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몸담은 써클은 여름마다 강원도로 진료봉사를 갔다. ‘여름진료’로 불려지는 그것은 우리 써클의 행사로, 졸업한 선배를 포함, 60-80명의 인원이 그곳에 간다. 지금이야 디카가 있고, 디카로 찍은 걸 해당 사이트에 올리면 그만이지만, 20년 전만 해도 사진을 찍으면 사람 수대로 뽑아서 나누어 줘야 했다. 그게 귀찮아서 사람들은 카메라를 잘 가져오지 않았는데, 86년 여름, 써클 진료에 내가 카메라를 가지고 간 거였다.


난 틈틈이 사진을 찍었고, 마지막날 왕창 찍었다. 진료 마지막날 짐을 다 꾸려놓고 진료 때 맡은 부서별로 이렇게 저렇게 모여 사진을 찍는 게 관례였다. 예컨대 약을 싼 사람끼리 모이고, 농촌활동 갔다온 사람끼리, 밥 집었던 사람끼리... 한 사람의 역할이 매일 바뀌므로 60명이면 실로 방대한 조합이 이루어졌는데, 모여서 포즈를 취하고 있으면 내가 달려가 사진을 찍었다. 포즈를 취한 사람들을 기다리게 하지 않으려고 하다보니 마음이 급해졌고, 너무나 서둘렀다. 자동카메라니 초점 맞출 시간이 필요했음에도, 난 달려가자마자 셔터를 눌렀다. 나중에 현상된 사진들은 초점이 안맞거나 빛이 들어간 게 대부분이라, 얼마나 속상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난 사람 수대로 사진을 현상해 나누어 주었는데, 필름이 7통이었으니 적잖은 비용과 시간이 소요됐다. 사진을 받은 이들 중 돈을 안낸 이도 있었고, 500원, 1,000원씩 받아봤자 돈이 모일 턱이 없었다. 게다가 사진도 흐렸으니 제 값을 받기도 미안했다. 10만원이 넘는 현상비용은 당시 내 용돈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고, 결국 난 어머님께 손을 벌려 문제를 해결했다. 그때 크게 데어서인지 난 그 이후 여럿인 놀러갈 때 카메라를 가져가본 기억이 없다. 내가 디카를 안사는 것도 그때의 영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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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꼬 2005-08-14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시절 저도 학과 찍새역할을 많이 했는데요, 전지에 사진을 붙이고 몇가지 코멘트를 ㅍ한 후 학생회실 벽에 붙이면, 그 사진 아래에 인화할 사람 이름을 쓰곤 했는데요..
아니면, 사진을 돌려서 사진 뒷면에 인화할 사람 이름을 썼구요... 지금도 그때 사진 보면, 뒤에 이름 써있는 사진이 있더군요... 그런데, 돈은 잘 받았을까? 잘 기억은 안나네요..

이매지 2005-08-14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중학교 때 친구들이랑 놀러갔을 때 그렇게 사진 찍어서 쫙 돌려서 인화한 사람 이름을 뒷 면에 쓰게 했더랬죠. 지금도 이름이 적힌 사진을 보면 그 때의 추억이 떠오르는^-^; 전 돈계산은 철저해서 -_ -; 돈 안 주면 사진도 안 줬습니다 ! ㅋㅋ

마태우스 2005-08-14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매지님/와, 그런 정신이라면 지금도 알뜰하게 잘 사실 것 같네요. 전 그때부터 돈 개념이 흐리멍텅해서 말입니다...
서림님/찍새 그거, 사실은 희생하는 겁니다. 겁나게 귀찮은 일이잖습니까. 찍새끼리 모임이라도...^^

검둥개 2005-08-15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주변의 사람들은 사진값 떼어먹게 절대 내버려두지 않았답니다. ㅎㅎ 그렇지만 전 원래 사진 찍히는 걸 싫어해서 필요없다고 찍지도 말라 줄 필요도 없다, 로 나갔죠. :)

산사춘 2005-08-15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체에 있을 때 사진찍히기가 싫어서 행사 때마다 맨날 찍사를 했는데,
사진이 제대로 나온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명수대로 인화하면 맨날 사진이 남았어요. 뜽금업씨 반성합니다.


