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토커가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집요함이겠지만, ‘한가해야 한다.’는 두 번째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스토커는 결코 될 수가 없다. 그다지 집요하지도, 한가하지도 않은 내가 스토커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내 사정일 분, 받아들이는 사람 모두가 내 사정을 이해해 주리라 생각해서는 안된다.
늘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라 미혼 여성을 대할 때는 무척이나 조심한다. 오래 전 N님의 캡쳐 이벤트에 당첨이 되어 받은 악세서리를 미모의 여인에게 선물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난 그녀에게 이런 댓글을 달았었다. “제게 사심이 없는 걸 믿어주신다면 이 선물을 받아 주세요.”
그녀가 흔쾌히 받아줘서 기분이 좋았고, 난 그걸 내가 워낙 많은 여자분들게 두루 잘했던 덕분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결혼을 하신 분께는 좀 더 스스럼없이 대하는데, 그건 그분들이 오해를 할 여지가 미혼 여성보다 더 적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또다른 N님에게 감히 “내 스타일이어요!”라는 댓글을 남길 수 있었고, ‘ㄱ’님께는 “제가 님을 가장 좋아하는 거 아시죠?”라고 여러번 말했다.
오래 전의 번개에서 만난 여자분이 몇 달 전에 결혼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은 미안함이었다. 알고 지낸지 그래도 꽤 되었는데 결혼을 그냥 지나쳐서야 되겠냐는 그런 미안함. 마침 상품권 이벤트에 당첨이 되었던 터라 난 그녀에게 상품권을 선물하겠다며 e-mail과 휴대폰 번호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하지만 일이 잘 안되어 상품권이 벌써 내 수중에 들어와 버렸기에, 할 수 없이 난 책 선물을 할테니 받고픈 책과 주소를 남겨 달라고 했다. 반응이 없은 지 이틀째가 되었을 때, 내 육감은 내가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를 깨달았다. 그 집에서 난 스토커가 되어 있었다. 그 후 그녀가 내 서재에 ‘거의’ 오지 않은 것이나, 내가 그녀 서재에 거의 가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 다음 번개 때 모임장소 근처에 살고 있음에도 그녀가 나오지 않은 까닭이 나 때문이라고 지인에게 설명했을 만큼 난 내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설마!’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는데, 그건 내가 한 일들이 워낙 보잘 것 없는 것이었기에, 이걸 가지고 스토커가 되기엔 좀 억울해서였다.
하지만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그 집에서 나 때문에 난리가 난 건 사실이었고, 부군은 물론 가족 모두가 그 일로 인해 흥분하셨단다. 내 위주로만 생각해서 그런지 그 일 말고 오해를 살만한 다른 일이 또 뭐가 있었는지 난 알지 못한다. 그분께 내가 달았던 수많은 댓글들이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을 수도 있고, 그분의 미모를 칭찬하는 내 말들이 문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난 정말 본의 아니게 그분께 폐를 끼쳤고, 내가 억울한 것 이상으로 그분 역시 괴로워하셨을 것이다. 내가 그때 결혼식을 지나친 것에 필요 이상으로 미안해하지 않았더라면, 혹은 그때 상품권이 당첨되지 않았더라면, 그것도 아니면 내가 그 며칠 전 보관함을 싹 비워버리지 않았더라면, 심오한 문학적 깊이를 가진 그분과 쭉 좋은 친구로 지낼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인간 관계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적으로 통용되는 기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이란 다양하기 짝이 없어서, 내가 둘을 줬을 때 그걸 하나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그걸 열 개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열 개로 간주하는 사람에게 왜 오버를 하냐고 다그치기 전에, 오해의 여지가 없도록 매사에 신중한 것이 좋을 듯하다. 나처럼 오래 ‘인간학’을 전공한 사람에게도 인간관계는 어렵기만 하다. 미모의 여인님, 정말 미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