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의 미학 - 서양미술에 나타난 에로티시즘
미와 교코.진중권 지음 / 세종(세종서적) / 2005년 2월
평점 :
품절


 

‘성의 미학’은 첫 번째 그림부터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하필 쿠르베의 ‘세계의 근원’이 맨 처음 나올 게 뭐람? 지하철에서 그 책을 보던 난 잽싸게 책을 덮고 주위를 둘러봐야 했다. 그런 그림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지만, 그 후에 나온 그림들도 그리 만만하진 않았다. 열심히 보다 보면 옆자리 사람의 시선이 느껴지곤 했으니까. 피부색이 가득한 그림은 언제 어디서나 시선을 끈다.


진중권의 책들은 언제나 내게 즐거움을 주는데, 이 책 역시 그랬다. 첫 번째 즐거움은 교양의 습득. 그림을 보면서 신화와 성경에 대해 알게 되는 건 무척이나 즐거운 일이다. 제우스가 백조로 변해 레다라는 여자랑 했고, 다나에랑 할 땐 ‘비’-가수 비가 아니라-로 변했다는 걸 당신은 아는가? 난 안다. 두 번째 즐거움은 균형 잡힌 시각. ‘팜므 파탈’이 대두한 배경을 진중권은 이렇게 설명한다. “19세기 말은 여성해방운동이 주요한 사회 현상으로 대두한 시기였다..그 시절 남성들이 느꼈던 사회적 거세공포를 구현한 형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 진중권은 덧붙인다. “...여성들이 누리는 권리는 아직 충분히 보장되지 못한 상태다. 그러니 그 아득한 100년 전에여성들이 제 목소리를 내면 얼마나 냈겠는가?...다분히 과장된 공포에 엄살을 떠는 남자들의 호들갑이란.(230쪽)”

세 번째 즐거움은 유머다. 진중권의 등장에 내가 환호한 이유가 뛰어난 해학과 풍자였는데, 그의 유머는 이 책에서도 잘 나타난다. “아폴론은 늘 연인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연인이 죽으면 방정맞을 정도로 요란하게 슬퍼하면서 그를 식물로 환생하게 한다. 아폴론의 애정행각이 없었다면 오늘날 식물도감은 매우 빈약할 뻔했다(245쪽).”


신화에 대한 지식을 테스트하는 퀴즈와 함께 허접한 리뷰를 마무리하자. 아르고스의 왕 아크리시오스는 자기 딸이 낳은 자식에게 살해당한다는 예언을 듣고는 자기 딸 다나에를 탑 속에 유폐시킨다. 하지만 제우스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비로 변해서 그녀랑 한다. 자, 그럼 문제. 그래서 태어난 영웅은 누구일까? 참고로 그는 예언대로 원반던지기에서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메두사를 물리치기도 한다. 다 맞출까봐 상품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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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LA 2006-06-28 0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ㅍㄹㅅㅇㅅ 맞죠??

푸하 2006-06-28 0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흠..... 지식검색하고 싶은 유혹이.... 이벤트가 아니라서 안할께요...ㅎㅎ
책을 읽으시면서 완고한 한국사회의 문화까지 느끼셨으니 좋으시겠어요...^^;

마태우스 2006-06-28 0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님/라일라님의 댓글에 힌트가 있사옵니다^^
라일라님/정답입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상품을 걸 걸 그랬어요^^

푸하 2006-06-28 0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프로메테우스?
... 어디에도 제가 답을 맞춘다는 예언이 없군요. 역시 운명은 무서운 법! ㅠㅠ;

모1 2006-06-28 0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님....ㅁ과 ㅌ는 없는데요. 무척유명한 사람이에요.
마태우스님...기억이 맞다면 클림트 그림에 있지 않나요?? 다나에몸에 황금색비가 휘감기는 그림이던가...확실히 기억은 안나지만요.
그런데 아폴론..이 그랬던가요? 음...지금 당장 떠오르는것은 히야신스랑 올리브나무밖에는...

미완성 2006-06-28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중권이 인기있는 걸 보면 분명 저만 그런 거 같은데요, 전 진중권의 문장이 어려워요. 무슨 말하는 지도 모르겠고..; 두 번째 인용하신 문장보면 재밌는 사람같기도 한데...;;

릴케 현상 2006-06-28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테레이시아스 아닌가요?

건우와 연우 2006-06-28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리뷰까지 유쾌할줄이야^^
책 담아갑니다.

