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전 10시 37분. 난 지금 집에 있다. 방학이라 안나간다고 생각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의대 사람들에게는 원래 방학이 없다. 방학 때도 학교 일은 계속 생기고, 논문을 가장 많이 쓰는 시기도 바로 방학 때다. 그럼에도 오늘 내가 집에 있는 이유는 여권 때문이다. 유시민의 장관임명에 여권이 반발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게, 외국에 나가기 위해 필요한 증명서로서의 여권이 나를 속 썩인다.
외국 여행에 별 뜻이 없는 나는 95년 태국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처음 여권을 만들었다. 그때 단수여권을 만든 건 돈을 절약하고자 하는 깜찍한 계략도 있었지만, 그거 말고는 외국을 나가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는 게 더 사실에 가깝다. 그로부터 10년간, 난 정말 한번도 외국에 나가지 않았다. 딱 한번, 외국에 나갈 생각을 해보긴 했다. 5년 전인가 할머니를 모시고 일본에 잠깐 갔다올 생각을 했던 것. 그때 여행사에서 5년 만기의 여권을 만들어 줬는데, 그 여행은 할머니의 사정으로 취소가 되어 버렸고, 아무것도 안하는 사이 여권의 만기가 다가왔다. 스페인에 가기 위해서는 여권의 만기연장이 필요했다.
“그거? 구청 여권과에 가서 신청하면 돼.”
난 이게 아주 간단한, 예를 들자면 화분에 물을 주는 것 정도의 노력으로 가능한 일인 줄 알았다. 9시부터 업무를 본다는 말에 “여권 신청하고 갈길을 가자.”고 생각한 게 바로 어제였다. 하지만 9시 반쯤 거길 갔더니 한 300명 가까운 인파가 북적대고 있다. 방학 때 해외여행 가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구나 싶었다. 안되겠다 싶어서 포기하고 내 갈길을 갔다.
“내일은 아예 마음을 잡고 가자. 오전 내내 기다릴 수 있도록 스케줄을 비워놓자.”
오늘 아침, 9시 즈음에 와서 줄을 섰다. 30분이 넘게 기다린 끝에 번호표를 받은 나는 세상 일이 그리 만만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내 번호표는 248번, 대기인 수는 229명이었다. 번호표라도 받은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안있어서 여권 신청이 마감되었고, “난 9시 반에 왔는데 왜 접수를 안받냐?”고 항의하는 일단의 사람들을 보고 나서였다.
수입인지를 사서 붙이는 데 또 30분의 시간이 소요되었고, 그때부터 내가 할 일은 내 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번호는 쉽사리 바뀌지 않았다. 어느 아저씨가 겸연쩍게 얘기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침 7시 반에 와서 41번 받았어요.”
그때는 10시07분, 전광판에는 29번, 30번, 31번이 찍혀 있었고 대기인 수는 282명이었다. 3시간 정도 기다리면 되려나 싶었는데, 창구 직원이 큰소리로 말한다.
“한시간에 30명 정도 한다고 생각하고 기다리세요.”
그렇다면 200여명을 기다리기 위해서는 무려 7시간이 소요된다는 얘기, 오후에 학교에서 뭐가 있는지라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쓸쓸히 여권과를 나왔고, 다음에 다시 날을 잡아서 가기로 했다. 아마도 7시 정도에는 그곳에 도착해 있어야지. 외국에 나가는 게 이렇게 어렵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