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난 여관방에서 메이져대회인 맥도널드 LPGA 챔피언십 마지막 라운드를 보고 있었다. 그냥 본 것만은 아니다. 한국 선수가 나오면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했고, 경쟁자들이 퍼팅을 할 땐 손가락 두 개를 모아 저주의 빔을 쐈다. 캐리 웹이 막판 짧은 버디퍼팅을 연달아 놓친 건 저주의 빔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으리라.




내 방해로 인해 8언더파에 그친 캐리 웹은 경기가 끝난 후 TV를 보면서 두꺼운 빵을 먹었다. 선두인 박세리와는 1타 차이, 박세리가 마지막 홀에서 실수를 한다면 캐리 웹은 연장전에 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혹시나’ 하는 불길한 예감은 그대로 맞아 떨어져, 18번 홀에서 박세리가 친 공은 홀컵을 한참 지나친 뒤에야 멈췄다. 그 이후 TV에서는 수시로 캐리 웹을 보여줬는데, 그녀는 눈을 TV에 고정시킨 채 계속 빵을 먹었다. 모르긴 해도 웹은 그 빵을 다 먹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을 거다. 그녀가 빵을 먹는 동안 박세리는 4번째 공을 홀컵에 넣지 못했다. 연장전. 

98년 우승당시 모습.


타이거 우즈처럼 연장전에서 거의 지지 않는 박세리는 길게 끌 것도 없이 연장 첫 번째 홀에서 끝을 냈다. 두 번째 샷이 기가 막히게 홀컵 가까이 붙은 것. 골프를 전혀 못치는 나도 넣을 수 있을 만큼 짧은 거리였다. 반면 캐리 웹의 두 번째 샷은 홀컵에서 멀리 떨어진, 결코 버디 잡기가 쉽지 않은 위치에 떨어졌다. 웹의 버디 퍼팅은 빗나갔고, 박세리는 아주 쉽게 공을 홀컵에 떨어뜨렸다.


1999년 어느 월요일 새벽, 그때 난 브리티쉬 오픈 마지막 라운드를 보고 있었다. 17번 홀까지의 경기가 끝났을 때, 난 출근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 1등을 달리던 프랑스의 반 드 벨드(이하 벨드)가 2위와 세타 차이였기에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우승자가 가려졌다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벨드가 친 첫 번째 공은 어이없게도 관중석으로 날아갔다. 난 다시금 TV 앞에 앉았다. 벨드가 두 번째로 친 공이 냇물에 빠지자 2등으로 경기를 마친 스코틀랜드의 폴 로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퍼팅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벨드는 그 다음 샷마저 실수를 하는 등 프로 선수로서는 좀처럼 하기 힘든 트리플 보기를 범하고 만다. 저스틴 레너드, 벨드, 그리고 폴 로리가 벌인 연장전의 승자는 당시만 해도 무명이었던 폴 로리였다.

폴 로리의 모습


캐리 웹의 패배가 오로지 빵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건 물론 아니다. 박세리의 두 번째 샷은 정말 훌륭했고, 연장전이란 긴박한 상황에서 그런 공을 칠 수 있다는 건 우승 자격이 충분하단 얘기다. 하지만 뭔가를 잔뜩 먹고 러닝머신을 하면 속이 영 거북해 달리기 힘든 것처럼, 두꺼운 빵을 먹고 멋진 샷을 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빵만 안 먹었던들 박세리의 것보다는 못할지라도 버디를 잡을 위치로 공을 보낼 수 있지 않았을까. 골프에서 한 타는 언제라도 극복될 수 있는 차이다. 18번 홀의 난이도로 보아 박세리가 보기를 범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으니, 캐리 웹은 그 빵을 먹는 대신 연장전을 상상하며 TV를 보는 게 옳았다. 캐리 웹은, 빵을 너무 일찍 먹었다.

이 정도까진 아니지만 꽤 큰 빵이었다.


* 어찌되었건 박세리가 간만에 부활한 건 정말 기분 좋은 소식이다.

** 박세리가 18번 홀에서 보기를 범하자 허탈한 나머지 자리에 누워 버렸는데, 내가 기도를 안 해줬다고 안시현이 공을 물에 빠뜨린다. 우리 선수들은 너무 나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크다.

***캐리 웹은 박세리와 세 번 연장전을 벌여 모두 졌다. 그 전에도 웹이 빵을 먹었는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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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6-06-12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오늘 점심은 특제 샌드위치를 먹어야할까요?

하이드 2006-06-12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간만에 정말 웃기는 페이퍼였습니다. 짝짝짝

건우와 연우 2006-06-12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선수들은 나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크다 ㅎㅎㅎ

Mephistopheles 2006-06-12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백합니다. 캐리 웹이 저 빵에 곁들여 마신 사이다에 미원 타라고 시킨게 접니다..

해적오리 2006-06-12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의 멋진 페이퍼에 메피스토님께서 맛난 양념까지 쳐주셨네요. ㅋㅋㅋ
마태님 축구 경기 보면서도 같은 포스를 유지해주시길 바래요.