새우범생 2006-06-28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두사의 머리- 루벤스 作

어렸을 때 이 그림을 보고 그 어떤 괴기 이야기보다 크나큰 공포에 쌓였었죠.^^;
나중에 알고 보니 메두사도 저주의 희생양이었을지 모른다는 측인지심이 들더라고요.
메두사의 최후가 굳이 저렇게 원한이 가득하기만 했을까 의구심을 품어봅니다.
어쩌면 눈물을 글썽이지는 않았을까 쓸데없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랑이 죄라면서...^^;
훗 정답은 발설하지 않고 메두사 이야기만 좀 해봤네요.
이 댓글을 보시고 섬뜩한 그림에 놀라들 하실까봐 걱정입니다. ㅡ.ㅜ


마태우스 2006-06-30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yjay님/처음 뵙는 것 같은데요 안녕하시어요? 저도 뭐, 진중권에게 불만이 없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미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제 가장 훌륭한 스승님이시죠
새우범생님/정말 세심하세요. 기생충과 싸워온 제가 저런 것에 놀라겠어요 설마. 근데 메두사가 저주의 희생양일 수도 있다는 님의 생각, 제게 깨달음을 주는군요
건우님/잘 못쓰니까 경쾌하게 쓰려고 노력하는 거랍니다.
자명한산책님/떙...입니다. 공부하세요^^
니노밍님/어렵고쉽고를 떠나서 코드 문제 같아요. 전 어려운데 남들은 쉬운 사람도 얼마든지 있거든요. 그나저나 맘 단단히 추스리시어요^^
모1님/하여간 님이 어여 병원생활을 청산하셨으면 좋겠어요. 동생분의 회복을 빕니다
푸하님/님도 땡이어요. 역시 공부하세요!!!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릴케 현상 2006-06-30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 아니면 말고...분탕질이다=3=3=3

2006-09-16 2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젠 정말 바쁜 날이었다. 월드컵을 봐야 하는데 도와줘야 할 애가 둘이나 생겼으니 말이다. 어제 스케줄은 이랬다.


-밤 11시 20분 귀가

-12시부터 잉글랜드-에콰도르 관전; 전반전 보면서 러닝머신 7킬로 뜀. 베컴 프리킥 말고는 볼 거 없는 답답한 경기.

-2시부터 여자골프 장정 선수 응원

[내가 TV를 켤 때는 알파라는 미국 선수가 선두, 장정은 2위였다. 난 알파에게 강력 레이져빔을 쏴댔다. 알파가 친 공은 불가사의하게 휘어 숲으로 들어갔고, 짧은 퍼트도 번번이 홀컵을 비껴갔다. 마지막 홀에 가기도 전에 알파는 이미 우승권에서 멀어져 있었다. 하지만 한놈을 집어넣으면 다른 놈이 올라오는, 두더지 게임의 속성을 갖는 게 바로 골프, 알파를 경계하는 사이 베타와 감마가 어느 새 치고 올라왔다. 겨우 감마를 끌어내렸지만, 베타는 이미 공동선두로 경기를 마친 상태, 더 이상의 훼방은 불가능했다. 이제 남은 건 장정이 잘하는 것. 내가 쏜 빔이 통했는지 장정이 17번 홀에서 친 두 번째 공은 거짓말처럼 홀컵 옆에 붙었다. 버디. 우승이었다. 연장전에 대비해 퍼팅 연습을 하던 베타는 쓴웃음을 지어야 했다.]

-4시부터 네덜란드-포루투칼전 관람; 노란딱지 16장, 빨간딱지 네 장이 난무한, 축구를 빙자한 격투기.

-4시부터 인터넷으로 중계되는 김병현 선발경기 관람; 김병현의 공은 참 좋았다. 행여 주자를 내보내면 내가 빔을 쏴줬다. 7이닝 무실점의 호투는 그와 나의 합작품이었다. 축구가 끝나고 김병현도 마운드에서 내려온 6시 15분, 난 그제서야 잠들 수 있었다. 한시간도 채 못되는 짧은 잠을.


에필로그

나를 아끼는 미녀가 말했다.

“잠 좀 자지 왜 그랬어?”

난 클라크 씨의 말을 그에게 들려줬다.

“초능력자의 삶은 한 개인의 것이어서는 안된다.”

24년 전, 세계 초능력협회에서는 이 말을 만장일치로 채택했고, 그 말의 준수 여부를 엄격히 감시한다. 초능력을 여자 후리는 데 사용한 인도 사람이 추방된 건 그 한 예다. 협회 회원으로 일정액의 회비를 내고 있는 나 역시 그 규정을 지켜야 한다. 그러니 순간의 안일을 위해 잠을 자는 건, 엄밀히 말해 규정 위반이다. 돈 있는 사람이 밥을 사듯이, 힘 있는 이가 힘을 쓴다. 내 초능력도 그렇게 쓰여져야지 않겠는가?


