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할머니의 삶은 무서우리만큼 심심하다. 어머니가 아침을 차려준 뒤 나가시고 나면 덩그러니 큰 집에 할머니만 혼자 남는다. 사교계의 여왕이신 어머님이 저녁 6시 반쯤 오셔서 저녁을 차려 줄 때까지, 할머니는 그 긴 시간을 혼자서 버텨야 한다. 책을 보는 것도 하루 이틀이고, 내게는 할머니 구미에 맞는 책이 별로 없다. 일본판 주부생활을 사다드리면 그리도 반가워하고, 이틀을 꼬박 그 책을 보느라 심심할 새가 없지만, 아쉽게도 그 책은 월간이다. 내가라도 좀 놀아드리면 좋겠지만, 나 또한 사교계의 왕자인지라 늘 12시가 다 되어 집에 온다. 어쩌다 일찍 올 때면 할머니는 소파에 혼자 앉아 계시거나 주무시기 일쑤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냐?”라고 수없이 묻는 할머니, 하루하루가 똑같은 일상이라 그런지 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도 알지 못하신다.
어제는 서울에서 소방교육을 받느라 할머니와 아침을 같이 먹었다. 할머니가 아침을 혼자 드시는 걸 안쓰러워하시는 어머니는 내가 같이 먹는다면 “안심이 된다.”고 하신다. 이 얘기, 저 얘기를 하다가 엊그제 발생한 사건 얘기를 했다. 학교 조교가 지갑을 잃어버렸는데 범인이 마이너스 통장에서 천만원을 인출해갔다는 슬픈 이야기. 할머니가 묻는다. “뭔 돈을 그렇게 많이 갖고 다닌다냐? 천만원이나?”
‘천’을 발음하는 순간, 할머니의 입에서 나온 침이 내 얼굴에 튀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지만, 사실은 좀 거시기했다. 서둘러 밥을 먹어버렸다.
교육을 갔다 오니 일하는 아주머니와 할머니가 김장을 하고 있다. 엄마가 날 조용히 부른다.
“너 할머니랑 좀 놀아 드려라. 김장 하는데 할머니가 방해만 되는데 계속 저러고 앉아 계시네.”
할머니한테 갔다. “김치가 아주 맛있게 담가졌네. 김치에다 밥 좀 먹어라.”
“할머니, 김치 그만 담그고 저랑 놀아요.”
엄마가 거든다. “그래요, 민이랑 좀 얘기도 하고 그러세요.”
하지만 할머니는 그게 자신을 김장터에서 몰아내려는 수작이란 걸 아셨고, 결국 엄마랑 싸웠다.
“허리 아프다면서 왜 계속 그러고 있는 거예요?”(엄마)
“내가 언제 허리 아프다고 했냐?”(할머니)
이치를 따져보니 어머니가 부당한 것 같아, 한마디 했다.
“엄마, 할머니 장난감도 안사드리면서, 할머니가 김치 가지고 노는데 왜 방해를 하세요?”
평소 내 말에 오버하게 웃으시는 어머니는 십분 동안 웃으셨다.
독서를 하려고 해도 눈이 쉬이 피곤하고, 진작 배우셨으면 잘 하셨을 인터넷도 글씨가 안보여 엄두가 안난단다. 그래서 늘 ‘실버타운’ 노래를 부르고, 신문에 가끔씩 실리는 양로원 기사를 스크랩하지만, 몇군데를 알아봐도 실버타운에 입주시키기엔 우리 능력이 많이 못미친다. 오늘 아침에는 난데없이 “미정네 집에 가겠다.”고 하신다. 미정 아줌마가 할머니를 모시고 놀러간 적이 몇 번 있는 건 맞지만, 그 아줌마는 사실 어머니 친구, 그래서 어머니는 이러신다.
“아니 엄마가 왜 미정이네 집에 가요?”
“왜, 오래 안봐서 보고 싶구만 누가 너한테 가자고 하냐?”
늘 자신을 ‘방치’하는 어머니가 할머니는 서운하신가보다. 그래서이리라. 아침에 내가 출근할 때마다 “오늘은 술 먹지 말고 일찍 오너라,”고 말씀하시는 건. 하지만 거대 조직을 이끌고 있고 그걸 관리하느라 여념이 없는 나란 놈은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매일같이 술을 마셔야 한다.
“어서 죽어야 하는데 안죽고 살아있다.”는 말이 입에 밴 할머니의 연세는 올해 아흔이다. 안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나이가 들고 돈은 별로 없으신 분의 노년은 이렇듯 힘든가보다. 엄마는 “나도 나이들면 저렇게 될까?”라고 걱정을 비치시는데, 지금은 사교계의 왕자로 군림하고 있는 나도 친구들이 하나둘 내 곁을 떠난다면 로빈손 크루소처럼 혼자 사는 수밖에 더 있겠는가. 그때 심심하지 않으려고 이런저런 취미를 만들려 하지만, 힘이 없어 테니스 라켓을 휘두르지 못하고, 눈이 침침해져 책마저 읽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하나. 오래 사는 것은 꼭 좋은 게 아니며, 난 그냥, 육십오세까지만 살았으면 좋겠다. 지금처럼 술을 계속 마신다면 그것도 힘들지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