프레이야 2006-06-12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구에서도 마태님의 주술이 수리수리~

물만두 2006-06-12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님의 지원덕에 이겼으니 뭐라도 있을까요^^

하루(春) 2006-06-12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빵을 너무 일찍 먹었다. ㅋㅋㅋ~ 맛있어 보여요. 호밀빵 같군요.

sooninara 2006-06-12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마태님 앞으로도 열심히 빔을 쏘아주세요.

Mephistopheles 2006-06-12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레이저를 쏘셨을 꺼라 생각됩니다만....??

호랑녀 2006-06-12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안시현 선수에게 사과하셔야겠네요.
한국선수가 박세리만 있는 게 아닌데, 어찌 자리에 누우셨단 말씀입니까? =3=3=3

모1 2006-06-12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나 큰 빵이길래...궁금하기까지...후후...요즘 한국 여자 골프선수들..정말 잘 나가는군요. 얼마전에 신문에서인가 지금까지 lpga모든 투어에서 1등과 2등을 쓸고 있다고 났던 것 같은데..

마태우스 2006-06-12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1님/매우 큰 빵이지요^^ 지금 한국 여자골프는 한두명이 잘하는 게 아니라, 정상권에 십여명의 선수가 포진해 있어서 그 상승세가 지속되리라 생각됩니다^^'
호랑녀님/그러게 말입니다. 변명하자면 저도 인간이고, 에네르기를 너무 쓰다가 지쳐서요....
메피님/어머 제가 원하는 바로 그 사진!! 님의 센스에 추천하는 바입니다.
수니님/열심히 하겠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하루님/캐리 웹도 맛있게 먹더군요^^
물만두님/만달러만 주면 좋겠는데, 몰라줘도 화내지 않아야 군자겠지요^^
배혜경님/축구는요 빔 쏘기가 좀 그래요. 공격권이 수시로 바뀌고, 90분 내내 쭈그리고 앉아 빔을 쏘는 게 어렵거든요... 그래도 해볼꼐요
해적님/음, 축구에서 빔을 쏘려면 술이 좀 필요한데... 술 사주실 건가요?^^
메피님/아니되어요 그런 식으로 제 공을 가로채려 하다니요^^
새벽별님/어마 전 그렇게 위대한 사람은 아니어요. 배고프게 할 능력은 없답니다^^
건우와 연우님/제가요 박세리 신화를 만든 사람이랍니다^^
하이드님/님의 칭찬을 받으니 기쁘기 그지없네요^^
조선인님/일하기 전에 빵먹지 말라는 게 제 메시지였는데요^^
 

* 퍼왔다기보단 제가 쓴 글입니다만... 후배들이 써클지에 실을 글을 써달라고 해서, 낑낑대며 썼답니다. 근데 읽어본 이가 잘썼다고 칭찬을 해서... 여기다 올릴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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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투수 잔혹사

얼마 전 끝난 청룡기 고교야구 결승전에서 진흥고 투수 정영일은 연장 16회까지 무려 222개의 공을 던졌다. 메이저리그로 불리는 미국 프로야구에서 선발투수가 100개 이상의 공을 던지는 게 여간해선 드물다는 것에 비추어 보면 혹사도 이런 혹사가 없다. 하지만 투수 한명에 의존하는 고교야구에서 정영일의 경우는 그리 드문 게 아니다. 안산공고의 김광현도 16강전에서 연장 15회를 홀로 책임지며 226개를 던진 바 있고, 진흥고의 맞상대였던 경남고 이상화는 13회 동안 162개를 던졌다. 문제는 이들이 매일같이 이렇게 던진다는 것. 메이저리그 투수들이 한번 던지면 4일을 쉬는 것과 비교하면, 이들의 팔이 남아나는 게 신기할 정도다. 진흥고 감독은 지나친 혹사가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혹사 맞다. 하지만 이제부터 쉴 것(당연하지. 대회가 끝났는데)”

고교야구 투수들의 잔혹사가 거듭되자 일각에서는 대회 숫자를 줄이거나 투구수를 제한하자는 주장을 내놓고 있지만,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다. 전국대회 4강에 들면 그 고교 선수들이 모두 대학에 진학할 수 있으니 잘하는 선수 한명에 편승해서라도 좋은 성적을 거두고 싶지 않겠는가?(참고로 전국대회 숫자는 과거보다 더 늘어나, 현재 9개의 대회가 열린다).

바톨로 콜론입니다. 진짜 마당쇠처럼 생겼죠?


