싸서 갔었지요. 차마 딸까지 병실에서 잘 수 없어서 아픈 사람을 혼자 병실에 덩그러니 두고 XX와 둘이 꼭 껴안고 울면서 잤답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니 콧등이 시큰하네요.
지난 7월 XX병원으로 향하는 바다아빠를 보면서 이번에는 혹시나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했었는데...... 어찌나 기쁘던지요!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우리가 그소중함을 얼마나 잊고 사는지 다시한번 생각했답니다]
K는 얼마 전에 둘째를 낳았고, 지금은 골프도 치면서 건강하게 잘 산다. 부인의 성격으로 보아 처음부터 결핵 얘기를 꺼냈어도 별 문제는 안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K에게 거짓말-말을 안한 거지만 결과적으로는 거짓말이겠지-을 강요한 것은 K가 내 친구였기 때문이다. 혹시나 그녀가 K를 싫어하게 되면 어쩌나 싶어서. 만약에 내가 K 부인의 친구였다면 그 사실을 숨기고 결혼한 K를 비난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찌되었건 결혼 후 그녀를 볼 때마다 난 일말의 미안함을 느껴야 했는데, 내가 미안하지 않도록 K 부부가 앞으로도 쭉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