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에 처음 들어갔을 때, 난 난생 처음으로 수업 빠지는 경험을 했다. 한명만 빠져도 금방 티가 나는 중고생 시절, 수업 시간에 땡댕이 치는 걸 얼마나 동경했던가. 하지만 노는 방법을 몰랐던 탓에 막상 수업을 빠지고 나니 달리 할 일이 없었다. 같이 수업 빠진 친구들끼리 학교 옆 술집에 가서 막걸리를 마시는 게 고작이었다. 술을 마시면서도 “혹시 출석 불렀을까” 계속 걱정이 되었다.
사실 예과 성적은 본과에 올라가기 위한 것일 뿐, 인생을 사는 데 하등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걸 알면서도, 출석에 걸리는 것은 영 찝찝한 일이었다. “출석 불렀어”란 말을 친구에게서 들으면 한동안 기분이 우울했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 우리는 대출이란 제도를 이용했다. 목소리를 변조하면 서너명 분을 대답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친구들이 다 술마시러 간 생물 시간, 그날은 종강 날이었다. 선생님은 출석을 부르면서 대답한 사람은 밖에 나가라고 하셨다. 난 날 믿고 나간 친구들의 출석을 하나도 지켜줄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한명 건 해줘야 했다. 그날은 그 친구 생일이었으니까. 난 윗도리를 벗고 다시금 강의실에 잠입했고, 그 친구 이름을 불렀을 때 힘차게 대답을 하며 나갔다. 나중에 그 얘기를 들은 친구는 “정말 좋은 생일 선물이다”라고 고마워했다.
본과에 오니 대출을 어렵게 하는 숱한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한 줄 당 앉아있는 사람수를 적은 쪽지를 나눠준다든지, 개인당으로 쪽지를 나눠준다든지. 어떤 과목은 세 번 결석하면 무조건 F 처리를 한다기에 누나를 대신 출석시킨 일도 있었다. 운전면허 적성검사를 받아야 했기 때문. 여성지를 받는 조건으로 학교에 간 우리 누나는 내 친구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4시간의 출석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성형외과 수업만 열심히 들었을 뿐, 나머지 시간에는 여성지를 봤지만 말이다.
졸업하고 나서 조교가 된 이후 난 출석을 관리하는 입장이 되었다. 특히나 대학원 수업은 출석 횟수로 성적이 나갔으니, 출석이 중요할 수밖에. 이런 일이 있었다. 학기가 끝나갈 무렵, 한 선배가 날 찾아왔다. 우리 과목을 듣는데 한번도 출석을 못했단다.
“직장이 지방이라서 매번 오기가 어려워요”
선배고 하니까 난 최대한 예우를 베풀었다.
“이게 출석부거든요. 원하시는 만큼 동그라미를 치세요”
난 놀랐다. 한 반쯤 치겠거니 했는데, 그는 모든 날에 다 출석을 한 것처럼 동그라미를 쳤다. 결국 그는 A+가 나왔다.
성적이 나가고 나서 다른 분이 날 찾아왔다. 한번도 간 적이 없는데 왜 내가 A+이 나왔냐고 묻는다.
“아, 선생님이 레지던트 때, 저 선생님한테 배웠었어요. 그래서...”
병원 실습을 돌 때 레지던트도 교육을 담당하는데 그는 우리 조의 담당교사였다. 그 이유로 그는 4학기 내내 A+를 받았다.
동기 중에도 대학원생이 있었다.
“민아, 나야 나!”
난 그에게도 A+을 줬다. 다 이런 건 아니었다. 다른 과목들은 대개 출석을 까다롭게 체크하고, 봐주는 게 없었다. 자연히 우리 과목의 수강신청자는 갈수록 늘어났고, 대개가 아는 사람이었다. 어느 학기인가는 대학원생의 80%-200명?-가 별 관계도 없는 기생충학을 선택과목으로 들었다.
내가 나간 후 출석을 맡은 사람은 나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언젠가 대학원 강의를 위해 교실에 갔을 때, 난 우리가 개설한 두과목을 합쳐서 수강생이 20명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격세지감을 느꼈다.
내가 잘했다는 건 결코 아니다. 출석을 엄격하게 관리했던 다른 이들이 원칙적으로 옳았다. 하지만 그 때 내가 출석을 잘봐줬던 사람들은 어쩌다 만나면 그때 얘기를 하면서 고마워한다. 그 중 한 분은 내 무릎을 무료로 치료해 주기도 했다. 이런 걸 보면 올바르게 살아야 하는지 가끔은 회의가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