당연한 일이지만 혹사 앞에는 장사가 없다. 고교 때 혹사를 당한 선수들 중 대학에 가서, 혹은 프로에 진출해서 자기 기량을 펼쳐 보이지도 못한 채 야구인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한둘이 아니다. 10억원을 받고 입단한 한기주가 평범한 투수로 전락한 이유를 고교 시절의 혹사에서 찾는 사람이 많다. 효천고 시절 초고교급 투수였던 김수화는 어깨부상으로 롯데 입단 후 제대로 공을 던진 적이 없다. 요즘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한화 류현진은 동산고 2학년 시절 팔꿈치 부상으로 오랜 기간 공을 던지지 않은 것이 어깨를 싱싱하게 보존할 수 있던 비결이라고 한다. 어떤 이는 이런다. 사람에 따라서 다른 거라고. 공을 많이 던져도 괜찮은 투수가 있고, 그렇지 않은 선수가 있다고. 실제로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는 바톨로 콜론(에인절스)과 리반 에르난데스(워싱턴 내셔날스)를 보면 그 주장이 타당한 듯하다. ‘마당쇠’라 불렸던 이 둘은 지난 6년간 해마다 200이닝 이상을 던졌고, 경기당 투구수도 늘 120개를 넘었다. 하지만 올 시즌, 이 둘은 나란히 부상 때문에 발목을 잡혀 경기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예는 또 있다. 2003년 캐리 우드와 마크 프라이어라는 걸출한 두 투수를 보유했던 커브스 베이커 감독은 등판 때마다 이 두명에게 120개 이상을 던지게 했다. 혹사가 아니냐는 질문에 베이커는 이렇게 말했다.

“얘네들은 보통 투수와 다르다.”

그 해 커브스가 최고의 성적을 올리긴 했지만, 그 둘은 이듬해 드러누워 버렸고, 지금도 여전히 부상에서 신음해 팬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그러니 이렇게 정리하면 될 것 같다.

‘공을 많이 던지면 틀림없이 팔이 망가진다. 다만 그게 좀 늦게 오는 선수가 있을 뿐’

 

케리 우드입니다. 얼마전 두경기 던지고 또 부상자 명단에 올랐죠...


2. 알코올 잔혹사

그런 혹사는 야구에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우리나라 남자들도 일상적인 혹사에 노출되어 있는데, 그건 바로 알코올이다. 우리나라의 1인당 소주 소비량은 60병을 넘는다. 전국민이 1주에 소주 1병씩을 매주 마셨단 얘기다. 2003년 통계를 본다면 소주가 61병, 맥주 74병에 양주가 1.2병, 술 소비량으로 따지면 슬로베니아에 이은 세계 2위다. 백화점에서 VIP 고객에게 정성을 다하는 이유는 ‘20%의 고객이 매출의 80%를 담당한다.’는 2: 8의 원칙 때문인데, 그 비율은 알코올에서도 비슷하게 적용되어 열심히 마시는 20%가 술의 80%를 마시고 있다. 술에 지나치게 관대한 풍토여서 그렇지, 술을 마시는 사람 중 상당수는 알코올 중독 진단을 내려도 무방할 듯하다.


지나치게 많은 공을 던지는 게 투수의 팔이 망가지는 첩경이듯, 술 앞에 장사는 없다. 아는 은사님 중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이 계시다. 평소 올곧은 성격으로 바른 말을 잘하는 그분은 알코올 앞에서도 전혀 굽히는 법이 없으셨는데, 그리 술이 약한 편이 아닌 내가 술을 먹다가 죽음의 공포를 느껴 도망간 적이 있을 정도다. 아무리 마셔도 자세가 흐트러지는 법이 없고, 아침에 해장술로 소주 서너 병을 드시는 일도 허다하니, 소위 말하는 ‘주선(酒仙)’이라 할만하다. 내가 꼭 극복해야 할 분으로 생각했던 그 선생님은 하지만 50을 넘기면서 부쩍 건강이 나빠지셨다. “몸이 옛날 같지 않다.”면서도 대여섯 병의 소주를 반주로 드셨던 그분이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은 충격이었다. 환자복 때문일까. 술집에서 술병과 싸우던 모습과는 달리 병실에서 뵌 선생님은 무척이나 왜소해 보였다.

“등산모임이 있는데, 산에 한번 가면 말이야, 소주 몇 박스를 들고 간다고. 열 명이서 50병을 다 먹고 내려온다니까.”

병실에서도 선생님은 그 시절을 생각하고 있었다. 안타까운 얼굴로 무용담을 듣는 내게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퇴원하고 나서 소주나 한잔 하자.”

지난 봄 학회에 선생님은 오지 못하셨다. 그 전 학회 때도 그랬지만, 올 봄에도 선생님은 입원 중이셨다.




사정이 이럴진대 우리는 너무들 술을 많이 마신다. 마시는 술의 양이 남성성의 정도로 간주되니, 술을 많이 마신 건 부끄러움이 아닌 자랑이 되어 버린다. 내가 공보의 시절 만났던 친구는 늘 자신의 무용담을 자랑했다.

“어제 말이야, 1차에서 소주 두병을 마셨어. 그리고 2차를 맥주 집으로 갔는데, 거기서도 한 다섯병 마셨지 아마. 그리고 또 3차를 갔는데...”

공중보건의 시절의 아침은 늘 서로의 무용담을 비교하는 자리였다. 한명의 무용담이 끝나면 다른 친구가 그에 질세라 자신의 경험을 얘기하곤 했다. 무용담이 다 그렇듯 소주 세병이 다섯 병으로, 새벽 2시에 집에 간 게 3시로 과장되는 경우가 흔했다. 그건 마치 진흥고 투수 정영일이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나 어제 공 220개 던졌다. 그저께도 180개 쯤 던졌지. 오늘은 한 200개 던져볼까?”

그 말을 바꿔 말하면 이렇다.

“나, 건강한 삶의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중이야.”

