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에 말했던 미이라를 ‘생로병사’ 팀에서 찍고 있다.
나름의 스케줄이 있어서 그러는 거겠지만 방송사 쪽에서 우리 편의를 별로 봐주지 않는지라
어느 선생님은 “협조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뒤 진짜로 인터뷰에 응하지 않고 있고
방송사 측도 미이라에서 한시간 분량의 그림이 나오지 않는다고 투덜대고 있다.
그랬거나 말거나
거기서 기생충이 나왔으니 내 인터뷰는 들어가야 한단다.
연습을 몇 번 해봤다.
“에...또...그 아이의 사인이 속립성 결핵(결핵균이 온몸에 퍼진 것)으로 판명이 났지만, 기생충에 의해서도 상당히 고통을 당했다는 게 제 판단입니다. 회충알의 개수로 보아 아이의 몸에는 상당수의 회충과 편충이 들어 있었는데요..어쩌고 저쩌고...그 당시에는 아마도 회충에 걸리는 게 아주 일상적인 일이었다 이런 말씀이지요.”
다른 선생에게 하듯 방송사 측에서는 나와의 스케줄도 여러번 바꿨다.
“오늘 찍으러 가겠습니다.”라고 했다가
“다음주에 가지요.”
“내일은 안될까요.”
자꾸 이러니 난 그냥 오면 오나보다 이렇게 마음 편히 생각을 하려고 했다.
그래야 사람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어제도 ‘안오면 말지.’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내 일을 하는데
거의 다 왔다고 전화가 왔다.
느긋한 마음으로 샘플을 챙기는데
세상에, 편충알은 보이는데 회충알은 하나도 안보이는 거다.
샘플 가지고 왔다갔다 하면 좋을 게 없으니
메인 샘플은 모교에 두고 모교 사람에게 조금만 덜어 달라고 했는데
너무 조금 줬는지 회충알이 거의 없다.
당황해서 슬라이드 열장을 만들어 봤지만 한개의 회충알도 보지 못했다.
사실대로 말해도 그쪽에서 화를 내겠지만
난 그렇게 하지 못했다.
피디가 서울대 감염내과와 목요일날 만나기로 약속을 잡는 걸 보고 옳다구나 했다.
“저, 저희 쪽 현미경이 별로 안좋으니 목요일날 어차피 서울대 가실 거면 그냥 거기서 찍으면 안될까요?”
“그냥 왔으니 찍을께요.”
“아니 그게요, 그쪽 현미경은 모니터로 볼 수도 있고...”
“괜찮습니다. 회충알만 찍으면 됩니다.”
두어번 더 말을 했다가 실토를 했다.
“저, 사실은요... 준비한 샘플에 회충알이 별로 없어서요...”
피디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지금 생각하니 원래 흙빛이었던 것 같다.)
“그, 그게요...샘플 가지고 왔다갔다 하다가 깨진 것 같기도 하고....”
피디는 당연히 투덜댔다.
“서울에서 찍을 거면 굳이 여기까지 안내려와도 되는데...”
“죄송합니다.”
열심히 촬영장비를 설치하던 촬영팀도 맥이 빠진 표정으로 다시 장비를 해체했다.
“철수하자!”고 피디가 말할 때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방송사에서 약속을 제멋대로 바꾸건 말건
내가 샘플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건 분명 잘못이다.
그런 잘못을 저지르고 난 뒤 솔직히 말했다면 욕을 덜먹었을 거다.
오라고 해놓고서 갑자기 현미경 타령을 하면서 “다음에 찍죠.”라고 하는 내 모습은 얼마나 파렴치한가.
서울로 올라가면서 그들은 “교수란 사람들은 왜 다 그러냐.”며 신나게 내 욕을 했을 거다.
“머리도 덥수룩해가지고 다음에 찍자고 하는 것좀 봐. 세상에 믿을 놈 없다니까.”라고 침을 튀기며 말하는 피디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착하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