클리오 2005-08-16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체로 놀러가면 그게 정말 싫어요. 설혹 돈을 안떼어먹는다고 해도 꼭 돈은 부족하기 마련이죠. 걷기도 싫구... 전 그래서, 한번은 사진을 무조건 안찾아줘버렸다는... --;; (귀차니즘의 위대한 승리..)

마태우스 2005-08-16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리오님/그렇죠? 돈은 항상 부족하게 걷히죠? 안찾아주는 것도 이해가 되요
산사춘님/아니 왜 반성을 하십니까. 산사춘님은 정말 좋은 분입니다
검정개님/찍지도 주지도 말라는 원칙, 거기에 정답이 있는가봐요^^
 

 

 

 

 

 

일시: 8월 13일(토)

누구와: 미녀 둘과

마신 양: 맥주만 왕창!


내겐 빗이 없다. 빚을 선물받은 기억이 있긴한데 안써서 그런지 다 없어졌다. 무스나 스프레이도 질색을 한다. 머리가 억세고 빨리 자라는데다 손질을 일체 안하니 영 어수선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 머리로 이십년 이상을 버티다보니 그게 하나의 스타일로 자리를 잡아버렸고, 웬만하면 이 머리를 유지하고 싶었다.


그 결심이 깨졌다. 내 머리를 안타깝게 여기던 여인이 미용사 이름이 내걸린 유명 헤어숍에 날 데려간 것. 머리를 자르러 강남까지 가보긴 난생 처음이었다.

“거기 가면 민이씨한테 어울리게 각을 잡아줄 거예요”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각이 아니라 청둥오리를 잡아준대도 그 미용실에 가는 일은 없었을 거다. 평소처럼 남들의 야유 속에 두달 반을 버티다 스포츠로 깎고, 그리고 또 석달간 기르기를 되풀이하며 살았을거다. 하지만 그녀는 0.1%를 내게 소개해준 고마운 분, 당연히 잘 보여야 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0.1% 미녀도 이렇게 말했다.

“그래요, 거기서 자르면 더 멋있을 거예요”

내가 스타일을 변화시키는 건 당연한 게 아니겠는가.


유명 헤어숍답게 실내는 쾌적했고, 미용사와 손님들 중엔 미녀가 득실댔다. 그 헤어숍에서 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다. ‘이사’란 직위를 가진 미용사의 손에서 원시림같던 내 머리는 서서히 길들여졌고, 다 자른 지금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신기해하고 있는 중이다. 그간 머리에 관심을 안기울인 건 어차피 외모는 글렀으니 막 살자는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다. 하지만 눈 위에 꺼플을 하나 더 만드는 게 얼굴 전체를 달라보이게 하는 것처럼, 무성하기만 한 머리칼도 어떻게 꾸미냐에 따라 천양지차의 차이를 가져온다는 걸 새삼 느낀다. 문제는 가격이 너무 비싸다는 것. 다른 미용사보다 잘 깎는 건 인정하겠지만, 그렇게까지 비싸게 받아야 하는 걸까. 머리값을 계산하는데 손이 다 떨렸다.

“이 스타일을 유지하시려면 3-4주에 한번씩 오셔야 해요”

술값은 그보다 더 쓸지언정, 머리에다 그렇게 투자할 수 있을까? 그건 전적으로 0.1% 미녀에게 달려있을 듯싶다.

(이상이 미용실에서 같이 간 여인의 머리손질-트레이트먼트라고 하던가요-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쓴 일기입니다)


머리에 투자를 하고나니 남들이 알아주길 바라는 건 인지상정일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다지 내게 관심이 없는 듯했다. 예컨대 어제 만난 미녀1. “머리 잘랐어요”라는 말을 하고 나서야 “잘 자르셨네요”라고 한다. 그나마도 뒤늦게 합류한 미녀2가 하필이면 그날 9시간 동안 비싼 돈을 들여가며 머리를 땋았던 터라 그 다음부터는 온통 그녀의 머리에만 관심을 집중시켰다. 머리에서 밀렸다.


