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 비사 - 대우그룹 자살인가 타살인가
한국경제신문 특별취재팀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0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스텔라님이 주신 <김우중 비사, 자살인가 타살인가>를 읽었다. 대마불사의 신화는 외환위기 이후에 속절없이 무너져, 기아도 망했고 대우도 망했다. 기아야 그렇다쳐도, 대우가 망한 것은 우리 경제는 물론이고 국민들의 정신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던져줬다. 그래서 음모론이 나온다. 당시 우리 교수님이 한 말씀, “대우가 얼마나 좋은 기업인데 그걸 망하게 해? 나중에 다 심판 받을거야!” 그 시기 나온 여론조사를 보니까 국민의 80%가 대우의 패망은 정부 책임이라고 답을 했었던 기억이 난다.


위암 말기 환자를 수술하지 않고 죽게 했다면, 의사를 욕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 요즘에는 수술보다 호스피스 기관에서 남은 생을 정리하도록 하는 게 더 유행이잖는가. 하지만 위암 2기나 3기 환자를 치료 안하고 방치했다면, 그 의사는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대우에게 생겨난 위암은 과연 몇기였을까? 림프종에 퍼지면 3기, 이런 식으로 진단기준이 확립된 위암과 달리 대우의 상태는 보는 사람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20조원을 넘는 분식회계, 세계경영의 처참한 실패는 자살을 지지하며, 김대중 정부의 경제관료들이 김우중을 아주 싫어했다는 점, 정부가 돈줄을 막는 대신 마음먹고 돈을 쏟아 부었다면-한 50조 쯤?-살릴 수도 있었다는 점 등은 타살설을 지지한다.  이 책의 저자들은 타살설을 부인한다.

“음모론을 거론하기에는 대우의 약점이 너무도 많았고, 또 몇 번의 회생 기회들을 너무도 쉽게 흘려보냈다(57쪽)”


혁명과 반란의 차이가 성공 여부에 좌우되는 것처럼, 성공한 기업인과 경제사범의 차이도 한순간의 판단에 좌우된다. 세계경영을 모토로 한 대우의 전략은 아쉽게도 실패했고, 얼마 전 귀국한 김우중은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대우의 사장들 중 감옥 간 사람은 또 몇인가?). 대우가 실패했으니 하는 얘기지만, 대우에는 김우중의 독단을 견제할 장치가 전혀 없었다. 책 뒤에 수록된 대우 사장단 회의 녹취록을 보니 재벌 사장이라 해서 부러워할 게 아니다.

[박사장: 전자 수출은 늘고 있습니다.

김회장: 여기 상반기..줄었잖아?

박회장: 전체적으로는 늘고 있습니다.

김회장: 무슨 소리하고 있어? 늘어야 되는데 줄어드는 이유가 뭐냐 이거야.


김회장: 인사부서 간지가 몇 년이야?

권상무: 20년 됐습니다.

김회장: 그래가지고 어떻게 그 지랄할 수 있어? 상무씩이나 돼가지고...]


게다가 김우중의 부인인 정여사도 가세한다. 대우가 생사의 귀로에 서있던 시점에, 자기 아들 이름을 딴 ‘아트선재센터’ 개관식에 사장들을 다 오라고 한다.

[김우중: 쓸데없는 사람은 갈 필요가 없지. 그거 뭐하러 가!

김비서: 정회장(부인을 이렇게 부른다)께서 모두 참석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이 계셨습니다...]

참 한가한 얘기가 아닐 수 없다. 하여간 이 책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모범생 체질이 대우를 망쳤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삼성그룹처럼 지방대 출신까지 두루 임용하고 학력보다 실력에 따라 승진을 시키는 전통과는 많이 달랐다. 대우에서는 임원 10명 중 9명이 이른바 경기고.서울대 출신이었다”

이것 역시 결과론에 불과할 것이지만, 학력만 너무 따지는 기업들로서는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할 얘기가 아닐까 싶다. 경기가 어려울 때는 근로자를 해고하면 안된다고 버티고, 대우가 어려워졌을 때 종업원들에 대해 미안해하기도 했던 인간 김우중의 면모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었는데, 대우 몰락이 자살인가 타살인가가 궁금한 분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그 판단은 물론 독자의 몫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05-06-25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상당히 중도적인 리뷰의 맺음이로군요. 그래서 마태님은 자살이라고 보시는가요? 타살이라고 보시는가요?
물론 대우가 무너졌다는 건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늙어서 구치소에 수감되는 김우중 씨의 모습도 안타깝기도 하구요. 이 사건은 어떻게 마무리가 될까요? 그리고 역사는 어떻게 평가를 하게될까요?

