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그러니까 4월 2일날 알라디너 20여분이 참가한 번개가 있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사흘이 지날 때까지, 아무도 번개 후기를 쓰지 않는다. 작년 10월에 있었던 번개에서는 참가자의 대부분이 번개 후기를 올렸던 것에 비하면 이번의 침묵은 기이하기까지 하다. 본 기자는 참석자 몇 명에게 인터뷰를 시도했다.


먼저 로드무비님께 전화를 드렸다.

나: 저 부리 기자라고 합니다.

로드무비
안녕하세요? 저 부리님 대따 좋아해요.^^
- 2005-04-04 23:56
 

 

나: 하핫, 감사합니다. 뭐 하나 여쭤볼 게 있어서요, 시간 되시나요?

로드: 그럼요, 남는 게 시간밖에...

나: 혹시 번개 때 무슨 일 있었어요?

로드: 딸깍(전화 끊어짐)

나는 재차 전화를 시도했지만, 전화기 전원은 이미 꺼진 후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다음으로 번개를 주최한 연보라빛우주님을 건대 근처에서 잠복근무한 끝에 만날 수 있었다.


나: 와 우주님. 연보라빛 옷을 입으셨군요! 대따 예뻐요!

우주 : 정말요? 앞으로 계속 이 컨셉으로 갈 거예요 하하. 근데 갑자기 여긴 웬일이세요?

나: 저 지난번 번개에 대해서 여쭤볼 일이...

우주: 그 얘기라면 됐어요! 저 말고 다른 분께 하세요.

나: 그래도 우주님이 번개의 공식 주최자잖아요

우주: 저 할 얘기 없어요. 전 2차에서 먼저 간걸요.

나: 그 전까지 얘기라도 해주세요.

우주: 글쎄요. 별 일 있었나? 수암님  오셨구, 아, 동물 모양의 쿠키 스무갠가 사가지고 오셨다. 수니나라님 이 쵸코렛 만들어 오셨구, 진우맘님은 그냥 오셨고....

나: 그리구요?

우주: 뭐, 평소에 오던 분들이 오셔서 즐겁게 놀다갔어요. 그게 다예요. 제가 간 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저야 모르죠.


토끼같은 그녀의 눈을 보니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았다. 더 물어볼라는 찰나 전화가 울렸고, 우주님은 바빠서 먼저 가보겠다고 총총히 사라졌다. 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뭔가 있다!”


나: 여보세요?

서림
네, 누-구세요? - 2005-04-04 23:39
 

 

서림님은 잠에서 막 깬 목소리였다.

나: 저 부립니다.

서림: 부리라니, 부리가 누구야?

나: 저 알라딘의....

서림: 아, 부리님. 안녕하세요?

나: 저 여쭤볼 게 있어요. 지난 번개 때 혹시 안좋은 일 있었나요?

서림: 그, 그게...

나: 그러지 마시고 좀 가르쳐 주십시오. 독자들 알 권리도 좀 생각해 주셔야죠.

서림: 이거 제가 말했다고 하지 마세요. 그날.... 누구더라. 20대 후반이고 미녀고...

나: 하이드님?

서림: 마, 맞아요. 하이드님. 그분이 오사까에서 산 모자를 쓰고 왔는데....그 누구더라. 다리 길고, 나이보다 십년은 젊어 보이는...

나: 아, 깍두기님이요?

서림: 맞아요. 깍두기님이 모자를 한번 써보겠다고 했는데....그, 누구더라. 나이 좀 젊고, 눈이 작은...

나: 그건 에피메테우스님이잖아요.

서림: 잘 아시네요. 그분이 깍두기님한테 왜 하이드님을 괴롭히냐고...아악! 그, 그들이......딸깍.


전화는 그렇게 끊어졌다. 사건의 핵심에 하이드님이 있었다는 걸 알아낸 게 수확이었다. 난 하이드님을 전화로 연결했지만, 전화는 계속 꺼져 있었다. 할 수 없이 하이드님 집 근처에서 네시간을 죽친 끝에, 오사까에 다녀온 뒤 더 예뻐진 하이드님을 만날 수 있었다.


나: 하이드님?

하이드: 어머나 깜딱이야! 놀랐잖아요!

나: 전화는 왜 안갖고 다니세요?

하이드: 배터리가 나간 거예요.


전에 하이드님을 만났을 때, 자기 전화는 배터리가 열흘을 간다고 자랑하던 기억이 났다.

나: 저 번개 때 썼던 모자는 어떻게 되었어요?

당혹감을 감추기 위해 책보는 척을 하는 하이드님.


 

하이드님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리는 걸 난 놓치지 않았다.

하이드: 모, 모자라뇨? 제가 모자라다구요?

