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시: 4월 15일(금)
마신 양: 맥주만
누구와: 여자 둘과
아버님을 돌아가시게 한 병은 물론 당뇨병이다. 아버님은 그 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신부전이 왔고, 그로부터 5년간 투석을 하시던 끝에 돌아가셨다. 하지만, 살아 생전 삶의 질을 저하시킨 병은 다름아닌 척추결핵이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어머님의 고생이 훨씬 덜하셨을테고, 아버님도 훨씬 더 인간적인 모습로 우리 곁을 떠나셨을지 모른다.
아버님의 허리가 아프기 시작한 것은 99년 1월이었다. 조카-누나의 아들-들과 축구를 하러 가셨던 아버님은 그날 공을 차다 허리가 아픈 걸 알게 되었다. 원래 아프던 게 발견이 되었던 거겠지만, 그 일로 인해 난 잠시나마 축구를 하자고 했던 조카들을 원망해야 했다.
허리가 아파서 일상생활이 어려워진 아버님은 유명하다는 ‘동서한방병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 병원엔 환자가 아주 많아 오래 기다려야 했고, 갈 때마다 침을 놔 주었다. 물론 차도는 전혀 없었고, 그럼에도 아버님은 매일같이, 근 보름간 그 병원에 다니셨다.
3.1절을 기해 아버님은 서울대병원에 가셨는데, 거기에는 친구분의 조언이 주효했다. 통증이 계속되자 X-ray를 찍어 봤는데, 척추 근처에 농양-고름주머니- 비슷한 게 발견된 것이다. 그 선생님은 나를 불러 “혹시 암이 아닌가 모르겠다”면서 큰 병원에 가기를 종용했고, 놀란 우리는 잽싸게 아버님을 서울대병원에 모신 것. 다행히 암은 아니었다. 거기서 나온 진단은 척추결핵. 다행이다 싶었다. 수술을 하고, 보조기와 더불어 약을 드시면 나을 수 있는 거였으니까. 하지만 수술이 잘 되었다는 의사의 말과 달리, 아버님은 계속 아프셨다. 두 차례의 수술을 더 했고, 그때마다 “수술은 잘 되었다”는 의사의 말이 이어졌지만, 아버님의 통증은 나아지지 않았다. 아버님은 아예 침대에 누워서 움직이지 못했고, 말로만 듣던 욕창이 생길 정도였다. 담당 의사는 아버님의 진료를 포기하는 무책임함을 드러냈고, 회진은커녕 진료조차 봐주지 않았다.
2년쯤 전에 정년퇴임을 하신 의사 중에 척추로 유명한 분이 계셨다. 그분은 상계백병원으로 영전되어 가셨는데, 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분을 찾아갔다. 하지만 그 선생님은 제자가 망친 환자를 보길 꺼려하셨고, 우린 수소문 끝에 한양대 병원을 찾아가야 했다. 하루 종일 걸린 수술 끝에 아버님은 온몸을 석고로 감은 채 누워 계셔야 했는데, 답답함을 못견디는 성격 탓에 연방 소리를 질러대 우릴 난감하게 만들었다.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아버님이셨지만, 누운 채로 대변을 봐야 했고, 대변의 횟수는 하루 여섯 번에 달했다. 욕창을 방지하기 위해, 또한 아버님이 답답해 하신 탓에, 어머님은 연약한 몸으로 아버님의 자세를 이리저리 바꿔 드려야 했고, 가려운 곳이 있다면 긁어 드렸다. 간병인과 더불어 12시간씩, 그 일에 우리 형제들이 도움을 준 것은 극히 미미했다.
그래도 그 시절에는 희망이 있었다. 석고만 풀면 아버님이 다시 걸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하지만 6개월 이상의 시련 끝에 석고를 푼 이후에도 아버님은 침대에 누워 꼼짝도 하지 못했고, 투석을 위해 혈관에 관을 이식하는 수술을 받은지 사흘만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투석을 시작한 환자의 수명이 5년을 못넘으니, 아버님이 유난히 더 빨리 돌아가신 건 물론 아니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아버님의 생활은 최악이었다. 투석을 하는 다른 사람들이 조용히 누워서, 혹은 앉은 채로 투석을 받다 집에 가는 반면, 아버님은 투석을 하는 내내 침대에 누운 채 고통으로 신음해야 했다. 허리만 아프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날 수밖에.
내가 믿고 맡긴 교수님이 수술이 실패한 후 아버님을 나 몰라라 한 것처럼, 양의라고 해서 특별히 뛰어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원인이 무엇이든간에 무조건 침만 놓아 질병을 치료하고자 했던 한의학에는 더더욱 믿음이 가지 않는다. 지금이야 한의사도 CT를 찍을 수 있게 된 모양인데-그게 좋은지 나쁜지는 논외로 하자-그 이전만 해도 한의학은 그런 수준에 불과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원은 환자들로 바글거렸다.
신촌에서 술을 먹고 집에 걸어오다, 연희 교차로에 있는 동서한방병원 앞을 지났다. 그 앞을 지나다보니 6년 전, 그때의 일들이 생각난다. 침을 맞는 아버님을 기다리며 두손을 모아 기도를 하던 생각이. 한가지는 확실하다. 그 병원은, 지금은 모르지만, 그때는 분명히 돌팔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