* 매주 테니스를 치는 내 친구, 머리 어떠냐는 내 말에 “머리 잘랐어?”라고 한다. 무정한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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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굼 2005-08-14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 올려주세요~

2005-08-14 15: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8-14 15: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히나 2005-08-14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요~ ㅎㅎ

어룸 2005-08-14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흐흐흐~ 저두요~^m^

마태우스 2005-08-14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디카가 없잖습니까. 흑. 어제 찍을 걸...

2005-08-14 1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5-08-14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래 남자들이 남자한테 관심이 없잖아요. ㅋㅋ 전 여자들 변화가 있어도 잘 모릅니다. ㅡㅡ;

sweetmagic 2005-08-14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사진을 봐야~~ 알겠는데요 ??
100번째 술일기는 어디갔나요 ?

kleinsusun 2005-08-14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사진 보고 시퍼요!!!
저도 오늘 머리했는데...호홋.

포도나라 2005-08-14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후후후~~~...>.<~... 너무 웃겨여~~~~
근데 단순히 자른 건 아주 파격적인 스타일이거나 보는 사람이 뚸어난 관찰력의 소유자이거나 관심주는 사람이 아닌 이상 머리 바꿨냐는 말 듣기 힘든 것 같아요...

마태우스 2005-08-14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행자의노래님/흑, 서운해요. 메이컨데...겁나게 비싸게 깎았는데... 관찰력의 소유자를 만나야겠군요
수선님/디카 있는 애 만나면 무조건 찍어달라고 하겠습니다. 막 자른 사진이 더 좋겠지만.... 수선님이야말로 사진 올려주세요!
매직님/그게요...부리가 썼답니다^^
아프락사스님/여자 분들도 잘 모르시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속삭이신 분/호호 눈치채셨군요! 부끄러워라... 인터뷰 사진, 그래도 괜찮게 나오지 않았나요?
사진 얘기하신 분들, 이따 뵈요!


비로그인 2005-08-14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따 뵈요? 이건 사진을 올리겠다는 의미인가요? 저도 얘기하려던 참인데 ㅋㅋ
정말 궁금하네요. 어떻게 변화하셨을지.. ^-^ 사진으로 보면 더 잘 모를수도 있지만
뛰어난 관찰력을 소유한 분들이 많으시니. 분명 성과가 있을 것 같아요. ㅋㅋ
마태님. 비싸게 생각하지마시구요. 님의 스타일을 만드신다고 생각하시고. 투자를
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예전의 님의 스타일이 이상했던 것은 절대 아니지만
이왕이면 전문가의 손길이 닿을 것이 좋을수도 있겠죠. ^-^ 홧팅!

마태우스 2005-08-14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시장미님/사진 올리겠단 말이 아니라요, 이따 모여서 디카 성금이라도 모금하자는 소리였어요^^ 글구 머리는...한번 이대로 밀고나가 볼께요^^ 대신 술 줄이구요.

하루(春) 2005-08-14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따우님 만나셨군요.

검둥개 2005-08-15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리관이 저와 상당히 비슷하십니다. 다만 저는 미녀가 주변에 없군요. :)
사진, 사진, 사진 올려주세욧 ~~~~

산사춘 2005-08-15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님의 댓글을 보니 명확해집니다.
그러니까 결론은 따우가 나삔뇬이라는 것이겠지요?
(날도 더운데... 쌈구경이라도 해볼까 하고... 우허허허허)
 

 

 

 

일시; 8월 9일(화)

누구와: 이사람 저사람과

마신 양: 고량주--> 맥주-->소주


화요일, 약속이 두 개 겹쳤다. 부득이한 일이 없을 땐 약속을 겹치게 잡지 않는데, 화요일의 약속은 둘 다 내 의사와 무관한 것이었다. 학장이 주관하는 모임(중국집)과 지도교수가 주도하는 ‘화요모임’(횟집). 고민이 시작되었다.

1. 학장 모임에 가야하는 이유

-학장이 더 무섭다. 아쉬운 얘기도 해야 하니 말 잘들어야 한다

-내가 돈을 안내도 된다.

-학장이 술을 안좋아하셔서 맨정신으로 집에 올 수 있다. 2차도 없다. 이걸 좋다고 하는 건 내가 알콜중독이 아니라는 강력한 증거다.

-점심을 굶었더니 중국음식이 땡겼다.