나: 그게 아니라 모자 말입니다.

하이드: 전 원래 모자 안써요.

나: 번개 때 모자를 쓰고 왔다는 증언이...

하이드: 이것 보세요 부리님. 내가 그날 머리를 안감고 간 것은 사실이어요. 그래서 머리가 떡이 되었고, 그게 모자를 쓴 것처럼 보일 수는 있죠. 내가 안썼다는데, 왜 나보다 다른 사람 말을 더 믿는 거죠?

나: 깍두기님과의 관계는 어떤가요?

하이드: 아주 좋은 편이죠. 우리는 나이를 초월한 우정을 나누고 있답니다.


더 이상 물어볼 분위기가 아니었다. 난 발걸음을 빨리 해 깍두기님을 만나러 갔다. 깍두기님은 집 근처 오락실에서 펀치볼을 하고 있었다. 세게 때리면 점수가 더 많이 나오는.

나: 깍두기님!

깍두기
어맛 부리님! 이거 기사화하면 안돼요! 치카님에게 혼난단 말임미닷!^^ 전 부드러운 여자로 남고 싶어요- 2005-04-04 23:42
 

깍두기; 어맛 부리님! 이거 기사화하면 안돼요! 전 부드러운 여자로 남고 싶어요.

난 깍두기님의 머리에 천으로 된 모자가 있는 것을 확인했다.

나: 웬 모자예요? 원래 모자 안쓰시는 줄 알았는데.

깍두기: 무슨 말씀이세요. 전 모자 안쓰면 요 앞 슈퍼도 안가요.

나: 그 모자 잠깐 줘보실래요? 어마, 일제네?

깍두기님은 거칠게 모자를 빼앗었다.

깍두기: 내가 일제를 쓰던, 도미니카제를 쓰던 댁이 뭔 상관이야?

나: 깍두기님, 솔직히 말해 보세요. 번개 때 무슨 일 있었죠?

깍두기: 글쎄요. 뭔 일이 있었지? 스노우드롭님이 술먹고 뻗은 거랑, 늦게 온 갈색빵님이 진짜로 커다란 빵을 하나 들고와서 사람들을 구타한 거...

 바로 이 빵이다...

 

나: 구타라뇨?

깍두기: 아, 그거 장난 수준이었어요. 맞은 사람들은 하나도 불쾌해하지 않았어요.

빵으로 때리던 단무지를 던지던 폭력은 폭력, 평화를 사랑하는 알라딘 모임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니 놀라웠다. 여기에 대해 캐물으려는 찰나, 깍두기님이 갑자기 도망가기 시작했다. 달리기라면 자신있는 나, 긴 다리를 이용해 성큼성큼 쫓아갔다. 시장 모퉁이를 막 돌 무렵, 난 머리에 강한 충격을 느끼며 나뒹굴었고, 의식이 점점 흐려져왔다. 가물가물한 의식 속에서도 난 두 남자가 나누는 말을 기억할 수 있었다.

남자1: 이봐 로렌초! 너무 세게 때린 거 아냐?

남자2: 머리가 단단해 별 일 없을거야. 마녀 당신은 단비랑 실론티 나 잘 단속해.


정신을 차렸을 때, 난 어느 주상복합 건물의 옥상에 누워 있었다. 지폐가 가득 든 지갑과, 내 것이 아닌 구형 휴대폰이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터덜터덜 집에 가는데 그 휴대폰이 울렸다.

나: 다, 당신 누구야?

남자; 몸 조심해라. 우리가 보고 있다.


오싹 공포를 느낀 나는 횟집에 가서 낙지 한마리를 통째로 먹으며 화풀이를 했다. 진실은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저희 뉴스레터는 용기있는 분들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이상 부리였습니다 (마부리 boori@aladin.co.kr)


댓글(28)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마태우스 2005-04-05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짜장면 왔네요. 사진 좀 더 넣어야 하는데 이따가 해야겠다^^

stella.K 2005-04-05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이거 사실이어요? 설마... @@

panda78 2005-04-05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하! 도... 도미니카 제! >ㅁ< 우와- 왕 재밌었나 봐요! 우와우와-

물만두 2005-04-05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야모야.... 넘 궁금해요...

하루(春) 2005-04-05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체 뭐가 거짓이고 뭐가 사실인가? 밝혀라!

마태우스 2005-04-05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님/밝힐 수 없소!!! 하지만 하루님이 가르쳐 달라면...으악!
물만두님/음하하하 궁금하시죠??
따우님/그럼요, 요즘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판다님/어마 판다님이다! 반갑습니다. 판다님도 계셨으면 좋았을 것을...
스텔라님/그러니까 번개 있을 때 빠지면 안되는 거예요^^
따우님/우리 모두 입조심합시다. 으아--악!

stella.K 2005-04-05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흐흑~

하루(春) 2005-04-05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뭡니까? 이게... 서운해요.

sooninara 2005-04-05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예요...저 집에 가고난뒤에 이런일들이 있었단 말입니까????