마태우스 2005-06-25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개인적으로는 대우가 자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전부터 안좋았지만, 98년 10월의 노무라 보고서가 대우 몰락의 본격적인 신호탄이었죠. 일본 쪽은 대우 사정이 안좋은 걸 알고 진작에 자금을 회수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대우 사태가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 일본 은행들은 돈을 거의 떼이지 않았다네요. 제가 보기에 대우는 위암 말기로 소생 가능성이 없었답니다. 폴란드를 비롯해 대우가 진출한 곳의 성장이 생각보다 더디었다는 게 결정적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니르바나 2005-06-25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업들 돈을 자기 주머니 속 용돈으로 생각하는 구 정권의 권력가들과 그들의 실력을 이용하지 않으면 생존하지 못하던 기업가들이 불행하게 만났던 시절이지요.
녹취록으로 살아 남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제가 보기엔 김우중씨가 인물은 인물인데 시대의 運을 넘지 못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파란여우 2005-06-25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우가 자살한 건 저도 인정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자살의 과정이나 의도가 어떤 것이었냐 하는것을 따져 봐야 하지 않을까요?
말은 이렇게 해도 벌써 201번째 추천을 날리고 갑니다.
요새 왜 이렇게 글을 더 잘 쓰시는 겁니까?
 

 

이 영화의 예고편을 보면서 "저딴 걸 누가 봐?"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올라오는 영화평을 보니 재미와 감동을 주느니 어쩌니, 난리가 아니다. 친구 둘과 적당히 술을 마시고 영화를 봤다. 소주 3분의 2병 정도를 마셨는데, 영화가 끝날 때까지 한번도 자고 싶단 생각을 안한 걸 보면 영화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알 수 있을게다. 특히 탁구를 치는 장면에서는 너무 웃겨서 배가 땡겼고, 손을 앞으로 내저으며 "그만! 그만!"을 외치기까지 했다. 배가 아플 정도로 웃어본 적은 최근 3년 사이에 처음인 듯. (그럼 3년 전엔 뭣땜에 웃었을까?)

바로 이장면이 탁구 치는 씬...


 

'굿바이 레닌'이란 영화가 있다.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당원인 어머님이 두달간 의식불명으로 입원 중인 동안 동서독이 통일이 되고, 깨어난 어머님이 충격을 받으면 안된다는 말에 통일이 안된 것처럼 자식들이 별의별 쇼를 다하는 그런 영화. 이 영화에서도 자식들은 그와 비슷한 쇼를 하지만, 늦게 나온 영화가 다 그렇듯이 훨씬 더 재미있다. 어쩌면 우리 정서에 더 잘 맞아서 재미있게 생각되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영화 예고편만 보고 이 영화를 안봤으면 후회할 뻔했다. 예고편에 속아서 후회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면서 왜 나는 예고편만 보고 이 영화를 안보려고 생각했을까. 따지고 보면 예고편이라는 건 한 인간의 겉으로 드러나는 면-그러니까 학벌이나 집안, 직업?-에 불과할지 모른다. 하지만 세상에는 좋은 조건을 갖추었으면서 영 인간이 안된 사람이 아주 많다. 사람의 됨됨이를 알기 위해서는 일단 한번 만나야 하는 것처럼 진실은 본 영화에 있는 법, 예고편만 보고 좋은 영화를 놓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겠다.


한가지 더. 하지만 사람을 만나기 전에도 그가 인간 말종임을 알게 해주는 척도가 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강도강간 3회, 노상방뇨 2회, 사기 3회의 전과가 있다면 굳이 그를 만나볼 필요가 있을까? 그와 비슷하게 영화 예고편에도 전과 10범임을 드러내주는 그런 것들이 있다. <내사랑 싸가지>라든지 <낭만자객>의 예고편은 그 영화가 연쇄살인마임을 말해 주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바의 꼬임에 빠져 <낭만자객>을 본 나는 일상생활에서도 사기 같은 걸 당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날개 2005-06-25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대되는 영화군요. 배가 아플 정도로 웃으셨다니.. 꼭 봐야겠어요..^^*

마늘빵 2005-06-25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이거 본 사람들이 재미없다 그래서 안볼라고 했는데...

