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난 세권의 책을 써냈다. 말이 세권이지, 앞의 두권은 '책'이라는 고상한 명칭을 붙이기엔 낯이 뜨겁다. 사실상의 저서는 그러니까 작년에 냈던 책 하나 뿐이지만, 그게 앞의 책들보다 낫다는 거지, 뭐 그리 잘썼다든지 그런 건 아니다. 내용에 걸맞게 그 책은 불과 수백권이 팔렸고, 그 중 상당수를 내가 샀다. 달라는 사람들을 만족시켜 주기 위해서 말이다.
수준에 무관하게, 난 일년에 한번씩 책을 내고 싶었다. 책을 내는 게 재미있기도 하고, 계속 내다보면 언젠가는 나도 책다운 책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하지만 올해 책이 나오지 않음으로써 그 계획은 둘째해에 이미 실패하고 말았다.
사실 올해도 한권 책을 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잘 안됐다. 지금까지 영세한, 혹은 무성의한 출판사에 치인 나머지 이번만큼은 제대로 된 출판사에서 책을 내고 싶었던 것이 이유였다. 여러 군데 메일을 보내 봤지만, 그럴 듯한 출판사들은 하나같이 내 제의를 거절했다. 내가 전업작가가 아니니 다행이지, 책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었다면 정말 서러울 뻔했다. 딱 한번, 아쉬운 적이 있었다. 출판재벌이 아닌 출판사에서 결국 원고를 내기로 한 뒤, 중앙M&B라는 곳에서 답신이 왔다.
[검토해 봤는데,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을 것 같아요]라는 내용으로. 검토하는 데 한달이 걸린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고, 계약도 안했는데 지금이라도 배신하자는 생각도 조금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아니다 싶었고, 난 날 받아준 출판사와의 의리를 지키기로 했다.
원고를 쓰는 데는 일년 가까이 걸렸다. 그 동안 늘 책만 쓴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관심이 책으로 가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맨 처음 쓴 책은, 술 마실 걸 먹어 가면서 한달만에 썼다. 그 다음 책은 불과 석달이 걸렸다. 세번째 책은? 한 육개월 이상 쓴 것 같다. 기간이 수준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 책은 그야말로 내 모든 것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출판사의 여건이 안좋았는지, 원고를 맡기고 나서 5개월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난 다시금 유수 출판사에서 책을 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내 동창 하나가 출판재벌인 시공사의 편집장이니, 거기서 내려면 어려울 것도 없었는데. 내가 그 길을 택하지 않았던 것은 인맥에 의존하기 싫은 것도 있었지만, 그들의 돈이 전두환의 검은돈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학생 때 시위를 한 적은 없지만, 민주주의의 적이었던 그들과 타협하는 것은 왠지 싫었다. 기대와는 달리 몇달간 책이 나오지 않자 난 내가 너무 순진했음을 반성했다. "검으면 좀 어때? 돈은 다 똑같다고!" 이렇게 자신을 질책했지만, 이미 늦었다.
책 나오는 걸 포기한 12월 중순께, 출판사에서 갑자기 연락이 왔다. 드디어 책 만드는 프로를 스카우트했단다. 그 프로가 요구하는대로 난 지금 열심히 책을 고치고 있는 중이다. 약속한 30일까지 원고를 주려면 별로 시간이 없는지라, 논문이고 뭐고 다른 모든 걸 전폐했다. 어제, 오늘은 점심도 걸렀다. 술만 안마시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지만, 그게 어디 쉬운가.
예정대로라면 2월, 실제로는 3월경에 내 4번째 책이 나온다. 판매에 무심했던 다른 책들과는 달리, 내 모든 게 담긴 이 책은 내가 최대한 사재기를 할 생각이다. 알바를 고용한 출판사의 사재기는 흔한 일이지만, 저자가 직접 사재기에 나서는 건 내가 처음이 아닐까? 그동안 그런 적이 없지만, 친구들에게도 도움을 청하련다. 내가 그리 나쁜 놈이 아니라면 한권씩만 사주라, 이렇게 말이다. 2월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