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탄 버스가 신호등에 걸렸다. 책에서 눈을 떼고 잠시 밖을 보다가, 엄청나게 늘씬한 미녀가 초미니스커트를 입고 건널목을 건너는 광경을 보았다. 저런 미녀를 이 땅에 보내주신 신께 일단 감사드렸고, 신호에 걸려준 버스 아저씨, 그리고 과감한 노출로 나같은 놈을 구원해 준 그 미녀께도 감사를 드렸다.
1. 박정희
박정희는 철권통치를 했다. 뒤를 잇는 전두환의 독재는 박정희에 비하면 정도가 덜했다. 독재가 심했던만큼 유신시절의 저항도 목숨을 건 필살의 투쟁이었는데, 저항이 그리 심했던 이유를 난 다른 데서 찾아볼까 한다.
박정희 때는 미니스커트를 입을 수가 없었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정윤희에게 “이렇게 예쁜 다리를 가진 여자는 입어도 된다”고 했다는 설도 있던데 하여간 그 당시 길거리에서는 경찰들이 무릎에서부터 치마 밑단까지의 길이를 재는 진풍경이 벌어졌었다. 머리 길이도 단속을 했다. 우리나라를 병영체제로 만들려던 박정희의 눈에 장발이 곱게 보일 리는 없는 일, 경찰들은 가위를 가지고 장발족들의 머리를 싹둑 잘랐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아무리 크다해도 미니스커트를 입은 아가씨를 보면 자유, 평등, 정의 같은 개념이 일시에 와해되기 마련이다. 히피들이 다 장발인 것처럼, 머리를 기르는 것은 사회에 반항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 두 가지를 다 막아 버리고, 일본군 출신이란 콤플렉스 때문인지 ‘기러기 아빠’나 ‘대전발 0시 50분’처럼 서민들의 정서를 위로해주는 노래를 왜색이라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그 정권에 저항하는 길 말고 다른 길이 있었을까. 박정희는 김재규의 손에 죽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해도 이승만처럼 망명을 하는 식으로 비참하게 쫓겨났을 거다. 그랬다면 그에 대한 평가도 지금과는 달라졌을 것이고.
2. 전두환
박정희가 하는 걸 충분히 봤을 전두환은 3S 정책, 즉 스포츠, 섹스, 스크린에 젊은 층의 시선을 붙잡으려는 시도를 한다. 그 정책은 충분히 성공했다. 프로야구가 만들어졌고, 야한 사진들의 보고였던 선데이서울이 공전의 히트상품이 되었다. <무릎과 무릎사이>를 비롯해서 <애마부인>같은 영화가 상영되어 구름관중을 끌어모았다. 섹시함은 더 이상 부끄러운 게 아니었고, 여성들의 치마 길이는 점차 올라갔다. 물론 대학가에서는 연일 데모를 했지만, 시민들의 참여율이 낮았던 이유는 거기에 있지 않았을까. 술자리에서 정권을 비판하다 죽도록 얻어터진 박정희 시절과 달리, 그래도 그때는 술을 마시며 마음껏 대통령 욕을 했었던 기억이 난다. 관료의 대부분이 권문세가의 나눠먹기로 뽑히긴 했지만, 신분사회였던 조선이 수백년 동안 유지된 비결도 과거를 통해 신분이 상승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놓은 덕분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유신 시절에 비해 신장된 자유가 전두환 정권에 대한 저항을 무디게 만든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은 박종철 열사를 고문해서 죽이는 결정적 실수를 저지르는데, 그로 인해 쌓인 불만은 4.13 호헌조치-다음번에도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을 뽑겠다-로 인해 폭발하고 만다.
3. 지금
절차적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정권교체의 경험까지 얻은 지금, 사람들은 굳이 사회에 저항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 같다. 독재정권처럼 우리가 타도해야 할 대상이 없어진 것도 이유가 되지만, 한눈을 팔만한 것들이 워낙 많아서다.
정윤희, 유지인, 장미희 말고는 예쁜 여배우가 없던 과거와 달리 요즘은 예쁜 애들이 지나치게 많아 어지럽다. 요즘엔 가수도 예쁘고, 심지어 개그맨도 미녀다. 캐치원에서는 야한 영화가 밤 11시부터 밤새도록 방영되고, 인터넷에 떠도는 야동은 과거라면 상상을 못했을 수준이다 (난 안봐서 모르겠다). 배우들 뿐 아니라 일반인들의 미모 또한 놀랍게 향상되어 외국에서나 보던 늘씬한 다리를 가진 여인들이 거리를 활보한다. 젠장, 이런 와중에 무슨 정의고 나발 이고가 있는가.
그래서 지금은 아무리 사회정의를 부르짖어도 시민들의 참여율이 지나치게 낮다. 집값이 떨어지는 것 말고는 절대 나서지 않는 시민들, 주변의 것들이 그들로부터 정의감과 열정을 빼앗은 결과다. 날로 예뻐져가는 여자들, 과거라면 꿈도 못꿀 꽃미남의 출현-장동건의 얼굴이 과연 우리나라에서 가능한 것일까?-이런 게 혹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그들’의 음모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