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를 난 실연으로 시작했다. 그 뒤 두달간 우울증에 시달리던 나는 3월부터, 지난 5년간 그래 왔듯이 즐거운 나날을 보내기 시작했다. 기억나는 사건들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8월에 내 다섯 번째 저서가 나왔다. 그리고 그 책은, 무려 2쇄를 찍었다. 8월 3일부터 9월까지, 난 사재기를 하느라 교보를 엄청나게 들락거렸다. 그래서 그런지 교보에서 ‘서민지책’이라는 예쁜 도장을 만들어 보내줬는데, 물론 난 가을산님이 만들어주신 말도장을 주로 이용할 것이다.
-‘노빈손’ 시리즈의 ‘인체탐험’ 편의 집필을 맡았다. 그것 때문에 무척이나 바빠졌지만, 유익한 과학 스테디셀러의 필진이 된다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었다. 창작이란 건 생각보다 어려웠고, 난 10월까지 쓰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리고 연말까지란 약속도 결국 못지켰다. 이런 일에 있어서 내가 시간 약속을 어기는 건 처음 있는 일이지만, 기일에 맞춰 졸속으로 끝내는 것보다 좀 늦더라도 제대로 된 작품을 쓰는 게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 노빈손 일행은 뇌 탐험을 하는 중이며, 귀를 통해서 밖으로 나올 예정이다. 처음에는 재미있었는데 갈수록 지식 전달이 많아지면서 지루해진 감이 있다. 막판에 뭔가 재미있는 반전을 생각 중인데, 그것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
-xxx 신문에 글을 쓰게 되었다. 백여명이 보는 곳에서 글을 쓰던 내가 급작스런 신분상승을 경험한 것인데, 처음에는 심적 부담이 너무도 커서 괴로웠었는데 세 번째 글을 쓰면서부터 어느 정도 감각을 찾은 것 같다. 그 일로 인해 잃은 것은 생활의 여유지만-3주마다 한번이 그리도 빨리 돌아오는지 몰랐다-어머니와 할머니가 많이 기뻐해 주셔서 보람은 있다.
-이건 슬픈 얘기. 6월 10일, 벤지를 저 세상으로 보냈다. 동물병원 의사의 손에 넘겨진 뒤 당황해서 날 바라보던 벤지의 까만 눈이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날 이후에도 난 벤지 때문에 여러 번 눈물을 흘려야 했고, 기차역 근처 동물병원을 지날 때마다 흰색 마르치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 벤지의 부재는 나로 하여금 집에 갈 동기부여를 없애 버렸고, 그래서 난 이곳저곳을 유랑하며 술을 마셨다.
-술마신 횟수보다 더 많은 권수의 책을 읽겠다는 다짐은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얼추 비슷하게 나가던 스코어는 8월 이후부터 벌어져, 술을 마신 건 164회, 읽은 책은 137권으로 한해를 마감하게 되었다. 이 목표는 그래서 내년으로 유예되었는데, 책을 더 읽는 건 어려울 듯 싶으니 술 마시는 횟수를 120회 이하로 줄여야 할 것 같다. 그래도 술 횟수가 작년보다 14회가 줄어든 걸 보면 상황은 희망적이다.
-재임용 심사를 통과했다. 남들 다 하는 걸 뭘 자랑하느냐고 하겠지만, 34명의 대상자 중 14명인가가 심사에서 탈락을 한 걸 보면 자랑할 만도 하다. 잘릴 걱정이 없는 정교수 분들이 무지하게 부럽다(정교수 때 논문을 안쓰면 호봉만 안오른다...).
-올 한해, 내가 목표한대로 누구와도 연애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좋은 여자 분들을 무척 많이 만났고, 그분들과 같이 수다를 떨거나 술을 마신 일, 인터넷을 통해 소통을 했던 일들은 내게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김규항, 변정수, 지승호, 그리고 오한숙희님을 알게 만났다. 평소 존경하던 분들과 만나게 되어 기뻤고, 내년에는 정희진님이 1학년 강의에 와주신단다. 예과 수업을 빙자해서 내가 보고픈 분들을 모시는 거라 좀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학생들도 그 강의가 좋았다고 하고 내가 보기에도 그들에게 도움이 된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 더 크다.
-다이어트에는 처절하게 실패했다. 어느 해보다 러닝머신을 성실하게 했고, 체중계까지 사면서 각오를 다졌지만, 오늘 테니스를 칠 때 친구로부터 “너 살 더 쪘다!”는 말을 들었다. 하긴, 12월에는 술만 마시느라 거의 운동을 못했으니 그전에 빠졌던 살도 다시금 원상복귀되었을 터다. 내년에도 여전히 다이어트를 목표로 삼고 있지만, 할 수 있는 건 대충 다 해봤기에 막막하기만 하다.
12월 31일, 난 지금 집에 있다. 신정을 쇠는지라 내일 차례 준비 때문에 제수씨가 와서 열나게 일을 하고 있고, 그게 미안해서 조카 녀석과 오래도록 놀아줬다. 원래 난 오늘 약속이 있었고, 적당히 놀아주다 저녁에 횡 하고 도망가려고 했었다. 하지만 만나기로 한 미녀에게 바람을 맞는 바람에 도망가는 건 실패했고, 조카는 지금 내 옆에서 “큰아빠! 놀아줘!”라며 칭얼거리고 있다. 바람 자체도 그렇지만 날이 날이니만큼 바람 맞은 게 유독 마음이 아픈데, 그러고 보니 올해는 실연으로 시작해서 바람으로 끝이 났다. 중간 과정이 워낙 훌륭했기에 30대의 마지막 한해로는 부족함이 없지만, 마지막 날 바람을 맞으니 용을 그릴 때 여의주를 빼고 그린 것 같은 허전함이 날 엄습한다. 저번에 먹다가 집에 싸온 죽엽청주-4만원이 넘는 고가의 술이다-나 먹으면서 올 한해를 마감하련다. 앗, 그렇다면 올해 마신 술은 165회가 되는 셈인가? 한해동안 저를 사랑해 주신 모든 분들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