* 초능력협회 회원 수는 358명이고, 클라크처럼 크립톤 행성에서 온 사람이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협회 본부는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으며, 해마다 2월이면 거기서 총회가 열린다. 우리나라엔 나를 포함해 9명의 회원이 있고,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불가사의한 일들, 즉 기상예보가 틀린다든지, 한나라당이 선거에서 압승을 한다든지 하는 일들은 대개 그 사람들의 소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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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6-26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우리의 클라크는, 왜 부모님께서 남겨주신 난감한 의상을 입을 때 팬티를 겉에다 입을 생각을 했을까요? 점프수트 바짓가랑이에 팬티가 아예 부착되어 있었을까요?

하이드 2006-06-26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퍼맨 리턴즈의 수퍼맨이 게이라면서요?

Mephistopheles 2006-06-26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점점..마태님과 공중그네의 `이라부'기 오버랩 되고 있습니다....

기인 2006-06-26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그러면 한국 내에서 초능력자들끼리도 암투가 있겠네요. 지지정당에 따라서^^;
앗, 근데 그거 보면 마태우스님이 한국 내 초능력 1위는 아니신가 보네요. 좀 아쉬워요~~
한국 내 초능력 1위는 한나라당 지지자면서 (하지만 지난 대선때는 마태님께 밀림, 그러나 이번에 권토중래) 안티-월드컵주의자 (하지만 지난 월드컵때는 마태님께 밀림. 이번에는 스위스 심판을 조종)
마태우스님 더 분발해서, 1위 탈환해주세요. ;)

마태우스 2006-06-26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인님/초능력자들끼리 능력을 비교하는 건 사실 무의미합니다.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분야가 따로 있거든요. 저 같으면 스포츠... 근데요 초능력자들은 대개 보수더라구요. 지난 대선 때 9명 중 여섯명이 1번을 찍었다는... 한명은 무소속 찍었다던데....
메피님/이라부와 전 다르죠. 전 뚱뚱하지 않.....뚱뚱하구나....ㅠㅠ
하이드님/그건 모르겠습니다만, 클라크 씨는 분명 게이는 아니었어요.
주드님/그건 크립톤 행성만의 의상입니다. 저는 절대 그렇게 안입죠^^ 그나저나 상대의 문화를 존중합시다^^

물만두 2006-06-26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명보다는 많아요=3=3=3

마태우스 2006-06-26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두님/등록된 회원 수는 아홉명입니다...^^

해리포터7 2006-06-26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요 마태우스님의 글을 읽고 있으면 카스테라를 쓴 박민규작가가 떠올라요..싫어하시면 할 수 없지만서도 (죄송)저는 좋아라하는 작가랍니다. 말도 얼마나 잘 지어내는지..그런사람 옆에 하나 있으면 인생이 심심하진 않을것 같아요.ㅎㅎㅎ

야클 2006-06-26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회비내세요. 님만 석달째 미납입니다.

클리오 2006-06-26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 점차 초능력의 세계에 빠져드는 마태 님... 그나저나 저도 어제 잉글랜드 재미없는 경기 보고 잤는데, 새벽경기가 볼만했군요. 레드카드 네개라~ 끝내줘요!!^^

건우와 연우 2006-06-26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능력자의 삶엔 많은 고난이 뒤따르는군요^^. 어쨌든 4년후까지 너무 무리하지마세요^^

파란여우 2006-06-26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번에 강금실씨가 떨어질꺼라는 예견을 해서 저도 준회원으로 등록한 상태랍니다 호호

모1 2006-06-26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계인이 그리도 많다니....fbi X파일의 멀더가 좋아할듯..

미래소년 2006-06-27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방금 인터넷 뉴스에서 마태님 친구이신 표진인 선생님 결혼 기사를 봤습니다.
님도 미녀의 마음을 사로잡는 초능력을 발휘하사 조만간 멋진 소식 들려주시기를^^

마태우스 2006-06-28 0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래소년님/하하, 제가 위에서 밝혔듯이 초능력을 여자 후리기에 사용하면 바로 퇴출입니다^^
모1님/저는 외계인이 아니구요,그냥 우연히 제 힘을 알게 된 케이스입니다^^
여우님/오오...님의 예측력이란... 하지만 예측을 잘한다고 우리 회원이 될 수는 없습니다. 물줄기를 바꾼다든지 뭔가를 보여줘야지요...
건우님/도와달라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무리 안할 수가 없습니다. 고달픈 삶이죠..
클리오님/님은 레드카드 많이나오는 경기를 좋아하시는군요! 전 갠적으로 좋아하는 네덜란드가 탈락해서 약간 섭했다는...
야클님/역시 님은 최고의 댓글러입니다^^
해리포터님/싫어하다뇨. 박민규님과 비교되니 영광입니다. 전 그분 흉내조차 제대로 못내고 있는걸요^^
 

 

 

 

 

 

시간강사로 일하는 내 지인이 3년간 5천만원을 모았단다. 이사를 가려고 돈을 박박 긁어봤더니 그 정도가 나왔다나. 그렇다고 평소에 돈을 안 쓰거나 그런 애도 아닌지라, 정말 대단하단 생각을 했다.