인터라겐 2005-06-25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굿바이 레닌... 버려버린 엄마의 낡은 가구속에 옛날 돈뭉치를 발견하고 돈을 바꾸러 가지만 이미 교환시기를 놓쳐서 휴지가 되어 버렸던 장면이 제일 기억에 남았었는데... 간큰가족도 한번 봐줘야 겠네요...

히나 2005-06-25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우성 뽀글뽀글 파마머리 앗, 너무 귀여워요 >_<
보고싶어요..

미완성 2005-06-25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 안 땡기는 종류의 영화인데, 마태님이 재미있게 보셨다니 다행입니다. 낭만자객은 유감스러운 경우지만, 예고편에 잘 속는 건 마태님의 끝없는 호기심 때문이 아닐런지?

로즈마리 2005-06-26 0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굿바이 레닌!!!! 제가 정말 좋아하는 영환데....저도 예고편 보고 <간큰가족> 별루일 거란 생각 했는데..구미를 당기네요. 예고편을 잘못 만든 건 홍보의 문제가 아닐런지..

2005-06-26 1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벌식자판 2005-06-27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예고편만 보고 별로라 생각했는데... 생각을 다시 해봐야겠는데요.

연우주 2005-06-28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저는 별로 재미없던데. 우리 우성씨 때문에 보긴 했지만, 시나리오가 참 별로다 했었거든요...
오랜만에 다는 댓글~~~
 

날짜: 6월 21일(화)
마신 양: 소주 두병 정도?

어제까지 난 70번의 술을 마셨다. 61번째 이후 아홉번을 마셨는데 술일기는 한번밖에 안썼으니 여덟번이 밀려있는 셈이다. 기억을 더듬어 누구와 마신지를 끼워맞추고 있는데, 대충 다 됐다.

지난 화요일, 매달 한번씩 만나는 여자친구 둘과 술을 마셨다. 마음 편하게 술을 마실 수 있는 좋은 친구들이다. 그 중 한명이 디카를 가져왔고, 그래서 여러번 포즈를 취했다.



감자탕집에서 3차를 하던 장면. 난 술 마시면 얼굴이 안빨개지는 줄 알았는데, 저건 완전히
홍인종이다.

 



맥주집에서 2차를 했다. 우아해 보여도 그리 비싸진 않다. 2천 두개랑 한치를 먹었는데
19,000원이 나왔던가? 두 미녀가 안주발을 세우느라 한치를 다 먹어서, 난 강냉이에다
맥주를 마셨다.

 




2차 가기 전에 영화 봤다. 그전엔 2차 갔다가 영화 봤더니 계속 잠만 자서
술 많이 먹기 전에 영화보야 한다고 한명이 주장하는 바람에...

 



살 빠진 줄 알았는데 사진 보니까 배가 왜이리 나왔는가. 아아....

 



1차 때 모습. 이때부터 이미 눈이 풀렸다....

 한명이 결혼 직전에 깨졌다. 성격 차이로 헤어졌단다. 그녀에게 난 위로를 해주기는커녕, 그녀가 돌아옴으로써 계속 우리랑 놀 수 있다는 걸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그녀 얘기로는 그간 많이 힘들었다는데 왜 난 그런 생각만 했을까.

술자리는 12시 40분이 되서야 끝났다. 늘 그랬듯이 즐거운 만남이었다.


댓글(2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파란여우 2005-06-23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 안보여요....사진으로 유혹해 놓구선...ㅡ.ㅡ;;

파란여우 2005-06-23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r.소크라테스....흐흐흐
앗, 산사춘이넹....하얀마녀님이 그리워요..흐흑

줄리 2005-06-23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싸이 사진을 링크하시면 여기선 안보이던데요. 잘 좀 해보세요. 사진 좀 봅시다요.^^

줄리 2005-06-23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보이네요. 지송해요. 위의 말 취소예요.
근데 온갖 귀여운 표정은 다 지어보이셨네요. 그래서!! 성공하셨어요! 구여워요^^

엔리꼬 2005-06-23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정말 미인들이시군요.. 추천 꾸욱~

아영엄마 2005-06-23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만에 사진으로나마 님의 모습 뵈니까 좋으네요~ ^^

moonnight 2005-06-23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거우셨겠네요. 영화는 뭐 보셨는지 궁금해요. +_+ 저런 미녀분들과(그것도 두분씩!)한달에 한 번 만나신다니 마태우스님은 외로울 틈이 없겠어요. ^^

stella.K 2005-06-23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자 친구만 보여주시네요. 마태님 애인은...?