정영일의 경우야 감독이 시키니까, 팀이 이겨야 하니까 그런다고 치자. 우리는 왜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수명 단축을 향해 달려가는가. 내가 사는 홍대 앞에서 취한 얼굴로 비틀거리는 수많은 젊은이들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술 말고는 다른 놀이가 없는 척박한 문화에도 원인이 있지만, 술을 친목의 수단이 아닌, 그 자체가 목적인 것처럼 여기는 풍토가 더 문제다.


3. 나의 잔혹사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건 나 역시 누구 못지않게 많은 술을 마신 전력이 있어서다. 내가 술을 마신 건 다른 이유가 없다. 고교 때 술을 못 먹게 했기 때문이다. 입시준비의 중압감에 시달려야 했던 내게 대학은 술을 먹으면서 망가져야 하는 곳이었다. 술을 마시면서 고뇌하는 척 하는 거야말로 대학생다운 것이라고 착각을 한 나는, 내가 마치 우주의 존재론적 고민을 혼자 짊어진 양 술을 마셨다. 사실은 술을 마시고 난 뒤 기분이 고양되는 걸 즐겼으면서.


하지만 용돈이 늘 부족하고, 그래도 공부의 스트레스를 받던 그때는 양반에 속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월급이라는 걸 받게 되자 난 점점 술을 많이 마시게 되었다. 핑계야 있었다.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를 우리 집에서 반대했으니까. 하지만 그건 분명 핑계였다. 술을 마심으로써 해결되는 건 하나도 없었지만, 난 그걸 빌미로 5년간이나 술을 마셨다. 스티븐 킹은 이런 말을 했다. 소설가들 중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이 많은데, 그건 술이 작품 구상에 도움이 돼서가 아니라, 그들이 사실은 알코올 중독자이기 때문이라고. 나 역시 그랬다. 괜히 술이 먹고 싶으니까 나를 둘러싼 여러 가지 어려움을 이유로 든 거였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술을 마실 이유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관성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관성은 어느 정도 지나면 없어지니 자전거에 비유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한번 달리면 계속 페달을 밟아야 넘어지지 않는 자전거 말이다. 몇 년간 술을 마시는 동안 내 주위에는 순전히 술친구만 남게 되었고, 난 그들과 돌아가면서 술을 마셔야 했다.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들지 않고 술값도 곧잘 내니, 난 그래도 술친구로는 제법 괜찮은 인간이었다(서른 전까지는 지나치게 많이 마셔 쓰러지는 일이 허다했지만, 그 이후엔 조금은 자제를 해 내 발로 집에 간다). 알코올 조직은 갈수록 커져만 갔고, 매주 다섯 번을 마셔야 조직 관리가 될 지경이었다. 학생 시절 술을 자주 마시던 친구가 술을 마실 때마다 달력에 별표를 하는 걸 비웃던 난 술자리 횟수가 많아짐에 따라 술 마신 걸 체크하는 달력을 따로 마련해야 했다. 기록을 하는 이유가 경각심을 갖고 술을 좀 줄여보자는 의도였던 것과는 별개로, 나날이 늘어만 가는 숫자는 나로 하여금 뿌듯함과 더불어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켰다. 1997년의 기록은 그래서 수립됐다. 12월 26일, 그해를 닷새 앞두고 난 298번의 술을 마셨다. 보통 사람 같으면 두 번 정도 더 마시고 300번을 채우는 걸로 만족하겠지만, 딱 삼백 번을 채우는 게 비겁하게 느껴진 난 밀린 친구들을 불러서 남은 닷새를 술로 지새웠다. 오래 갈 줄 알았던 303회의 대기록은 이듬해 깨졌다. 1월 1일부터 오르기 시작한 술 카운트는 그 해 마지막 날 305번째 술을 마실 때까지 쉼이 없었다. 당시 난 늘 초췌한 모습을 하고 있었고, 가끔씩 헛구역질을 했으며, 무의식적으로 소주잔을 기울이는 동작을 취하는 ‘알코올 손목 증후군’에 시달리기도 했다. 술을 같이 마신 사람이 다르고 모인 이유가 다 달랐지만, 내가 술을 마신 이유는 딱 한가지였다. 내가 알코올 중독이었다는 것. 내게 금단증상이 없었던 것은 그런 걸 느낄 여지를 주지 않았던 탓이고, 술이 내 사회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았던 것은 비교적 널널한 공중보건의 생활을 할 때였기 때문이다.


4. 맺는 말

99년, 직업을 갖게 된 이후 술 마시는 빈도는 크게 줄었다. ‘크게’라고 해봤자 180번 내외니, 거의 이틀에 한번 꼴이다. 나름대로 느끼는 바가 있어 조직을 대폭 축소해 나가고 있지만, 조직이란 게 무한 확장의 속성을 갖고 있어서 그리 쉽지만은 않다.


