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머리를 늘 학교 이발소에서 깎았다.
"대학원생이세요?"라는 말에 "네"라고 대답하기만 하면 3,500원에 머리를 깎을 수 있었으니까.
어떤 여자의 꼬임에 빠져 청담동의 '정준 헤어샵'에서 4만원을 주고 머리를 깎은 적도 있고,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체인점을 드나든 적도 있지만
내 외모에 비싸게 깎아봤자 말짱 헛것이란 걸 깨달은 뒤로는
그냥 학교에서 자르고 있었다.
아내를 만난 뒤부터는 그러질 못했다.
아내는 우리집 근처인 홍대앞 이가자 미용실의 단골이었고
앞으로는 나도 거기서 깎으라고 했다.
세상에, 거기는 머리를 깎는 데 예약까지 해야 했고,
사람도 바글바글해 예약한 시각에 갔는데도 한참을 기다린 적이 있다.
다행히 미용사 언니가 아주 이상하게 머리를 깎아준 덕분에
난 아내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이가자 싫어! 그냥 내가 알아서 깎을 거야!"
그렇다고 예전처럼 학교 이발소를 이용할 수는 없는지라 당산동 일대를 헤매며 그럴듯한 미용실을 찾았다.
내 기준은 딱 하나, 머리를 잘 깎는지에 상관없이 사람이 없고 한적한 곳이었다.
'김xx 헤어샵'은 그 기준에 딱 맞는 집이었다.
게다가 거기선 의외의 성과가 있었으니,
첫날 내 머리를 깎아주는 언니가 대단한 미녀였던 것.
눈이 부셔서 머리 깎는 내내 눈을 감고 있어야 할 정도 (아주 살짝 떴음을 이제사 고백한다).
두달쯤 후 그곳에 갔더니 미녀언니는 없었지만,
또 다른 미녀가 나와서 내 머리를 깎아 준다.
그날 난 앞으로 쭉 거기서 머리를 깎을 생각에 적립카드를 만들었다.
아내는 두 번 다 "머리가 그게 뭐야? 거기 가지 마"라고 했지만 말이다.
근데 그 다음에 갔더니 그 미녀는 바쁜 듯했고, 나이가 드신 김xx 원장이 직접 머리를 깎아줬다.
"이번엔 잘 깎았네"라며 만족해하는 아내 앞에서 난 "거길 계속 갈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게 10월 초 얘기다.
그 후 두달하고도 보름을 버틴 지난 일요일,
난 드디어 머리를 깎으러 그곳에 갔다.
원장이 이런다.
"머리 오래 안자르셨나봐요"
그랬다.
머리가 너무 길어서 귀에다 올리면 귀가 무거울 정도였으니.
그러면서 원장은 이런다.
"미스터 김! 머리 좀 깎아드려"
미스터김이라니.
내가 놀라는 사이 키가 훤칠하게 큰 남자가 다가왔다.
"저리로 가시죠."
내가 미녀라고 지칭했던 여자분은 다른 남자의 머리를 깎고 있었는데,
그 남자는 무척이나 흡족한 표정이었다.
아내는 내가 머리를 깎은 모습에 그 남자처럼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엔 아주 잘 깎았네? 어디서 자른 거야?"
그 말과 상관없이 난 가방에 들어있던 적립카드를 쓰레기통에 던졌다.
2월쯤 다시 머리를 깎을 땐 다른 데를 찾아봐야겠다.
* 글구 허공에 날린 알라딘 상품권을 지기님이 다시금 등록시켜 주셨다.
감사드립니다 지기님. 열심히 할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