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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 구운몽 ㅣ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자라면서 읽었어야 하는데 읽지 않았던, 그래서 마음의 빚으로 남은 책들이 꽤 있다. 그 중 가장 큰 부담으로 작용한 것이 바로 최인훈의 <광장>이었다. 후속작인 <화두>를 실론티님으로부터 받고나니 <광장>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더욱더 많이 하게 되었는데, 그러던 차에 에피메테우스님으로부터 <광장>을 선물받았고, 몇 달이 지난 엊그제 비로소 다 읽을 수 있었다. 초베스트셀러인 이 책에 대해 그리 잘쓰지도 못한 리뷰가 하나 더 붙는다고 크게 달라질 것은 없어 보이기에, 리뷰의 탈을 쓴 페이퍼를 하나 올린다.
<광장>에서 주인공 이명준의 인생선배인 정선생이 이런 말을 한다.
[친구들이 소탈한 체하고 털어놓는 연애 얘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말게. 정말 소중한 얘기는 그렇게 아무한테나 쏟아놓지 않는 법이야. 설사 하더라도 에누리를 두는 법이지. 자네와 나하구의 우정하곤 다른 얘기야. 그런 고백을 한다는 건, 저쪽에 대한 모욕이지]
여기서 말하는 ‘저쪽’은 이야기를 듣는 사람을 의미한다. “상대가 그보다 못한 애정 생활의 내력밖에 못가졌다면 그는 은근히 자기 생애가 초라한 생각이 들 것이며, 그 반대의 경우에는 지루해할 것이 아닌가”
정선생의 생각에도 일리가 있지만, 난 그런 얘기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보다 자기 애인에게 더 모욕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둘 사이에 있었던 소중한 일들을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남자들은-여자들은 어떤지 모르겠다-그런다. ‘진도’가 어디까지 나갔는지를 궁금해하는 친구들 앞에서, 그는 자랑스럽게 떠벌인다. 오늘은 “손 잡았어”, 내일은 “발 잡았어”
대학 때, 친구 하나가 애인을 사귄 적이 있다.
“이대 앞에 ‘캐슬’이라는 카페가 있어. 거기 2층이 좀 어둡고 칸막이도 있어. 거기 올라가서... 설왕설래를 했어”
우린 그가 해주는 얘기에 같이 흥분했다. “와, 정말 좋았겠다...”
그리고 나서 한참 후, 그는 여자 하나를 데리고 우리 모임에 왔다. 우리 중 한 친구가 조용히 물었다. “저 사람이 그 설왕설래하던 그사람이냐?” “응”
그때부터 난 그녀가 좀 헤픈 여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키스한 걸 가지고 뭘 그러냐고 하겠지만, 철저한 순결교육으로 무장된 내게는 키스를 해본 여자가 그리 곱게 보이지 않았다. 그때의 경험 대문에 난 나중에 과커플이 되었을 때 그녀와의 진도를 절대로 공개하지 않았고, “아직 손도 안잡았어”로 일관했다. 친구들의 거듭된 추궁에도 “안믿으려면 관둬”라는 자세를 취했는데, 키스를 열 번도 더한 뒤에도 계속 그랬다 (가벼운 키스를 하다 같은 과 후배에게 들킨 적이 있다는 게 옥의 티).
순결교육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인 요즘도 난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진도를 친구들에게 공개하면서 여자의 위신을 실추시키기보다-위신이 실추된다고 생각하는 게 편견일 수 있다. 인정한다-둘만의 소중한 사랑의 행위는 둘만의 추억으로 간직하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한다. 그-렇-지-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