생각해보면 내가 그렇게 술을 마시는 동안 별다른 탈 없이 살아올 수 있었던 건 행운인 것 같다. 내시경을 한 번도 안 해 봐서 내 상태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후배한테 간 초음파 검사를 받아본 결과 중등도의 지방간 진단을 받았으니 다른 곳이라고 크게 성할 것 같지는 않다. 거듭 말하지만 일주일간 매일 공 150개씩을 던졌는데 팔에 탈이 없다면 그건 운이 좋은 탓이지, 팔이 고무로 된 거라서 그런 건 결코 아니다. 그리고 매번 운이 좋을 수만은 없는 법, ‘마당쇠’로 불렸던 바톨로 콜론이 그랬던 것처럼 무리를 거듭하면 결국엔 탈이 날 수밖에 없다.


우리 주위에는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신화적으로 술을 마시는 분들이 있어왔다.

“소주 댓병 있잖아? 그걸 끼니때마다 반병씩 마시면서도 아흔 셋까지 사셨다고.”

술이 건강을 해친다는 설에 방패막이가 되어 주는 그분들은, 사실은 엄청난 폭음 속에서 운 좋게 견뎌 낸 몇 안 되는 분들이다. 그분들보다 훨씬 더 많은 분들이 술과 관련된 각종 질병으로 세상을 떴을 것이다. 인간의 수명이 지금보다 길었다면 그분들이 계속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로저 클레맨스입니다.


1962년생인 클레멘스는 우리나이로 마흔네 살이던 지난해 13승에 방어율 1.87을 기록했다. 타선지원만 있었다면 20승도 가능했을 성적인데, 그는 그 나이에도 150킬로가 넘는 강속구를 던졌다. 통산 341승을 올렸고 올해도 2천만 달러 가까운 연봉을 받은 그가 우리나라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면, 혹은 마크 프라이어를 망친 베이커 감독 밑에서 선수생활을 했다면 진작에 은퇴했지 않았을까. 과연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 클레멘스가 되고 싶은가, 아니면 마크 프라이어가 되겠는가. 한마디 더. 술을 잘 못 마시는 동료나 후배에게 술을 강요하는 분들이여, 망가지려면 혼자 망가져라. 베이커 감독은 시카고에 있는 한명만으로도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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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6-10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짝짝짝.^^ 근데, "내일은 정말 오랜만에 한번 주량껏 마셔보자."라는 (다른 글에서의) 다짐은 어느 분이 쓰신 건가요?..

마태우스 2006-06-10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 로쟈님... 그, 그게요... 후배들에게 쓰는 글과 제 개인적인 다짐은 많이 다르답니다...ㅠㅠ

새우범생 2006-06-10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최 이 땅에는 얼마나 많은 주당, 주선, 주신들이 있단 말입니까. 마태우스님의 잔혹사만 봐도 절로 기겁하게 되는데 아래 글에서는 스스로 에이스가 아니라는 겸양을 하시니 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논어에서 공자는 술을 마시는 데 한도를 정하지는 않았지만 술에 취해 어지러워지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다(有酒無量 不及亂)고 한 것을 음주의 이상향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주무량과 불급난 중에 하나는 어떻게 해보겠는데 좀처럼 이 둘을 결합시키기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더라고요.^^;

저는 술을 그리 잘 마시는 편은 아니지만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던 거 같습니다. 가끔 왜 내 둘레에는 술을 많이 못 마시는 건 좋은데 열심히 마셔보려는 정성(?)까지 별로 없을까라는 한탄(?)을 해봅니다. 혹시 나란 녀석이 별로 재미가 없으니 무리를 해서 술잔을 비울 유인이 없는 것인가 스스로 자책도 해봅니다. 음주 강요는 딱 질색이지만 너무 술을 안 마시려고 하는 후배들에게 내심 섭섭함을 느끼기도 하고요. 이번에도 나란 녀석이 별로 신통치 못한 선배다 보니 술을 마시는 시늉이라도 할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 것인가 또 자책에 들어갑니다. 저는 강권 대신 자책을 하는 이상한 술버릇이 있어요.^^;

마태우스님의 술일기를 천천히 탐독하며 저도 좀 더 기품 있고 유쾌한 음주가가 될 수 있도록 궁리해봐야겠어요. 마태우스님의 페이퍼를 보면서 참 많은 영감과 교훈을 얻어 갔음을 덧붙여 밝힙니다.^-^ - [小鮮]

2006-06-11 0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시장미 2006-06-11 0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재미있는 글인줄 알고 웃으면서 읽었는데, 다 읽고 나니 웃음이 안 나오네.훌쩍

형! 예전에 도망치던 형에게 매몰차게 굴었던 것 사과해요. 앞으로 언제 어디서든 술자리에서는 그런 태도를 가져주시길 바래요! _-_)~

마태우스 2006-06-12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미/그럴 수도 있지 뭐. 나중에 즐겁게 마셔 봐요.
속삭이신 분/댓글에 허접하고 말고가 어디 있어요. 그런 부담 가지지 마시고 손 가는대로 글 남겨 주세요. 아버님도 이제는 별같은 약한 술을 드시도록 권해 보는 게 어떨까요^^
새우범생님/님 주위에 많이 마시는 사람이 없다고 넘 개탄하지 마시어요. 주위의 태도와 무관하게 마시는 게 술꾼이랍니다. 즉 술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 어쨌든 최선을 다하신다니 보기 좋습니다. 조금만 더 열심히 하다보면 어느새 술꾼들에게 둘러싸인 자신을 발견하게 되리라 확신합니다.