숨은아이 2005-04-05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하!

chika 2005-04-05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 전 관심없어요!! ㅡ.ㅡ
- (마기자!! 잊을만했는데 기사화 시킨 마부리!! 왜! 왜 그런거야!! ㅠ.ㅠ)

2005-04-05 2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5-04-05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부리 기자와 야부리 기자는 어떤 관계인가요?
정체를 밝혀주세요.

울보 2005-04-05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즐겁게 읽었습니다,,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어요,,,
그냥 글로 읽을래요,,,그럼 하이드님 모자를 깍두기님이 가져가셨다고요,,,(조금 엉뚱)

히나 2005-04-05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최선을 다해 안내한 죄 밖에 없는데 흑흑~

클리오 2005-04-05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왜 저 긴 문장 속에서 부리 기자의 '긴. 다.리. 를 이용해'가 확 눈에 보이는 걸까요? ^^;;

줄리 2005-04-05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일이 있었음이 분명한데 도대체 사실을 말할수 있는자는 누군인가요? 부리님 말을 어떻게 믿냐구요!^^

깍두기 2005-04-05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 제가 진실을 밝혔으니 이런 거짓기사는 당장 취소해욧! 그리고 나랑 묵찌빠나 하자구....=3=3=3

마냐 2005-04-06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야부리기자라니...발마스님, 정말 정말..OO하심다. ^^;
글구 마태님, 언제나, 뭔일은, 끝까지 숨겨야 하는 법입니다. =3=3

하얀마녀 2005-04-06 0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무슨 일이 있었죠? 제가 올린 후기 페이퍼에 서림님, 실론티님, 스노우드롭님이 빠져있더군요. 에구... ㅜㅜ

로드무비 2005-04-06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마태우스님도 대따 좋아해요.^^

paviana 2005-04-06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ㅠㅠ 궁금해라..점점더 궁금해지네요..
평일에 하는 번개가 있으면 좋으련만...

마태우스 2005-04-06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비아나님/평일이라, 할 수 없군요. 몇명 몰고 갈테니 술 마십시다!
로드무비님/전 님이 부리보다 절 좋아하는 거 알고 있었어요^^
마녀님/그게 다 마녀님이 일찍 가신 때문이어요! 책임지세요!
마냐님/그러게 말입니다. 끝까지 숨겨야 하는데, 사람들이 후기 쓰라고 해서 부리를 시켰더니 의혹이 더 증폭되는 느낌이어요
깍두기님/저 묵찌빠 대따 잘하죠?? 담에 또 합시다^^
줄리님/부리 말은 자신도 안믿을 겁니다. 제 말을 믿으세요. 무슨 일이 있었습니다!
클리오님/그건 님이 평소 긴 다리를 흠모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스노우드롭님/그러게요. 왜 부리는 님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것일까요
새벽별님/어마 제가 그런 게 아니라 부리가 그랬다구요! 전 억울해요
울보님/모자 하나로 생긴 괴사건....근데 그게 단순한 모자가 아니었다면???
발마스님/마부리가 제 측근이구요, 야부리는 아무 상관없는 인물입니다. 교봉의 첩자라는 설도..
속삭이신 분/어마 그랬군요. 근데...뻗는 것과 자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나요??
치카님/치카님이 책임지셔야 합니다!11
숨은아이님/웃음으로 얼머부리려고 하시다니 아니되옵니다. 진실을 밝히시죠!@
수니님/모든 문제는 책임있는 미녀가 간 뒤에 일어납니다^^
하루님/서운해하지 마옵소서. 원래 진실은 각자의 마음 속에 있는 법입니다
스텔라님/울지 마세요 갑자기 설움이 복받쳐오네요...으흐흑

2005-04-06 1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4-06 1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란여우 2005-04-06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우~추천 없다...흐흐^^

진/우맘 2005-04-06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빈 손으로 온 진/우맘....으흐흑........
알라딘 오프 모임의 선물 분위기는, 제가 원조라구욧! 한 번 빈손으로 나갔다고 이리 구박하시깁니까~~ㅠㅠ

인터라겐 2005-04-07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용기있는분들의 제보가 없다는건 심각한거 아닌가요?
ㅎㅎㅎ 진실을 파헤쳐 주세요~
 

 

 

 

 

난 배낭을 메고 학교에 다닌다. 뭘 많이 넣을 수 있고, 어깨에 멜 수 있다는 점에서 난 배낭만을 선호한다. 오랜 세월 배낭에 길들여져 이제 다른 가방은 갖고 다니지 못할 정도가 되어버렸다. 친구 하나는 내 배낭을 볼 때마다 더럽다고 난리다. 내가 봐도 때가 잔뜩 낀 내 배낭은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겐 배낭 말고도 긴 끈이 달린, 네모났고 조그만 가방도 있다. 너무 작아서 책 두권을 넣으면 끝인데, 워낙 귀티가 나는 가방이라 아껴 쓰고 있다.