“주말에도 과외하고 그랬어. 친구들한테는 썼지만 나 자신을 위해서는 거의 돈을 안 썼어.”

그의 다음 말이 날 부끄럽게 했다.

“넌 얼마나 모았니?

매달 버는 돈은 그 친구보다 많은데, 난 왜 이렇단 말인가. 조직관리한다고 밤낮 술만 먹고, “내가 쏜다!”는 말을 즐겼던 결과는 역시 허무함이었다.


그 후 난, 마음을 잡고 건실하게 살아보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예컨대 기차 대신 밀리더라도 퇴근버스를 탄다든지, 맛이 없어도 외식 대신 우리 병원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다든지, 머리가 길어 얼굴을 덮어도 안깎고 버틴다든지. 돈을 많이 가지고 다니면 많이 쓴다는 옛말을 교훈삼아 만원짜리 한 장만 넣어두고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갑자기 쓰임새를 줄이는 건 역시나 어려웠다. 그렇게 한푼 두푼 아끼고 나면 난데없는 술자리가 생겼고, 아는 후배가 결혼을 했고, 지인의 부친상이 이어졌다.


오늘은 카드 결재일, 즉 상당수의 돈이 잔고에서 빠져나가는 날. 그래서 난 각오를 더 다졌다.

‘교통비 빼고는 십원도 쓰지 말자!’

다행히 내겐 지난번에 실수로-한장 눌렀는데 두장이 나왔다-뽑아놓은 2500원짜리 식권이 있었으니, 점심값이 들 일도 없었다. 난 병원식당에 가서 유유히 식사를 했고, 배를 두드리며 그곳을 나왔......는데....


선생님 한분이 지갑을 뒤지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입구에 서계신지라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 뭐하세요?”

“혹시 식권 있으면 한 장만 줘. 지갑에 돈이 하나도 없네.”

난 식권이 없다면서 3천원을 드렸다.

“나중에 갚을께!”

“아유, 별 말씀을!”

말이 그렇지, 3천원을 어떻게 받는가. 하지만 난 몇 발짝 걷기도 전에 무릎을 치고 말았다. 주머니에 500원짜리 있는데, 2천5백원 드릴 걸.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방으로 왔다. 그런데 학생 하나가 내 방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상의할 게 있다고. 혹시나 해서 물어봤다.

“점심은 먹었나요?”

학생은 안먹었다며, 슬픈 눈으로 날 본다.

“어쩌죠? 난 먹었는데.”라고 말을 했는데, 하고나서 보니 내가 좀 너무한다 싶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굶는 걸 못보는 내가 아니던가. 난 그 학생과 압구정 김밥에 갔고, 나는 칡냉면을, 학생은 치즈김밥을 시켜 줬다.

“한창 때인데 그거 먹고 되겠어요? 다른 것도 하나 시켜요.”

“전 많이 안먹어요.”

“괜찮아요. 이럴 때 많이 먹어야지. 자, 뭐 먹을래요?”

학생은 물만두를 골랐다.


난 부른 배를 움켜쥐고 칡냉면을 먹었다. 근데 학생은, 진짜 양이 작았다. 물만두를 손도 안댄다. 저거 어떡하냐, 내가 먹어야 되나 이러고 있는데 학생이 말한다.“물만두 싸주세요.”

정리하면 이렇다. 학생은 진짜 양이 적다. 그러니 물만두는 안시켜도 됐다. 물만두를 시켰다면 내 칡냉면은 시킬 필요가 없었다. 냉정히 생각해보자. 이 모든 게, 식사 타이밍을 잘못 맞춘 때문이다. 배고프다고 일찍 가지 말고 한 이십분만 있다 갔으면 그 선생에게 3천원을 안뺐겼을 것이고, 점심을 두 번 먹는 일도 없었을 거다. 역시나, 내가 돈을 아낀다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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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6-26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신에 '공덕을 쌓기'로 목표를 조정하시면 될 거 같습니다. 사실, 돈 많이 모았다고 누가 나중에 '공덕비' 세워주나요?..

비자림 2006-06-26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지만 난 몇 발짝 걷기도 전에 무릎을 치고 말았다. 주머니에 500원짜리 있는데, 2천5백원 드릴 걸. "
킥킥킥 마태우스님, 제발 그만 웃겨 주세요. ^^
근데, 돈 모으기는 어떤 목표가 세워져야 되는 것 같더라구요. 이를테면 5년 안에 내 집 장만한다, 2년 안에 차 산다 등등..

릴케 현상 2006-06-26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이 아무래도 품위유지비가 들것 같네요. 지인보다 불리한 입장^^

Mephistopheles 2006-06-26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부터는 변장을 하시고 학교를 돌아다니시는 건 어떨까요..??

