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건 학교에서 지속적으로 주입된 반일교육 탓이 아니다. 그 이전부터 내 유전자에는 그게 각인되어 있었다. ‘나라스께’라는 말을 들으면, 일본말을 들으면, 일본어로 된 책이 근처에 놓여 있으면 난 밥을 먹지 못했다.
1. 라면
할머니는 오랜 기간 일본에서 사셨다. 영구 귀국한 뒤 할머니댁에 갔었는데, 할머니가 라면을 끓여주셨다. 열나게 먹고 있는데 쓰레기통에 라면 껍질이 보인다. 그건, 일본라면이었다. 난 남은 라면을 다 버렸고, 십분이 넘도록 구역질을 했다. 그날 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2. 압구정동 카페
김치볶음밥을 먹고 있는데, 노래가 일본노래로 바뀌었다. 속이 미식거려 더 이상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저..제발 음악 좀 바꿔 주시면 안돼요? 밥을 못먹겠어요”
종업원은 죄송하다면서 음악을 껐다. 사실 그녀가 죄송할 건 없었다. 그건 내 문제였으니까.
3. 기조암
조교 시절, 선생님들과 ‘기조암’이라는 식당에 갔다. 일본옷을 입은 종업원들, 그리고 일본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릇들. 게다가 어묵을 분홍빛으로 물들인 우동까지. 난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가장 싼 3천원짜리 우동을 시켜놓고 몇가닥 먹는 시늉만 하는 동안, 남들은 덴브라우동정식을 맛있다며 먹었다. 그 다음번에 한번 더 그짓을 한 끝에, 난 메뉴에 돈까스 우동정식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기조암은 더 이상 공포가 아니었고, 난 자발적으로 거기 간 적도 많다. 물론 내 메뉴는 언제나 돈까스 우동이었다.
4. 대학로
맛집 사이트에 난 식당은 전형적인 일본 분위기였고-미쳤지. 내가 왜 거길 갔을까-더 놀라운 것은, 사장과 종업원이 한 가족인데 지들끼리 일본말로 얘기한다는 것. 속이 거북해서 더 이상 앉아있는 게 불가능했다. 같이 간 미녀 둘이 남은 음식을 먹는 동안, 난 옆에 있는 야구 연습장에서 공을 쳤다.
5. 초등학교 번개
이촌동에 있는 일본풍의 음식점에서 번개가 있었다. 음식이 하나씩 나올 때마다 젓가락 십수개가 분주히 움직였다.
“맛있다” “여기 참 괜찮네”
한동안 그러던 친구들, 어느 순간 날 주목했다.
“민아, 넌 왜 하나도 안먹어?”
적성에 안맞는다는 내 말에 친구들은 메뉴판을 주고 맘에 맞는 안주를 고르라고 했다. 물론 난 아무것도 고를 수가 없었고, 친구들이 맛있다고 일본라면을 먹을 때, 난 그걸 안보려고 밖에 나가 있어야 했다. 할머니 집에서 먹던 라면을 떠올리게 했으니까.
6. 청담동 카페
종업원은 기모노를 입고 서빙을 하고, 음식들에서는 하나같이 일본냄새가 짙게 풍겼다. 꼬치, 오꼬노미야끼, 이런 것들을 되도록 보지 않으려 애쓰며, 일본 소주인 사케가 참이슬이라고 자기 최면을 걸면서 난 하릴없이 술만 들이켰다. 그날 집에 가서 라면을 먹었다.
7. 대학로
그곳에 가니 머리를 짧게 깎고 일본옷을 입은 종업원들이 우르르 나와 “어서 오십시오”라고 외쳤다. 그동안 한명이 북을 울려댔다. 그 북소리에 담긴 일본향에 이미 난 입맛을 잃었다. 거기서 난 뭔가를 먹었다기보다, 식사시간을 견뎌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싶다.
8. 지난 일요일
“정말 괜찮은 곳이 있다”는 미녀의 인도로 일식주점에 갔다. 파란색 기모노를 입은 종업원이 눈에 거슬렸고, 오뎅탕이 없어서 시킨 해물안주는 날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11,000원짜리 사케에 속이 미식거려, 참이슬을 시킨 뒤 안주없이 깡소주를 마셨다.
“괜찮아?”
미녀가 물었다.
“그럼, 일본말만 안들리면 돼”
그로부터 채 5분이 안됐을 무렵, 여행객으로 보이는 동양인 여섯이 술집에 들어왔고, 난 한눈에 그들의 국적을 알아봤다. 유일한 손님인 우리 옆 테이블에-하필이면-자리를 잡은 그들은 유창한 일본어로 웃고 떠들고 절규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난 남은 사케를 참이슬병에 담아 그곳을 나왔고, 한국냄새가 물씬 나는 술집에서 한국적인 음식인 탕과 계란말이에 참이슬을 마시면서 몸에 밴 일본냄새를 뺐다.
9. 전생에 나는
2년마다 열리는 일본학회에 너는 왜 한번도 가지 않느냐는 지도교수의 질문에 난 이렇게 답했다.
“일본 알레르기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일본식당도 견디기 어려운 판에, 진짜 일본식당에 간다면 거품을 물고 쓰러져 버릴 것만 같다. 다른 애들에 비해 마디 하나쯤이 더 짧은 새끼손가락을 보면서 생각한다. 전생에 나는, 혹시 안중근 의사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