2. 학장모임의 불리한 점

-아무래도 재미가 덜하다. 학장님 말씀을 주로 들어야 하고, 내가 유머를 구사할 여지가 별로 없다.

-참석하는 사람들끼리 친하지 않다. 즉 편한 분위기는 아니다.


3. 지도교수 모임에 가면 좋은 점

-거기 가면 내가 서열 2위다. 즉 내가 거침없이 말할 수 있다.

-선후배고 오래 봐온 사람들이니 편하다.

-술을 돌린다. 즉 공평하게 마시니까 많이 먹어도 안억울하다.

-좌우지간 친정이 좋다(그날도 뭔가를 얻었다)


4. 지도교수 모임의 불리한 점

-1, 2차 중 내가 한번은 내야 한다(서열2위니까)

-2차로 꼭 노래방에 간다. 난 요즘 노래부르는 게 그다지 안땡긴다. 근데 거기선 춤까지 춰야 한다. 으....

-멤버 중 외국인(인도네시아?)이 있어 영어를 써야 한다.


5. 결과

그래서 난.

-학장 모임에 가서 중국음식을 맛나게 먹었고(+3점)

-이상하게도 한명이 고량주 두병을 가져와 열심히 돌렸다. 알딸딸했다(-2점)

-지도교수 모임에선 계속 2차라도 오라고 메시지를 보내왔고(-1점)

-그래서 피곤을 무릅쓰고 대학로로 갔다(-1점)

-도착하니 노래모임은 끝난 뒤였고, 남은 맥주만 내가 처리했다(+3점)

-내가 오기 전엔 폭탄주도 돌렸단다(+1점)

-교수님은 가고 나랑 내 동기가 주동을 해서 감자탕집으로 3차를 갔다(-1점)

-술국과 감자탕을 놓고 소주를 마셨는데, 이상하게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가 않았다(+2점)

-집에 들어오니 1시였는데, 그때까지 안주무시던 엄마와 한시간이 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2점)

-그런데 엄마가 전화번호 적어준 여자와 왜 맞선을 안보냐고 다그쳤고(-2점)

-난 얼떨결에 0.1% 미녀랑 수요일날 만나기로 했고, 사귈 거라고 둘러댔다(-1점)


화요일 술자리를 종합하면 +3점, 0을 넘으면 양호한 편이니 대체로 무난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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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런스 2005-08-14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0번째 술일기가 겁나 기대되요

싸이런스 2005-08-14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1등이었네

2005-08-14 14: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春) 2005-08-14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젠 술자리를 평가도 하시는 군요. 그것도 점수로다가... 흐흐~

미완성 2005-08-14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 화이팅!

마늘빵 2005-08-14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이 드셨네요. 여기저기... ^^

포도나라 2005-08-14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전 술처리반 직원이시군요...^^
근데 어머님께서는 마태우스님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신가 봐요...ㅋㅋㅋ

비로그인 2005-08-14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얼떨결에 0.1% 미녀랑 수요일날 만나기로 했고, 사귈 거라고 둘러댔다 ->
이부분이 가장 압권입니다!!! ㅋㅋ 그래서 미용실에 가셨군요 ^-^ 하하.

저라면 돈을 쓰더라도 할말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을 택하죠.
그런데 두 모임다 중요한 모임이니.. 두탕을.. 뛰실 수밖에 없으셨을 것 같네요.
피곤하셨겠어요. 이런 상황이야 말로 역할갈등을 불러오는 상황이네요 ㅋㅋ
근데. 어여.. 연애사업에 진전이 있으셔야 하실텐데.. ^-^ 홧팅!!
 

 

 

 

 

 

일시: 8월 12일(금)

마신 양: 겁나게 많이, 결국 정신 잃음

누구와: 친구1와 시작--> 친구 2와 마무리


술을 얼마나 안마셨는지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고 있었다. 소주 한병에 맥주 다섯병이니 그렇게 안마신 건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난 하나도 술에 취하지 않았다. 갑자기 ‘그’가 생각났다. ‘뭐하니’라는 메시지를 날리자마자 응답이 왔고, 우리는 홍대앞 감자탕집에 들어갔다.