울보 2006-06-26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도 돈을 모아야 하는데,,
그것이 잘안되요,,마태님 마음조금은 이해가 가요,,,

비로그인 2006-06-26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녀님을 애인으로 사귀시구요, 그 미녀님께 돈관리 해달라고 하세요 ^-^

깐따삐야 2006-06-26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반 아이들은 제가 아이스크림이라도 사주면 홀홀쩝쩝 맛있게 먹으면서도 해사한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샘~ 베트남 가서 남자 사오시려면 돈 아끼셔야죠~ 케케케~" 이런답니다. 돈 쓰고 상처 받고 뭐 그런 식이죠. 케케케~

하이드 2006-06-26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곱창은요? ㅋㅋ 그렇게 밥값 몇천원, 차비 몇천원 아끼고, 쏜다고 몇십만원 쓰면 무슨 소용이냐! 고 우리 엄마가 나한테 그랬어요. -_-a

물만두 2006-06-26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사체는 안쓰시니 장하십니다=3=3=3

건우와 연우 2006-06-26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품위유지하시고 지금처럼 유쾌하게 사심이 나을듯...^^

짱구아빠 2006-06-26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윽 물만두님 사체라니요....마태님께서 열심히 카드를 긁어주신 덕분에 요즘 저희 업계가 2000년대 초반의 위기를 딛고 꾸준한 성장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

chika 2006-06-26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퍼 제목과 작성자를 한꺼번에 읽느라 '돈태우기'로 봤다. 헉, 어떤 미친넘이 돈을 태워? 하고 다시 봤더니, 돈 모으기였군. ㅡㅡ;
(월급이 많지 않았던 나, 정말 별로 돈 쓰는 것도 없는데 십년동안 직장다니며 모은 돈을 긁어야 오천만원 나오까나~ 생각하니 왠지 기운없는 오후가 될 듯하네. 흑~ ㅠ.ㅠ)
- 근데 정말 예전엔 후배들 밥도 잘 사주고, 술값없다면 돈 들고 뛰어 나가고 그랬었는데 요즘은...... ................ ;;;;;

비로그인 2006-06-26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르크스 어머니가 그러셨다죠. `너는 자본에 대해 쓸 게 아니라 이제는 자본을 좀 모아보렴' 흐흐흐....웃으면서도 슬프고 슬프면서도 웃깁니다.

해리포터7 2006-06-26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식사를 하셨는데도 그 학생을 위해 같이 드셔주시는 마음씨 감동입니당.~

마태우스 2006-06-26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카님/제가 제주도 가면 돈 들고 뛰어오실 거죠? 네,라고 대답해 주시어요!! ^^
짱구아빠님/진짜요즘 많이 긁었습니다 음하하핫하하...흐....흐흐흑.
건우님/그래요, 맘 편한 게 제일이죠 뭐^^
만두님/사채 한번 써봤어요. 정말 날도둑놈들이었죠...150만원 빌리고 갚은돈은 240만원인가 그랬을걸요.
하이드님/그니까 한푼 두푼 아껴서 님 오시면 곱창 쏘겠단 소리죠
깐따삐야님/애들이 진정한 유머가 뭔지를 모르는 듯하네요. 유머란 남에게 상처주는 게 아닌데....
고양이님/님도 미녀시잖아요!!
울보님/님이야 류가 있으시니, 돈 모으는 게 쉽지 않겠지요. 하지만 전 순전 유흥비로 쓰니 아낄 소지가 많이 있지요..
메피님/모자 쓰고 다녀도 다 아라보더이다.
자명한산책님/품위 유지비란 명목으로 나가는 돈..... 사실은 그게 다죠....
비자림님/그런 것 같아요. 저야 이미 저택이 있고 하니....그게 어렵더이다.
로쟈님/사실은 저도 그냥 해본 소리였어요. 전 돈 모으는 건 진작에 틀렸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답니다 ^^


마태우스 2006-06-26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리포터님/부끄럽사옵니다...
주드님/오오 그 어머님, 참 멋진 말을 하셨네요....^^

모1 2006-06-26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행복하게..사시라고 밖에는..후후..

세실 2006-06-26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마태우스님 우리 그냥 포기하고 살아요~~~
돈 모으려고 하면 그 머피의 법칙이 적용되는 것 같아요.