지난 토요일, 그 가방을 들고 나갔다가 그 안에서 편지 한통을 발견했다. 보니까 내가 전에 썼던 편지다. 친구에게 보내려고 썼다가 친구가 이사갔다는 얘기에 ‘주소를 확인하고 써야겠다’며 그 가방에 쳐박아 뒀던 것. 편지 쓴 날짜가 2002년 1월이니, 벌써 3년 전이다. 편지에 썼던 구절 중 몇 개만 옮겨본다.

[아버님 빈소를 찾아주어서 정말 고마웠다. 거기 와준 많은 친구들 중 네가 가장 고마웠던 건, 네가 어려운 걸음을 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 편지를 쓴 건 그러니까 아버님이 돌아가신지 열흘 정도 시간이 흐른 뒤다. 그러고보니 이 친구가 빈소에 왔던 기억이 난다. 편지에 쓴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걸음을 해준 친구 앞에서, 난 그만 울고 말았었다. 물론 그 기간 중 겁나게 많이 울었지만, 그 앞에서 운 건 또 다른 의미였을거다.


[동기회 때 네가 내 옆에 앉았었지. 술 마시지 말라고 날 걱정해 주던 너, 그 말 때문인지 난 지난 12월 별로 술을 마시지 않고 흘려보냈다....그간 내 사전에 없던 ‘적당히’를 내 생활철학으로 삼을게. 술 적당히 마시고, 집에 일찍 들어와 책도 읽고 글도 쓰고, 그런 삶을 살아야겠어]

내가 그 전해 12월에 술을 마시지 않은 것은 순전히 아버님이 위독하셨기 때문이었다. 아버님은 중환자실에 계셨고, 하루 두 번의 면회만 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날, 난 친구들과 코가 비뚤어지게 술을 마시고 새벽에 들어왔다. 병원에서 연락을 받고 옷을 챙겨 입은 시각은 새벽 4시쯤. 명백한 음주운전으로 병원에 차를 몰고 갔었다. 심장박동수가 50에서 10, 그리고 0으로 떨어지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난 이게 꿈일까 살을 꼬집어야 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후, ‘적당히’는 아직도 내 생활 철학이 아니며, 여전히 난 코가 비뚤어지게 술을 마시고 있다.


편지는 빨리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로 끝을 맺고 있다. 갑자기 왠 통일 얘기를 했을까. 편지란 건 원래 다시 읽어보면 유치해 보여, 보내기가 어려운 법이다. 그때 난 이 편지를 다시 읽어봤음에 틀림없고, 영 마음에 안들어서 주소 핑계를 대면서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이 편지를 그냥 보냈어야 했다. 이 편지를 보냈다면 내 성격상 몇 번 더 편지를 보냈을 것이고, 내 편지들은 친구의 삶에 위안이 되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 편지를 안보냄으로써 난 그 뒤 한통의 편지도 쓰지 못했다.


뒤늦게 발견한 이 편지를 지금은 부칠 수가 없다. 아버님의 뒤를 따라 내 친구도 하늘나라로 갔기 때문에. 그게 벌써 작년의 일이다. 아버님께 잘 못해드린 걸 뒤늦게 후회하는 것처럼, 난 그가 암과 싸우는 동안 별반 도움이 못된 것을 후회해 본다. 그래도 내가 편지 하나는 잘 쓰는데. 내 딴엔 유치하게 썼다고 생각해도, 내 편지 받은 애들이 다들 좋아했었는데.


편지를 발견하기 전까지, 난 꽤 오랫동안 그를 잊고 지냈다. 편지 때문에 다시 부활하긴 했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편지를 보낼 수 없을 때가 되어서 후회하지 말고, 지금 있는 사람들에게 잘 해야겠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인내심이 없어지는 자신이 무섭지만, 그래도 노력은 하련다. 부치지 못한 편지를 붙잡고서 마음 아파하지 않기 위해서. 일단 가서 어머님 어깨나 더 주물러 드려야겠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5-04-04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_^*
어머님 어깨나 더 주물러 드려야겠다에 올인!

