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에 글에다 썼던 바와 같이, 높은 분과 전화로 싸우다가 본의 아니게 ‘개새끼’라고 해버렸다. 욕한 거 자체를 후회하진 않지만, 개를 비하하는 욕을 했다는 게 부끄러웠다. 배신을 모르며 인간성이 좋기만 한 개를 깎아내리는 전통에서 나마저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 전통은 비단 언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살해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다른 사람, 그것도 평소 알고 지내온 사람에 의해 죽음을 맞지만, 일년에 하나쯤 생길까말까 한 개에 의한 사망은 대문짝만하게 기사화되어 개에 대한 공포심을 증폭시키고, 사람들이 낯선 개를 적대시하는 근거가 된다. 먹을 게 풍부해져 굳이 개를 먹지 않아도 되고, 일부의 생각과 달리 개고기가 영양학적으로 좋은 게 아니라는 의학적 견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신탕은 복날이면 으레 먹어야 하는 음식으로 여전히 사랑받는다. 외국에서 하는 거라면 무조건적으로 추종하고, 심지어 자연발생적으로 나와야 할 감탄사마저 “oops"같은 걸 쓰는 나라에서, 개고기는 서구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우리 문화의 자존심을 지키는 보루가 된다. 남의 식문화에 대한 서구의 간섭이 부당한 건 맞지만, 다른 좋은 전통은 다 버리면서 왜 개고기만이 지켜야 할 우리 것이 되는 것일까?
어느 여름, 차를 타고 가다 보신탕용으로 길러지는 개들을 본 적이 있다. 복날을 앞둔 때라 무척 더웠는데, 철장 하나에 개들이 여러 마리씩 갇힌 채 혀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지키는 사람이 없었기에 자물쇠를 풀어버리고픈 충동을 느끼는 건 개 애호가라면 당연한 마음일 것이다. 개의 본능 때문인지 내가 가자마자 반색하며 일어나 꼬리를 치고, 머리를 쓰다듬자 기뻐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식용개와 애완용이 다르다고들 하지만, 식용으로 분류된 개도 사실은 인간의 애정을 갈구하고, 주인에게 안겨 재롱을 피우고 싶어하는 녀석이다. 빈 밥그릇을 꺼내서 물을 줬다. 정신없이 달려들어 물을 먹는다. 그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벌써 몇 년 전 얘기니, 그들은 이미 이 세상 개가 아닐 것이다.
몇 년 전에는 이런 얘기도 나왔다. 모 탤런트가 큰 개를 키우는데 그 아이가 갑자기 죽은 뒤 부검을 해보니 기관지에 개털이 왕창 뭉쳐 있더란다. 그 탤런트의 아들이 멀쩡히 살아 있다는 걸 논외로 치더라도, 개털같이 큰 물체가 기관지까지 갈 수 있는지도 의문이고, 그게 제거되지 못해 하부 기관지로 내려간다 해도 뭉쳐서 질식을 일으킨다는 건 도무지 말이 안된다. 하지만 그 소문은 빠르게 퍼져 있던 개를 내쫓는 이유가 되었다. 알레르기의 주범이 카펫에 사는 집먼지 진드기건만 개는 알레르기의 온상이 되고, 구충만 잘해주면 문제가 없을 텐데 임산부가 있으면 당연히 개를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정말 마음 아픈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버려지는 개는 매년 만여 마리. 운 좋게 다른 주인에게 분양되는 경우는 5%가 안 되며 나머지는 거리에서 죽거나 안락사를 당해야 한다. 개에게는 자기 주인만이 세상의 전부일진대, 아무리 사정이 생겼다고 가족 구성원을 그리 쉽게 버리는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인가. 당장 외롭다고 개를 기를 게 아니라, 과연 자신에게 그럴 능력이 있는지 곰곰이 따져 봐야 할 것이다. 아파트로 가서도 기를 것인지, 결혼해서 애를 낳더라도 책임을 질 수 있을지, 부모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는지를. 자식은 커서 “왜 나를 낳았느냐?”고 부모에게 따지지만, 개는 “왜 하필 너같은 주인에게 팔려왔을까”를 탓하지 않는다. 개가 인간보다 낫다는 데 동의하지 않더라도, ‘개에게 무슨 죄가 있냐?’는 말에는 어느 정도 수긍하지 않을까. 개는 가장 오래된 인간의 친구였으며, 지금도 그렇다. 제발 개를 혹사시키지 말자. 그들은 단지 사랑받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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