2005-06-23 14: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6-23 14: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6-23 14: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6-23 14: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클리오 2005-06-23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 근데 이미지가 바뀌셨네요?? ^^

날개 2005-06-23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귀여워요...ㅎㅎ 추천 꾸욱~

2005-06-23 16: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울보 2005-06-23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옆에 항상 저런 근사한 미인들만 계신가요,,

로드무비 2005-06-23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면 볼수록 나의 이상형이란 말이시.^^

oldhand 2005-06-23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번째 사진은 3차고 마지막 사진은 1차인데, 장소가 똑같습니다!!!

숨은아이 2005-06-23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귀여우세요. >.<

히나 2005-06-23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오랜만에.. 술일기 기다렸어요..
나도 미남이랑 술일기 쓰고파.. ^^

마태우스 2005-06-24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노우드롭님/써서 올려 주세요. 혹시 주위에 미남이 없는 건 아니죠??
숨은아이님/헤헤 그게 제 컨셉^^
올드핸드님/예리한 지적이세요. 지금 보니까 아래 것도 3차네요. 어쩐지 맛이 갔다 했더니..
로드무비님/그러게요 우린 너무 늦게 만났어요
울보님/대략 그렇죠 하하
속삭이신 비발님/애정 고백을 그렇게 강하게 하시면 부끄럽죠...^^
날개님/좋게 봐주시는 거죠 실물은 안그래요..
클리오님/새 이미지가 맘에 안들어서 여러번 바꾼 끝에 지금의 근사한 말로 돌아왔습니다
스텔라님/아직 애인 없습니다^^
문나이트님/외로울 틈은 원래 없었습니다.... 근데 요즘...흑.
아영엄마님/가끔씩 사진은 올려줘야겠네요 호호 님 사진도 보고 싶어요!
줄리님/하하 들켰다. 귀연표정 ...
파란여우님/아니 저보다 하얀마녀님이 그립다니...왜 저는 안되는 겁니까 여우님!

진/우맘 2005-06-29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이제야 봤어요. 되게 귀여우세요!
얼굴이 정말 조막만해졌네...쯧.
 

 

 

 

 

조교 때, 아무도 안쓰는 방이 하나 있었다. 나이 드신 교수님이 창고로 쓰는 그 방에는 수많은 책들이 가득 차 있었다. 무슨무슨 전집들이 박스에 쌓여진 채로. 그 중에는 NHK에서 만든 동물들 비디오같이 구미가 당길만한 게 많았고, 책들 또한 그랬다. 그게 방의 절반 이상을 메울 정도였으니 가격으로 따지면 얼마나 되겠는가?


그건 다 은사님이 사신 거였다. 은사님의 친구 분 중 사업이 망한 뒤 책장사로 나선 분이 있었는데, 그분이 오실 때마다 은사님은 커다란 박스에 든 전집을 사주셨다. 댁으로 가져가면 안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마누라 알면 나 죽어!”

그곳이 다른 교수 방이 된 지금, 그 많던 책들이 어디로 갔는지 나는 모른다 (한가지 아는 건 내가 탐내던 동물 테이프는 다른 교수님이 가져갔다는 것).


그 교수님을 보면서 왜 거절을 못하실까 하는 안타까움이 있었는데, 나라고 다를 게 없다. 조교 때부터 인연을 맺어온 책장사 아저씨, 나만 보면 책을 판다. 은사님이 사신 것과는 달리 연구에 관한 책이고, 도움이 되는 것도 여럿 있다. 하지만 딱 봐서 내가 절대 안읽을 것 같은 책도 마음이 약해 거절하지 못한다. 노크 소리에 이어 그가 들어올 때마다 그래서 난 “아, 화장실이라도 가있을 걸!”이라는 탄식을 속으로 한다. “요즘 바쁘시죠?”로 말을 꺼낸 그는 들고있는 책 중 하나를 권한다.

“이 책 이거, xx 대학교 xxx 교수님한테 드렸더니 아주 좋아하시더라구요. 교수님도 필요하실 거예요”

“저...안사면 안될까요”

“이게 얼마나 좋은 책인데 그래요. 당장 돈 없으면 나중에 보내주시면 돼요. 8만원밖에 안하는데..”