감자탕집에는 개 한 마리가 있었다. 모든 개는 벤지가 가졌던 귀염성과 충성심을 갖고 있고, 그래서 나로 하여금 벤지를 생각나게 한다. 감자탕에 붙어있는 고기를 식힌 후 녀석에게 주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녀석은 넙죽넙죽 잘 먹었다. 벤지는 평소엔 나밖에 모르지만, 어머님이 뭔가를 드실 때는 그 앞에서 알랑거렸다. 하지만 먹을만큼 먹고나면 엄마에게 짖어대며 자기가 마음까지 허락한 건 아니라는 걸 내게 증명하곤 했다. 녀석 역시 배가 어느 정도 부르자 홀연히 내 곁을 떠나 주인 곁으로 갔다.


다른 손님들이 개를 부른다. 온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한다. “개 참 예쁘네요”

주인이 우리에게 말한다.

“주워온 개에요. 누가 박스에 싸서 버렸더라고요. 우연히 발견해서 데려다 기르고 있어요”

버려진 개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다. 그 안타까움은 내가 어떻게든 도움을 주는 게 어렵기 때문에 생긴 거다. 그래서 난 그런 개를 데려다 기르는 사람이 고마워 죽겠다. 주인이 갑자기 위대해 보였다.


감자탕 주인아주머니가 그러지 않았더라면 그 개는 박스에 갇힌 채 굶어 죽거나, 운좋게 탈출한다 해도 차에 치여 죽기 십상이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다른 개들처럼 길거리에서 쓰레기통을 뒤지며 여생을 살아가야 했을 것이다. 그때 그 개를 만났더라면 감자탕집 손님들이 예쁘다면서 머리를 쓰다듬지 않았겠지. 쓰다듬기는커녕 병이라도 옮을까 황급히 몸을 피했겠지.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을 거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유전이 중요하다고 느낀다. 최근 읽은 책에서도 부모의 노력이 자식의 운명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한단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사람과 개를 비교하는 게 말이 안되겠지만, 나쁜 주인을 만나 죽을 뻔했던 그 개의 운명은 감자탕 주인을 만남으로써 극적으로 바뀌었다. 사람을 경계하며 음식물을 찾아 헤매는 대신, 손님과 주인의 사랑을 받으며 꼬리를 치는 개가 되었으니 말이다. 아무리 유전이 중요해도 따스한 보살핌 역시 그만큼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거리의 범죄자가 된 사람들 중 부모의 사랑을 받았다면 운명이 바뀌었을 사람이 많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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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5-08-13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쓰레기 모아 놓는 곳에 가면 개들이 단단히 묶인 봉투를 풀어 보려고 애쓰는 걸 보곤 합니다 생긴 건 분명히 누군가에게 키워졌을 애완견인데, 비루먹었다는 말이 딱 맞는 듯한 모습으로 쓰레기통 주변을 배회하는 걸 어제 보고, 먹고 있던 치즈빵을 잘라서 주고 왔어요 말 그대로 숨도 안 쉬고 허겁지겁 먹더라구요 오늘이야 내가 준 빵으로 버텼지만, 내일부터는 또 어떻게 살련지,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kleinsusun 2005-08-13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그 개가 좋은 주인을 만나지 못했다면 길을 헤매다가 복날에 험한 일을 당했을 수도....감자탕 집에 입양되어서 정말 다행이예요.
버려진 개들을 키우는 할머니가 계시더군요. 개가 몇백마리가 되던데.... 남양주군에요.세상에는 고운 분들이 참 많네요. 그래도...아름다운 세상.

야클 2005-08-13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착한 감자탕 주인 아주머니 복 많이 받으시길. 엄청 개 좋아하는 야클.