상복의랑데뷰 2006-06-15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절대 주량이 ^^ 소주 한병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전출처 : mannerist > kleinsusun님, 조선인님, 딸기님, 마태우스님 도로안내표지판

요즘 미친듯이 일하는 매너놈, 결국엔 놀아도 이따위로 논다나 뭐라나-_-;

재미삼아 만들어봤으니 너그러이 보아주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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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1 2006-06-10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표지판이 가장 복잡하군요. 후후.

비로그인 2006-06-10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유행하는 뇌구조보다 재밋는걸요? ㅎㅎ
 

 

 

 

 

일시: 6월 8일(목)

마신 양: 주량의 50%


어제, 내가 가끔씩 글을 기고하는 곳에서 모임이 있었다. 사진으로만 보던 분들을 직접 보는 건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초면이고, 다들 내공이 높은 분들이라 혼자 마시고 취하면 민망할 것 같았다. 그래서 1차에서 소주를, 2차에서 생맥주를 정말 기본만 하고 집으로 오는데, 갑자기 학장님이 전에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이제부터 학장님이 해준 이야기다.


중국에 우리 학교와 자매결연을 맺은 대학이 있는데, 거기서 학장님을 초청했다. 일정을 마치고 저녁 연회 자리에 갔더니 좌석마다 잔이 아홉잔씩 놓여 있고, 거기다 독한 술 세종류를 세잔씩 따라 주더란다. 이게 뭔가 싶어 초청자를 봤더니 그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일단 이걸로 목을 좀 축이고 나서 본격적인 술자리를 가져 봅시다.”

40도가 넘는 독한 술 아홉잔을 마시면 그걸로도 어지러울 텐데, 목을 축이다니 정말 대단하지 않는가. 학장님은 다행히 술을 못드시는 편이 아니라 아홉잔을 다 마셨고, 그 이후에도 주는 술을 다 받아마셨다. 다음날 아침, 무슨 일이 있었는지 통 기억이 나지 않지만, 거울을 보니 얼굴에 긁힌 자국이 있더란다. 중국 사람들을 만나니 “술이 좀 약하시네요.”라면서, 더 이상 술을 권하지 않았다고 했다.


귀국한 뒤 오기가 발동한 학장님, 우리 학교의 에이스를 중국으로 보냈다. 적당한 키에 적당한 체격을 가진 우리 에이스는 기대대로 학장님을 보내버린 중국 사람들을 박살내고 왔단다. 에이스가 귀국한 뒤 다시 중국으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정말 좋은 분을 보내줘서 배운 게 많다.’며 ‘정성껏 연회를 준비해 놓을 테니 그분을 다시 한번 보내달라.’고 했다는 거다. 에이스는 가겠다고 했지만, 학장님은 가면 큰일난다고 결사반대, 그 대결은 성사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얘기가 생각난 것은 요즘 너무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자각 때문이다. 그전의 나는 술을 마시면 언제나 주량껏 마셨고,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 도망을 나오거나 엎어져 자버리곤 했다. 그런 모습이 좋은 건 아니지만, 주량의 절반만 겨우 채우고 나오는 요즘 상황은 영 부끄럽다. 그렇게 마시고 어찌 술을 한번 마셨다고 카운트를 할 수가 있을까. 중국이 무섭게 성장하고, 미국마저 중국 견제에 여념이 없는 이유의 절반쯤은 그 주량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독한 술 아홉잔으로 목을 축이고, 한번 패하고 나서 다시 한 번 붙자고 말하는 그 패기가 바로 중국의 저력이 아닐까.


난 에이스가 아니며, 노력한다 한들 그렇게 될 수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주 한병에 맥주 두잔을 마시고 집에 오는 일이 잦아서야 어찌 제대로 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주량이 적다면 적은대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야말로 인간이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일 것이다. 목만 축이고 온 오늘을 반성하면서 이렇게 다짐해 본다.

“내일은 정말 오랜만에 한번 주량껏 마셔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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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10 0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6-06-10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에이스가 아니며~~ 유재석의 무모한도전에서 매번 ' 이 분은 에이스가 아니죠 ~ ' 했던게 기억나네요. 흠.. 재밌었죠.

paviana 2006-06-10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을 잡아보아요...ㅋㅋ

Mephistopheles 2006-06-10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중국사람들은 무협지처럼 입으로 마시고 손가락 끝으로 그 술 빼버리는
건 아닐까요..^^

oldhand 2006-06-10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월드컵에 출전하는 대표선수들 만큼의 비장미와 각오가 느껴집니다. 으흐흐.

마태우스 2006-06-10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드핸드님/오늘까지만 이렇듯 비장하게 마시고요, 낼부턴 안마시려구요...
메피님/그들은 한번 몸에 들어온 건 절대 밖으로 안내보낸다는데....^^
파비님/캐치 더 데이! 홧팅.
캐서린님/아 그랬나요? 하여튼 전 에이스가 되고 시퍼요....
속삭이신 분/맞습니다. 그게 젤 좋죠. 근데 요즘 우리 술자리에 헝그리정신을 찾아볼 수가 없어서 말이죠..^^

모1 2006-06-10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일전에 축구이야기 나오면서 마태우스가 나왔는데 아..저 머리 하얀 사람 누구더라?했더라는..그러다 오늘 개막식 잠깐 보여주는데...그 사람이 마태우스더군요. 후후...