숨은아이 2005-04-04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내지 못한 편지가 이젠 보낼 수 없는 편지가 되었군요. 가슴이 아파요.

울보 2005-04-04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저 가신분들이 그곳에서 편안하시기를 그들도 남아있는이들이 편하기를 바라겠지요,,,,,

하루(春) 2005-04-05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슬퍼서 눈물 나요.

클리오 2005-04-05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아프네요. 그래도 마태님은 고마운 친구에게 편지를 쓰실 줄 아시는 따뜻한 분이시군요.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한번 돌아봐야 되는데....

비발~* 2005-04-05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찌잉.... 갑자기 마태님 편지를 받고싶다...

stella.K 2005-04-05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처음 알라딘 오프 모임에 갔었을 때도 마태님 어깨에 매는 가방을 어정쩡하게 들고 계셨던 것 같았는데...그때 저 마태님 보고 놀랐어요. 동안이어서. 누가 마태님을 아저씨로 보겠어요? 늦게 대학에 갓들어간 고학생쯤으로 보지. 하하.
마태님은 엉뚱한 게 매력이어요. 말씀하신 그 친구 누군지 알 것 같네요. 오늘 글은 유난히 소년 같으시네요. 오해 마세요. 좋다는...(잉? 뭐라고 해야하지?) 어쨌든 짠한 글이어요.^^

로드무비 2005-04-05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편지 저에게라도 보내실래요?
답장 쓸게요.

마태우스 2005-04-05 1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비님/아네요. 부끄러운 내용이 많아서 못보내겠어요...... 다시 써서 보내드릴 순 있어요
스텔라님/제가 동안이라뇨. 아저씨 그 자체로 보이죠!! 스텔라님이야말로 동안!
비발님/제가 편지 써드릴까요??? 희한하네. 갑자기 편지 쓰고 싶네...
클리오님/편지 쓰는 거, 노력에 비해 받는 기쁨은 훨씬 크더라구요. 그래서 전 가끔 편지를...하핫. 근데요, 그건 제가 사람 사귀는 스탈이구, 다른 것보다 더 좋을 건 없는 것 같습니다
하루님/그죠. 저도 이 글 쓰면서 마음이 너무도 쓰려 왔어요.
울보님/님 말씀대로 그곳이 편안해야 할텐데요...
숨은아이님/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다시금 생각납니다.
고양이님/그러고보니 님과도 술 한잔 해야 하는데.............
새벽별님/음, 갑자기 엄마 어깨 주물러 드리니까 엄마가 참 좋아하셨어요. 주무시다 일어나셨는데두요^^

하얀마녀 2005-04-15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기도 그렇고 편지도 그렇고. 어째 자기가 쓴 글은 마음에 드는 글이 별로 없죠. 마음이 짠해지는 글입니다.
 

 

 

 

 

허리부상으로 은퇴한 친구가 테니스 멤버이던 시절, 나는 그 친구 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그때 우리는 한데 모여 차 한데로 테니스장에 갔는데, 늦게 가면 테니스 코트가 없어서 일분이라도 일찍 테니스장에 가야 했건만, 그 친구는 언제나 10분-20분, 혹은 30분을 늦었다. 새벽 나절의 십분은 기다리기에는 고통스러운, 긴 시간이었다.


늦게 와서는 꼭 담배 한 대를 물면서 “한대만 피고 가자”고 하는 것도 얄미웠지만, 매번 다른 핑계를 대는 게 우리를 어이없게 했다.

“차 가지고 나가는데 다른 차가 막고 있더라고. 그래서 밀고 나오느라 늦었어”

“지하철이 십분 이상 안와서 늦었어”

“택시가 안잡히는 거 있지”

“어제 술먹고 집에 못들어갔어. 지금이라도 나온 게 용하다”


그 친구가 은퇴한 지금은 또 다른 사람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아침 일찍 휴대폰으로 깨워 주건만, 항상 늦는다.

“전화했을 때 일어났다가 또 잤어요”

“사고 났나봐요. 차가 굉장히 밀리던데요”

“오다가 지갑을 놓고 와서 집에 갔다 왔어요”

늦는 정도가 그 친구만큼은 아니어서 10분 내외에 불과하지만, 나이가 듦에 따라 인내심이 약해져 그 정도의 지각도 속이 상한다. 비가 와서 실내코트를 끊어야 했던 어제, 일분이라도 빨리 가서 코트를 끊을 생각에 초조했다. 5시 10분쯤 그에게 전화를 했다.