다락방 2006-06-26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밤의 피크닉]이란 책을 보면 이런 말이 나와요. '요는 타이밍이다.'
마태우스님의 일처럼 돈에 관해서도, 그리고 사랑에 관해서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든것들이 다 타이밍으로 결정되는게 아닐까요. 그때 내가 거기에 없었다면, 그때 내가 널 만났다면...하면서 말이죠.
제게도 돈 모으는건 정말이지 너무나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공룡을 애인으로 두는것보다 더 힘든 일 같아요 ㅜㅡ

마태우스 2006-06-28 0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오, 그러니까 제가 알게모르게 생활 속에서 진리를 깨우친 거군요! 글구 제 생각엔 공룡을 애인으로 두는 게 더 힘들지 않을까요?^^
세실님/말은 그렇게 하지만 저는 계속 로또에 트라이하고 있습니다.
다우님/고맙습니다. 곧 연락드리겠습니다^
모1님/아유, 사실은 행복하게 살지요...^^ 과분하다고 생각하는걸요

실비 2006-07-01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마음먹으면 꼭 꼬이는날이있더라구요.. 그래도 잘하시리라 믿어요^^
 

 

 

 

 

 

 

 

언젠가 대청역 근처에서 친구와 식사를 했다. 뭘 먹을까 하다가 술이 먹고 싶었던 난 횟집에 가자고 제안했고, 그 건물에 있는 유일한 횟집에 자리를 잡았다. 회값은 무지 비쌌지만, 비싼 것에 걸맞지 않게 서비스며 맛이 엉망이었다. ‘잘 모르는 데서는 비싼 걸 먹지 말라.’는 교훈을 외면한 그 멍청한 선택은 두고두고 머리에 남아 나를 괴롭힌다.


반면에, 예술의 전당 근처에 ‘선궁’이란 중국집이 있다. 맛도 맛이지만 유명세에 걸맞지 않게 값이 싸서, 매우 흡족한 식사를 하고 나올 수 있다. VIP를 모시고 가도 칭찬을 받을만한 그런 집, 보름 전에도 귀빈-여기서 귀빈이란 미녀를 말한다-셋과 함께 갔다가, 뿌듯한 마음으로 배를 두드리고 나왔다.


비유가 적절하지 않지만, 내게 있어서 뮤지컬은 ‘선궁’이고, 오페라는 그 횟집이다(이건 물론 오페라에 대한 내 소양이 부족한 탓이다). 오페라를 볼 때 난 남들이 치니까 박수를 치고, 뭐가 뭔지도 모른 채 시계만 들여다보며 ‘언제 끝나나’만 기다린다. 대청역 횟집에서 카드로 그은 일이 지금도 생각나듯이, 오페라를 보고나면 내가 지불해야 했던 비싼 표값이 오래도록 머리에 남는다. 꼭 오페라 뿐 아니라 언젠가 봤던 퍼포먼스 ‘델라구아다’도 왜 봤는지 후회되는 비싼 공연이었다. 반면 뮤지컬은, 그것도 영화에 비하면 턱없이 비싼 값일지라도, 재미와 더불어 가슴을 벅차게 하는 희열을 느끼게 된다. 내용도 다 이해가 가고, 배우들의 대사와 행동이 나로 하여금 폭소를 터뜨리게 한다. 거기서 난 남들이 쳐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손바닥이 아플 정도로 박수를 친다.


뮤지컬 ‘맘마미야’를 봤다. 1인당 4만원의 표 값을 같이 본 미녀가 쐈다는 게 미안할 정도로 뮤지컬은 재미있었고, 배우들의 연기도 나무랄 데 없었다. ‘결혼식을 앞둔 딸이 자신의 아버지일 가능성이 있는 세 남자를 초청한다’는 기발한 아이디어도 재미가 있었지만, ‘댄싱 퀸’을 비롯한 ‘아바’의 노래들이 전편에 흐른다는 게 더더욱 마음에 들었다. 학생 시절 팝송에 문외한이었고 ‘아바’ 역시 별반 관심을 끌지 못한 그룹이건만, 나 역시 알게 모르게 아바의 영향권 안에서 살았던 거였다. 게다가 뮤지컬에서 아는 멜로디가 나오는 건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뮤지컬을 보고나서 주의해야 할 게 있다. 무대에서 보는 여배우들이 하나같이 미모로워 보이지만, 막상 무대 뒤에서 만나면 몸도 크고 보기보다 꽤 나이가 들었다는 사실. 유명 뮤지컬에 나오려면 경력도 화려해야 하니, 40이 넘은 건 당연한 일이건만, 무대에서 보는 배우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환상을 품게 한다. 그 환상을 깨지 않기 위해 오늘 난 막이 내리자마자 잽싸게 극장을 빠져 나왔다. 난 역시 뮤지컬 타입이다.


* 써놓고 보니까 비유가 정말 적절하지 않다는 걸 절감한다. 고급문화인 오페라를 어떻게 대청역 앞의 맛없는 횟집에 비유하는가. 그보다는 1인당 15만원짜리-안먹어봐서 가격은 모른다만-바닷가재에 비유하는 게 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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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06-06-26 0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도 꽤 크고, 나이(경륜)도 꽤 있어야 그 정도의 실력과 멋이 어우러져 나오는가 봅니다 ^ ^
맘마미아, 그야말로 신나는 뮤지컬이지요.