누미 2006-06-23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갑자기 술이 땡기네요
 

이 사진은 본문 내용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마음잡고 일할 때 타는 게 바로 8시 퇴근버스, 그 전에 떠나는 버스와 달리 차가 안밀려 오히려 시간을 버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 버스의 맹점은 해가 진 뒤라 책을 볼 수 없다는 것. 물론 실내등이라는 게 있지만, 아저씨가 여간해선 실내등을 켜주지 않는다. 그래도 출퇴근 시간에 책을 읽는 게 낙인 나는 할 수 없이 휴대폰 불빛에 의존해서 책을 읽곤 했다. 휴대폰 빛이라봤자 얼마나 밝겠는가. 그나마 30초마다 불빛이 꺼지니 수시로 버튼을 눌러줘야 하는데, 아무 버튼이나 누른다고 했는데도 난데없이 통화가 되어 난감한 적도 있다.


그런 아쉬움을 안고 살다보니 지하철에서 조그만 전등을 판다는 외로운 벤처사업가의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전등은 크기에 비해 겁나게 밝아 보였고, 책 읽기에 딱이었다. 2천원인가를 주고 구입을 했다. 그리고 오늘이 전등을 산 뒤 처음으로 8시 버스를 타는 날이었다. 결과는 아름다웠다. 난 오늘 쓰고 간 메이져리그 모자의 챙에 전등을 끼웠고, 불이 꺼진 깜깜한 버스 안에서 유유히 책을 읽었다. 금방 고장나면 어쩌나는 걱정은, 아직은 기우였다. 전에 나처럼 버스에서 책을 읽는 취미를 가진 선생과 실내등에 대한 불평을 공유한 적이 있었다. 이제 실내등에 대한 불만은 오로지 그 선생만의 것, 같이 양재역에 내린 뒤 그런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나왔다.


전등의 성공에서 보듯, 지하철에서 파는 것도 잘만 선택한다면 쏠쏠한 유익함을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작년에 샀던 천원짜리 장갑만 해도 내가 겨울을 따뜻하게 나는 데 얼마나 힘이 되었는가. 재작년 것이 투박한 검정 장갑이었다면, 작년엔 하얀 물방울 무늬를 입히는 등 미적인 부분까지 신경을 썼다. 좌우 구분이 없으니 세짝 정도 사놓고 쓰면 하나두개 잃어버려도 아무 상관이 없다. 그리고 선풍기 커버, 이것도 몇 개 사놓으니 여름이 물러갈 때마다 아주 유용하다. 엊그제는 돗자리를 3천원인가에 팔던데, 고수부지에 갈 때 쓰면 아주 좋을 것 같다. 차 트렁크에 2개가 들어 있기에 망정이지, 안그랬다면 두 개 정도 샀을 거다.


물론 실패한 경우도 있다. 거기서 산 컬러볼펜과 형광펜은 쓰지 않아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닳아 버렸고, 20개에 천원을 받은 면도기는 수염과 더불어 내 살까지 베는 예리함을 보여 버려지고 말았다. 우산은 금방 고장났고, 칫솔은 알고보니 구두솔이었다. 만득이 인형은 사자마자 얼마 안가서 터졌으며, 돌려서 색깔을 맞추는 큐빅은 돌리는 게 워낙 뻑뻑해 놀이기구로서의 기능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여전히 지하철 외판원들에게 희망을 갖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싸니까 사야지,라는 자세로 접근해서는 안되며 내게 필요한지 아닌지 여부를 따져야 한다는 거다. 근데, 필요하다고 해서 샀는데 불량품이면? 이것 보시오. 필요하면 돈을 더 주고라도 제대로 된 걸 사야지 왜 지하철에서 산단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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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6-07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그 전등 있어요. 전 작년에 샀는데 공연할 때 드럼악보 걸치는 보면대에 끼우려고 구입했죠. 불 다 꺼지면 악보가 안보이거든요. ^^ 오늘 근데 그거 천원에 팔던데요 어떤 아저씨. -_-

바람돌이 2006-06-08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자에 전등을 끼운 마태님 너무 어울릴 것 같아요. ^^
아 글고보니 저도 예전에 지하철에서 샀던 것 중 가장 인상적인것이 있어요. 그날은 저에겐 너무너무 중요한 시험날이었어요. 아침 일찍 시험장에 가기 위해서 지하철을 탔는데 글세 본드를 팔지 뭐예요. 딱 붙으라고....필요는 별로 없었지만 기분좋아서 그 본드 사고 시험은 붙었답니다. ^^

히피드림~ 2006-06-08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인터넷이나 홈쇼핑에서 싼 물건 봤을때 그냥 '충동적'으로 막 사고 싶을때가 종종 있거든요. 그럴때마다 저 물건이 정말로 내게 필요한지, 그리고 사고나면 얼마나 자주 쓸 수 있는지를 냉정하게(?) 생각하거든요. 그러면 의외로 정말로 필요한 물건은 많지 않더군요. 마태우스님 말씀에 동감해요.^^

세실 2006-06-08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하 마태님 같은 분때문에 아직도 외로운 벤처사업가가 많은가 봐요~
오늘 지하철을 타려고 기다리는데 슬그머니 옆에 오더니 "사모님 00 하나 사세요" 하더라구요. 그 00가 안들려 굉장히 궁금했지만 물어볼수 없어서 그냥 지나쳤어요. 2천원이라고 하던데 살껄 그랬나? 뭔줄 알아야 사지.....