매번 이런 식이다. 내 책장에는 그가 판 해적판 책들이 하나둘 늘어간다. 물론 새로나온 면역학 책은 있으면 뿌듯하지만, 억지로 떠맡은 면역학 저널 모음집은 아직 한페이지도 안본 채 먼지만 쌓이고 있다. xxx 책도, xxxx 책도 한번도 안본 건 마찬가지다. 그를 두 번 만날 때마다 한번꼴로 책을 샀는데, 그가 “천안은 멀어서 자주 못내려온다”고 하니 올 때 잠깐 피하면 될 터, 하지만 문이 유리문이 아니라 누가 노크하는지 모르는데 어쩌란 말인가.


어저께는 다행히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를 만났다. 전날 술을 무지하게 마셔 지각을 한 날이었는데, 일단 방에다 가방을 갖다놓고-가방 들고 돌아다니면 남들이 나 지각한 거 다 아니까-생화학교실로 도망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반대쪽 엘리베이터로 열나게 뛰어간 뒤 방문을 열고 가방을 던졌다. 계단을 향해 달려가다가 복도 모퉁이에서 그와 딱 마주쳤다.

“아이고 교수님! 안그래도 기생충학 책 좋은 거 나와서 갖다드리려고 하는 중이어요”

판본이 다른 기생충학 책이 여럿 있어서, 엄밀히 말하면 살 필요가 없었다. “갖다드리는 교수님들마다 좋아하시더라구요”라고 해도 말이다.

“저, 안사면 안될까요?”

그가 이런다. “아니 이 책 정도는 사셔야지요!”

그는 결국 계좌번호가 적힌 책을 내 방에 놓고 사라졌다. 9만5천원이란다.




댓글(16)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줄리 2005-06-23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저, 안사면 안될까요?" 를 눈 가장자리를 좀 더 아래로 내리고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셨다면 혹시라도 그 아저씨가 "그러죠 이번만 한번 봐주죠" 하면서 돌아섰을수도요. 좀 약해요. 좀 강하게 못산다고 해보세요 다음부터는요. 아니면 확실히 숨으시든지요! 제가 답답하잖아요.

세벌식자판 2005-06-23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나가다 들렀습니다. 강하게 나가셔야 됩니다. ^^;
"전에 샀던 책도 아직 다 못 읽었는데... 그 책들 다 읽으면 살게요. 일단 책 목록이나 있으시면 좀 주시죠." ---> 요런 명분(?)은 어떨까요? ^^;

인터라겐 2005-06-23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아저씨 상술에 넘어가지 마세요...!!!!

moonnight 2005-06-23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마태우스님도 거절을 못하시는군요. 저도 그런 이유로 늘 책을 사게 되는 아자씨가 있지요. ㅠㅠ

야클 2005-06-23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의 부탁 거절못하고 너무 착하게만 살면 힘든데... 속으로 꽁꽁 앓는데... -_-;;

클리오 2005-06-23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사면 안될까요...'라니요. 저같아도 그렇게 물어보면, '안되요...'라고 말했을 것 같아요... ^^

ceylontea 2005-06-23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 성격에 정말 거절은 못할듯.. 그 아저씨를 만나지 말아야 할텐데... 문앞에 CCTV를 설치 할 수도 없구.. 에효...
아님.. 아파트에 있는 작은 렌즈 구멍이라도. 좀 이상하겠죠?

날개 2005-06-23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ㅠ.ㅠ 이 험난한 세상을 어찌 사실려고...

숨은아이 2005-06-23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요새도 학교 돌아다니며 해적판 책을 파는 사람이 있군요. -.-

어룸 2005-06-23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득 어제본 드라마가 생각납니다, 그럴땐 이렇게 말씀하세요 "내가 봉이냐?!!" (라고 정려원이 시켰어요^^a) 그 책파는 아저씨 입장도 이해는 가지만 너무 마태님한테만 떠안기는것 같아요, 실론님 말씀대로 그 렌즈를 설치하심이 어떨런지요...? ^^

2005-06-23 2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6-23 2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호랑녀 2005-06-23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제 수첩에 적어두겠습니다.
마태우스님 - 거절을 못하는 성격. 급할 경우 ... ^^=3=3=3

balmas 2005-06-24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백만원 날린 사람 또 하나 있음 ... -_-v