“저, 저희 집에 6시 10분까지 오시겠어요”

그가 답한다. “뭐 그렇게 빨리 가요? 그냥 20분까지 갈께요”

나와 친구는 10분에 만나 기다렸건만, 그는 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20분까지는 와야 할텐데, 그가 도착한 시각은 25분, 부리나케 코트로 갔지만 남은 실내 코트는 없었다. 우리보다 불과 몇걸음 먼저 온 팀이 코트 2개를 예약한 탓. 늦게온 그를 원망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상의 경우에서 난 늦게오는 한명을 제거하면 또 다른 사람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


나도 이따금은 그런 사람이 된다. 또 다른 친구와 다른 테니스 모임에 나갔던 사흘간, 난 매번 늦었다. 첫날은 십분만 늦겠다더니 20분을 넘게 늦었고, 그 다음엔 십분씩 늦었다. 첫날은 아예 늦게 일어났고, 그 친구가 전화해서 깨워준 둘째날은 사고가 나서 차선 하나가 막히는 바람에 예상치 않게 겁나게 막혔다. 셋째날은 길을 헷갈려 헤매다 늦었는데, 내가 대는 이유를 유심히 듣던 친구는 내게 이렇게 말한다.

“넌 어떻게 늦는 이유가 매번 바뀌냐?”

그 말을 들으니 은퇴한 그 친구 생각이 났다. 그 친구가 매번 다른 핑계를 댄 것은 내 생각처럼 ‘같은 이유를 대면 우리가 지겨워할까봐’가 아니라 진짜 그랬을 것이다. 난 “늦을 거 생각해서 십분쯤 여유있게 나오면 안되냐”고 그 친구를 타박했었지만, 막상 해보니 아침 나절에 십분을 일찍 나가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테니스 모임 때 내가 안늦었던 이유는 내가 부지런해서가 아니라 만나는 장소가 우리집이었기 때문에, 겁나게 성실했던 다른 친구가 제 시각에 와서 나를 깨워줬기 때문이었다. 장소가 다른 곳이었다면 필경 나도 “5분이면 가!” 이러면서 꾸물대다 매번 늦지 않았을까.


누구나 늦을 수 있다. 마음을 비우고 타인을 이해하자. 남이 늦는다고 속상해하면 나만 손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클리오 2005-04-04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핫! 전향적 자세... (사실 저도 늘 5분쯤이 부족해서 늦는 관계로... ^^;;;)

숨은아이 2005-04-04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음... (.. )( ")

하루(春) 2005-04-05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어제 비가 왔죠. 마치 열흘쯤 전 일처럼 너무 멀게 느껴져서 갸우뚱 했지 뭐예요.

하얀마녀 2005-04-15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대개는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이 잘 늦지 않나요?
 

 

친구가 <아무도 모른다>를 보자고 바득바득 우길 때, 난 <마파도>나 보지 뭐 저런 영화를 보겠다고 그럴까 싶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난 그 친구에게 감사했다.


난 사전정보 없이 영화를 본다. 미리 알면 나중에 있을지도 모를 반전에 놀라지 않게 되니까. 하지만 그런 게 꼭 좋은 건 아니다. 이 영화의 주연을 맡은 야기라 유아가 <올드보이>의 최민식을 제치고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은 것을 알았다면, 그리고 최민식이 “저런 배우에게 상을 줄 수 있는 칸이 위대하다”고 했던 것을 미리 알았다면 내가 먼저 저 영화를 보자고 졸랐을 테니까 말이다. 아는만큼 보인다고, 이런저런 정보들에 귀를 꼭 막고 육감만으로 영화를 고르는 건 오히려 위험하며, 계속 그딴 식으로 살다간 좋은 영화를 번번히 놓친다.


잔잔한 감동이 흐르는 영화거니 생각했었지만, 중반부로 갈수록 영화는 공포로 치닫는다. 실제 일어난 사건이라는 자막을 봐서인지 아이들이 겪는 고통이 훨씬 더 생생하게 전달이 되었다. 눈이 붉게 충혈되는 우리와 달리, 배우들은 아무도 울지 않는다. 그저 담담하게 자신의 사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줄 뿐이었다. 그게 더 슬펐다.(여기서부터 강력 스포일러)

2남2녀, 우리집과 똑같다....

 

애들 엄마는 이 남자와 사귀다 애 하나 낳고, 저 남자와 사귀다 또 하나 낳고, 이런 식의 생활을 하다가 애 네명을 얻었다. 애들을 학교도 안보내고 장남에게 살림을 맡긴 엄마는 또다른 남자와 연애를 한다. 집에 안들어오는 기간이 갈수록 길어지더니 다른 남자와 동거를 해버리는 엄마, 애들은 돈이 없어 굶주리는 상황에서 “엄마도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는 말을 들으니 몸이 떨려왔다. 공포영화란 게 꼭 귀신이 나와야 하는 건 아니다.