가시장미 2006-06-08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칫솔은 알고보니 구두솔이었다.-> 정말정말? 으흐흐흐 나도 지하철에서 오이자르는 기계 사서 오이맛사지 할 때마다 사용했는데 얇게 잘 잘려서 되게 좋았어요! ㅋㅋ 근데 모자에 전등끼우고 책을 본다? 정말정말 특이한 사람으로 보이겠다.. 주위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을 느끼지 않았는지 궁금하네! 광부의 후예인줄 알았을꺼야. ㅋㅋ 참! 우리 반말하기로 했었는데.. 그거 아직도 유효한거지? 캬~ [ 버르장머리 없는 장미_-_)~ ]

비로그인 2006-06-08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지하철을 탈 때면 늘상 국민 클래식 베스트 100 그런 것만 팔고 있던데, 생각보다 다양한 물품들이 판매되는군요! 필요한 물건을 더 싸게 구입하면 정말 기분좋을 것 같아요.

조선인 2006-06-08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하철에서 샀던 것 중 제일 아쉬운 게 스트레스 해소용 달걀과 토마토 장난감이었어요. 정말 유용했는데, 왜 또 안 파나 몰라. -.-;;

짱구아빠 2006-06-08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은 한림공원인가요??...저도 내일 제주도 간답니다. 비가 온다고 해서 거시기 합니다만... 저는 지하철에서 파는 상품을 일체 사지 않는데요,우선 물건에 하자가 있을 때 a/s를 받는 게 쉽지 않을 듯하여서요....

paviana 2006-06-08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비슷한 전등 전철에서 샀어요.천원짜리로......글구 전 명함꽂이도 하나 사서 잘 쓰고 있고, 큐빅도 샀었는데 역시 너무 어려워서 포기했어요.ㅎㅎ 저도 꽤 많이 샀지요? 항상 그 오이 써는 칼을 보면 갈등했는데, 장미양이 잘 된다고 하니 담에 보면 사봐야지.~~

하늘바람 2006-06-08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그 전등 2천원주고 샀는데 집에 오니 안되더라는 아주 슬프고 속상한 이야기

Mephistopheles 2006-06-08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하철의 외로운 벤쳐사업가 노마진을 많이 애용하시는군요..^^

플레져 2006-06-08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꼭 외로운 벤처사업가들에게 순간접착제를 사고 싶은데,
매번 올드팝송, 만득이, 칫솔 파는 분들만 만나요.
한번은 절묘하게 만났는데... 너무 멀리 계셔서 부를 수가 없었어요.
손들까 말까 망설이던 와중에 이미 다른 칸으로...ㅠㅠ

박예진 2006-06-08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헤헤~마태우스님의 인생은 너어어무 즐거워 보여요!

비로그인 2006-06-09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핫핫핫 너무 재밌어요 쿄쿄쿄 ( 세실님얘기도 압권입니다 ㅋㅋ)
만득이 사시는 마태님 상상되서 ㅎㅎㅎ

마태우스 2006-06-09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캐서린님/더 열심히 하겠습니다...글구 만득이는 절대 사지 마시어요^^
박예진님/님이 제 나이쯤 되었을 때는 많은 사람이 재미있게 사실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플레져님/순간접착제 그거, 안쓰고 오래 두면 굳어버리던데...가까운 철물점을 찾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메피님/아무래도 그렇지요 호호 제가 워낙 알뜰해서요
하늘바람님/제 일처럼 슬퍼요. 미녀를 속이다니 나쁜 사업가네요
파비님/아 맞다 명함꽂이도 잘 쓰고 있어요. 지하철은 정말 5일장 같아요^^
짱구아빠님/아 예리하시네요. 에이에스가 안되긴 하지만, 한달 이상만 쓴다면 본전은 뽑는 거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답니다^^
조선인님/님도 좋은 추억이 몇개 있군요!! 혹시 요요는 어떤가요?
주드님/의외로 보석이 많답니다. 무조건 안좋다는 편견은 버려야 하죠^^ 근데 대일밴드 같은 건 절대 사지 마시어요!
장미님/광부같다...호호. 그렇네 정말! 그래도 책 잘 보고 갔으니 좋아.
세실님/그사람이 사모님을 몰라봐서 팔 기회를 놓쳤군요. 글구 사모님보단 아가씨가 더 올바른 호칭이라 생각됩니다
펑크님/아아 제가 존경하는 펑크님, 댓글까지 달아주시고...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바람돌이님/보, 본드.... 제 생각엔 그냥 님 실력으로 붙은 거 같은데요...-.0-
아프님/아 제가 바가지 썼군요. 천원이라...으음.... 재벌2세인 게 티가 나나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