2005-08-13 1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moonnight 2005-08-13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마음에 감동하셔서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을 드셨군요. 세상엔 여전히 좋은 사람들이 많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술일기입니다. 해장하셨나요? ^^

플라시보 2005-08-13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그렇지만 길을 가다가 보면 버려진 개들을 보게 됩니다. 초라한 몰골과 피골이 상접한 몸매... 한때는 분명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을텐데 잃어버린건지 아니면 자신들의 삶에서 밀어냈는지 모르겠지만 참 책임감도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긴 낳은 자식도 어디다 버리는 사람들도 있는데 개 쯤이야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생명이 붙은거라면 그게 뭐가 되었건간에 처음 기르겠다고 생각을 했으면 혹은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라면 내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2005-08-13 1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5-08-13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많이 받는다고... 꼭 좋은 인간이 되는 것도 아닌 것 같아요. ^-^;
흠.. 가정환경도 물론 중요하긴 한데, 스스로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느냐..
그것은 꼭 환경만의 영향은 아닌 것 같아요. 유전의 영향인가? -_-a
조금만 잘못 생각했다면 일탈했을지도 모르는 과거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 어머니의 사랑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자신에 대한 신뢰
믿음 책임 신념 을 지키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컸던 것 같아요. 행복한 가정에서..
아무 걱정없이 부족함없이 자란 사람들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해야했기에.. 좋은 것도
많았어요. 비슷한 상황에.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을 이해할 수 있고, 또 배려하려
노력했던 적도 많은 것 같은데.. 아직도 좀 부족하기는 하지만..서도. 하여튼 전...
사람은 부족함을 느낄 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다는 주의라. 부모의
영향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해요. ^-^

2005-08-13 1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꼬마요정 2005-08-13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집도 버려진 고양이들을 데려다 키웠답니다. 앞집이 거의 판자촌 수준이라 고양이들이 많이 서식했었는데, 철거되는 바람에 그 고양이들이 갈 데가 없어졌었거든요.. 그 중에 암코양이 한 마리가 새끼 두 마리를 집 앞에 떡 하니 낳아 기르길래 낼름 데려다 3마리 키웠죠... 그런거야말로 진정한 방생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신문에 나오신 거 봤어요~~^^ 이제는 거의 스타가 다 되셨는걸요~~^*^

2005-08-14 0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예고편을 보니 유치한 것 같아 볼 생각이 없었던 ‘동막골’, 하지만 9점대의 높은 별점과 쏟아지는 찬사는 나로 하여금 그 영화를 보게 만들었다. 그런 걸 보며 난 대세추종형 인간이다.


하지만 다들 재미있다고 하고, 같이 영화를 봐준 미녀 또한 “보길 잘했다”고 좋아하는 시점에서 나 혼자 “재미 하나도 없어 씨!”를 외치는 걸 보면, 내 안에는 어떤 고난에도 굴하지 않는 대쪽같은 선비정신이 있음이 틀림없다.

사진설명: 내가 재미있건 없건간에 강혜정은 올드보이, 연애의 목적의 히트에 이어 세번 연속으로 히트작을 만든 배우가 되었다.

 


그간 유머를 지나치게 갈고 닦아서인지 ‘동막골’에서 구사되는 수준의 유머에는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총을 들이대며 꼼짝 말라고 하는 군인에게 할머니가 “꼼짝 안하면 어디다 똥을 누나?”고 했을 때 딱 한번 웃은 게 유일한 웃음이었다. 전쟁의 잔인함을 원래 알고 있었던만큼, 이 영화에서 내가 건진 건 미녀와의 친분이 돈독해진 걸 빼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도 그렇게 말할 처지는 아니다. 영화를 보는 도중 난 구석자리에서 엄청 방귀를 뀌어댔다. 스무번? 서른번? 소리가 없었던 게 일단 다행이고, 방귀뀌다 실수하지 않은 게 더 다행이고, 소리없는 방귀 치고는 냄새가 없어 주위에서 그다지 불평을 하지 않았던 게 더욱 더 큰 다행이다. 저녁으로 먹은 해물볶음밥이 문제였던 걸까.


그렇다면 이 영화의 교훈은 다음 두가지로 요약된다.

하나. 지나치게 유머를 연마하면 웬만해선 웃지 않게 된다. 연마도 적당히 하자.

둘째. 영화를 보기 전 해물볶음밥을 먹는 건 삼가자. 방귀가 잦으면 x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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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8-11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미녀가 누군지 알 것같은데요, 이런 글 쓰셔도 되나요?ㅋ

2005-08-11 10: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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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5-08-11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쪽같은 선비정신? 푸하하하~~~
근데 아마 주변의 분들이 님이 방귀뀌는거 다 알고도 모른척해주신걸거예요. 미녀는 물론이고....^^;;

연우주 2005-08-11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그러셨군요. 저는 박광현 감독이 <내 나이키> 때부터 좋았는데. 전 이 영화 올해에 본 영화 중 베스트1위입니다. 물론 이 후에 다른 영화를 또 본다면 바뀔 수도 있겠지만...