주인공이 엄마를 버린 남자들을 찾아다니며 돈을 걷는 장면, 전기가 끊겼음에도 냉장고에다 마실 물을 넣는 장면, 이것저것 냄새를 맡아 보지만 하나같이 땀내가 나는 티셔츠, 마음이 아픈 대목이 한두군데가 아니었다. 그날 난 집에 가서 어머니 어깨를 주물러 드렸다. 두달간 깁스를 한 탓에 어깨가 굳어버린 탓. 2분쯤 지나자 어머니는 “이제 됐다. 그만해라”면서 “니가 해주니 시원하다”고 하신다. 엄마의 사랑을 난 당연하게만 여겨왔었지만, 부모에 따라서는 안그럴 수도 있다는 걸 영화를 보면서 절실하게 깨달았다.


막내가 의자에서 떨어져 죽어갈 때, 주인공은 엄마의 편지를 받는다.

“잘 지내고 있지? 난 너를 믿는다”

믿기는 개뿔! 사귀는 여자를 꼬셔서 한번 자보려고 하는 남자들, 그리고 부모님이 자기에게 해준 게 없다고 불평하는 이들에게 이 영화를 권한다.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날개 2005-04-04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마태우스님의 '영화의 날'이로군요.. 이렇게 몰아쳐서 주르륵 올리시다니.. 얼마전에 영화리뷰특강을 한 덕입니까? ^^

stella.K 2005-04-04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원 없이 보셨나 봅니다.^^

비연 2005-04-04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정말 이렇게 다 보신 거에요? ^^ 부럽슴다.
저 이영화 보고 싶었는데...

Muse 2005-04-04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도 행복해 질 권리가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 '엄마'가 된 여자들에게 의미있는행복은 자신의 '아이'와 함께 하는 행복이라고 생각하는데......저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엄마'는 이 영화를 보면 한없이 슬프고 우울하고 심지어 그 아이들을 버리고 간 누구인지도 모를 '엄마'에게 분노를 느낄 것 같군요.

그래도 보고싶은 건.....마태우스님의 리뷰때문인가요?^^

저번에 '팝콘 심리학' 로또에 당첨되었던 서연엄마였습니다.

sweetmagic 2005-04-04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영화 넘 잔인했어요 진짜 다시 생각도 하기싫어요.
근데...소년이 너무 섹시했어요. 저 미쳤나봐요 ㅠ.ㅠ;;;;

줄리 2005-04-04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때문에 볼 영화가 너무 많아져서 원.. 시간을 두배를 부풀려주는 마술을 부리던지 해야 할거 같아요. 하지만 님의 리뷰를 보고 이 영화를 꼭 봐야겠다구 굳게 굳게 마음먹었습니다.

마태우스 2005-04-04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dsx님/아 이거 정말...............자신있게 추천할 수 있습니다
매직님/님이 연하 스타일인 거 저는 압니다. 하하핫.
서연사랑님/엄마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데는 동의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 행복이 님처럼 애와 더불어 있으면서 느끼는 게 아닐 수 있단 것도 동의할 수 있죠. 근데 그건 애한테 책임을 다한 뒤에야 찾아야 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자기가 돌보기 싫으면 파출부한테라도 맡기고, 그게 옳다는 게 아니라 최소한 먹고살고 배우게는 해놓고 나서 행복 운운해야지 않겠냐는 거죠. 그 엄마, 정말 잔인하고 무서웠어요
비연님/저도 맘잡고 보면 무섭다는 걸 나타내려고...호호
스텔라님/전 비디오를 못봐서 그래요.... 극장에서가 아니면 케이블을 기다려야 하거든요
날개님/아 그것도 좀 관계가 있죠. 예리하신 날개님...

울보 2005-04-04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오늘 마태우스님 집이신가보군요,,
전 비디오나 나오면 님이 소개한 영화 다볼거예요.
아직 류를 데리고 가기는 그렇거든요,,
류를 맡기고 갈마음은 전혀 없고ㅡㅡㅡㅡ
잘 들었습니다,
이다음에 영화를 볼때 다시한번 참조를 하지요,,,,,

아영엄마 2005-04-04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대신 다양한 영화를 보고 이리 글로 알려주시는 님께 감사의 의미로 추천을~ ^^*

마태우스 2005-04-04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영엄마님/저만 날날날 놀러다녀서 죄송해요
울보님/류는 행복하겠어요. 멋진 엄마를 두셔서요. 알라딘 하는 엄마가 그리 흔하겠습니까^^

마냐 2005-04-06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으, 방금 보고왔어요. 지난번에 님의 '여기서부터 강력 스포일러'까지 읽고 안 읽었었는데...암튼, 엄청 찜찜해요. 찜찜해요. 찜찜해요......아, 너무하잖아요.
 

