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과과장이 되는 바람에 삶이 좀 힘들어지긴 했지만, 좋은 점도 있다. 보직수당을 받는다는 것도 좋은 점이겠고, 또 하나 좋은 점은 애들 수업을 내 재량껏 바꿀 수 있다는 거다. <의학개론>이라는 과목은 원래 임상 각 과 선생님들이 오셔서 교과목을 소개해주는 시간이었는데,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아서 의료 현안에 대해 학생들이 토론을 하는 걸로 바꿔 버렸다. 학생들이 의외로 자기 의사 표현을 못하는구나,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나름의 재미도 있고, 내가 미처 몰랐던 것도 배울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고 있다.
또다른 과목인 <1학년 세미나>. 이 과목은 외부강사의 특강 두 번으로 강의가 종료되며, 성적은 책이나 영화를 보고 감상문을 적어내는 걸 내가 채점해서 낸다. 좋은 점은 외부강사를 내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는 것. 난 내가 아는 친구 중 최고의 스타인 표진인과 명성은 덜하지만 유익함과 재미를 동시에 던져주는 걸로 정평이 나있는 또 다른 친구를 섭외했다 (다 내 친구들 잔치다 으하하하). 어제는 표진인이 강의를 하는 날이었다. 내가 부탁한 주제는 ‘예과 생활을 잘 보내는 법’이었고, 그는 다년간의 강의 경력에 어울리게 훌륭한 강의를 해줬다.
원래 강사 소개를 이렇게 하려고 했었다.
나: 예과 생활 잘 보내고 있어요?
학생: 아니요
나: 예과 시절을 잘못 보내면 후회합니다.
학생: 에이, 예과 시절을 잘보낸 의사가 어딨어요?
나: 왜 없어?
그때 표진인이 계단을 걸어내려오고, 내가 말한다. “예과 생활을 가장 성공적으로 보낸 표진인님이십니다”
이렇게 하려다 참았다. 잘 참은 것 같다.
애들이 표진인을 모르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그건 기우였다. 그가 등장하자 뒤에 있던 애들까지 모조리 강의실 앞으로 나와서 앉았고, 일부는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도 했다. 강의 후 싸인을 요구한 학생, 그리고 사진을 같이 찍자는 학생도 있었고, 지나가던 학생들은 “어 저사람...그사람이잖아!”라며 놀라기도 했다.
올해 강사를 내 친구들로 짠 것은 내가 좀 정신이 없어서, 다른 생각을 못해서였다. 하지만 이제 어느 정도 과장 업무에 적응을 했으니 다른 생각도 해보게 된다. 내년에는 누구에게 강의를 맡길까? 맨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차명석 씨다. LG 야구선수로 뛰면서 선발을 잠깐 맡기도 했지만 줄곧 중간계투로 활약했던 그는 중간계투 사상 처음으로 1억 연봉을 받는 등 LG의 허리를 튼튼히 지켰고, 은퇴 후 드라마틱한 변신을 해 매니아를 거느린 메이져리그 해설가가 된다. 그의 해설이 어찌나 웃겼는지 그의 어록이 인터넷에 돌았을 정도.
아나운서: 차 위원님은 올스타전에 얽힌 추억이 있습니까?
차: 저는 올스타전 추억이 아주 많습니다. 한번도 뽑힌 적이 없어서 올스타 기간 동안 맨날 가족들하고 놀러다녔거든요.
입담이 워낙 좋은 차명석이니, 강의 역시 잘 해줄 것으로 생각한다. 화려한 선발투수 대신 중간계투로 묵묵히 맡은 바를 실천하며 ‘중간계투도 중요한 일이구나’를 느끼게 해줬고, 스타 해설가의 자리를 박차고 다시 LG 코치로 들어가 선수 육성에 힘쓰고 있는 사람이니, 예과 애들이 배울 만한 구석이 많지 않을까?
이건 순전히 농담인데, 두 번째 후보로 가수 유니가 어떨까 싶다. 그저 그런 탤런트에 머물 뻔했지만, 자신에게 거액을 투자, 최고의 섹시 가수로 거듭났지 않는가. 표진인한테 “유니를 강사로 부르려면 얼마 줘야 되냐”고 묻자 그가 이런다. “안줘도 될 걸? 그 자체를 영광으로 알 거야. 그리고 TV 카메라가 오니까 선전도 되잖아”
1학년들 앞에서 “내년에는 유니 부르면 어떨까요” 그랬더니 애들이 단체로 휴학을 하겠단다. 휴학 사태도 막아야겠고, 유니를 불렀다간 내가 경고를 받을지도 모르니 말로만 그치련다. 이런 일을 내 맘대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 그늘이 더 많은 예과 과장직의 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