마늘빵 2005-08-11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전 평소 별로 안웃기 때문에 이런게 재밌었나봐요. ㅋㅋ 많이 웃었는데... ^^

2005-08-11 11: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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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오 2005-08-11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재미 있는 것도 그렇지만, 적과 아군을 구분하는 시각이 기존보다 한발쯤은 나아간 것 같아 좋았습니다..

플라시보 2005-08-11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정말이지...너무도...아아....어찌해야 할지....조금도...눈치를 못챘습니다. 방귀 서른번요? 세상에나. 저 곧 이빈후과 가 보렵니다. 분명 제게 문제가 있는거에요. 그런거에요. 아흑... (그나저나 소리없이 해결하시느라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ceylontea 2005-08-11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잉... 80,000을 잡으려고 했었는데.. 말입니다..

어제 퇴근하면서... 오늘은 마태우스님 서재 80,000이 넘겠구나..

꼭 잡아드려야지 했었답니다..

오전 사태로 정신이 없다 이제서야 생각이 나서 와보니 역시나... 80,000은 훌쩍 넘어가 버렸군요..

그래도... 80,000 넘으신건 축하드려요.. 히히..

21980070


진/우맘 2005-08-11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 "머리에 꽃 꼽았슴미다"에서 안 웃으셨어요? "그냥 멀 마이 메기야 돼."에서도?
역시...저랑 마태님은 영화보는 취향이 매우 판이하다니까요, 쯧쯧......

포도나라 2005-08-11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 그래도 그 영화 그냥저냥 재미있던데요...

2005-08-11 23: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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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5-08-12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ㄴ님/뭘요 우리 사이에^^
여행자의노래님/저는 너무 유머감각이 뛰어난 것 같아요 아...이 슬픔..^^
진우맘님/그거 하나도 안웃겼어요.... 마음이 아픕니다.
실론티님/아아 8만이 그냥 지나갔군요. 어수선한 분위기라 잡을 틈도 없었을 것 같아요
플라시보님/죄송합니다....흑. 제가 원래 해물에 약해요
클리오님/제가 그 영화 재미없다고 한 유일한 사람이네요. 역시 난 선비야...^^
속삭이신ㅁ님/괜찮습니다. 시간이야 또 생기겠지요^^
아프락사스님/극장에서 영화볼 때, 다 웃는데 혼자 멍하니 있으려니 제게 문제가 있나 싶기도 했어요^^
우주님/전 그 ,묻지마 패밀리, 아주 재밌게 봤어요. 거의 죽을 뻔했는데 이번 건 유머가 약했어요....
바람돌이님/다행히 몰랐답니다^^ 제 왼쪽에 그 미녀, 오른쪽은 벽이었습니다
속삭이신 분/이 씨...한번 해보자는 거잖아요!! 좋아요, 술로 한판 붙어요. 요즘 저 소주 세병 마셔도 끄덕없어요
별사탕님/하하 방귀야 뭐 범죄는 아니지 않습니까 글구 그 미녀, 애인 있답니다
검은비님/호홋, 님은 방귀 얘기를 너무 좋아해요!! 해물 조심합시다!

2005-08-12 10: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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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12 11: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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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12 14: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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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12 19: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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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12 19: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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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개 2005-08-18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재미없으셨어요? 전 이 영화에서 박광현보다는 온통 장진이 보이던데... 너무나 장진스러워서.. 박광현이 누군가 했어요.. 찾아보니 유명한 시에프감독이더군요. 그제서야. 그 (저한테는 별 감동이 없었지만) 유명한 팝콘 날리는 신이나 멧돼지 출현 신의 기가막힌 화면 구성이 다 이유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장진(혹은 장진표) 영화는 '느린 호흡'에 적응하지 못하면 재미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매니아가 생겨나는 거겠지요.......

2005-08-31 14: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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