미완성 2006-06-26 0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체 공연비가 비싼 세상이다 보니까 뮤지컬을 4만원주고 보셨다니, 오, 꽤 싸네요? 맘마미야 예전부터 얘기 들었던 거 같은데 역시 좋은 공연은 오래 가나 봅니다. 전 함께 소리지를 수 있는 콘서트가 좋아요.

비연 2006-06-26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며칠 뒤에 보러가기로 했는데 마태우스님 평을 보니 더욱 기대된다는...^^
개인적으로 저도 델라구아다는 좀 어수선하다는 느낌을 받았었죠...;;;

2006-06-26 1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에 맡겨봐! 2006-06-26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맘마미야랑 미스사이공 중 갈등하다가 미스사이공 표를 예매했는데 마태님 평을 보니 이것도 봐야겠네요.

이매지 2006-06-26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예전에 맘마미아 공연을 봐서 이번에도 보러갈까 고민중인데.
좀 배우들의 연기가 중요한 뮤지컬 같은 경우에는 되도록 앞이 좋지만.
맘마미아처럼 음악이 중심이 되는 뮤지컬은 뒤에서 봐도 괜찮을 듯 ^^
이번 공연에도 박해미씨가 도나로 나오나요?!

짱구아빠 2006-06-26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다>를 공짜 티켓이 생겨서 얼떨결에 본 후에 노리고 있는 뮤지컬이 몇 편 있습니다. <오페라의 유령>,<미스사이공>,<맘마미야>,<지하철 1호선>정도... 근데 말씀하신대로 가격이 만만치 않아서 많이 주저하게 되는데,짱구엄마랑 <맘마미야>를 우선 보기로 약속했습니다. 마태님의 글을 보고 그 결심을 더욱 굳히게 되었네요..
저희 회사 플래티늄 카드로 예매를 하시면 할인 혜택이 있음을 참고하시구요 ^^.....

마태우스 2006-06-26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짱구아빠님/앗 전 플래티눔이 아니어요 글구 한번 봤기 때문에 또 안본다는...^^ 근데 정말, 음악만 들어도 신이 나고, 내용도 재밌어요.
이매지님/앗 님을 벌써 보셨군요 대단! 전 3층의 뒷줄에서 봤는데요, 뭐 크게 지장 없었어요. 연기도 다 보여요!'+
바람에맡겨봐님/안녕하시어요? 닉넴 여전하시군요^^ 확실히 알라딘 분들은 문화취향이 고상해요... 전 미스사이공이란 말 처음 들어보는데..
속삭이신 분/그,글쎄요. 전화 드리겠습니다아.
올리브님/구워드릴까요????<--죄송합니다. 조크였어요...
비연님/전 미녀님이 말 안해줬으면 있는 줄도 몰랐다지요. 역시 다양한 미녀를 사귀어야 합니다.
니노밍님/전 콘서트를 몇번 못가 봤어요. 같이갈 사람이 없어서요 흑.
hnine님/저만 빼곤 다 이 뮤지컬의 존재를 알고 계시는군요. 으음...책과 음악은 통하는가봐요. 하여간 멋진 뮤지컬이었어요

모1 2006-06-26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페라라....너무 졸린 것이란 생각에..음악시간에 선생님이 숙제로 오페라 보게 해서..그 이후로 오페라라고 하면...학을 뗍니다..하하..

choi777rus@daum. 2021-07-28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맛이 매우 오묘해서 맛을 느끼기에는 상당한 수련조차 필요한 비싼차가 있습니다. 와인도 그렇습니다. 수백만원, 극단적일 때는 수천만원까지 한다는 와인을 즐기려면 와인에 대한 공부와 수련과 내공이 필요합니다. 만원 이만원 와인도 감격하는 미각으로서는 고가의 와인을 제대로 감별할 수 없지요. 음악도 라면과 같은 음악이 있을 수 있지만 세계최고 쉐프가 만든 요리도 있읍니다. 고급예술을 즐기려면 그래서 내공이 필요하고 공부가 필요합니다. 오페라가 재미없다고 불평하시기 전에 클래식 쉬운 음악부터 첫계단을 밟아서 차근차근 올라가야 합니다. 패션쇼를 위한 작품 옷을 집에서 편하기 입는 옷처럼 쉽지 않다고 불평하면 안되지요.정상을 오르려면 땀을 흘려야 합니다.
 