 

상 받은 작품은 안보는 게 내 관행이었다. 평론가만 만족시키는 아주 어렵고 난해하면서 이해하기 힘든 영화들이 주로 상을 받지 않는가. 칸은 말할 것도 없고 아카데미상 타이틀이 붙은 건 그래서 외면했다. 하지만 <밀리온달러 베이비-이하 밀베>는 희한하게 보고 싶어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권투 경기를 소재로 한 영화라면 <로키>가 생각난다. 하지만 그건 권투영화라기보다 냉전 영화였고, 스텔론이 자기 근육질을 자랑하는 무대였다. <밀베>는 오래 전에 한물간 권투를 소재로 삼아서도 이렇게 많은 얘기들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줬다.

-75세라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여전히 멋졌다. 누구는 75세에도 멋진데, 나는 20대는 물론이고 지금도 멋과는 거리가 멀다. 신의 불공평에 항의하려고 석달째 머리를 안깎고 있는 중인데, 무성한 머리 때문에 목에 부담이 가는 듯하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옆에 앉은 놈이 영화 내내 문자질을 했다. 그 인간을 째려보느라 영화의 감동이 2%쯤 줄었다. 그렇게 문자질 할거면 극장에는 왜 왔단 말인가.

-난 영화를 보기 전 클린트 이스트우드(프랭키)가 매기를 안락사시킨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얼마 전 있던 토론수업의 주제가 안락사였는데, 토론을 준비한 애들이 동영상으로 그 장면을 방영했기 때문. 안락사 얘기를 들은 게 스포일러인 건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로 인해 영화의 감동이 줄어든 것은 절대 아니다. 희한한 것은 눈물은 꼭 콧물과 같이 난다는 사실. 나 역시 내가 쓴 휴지의 절반은 콧물을 닦느라 썼다 (손수건으로 닦는 애들은 콧물 닦던 수건으로 눈물을 닦았겠지? 으, 드러).

-이 영화를 보고나니 안락사에 찬성하는 입장이 된다. 프랭키는 신부에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는데, 신부는 이런다. “그건 안됩니다” “당신은 빠지세요. 하느님께 맡기세요”

종교의 완고함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촌철살인의 대사들

영화 속의 대사들은 웃음을 던져준다. <잠복근무>보다 훨씬 더 많이 웃었다. 하지만 슬픈 상황에서 발휘되는 유머는 사람을 더 슬프게 한다.

1) 매기와 프랭키의 대화 중

매기: 개 키워 봤어요?

프랭키: 개같은 새끼는 키워본 적 있지.

2) 물병만 들여다보는 권투선수 지망생이 있다. 그가 한 말, “저 엉뚱한 질문 하나만 할께요. 이 구멍으로-생수병-어떻게 얼음을 넣었죠?”


재미와 감동을 내게 선사해 준 멋진 영화였다. 안봤으면 오래 후회할 뻔했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stella.K 2005-04-04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카데미에서 한껀 크게 올리더니 제값을 하는가 보군요. 보고 싶어라...ㅜ.ㅜ

줄리 2005-04-04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들 재밌다고 그리고 감동이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매기로 나온 배우 인터뷰를 보니 아주 괜찮은 여자같더군요. 그래서 꼭 봐야겠다고 굳게 마음먹었습니다.

하이드 2005-04-04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뭐랄까, 감동적이라기 보다는 기분 몹시 드러워지는, 에잇, 젠장 퉤퉤퉤 하고 나오는 그런 영화였어요. ( -> 그러니깐, 좋았다는 뜻입니다. )

비연 2005-04-04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괜챦은 영화였습니다..저도 보고..리뷰 올렸었는데..감동 그 자체입니다^^

sweetmagic 2005-04-04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번 봤어요 ㅎㅎㅎ

마태우스 2005-04-04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직님/한자리에서 두번 보셨죠??? 다 알아요!
비연님/님 리뷰 저도 읽었었죠 영화를 통한 교감이란 게 바로 이런 것?^^
하이드님/제말이.......그말이죠
dsx님/서른두살이 뭔가를 시작하기엔 늦지 않았다는 것도 깨달았어요. 근데 전...흑흑
스텔라님/요즘 아카데미가 대중의 눈높이로 내려온 듯하더이다. 아메리칸 뷰티도 그렇구, 타이타닉도.....

비로그인 2005-04-04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영화보고 며칠 앓았어요.
너무 힘들고 슬프고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이더군요.

마태우스 2005-04-04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양이님/그러셨군요..... 저도 어찌나 가슴이 아팠는지요. 매기의 눈이 지금도 생각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