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흰머리가 있네요?"
내게도 흰머리가 난다는 사실을 안 건 팔년쯤 전이다.
조교선생의 말에 놀라서 거울을 보니 흰머리 몇가닥이 보인다.
"어, 이거, 새치예요, 새치.
하지만 일년쯤 전, 친구 하나가 "너도 이제 흰머리가 나는구나."라고 말했을 땐, 더 이상 그게 새치라고 우길 수가 없었다.
우리 사회의 통념에 맞게 새치를 '흰머리가 날 사람이 아닌데 돌연변이처럼 몇가닥이 하얀 거"라고 정의한다면,
'몇가닥'의 범위를 넘어선 흰머리는 노화의 결과일 뿐, 돌연변이는 아니었다.
한달 전에 만난 다른 친구는 새치를 잡초에 비유했다.
"새치가 몇 개 있을 때 뽑아야지, 방치하면 머리 전체가 흰머리로 뒤덮힌다."
그 자리에서는 '에이, 설마!'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말은 오래도록 귓가에 메아리쳤다.
그 후부터 난 수시로 거울을 보며 흰머리 개수를 세는 습관이 생겼고,
며칠이 지났을 땐 손으로 흰머리를 뽑는 단계에 이르렀다.
남에게 뽑아달라고 했더니 '한 개 당 오백원!'을 외치는 통에,
그냥 내가 뽑자고 마음을 먹은 소치다.
근데 거울을 보면서 뽑다보니, 공간 감각이 그리 좋지 않았다.
흰머리라고 뽑은 걸 보면, 애꿏은 검은머리인 경우가 꽤 많이 있었으니 말이다.
안그래도 아버님이 대머리셨기에 걱정이 많은데, 검은 머리 한가닥이 얼마나 아깝겠는가?
하지만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수시로 그짓을 했더니 이젠 제법 흰머리를 잘 뽑는다.
오늘, 강릉에서 발견된 미라를 연구한답시고 미라 팀이 모여 일을 좀 했다.
처음엔 눈을 빛내며 봤는데, 두시간이 넘어가자 내가 꼭 있어야 하나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료하게 서성거렸다).
마침 큰 거울이 있기에, 에라 모르겠다 싶어서 흰머리를 뽑기 시작했다.
내가 너무 흰머리를 방치했는지, 흰머리의 개수는 생각보다 많았다.
요거, 저거, 이거 이렇게 몇 개만 제거하면 될 줄 알았는데
머리를 들출수록 흰머리는 끝없이 나왔다.
한 삼십분 쯤 뽑았을까.
그동안 뽑은 걸 세어보니, 흰머리가 서른셋에 검은 게 여덟이다.
이 정도면 뭐, 만족스러운 결과라 할 수 있겠다.
다시금 거울을 보니 흰머리가 확연히 줄어든 게 아주 젊어 보여 기분이 좋았다(뽑은 흰머리들을 사진으로 찍어 올리려 했지만,
지금사 집에 와서 너무 피곤한지라...)
내가 조교 시절, 교수님 한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난 흰머리가 나기에 새치인 줄 알았거든. 근데 어느날 보니까 흰수염이 나더라고. 야, 내가 진짜 늙었구나 했지."
그렇게 말씀하셨을 때 선생님의 연세가 마흔다섯이랬다.
이십대인 그때는 그 나이가 참 까마득해 보였지만,
3년만 있으면 내가 그 나이가 된다. 흑흑.
아직까지 흰수염이 나는 기미가 없어 다행이지만,
노화의 징조는 내가 원하지 않는다고 찾아오지 않는 건 아니리라.
머리 전체가 하얗게 뒤덮여, 흰머리를 뽑으려면 내 머리를 거의 다 뽑아야 하는 그땐, 많이 슬플까?
이렇게 위안을 하자.
우리 강아지들은 각각 세 살과 7개월인데, 벌써 흰 수염이 났잖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