 

 

 

 

월드컵 16강전이 시작된 첫날, 난 밤 열시부터 두시간 가량을 잔 뒤 월드컵에 임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두시간은 좀 적었다. 최소한 밤 8시부터는 잠자리에 들었어야 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독일과 스웨덴의 경기는 팽팽하리라는 내 예상과 달리 독일의 일방적인 무대였다. 내가 알던 독일은 그냥 공중으로 뻥 찬 뒤 클로제나 다른 키큰 선수의 헤딩으로 어찌어찌 해보려는 팀이었는데, 어제 경기로 판단컨대 환골탈태를 한 듯하다. 정확한 패스에 이은 위력적인 슈팅이 경기 내내 나왔는데, 특히나 2대 0으로 앞서고도 계속 밀어붙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두시에 경기가 끝난 뒤 고민을 했다. 잘 것인가 그냥 날을 샐 것인가. 일단 자면 일어나는 게 자신이 없었기에 후자를 택했다. 그 동안 난 여자골프에서 우리 선수들의 경기를 도왔다. 장정이 1위, 김미현이 2위를 달리고 있는 게 모두 내 공은 아니겠지만, 그들이 내가 쏜 빔 덕을 본 건 분명하다. 4시가 지나 아르헨티나와 멕시코의 경기가 시작된 뒤에도 난 결정적 순간마다 채널을 바꿔 빔을 쏴줬다.


아르헨티나와 대결한 멕시코는 강팀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는 멋진 모습을 보여줬다. 선제골을 넣는 등 선전했지만 아깝게 역전패했는데, 아르헨티나 선수의 2번째 골이 워낙 멋졌으니 보따리를 싸는 게 억울하진 않을 것 같다. 사실 이 경기의 전반전이 내 한계였다. 후반이 시작된 건 기억을 하는데, 그때부터 눈만 떴다 감으면 십분 내지 이십분이 지나 있었다. 아무나 이겨라 이러고 있었는데 글쎄 연장전에 들어간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자버렸다. TV를 켜놓고 잤기에 골이 들어갔다고 흥분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6시 15분쯤 모닝콜이 울렸고, 난 테니스 멤버들을 전화로 깨운 뒤 다시 잠이 들었다.


7시 10분, 난 다시금 잠에서 깨어 테니스장으로 향하는 차를 타고 있었다. 그리고 두시간 동안 무더위와 싸워가며 테니스를 쳤는데, 잠을 별로 안자고도 그렇게 잘치는 스스로가 대견하기 짝이 없었다. 11시, 다시 집에 와서 밥을 먹고 선발로 나오는 박찬호를 위해 빔을 쏴줬다. 너무 지친 탓일까. 내 빔은 별반 도움을 주지 못했고, 박찬호는 부진한 경기 끝에 패전투수가 되고 만다. 다음엔 잘 해줄게. 미안해 찬호!


박찬호가 강판하자마자 난 잠이 들었다. 한 세시간 정도는 잘 수 있겠다 싶었는데, 할머니가 너무 심심하셨는지 우유를 마시라고 두 번이나 깨운다.

“우유 안먹으려면 밥이라도 먹어라.”

“...드르렁...”

“무슨 잠을 이렇게 자? 처음 봤네.”

자는 와중에 할머니가 어찌나 얄밉던지.

4시 반에 일어나 대충 옷을 차려입고 뮤지컬 ‘맘마미야’를 봤다. 다시금 집에 온 건 밤 11시 20분, 이틀째 월드컵이 40분 남았다 (이날은 4시에 김병현이 등판하고, 여자골프 마지막 라운드도 겹쳤다...).


그간 체력을 충분히 비축했다고 생각했는데, 첫날 이러고 나니 무지하게 지친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4년에 한번씩 하는 행사인데, 놓치지 말고 봐야지. 갈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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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퇴전문 2006-06-26 0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2시 경기와 4시 경기를 풀타임으로 다 보기엔 체력적인 부담이 너무 크죠. 12시 경기 포기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가, 이제 네-포 전 관전할 참입니다. 쥔장님의 스태미너가 상당하시군요.

마태우스 2006-06-26 0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퇴전문님/아앗 이밤에 깨어있는 분이 또 있으셨군요 반갑습니다아! 님은 12시 경기를 포기하셨군요. 잘하셨어요 베컴의 멋진 프리킥 한방과 루니의 동물적인 돌파 하나 말고는 별반 건질 게 없었다는... 물론 제가 축구 비전문가라 더 멋진 것들을 놓친 결과겠지만요. 지금이라도 한시간쯤 잘까 싶지만 여자골프 응원해야 해서 그것도 안되고....ㅠㅠ

중퇴전문 2006-06-26 0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니가 동물적이라면, 크라우치는 식물적일까요. 개인적으론 둘이 투톱으로 함께 뛰는 장관을 보고 싶지만, 가능하진 않겠죠. 그럼 열심히 달리시길.

마태우스 2006-06-26 0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퇴전문님/크라우치요..오늘 뛰려고 몸풀다가 베컴이 골 넣는 바람에 결국 못나왔죠. 오웬이 다치는 바람에 둘이 뛰는 광경을 아마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8강전에서요. 님도 즐감하세요

모1 2006-06-26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의 빔이 그리도 위력적인지 몰랐네요. 오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