마태우스 2005-06-24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반갑다고 해도 될까요...
호랑녀님/원래 수첩 같은 거 분실 잘한다고 들었는데 맞죠?
속삭이신 분(선물 주신 분과 다름)/죄송합니다. 제가 좀 단호하지 못해서 말입니다. 주위 사람들도 제 이런 모습에 짜증을 냅니다만, 그래도 놀아주긴 해요..
투풀님/렌즈!! 아, 렌즈!!
숨은아이님/그럼요. 해적이 있는 한 해적판은 없어지지 않죠!
날개님/날개님이 큰 날개로 좀 감싸 주세요 흑흑
실론티님/구멍을 뚫는 거, 좋은 의견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구멍을 뚫을 용기는 있을까요.......
클리오님/앞으로 클리오님만 믿겠습니다. 그 아저씨 오시면 전화드릴께요
야클님/잘 아시는 거 보니까 님도??
문나이트님/호오 님도 그렇단 말이죠. 그런 사람들끼리 의지하며 삽시다!
인터라겐님/그래야 할텐데....
세벌식자판님/그런 논리로는 설득시킬 수 없을 것 같아요. 일단 사놓고 읽으라고 하면 어떡해요...
줄리님/흑, 그런 걸 할 수 있으면 제가 여기다 이런 글을 안쓰죠...

marine 2005-06-27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은 마음이 너무 착하세요^^ 하긴, 저도 얼마 전에 미대생이 직접 그린 그림이라고 팔러 왔길래 하는 수 없이 4만원 주고 샀는데, 지갑에 돈이 부족해서 남에게 꿔서 샀답니다 알라디너님들은 다들 마음이 약하신 것 같아요^^
 
수의사 헤리엇의 행복을 전하는 개 이야기
제임스 헤리엇 지음, 김석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3년 9월
평점 :
절판


 

[벤지 생각나게 한다고 어이없어 마시고요, 주제넘지만 벤지와의 즐거운 추억을 간직하시라고 보내드립니다. 마태님, 기운 내세요]

벤지를 보내고 난 뒤 5일째 되는 날, 한 알라딘 분께서 보내주신 책 <수의사 헤리엇의 행복을 전하는 개 이야기>에 동봉된 메시지다. 눈물이 어느 정도 잦아들고 있던 그날, 책을 보자마자 난 문을 잠그고 펑펑 울어버렸다. 이 책을 제대로 볼 수 있었던 것은 책을 받은 지 닷새가 지나서였다.


아들같은 개를 잃고 상실감에 빠진 사람에게 개 이야기를 담은 책을 보내는 건 그분 말씀대로 ‘어이없’는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집에 있으면 벤지 생각이 난다고 밖에서 술만 마시는 식의 ‘회피’는 벤지를 제대로 보내는 게 아니다. 어렵사리 책을 읽으며 난 벤지와의 추억을 다시금 떠올렸고, 그럼으로써 벤지를-어느 정도는-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개들은 놀기를 좋아하고,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오락이나 취미를 갖고있다(89쪽): 저자는 두 마리를 함께 키우는 게 좋다고 하며, 그게 안되면 주인이 놀아줘야 한다고 말한다. 나 자신을 반성해 본다. 술만 마시느라 벤지로 하여금 소파 위에서 하루종일 나만 기다리게 만들었던 나는 개를 기를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벤지에게 친구를 만들어줄 생각을 안한 것은 아니었다. 벤지가 열 살이 되었을 때, 우리 가족은 모두 결혼을 해 집을 나갔고, 아버님과 어머님은 병원에 계셨다. 혼자 있는 벤지가 안스러워 미니핀 한 마리를 23만원에 샀다. 하지만 이미 사람에게 길들여져버린 벤지는 성질 고약한 미니핀이 괴로울 뿐이었다. 내가 집에 왔을 때면 벤지는 어린 미니핀이 접근 못하는 소파 위에서 꼬리를 치고 있었다. 결국 그 미니핀은 다른 애한테 넘겨졌고, 그 뒤 6개월을 살다가 죽었다. 막대사탕의 막대를 먹은 것이 원인이었는데, 뒤늦게 그 소식을 들은 나는 혼자 술상을 차리고 술을 마시며 그를 추모했다.

-저자의 말이다. “개와 할 수 있는 놀이는 놀랄만큼 많다. 줄다리기, 공을 던져주고 다시 가져오게 하기, 숨바꼭질까지 할 수 있다(같은 쪽)”

내가 숨어 있으면 벤지는 당황해서 날 찾아다녔다. 이방저방을 오가면서 초조하게 다니는 벤지를 보면서 난 마냥 즐거워했다. 벤지가 날 발견하면 다가와 꼬리를 쳤고, 끝내 날 못찾으면 내가 몰래 벤지 뒤로 다가가 녀석을 불렀다. 날 보고 반가워하는 녀석의 모습, 하지만 난 나를 찾는 동안 벤지가 심리적 고통을 겪을까봐 숨바꼭질 놀이를 자주 하지 않았다.  자주 할 걸.

-책에는 다치거나 병이 든 개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러고보면 나와 같이 지낸 17년 동안, 벤지는 감기에 몇 번 걸린 것치고는 아주 건강하게 내 곁에 있어 주었다. 그게 너무나도 고맙다.


시간이 열흘 남짓 지난 지금은 눈물 없이 벤지 얘기를 할 수가 있게 되었다. 하지만 가축병원 수의사에게 넘겨지던 순간 당황해하던 벤지의 모습은 지금도 눈앞에 선하고, 이따금씩 날 눈물짓게 한다. 그 광경을 잊으려면 좀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하겠지. 내 마음을 헤아려 책 두권을 보내주신 그분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완성 2005-06-23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저 조용히 그분과 벤지와 마태님을 위해 추천을...

노부후사 2005-06-23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정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stella.K 2005-06-23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누군지 모르지만 그 분 참 좋으신 분이네요. 마태님은 복도 많으셔요.^^ 사실 벤지가 죽었다는 소식 들었을 때 마태님 생각 안 한거 아닌데, 저는 저런 생각 못했거든요. 대신 우리 똘똘이라도 드릴까? 하는 생각은 했는데...원하시면 드릴게요.
저 책 시리즈로 나온 거 아시죠? 저는 양을 돌보는 헤리엇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는데, 이 책들 잔잔하고 따뜻한 고급 단편 읽는 것 같아요. 제가 유럽 저자들을 조금 좋아하걸랑요.^^

돌바람 2005-06-23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추천을!

로드무비 2005-06-23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분 저도 참 고맙네요.
전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요!

짱구아빠 2005-06-23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 주변에는 마음 따신 분들이 정말 많네요.... 책을 통해 슬픔을 다독거려주시는 분도 계시고..마태님은 참 행복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moonnight 2005-06-23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좋은 사람들은 마음으로 통하는 거로군요. 잔잔하고 감동적인 리뷰 잘 읽었습니다. 벤지와의 추억이 있으니, 그리고 이렇게 좋은 친구분을 두셨으니 마태우스님은 행복한 분이십니다. ^^

진/우맘 2005-06-23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만큼 마태님이 주변지인 모두에게 따뜻한 벗이니까요....

인터라겐 2005-06-23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년전 수의사 헤리엇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은적이 있어요.. 동물이던 사람이던.. 사랑을 받아야 행복한건 당연한거겠죠... 사랑받은 벤지는 아마도 영원히 마태님을 못잊을꺼예요...

panda78 2005-06-23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분인지 알 것 같기도 하고.. 책도 따뜻하고 좋지만, 책을 보내주신 분의 마음이 더 따스하고 좋네요. 좀 더 시간이 지난 다음에 마태님께 벤지 이야기 많이 많이 듣고 싶어요. 저도 추천하고 갑니다.

마태우스 2005-06-24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판다님/아시면 좀 가르쳐 주세요! 은혜 갚아야 하는데... 나중에 벤지 얘기 해드릴께요...
인터라겐님/네........ 감사합니다
진우맘님/따뜻한 벗 중 한분인 진우맘님, 요즘 애정이 식은 것 같은데요^^
문나이트님/네, 문나이트님 알게 된 것도 행복의 한 요인이랍니다.
짱구아빠님/그러게요.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늘 합니다...
로드무비님/아닙니다. 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돌바람님/추천 감사합니다. 덕분에 제가 톱텐에 진입했습니다
스텔라님/책을 보니까 동물을 사랑하는 분들이 많다는 걸 느껴요... 한권 더 있으니 그거 읽으면서 벤지를 추억할래요...
에피님/그러게요... 술의 힘을 빈 거긴 하지만...
사과님/님의 이쁜 마음도 잘 압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