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피디로 일하는 김형민이란 사람이 책을 한권 냈다. <섬데이 서울>이란 책인데, 어찌나

재미있는지 무서운 속도로 읽고 있는 중이다. 책에 나온 얘기 중 하나다.

 

놀이터 앞에서 실종된 정종훈이란 아이에 대한 다큐를 4회 연속 방영하던 때, 확실해 보이는

제보가 들어왔다.
"미아삼거리 대한제일증권 빌딩 옆 제일교회...정신지체아들이 수용되어 있는 시설이 있는데,

그 가운데 6살 정도 되는 아이가 있다, 이름을 물어 봤더니 종훈이라고 한다"
피디도 흥분한 나머지 카메라를 들고 그쪽으로 뛰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대한제일증권이란

증권사는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그 여자가 불러줬다는 휴대폰 번호로 전화를 했다.

"이 번호는 사용하지 않는 번호..."라는 멘트가 나온다.

그러나.. 희망은 있었다. 아버지의 휴대폰은 경찰, 전화국의 협조를 통해 발신제한번호도 알아낼 수

있었던 것.

아버지: 임원애 씨죠?
여자: 누구세요?
아버지: 아들 잃어버린 아빱니다. 아까 제보 주셨죠?
여자: 이 번호 어떻게 알았어요?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거의 고함 수준이었단다)

그랬다. 그건 장난전화였다. 여자는 동생이 전화한 것 같다고 했다가, 언니가 했다가 횡설수설한다.

"하나만 물읍시다. 종훈이를 진짜 본거요?"라며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아버지는 결국 절망감에 빠진

채 전화를 끊었다.

 

이걸 읽는 나도 화가 나는데, 당사자인 아버지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아들을 잃은 절박한 마음을

십분의 1만 이해한다해도, 그따위 장난은 하지 않았을텐데. 제보를 확실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 여자는 이런 짓까지 했다고 한다.
"지금 옆에 있는데 바꿔 드릴까요?" 하고 묻고, 잠시 뒤 "아이가 안받겠다네요" 하고 걱정스럽게

얘기했단다. 아이의 특징과 입고 있는 옷 색깔까지 이야기해 주었고, "이름이 종훈이니?"라며

누군가에게 묻는 시늉까지 했단다.

 

흥분한 PD가 다시 전화를 했다.
피디: 아까 하신 말씀, 다 거짓말입니까?
여자: 네? 아니, 동생이... 언니가....
욕을 퍼붓고 끊으려는데, 그 여자가 이러더란다.
"종훈이 아버지, 종훈이 꼭 찾게 해달라고 기도할께요"

글쎄다. 꼴을 보아하니 기도를 할 것 같지도 않지만, 기도를 한다해도 그게 얼마나 진실된

기도일지? 아마도 그여자는 친구들에게 자신의 무용담을 호들갑을 떨면서 자랑할거다.
"글세 내가 직통으로 걸렸잖아? 얼마나 쫄았는데... 앞으로는 공중전화로 해야겠어"라면서.

 

나 역시 장난전화를 해본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라서, 그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해보지는 않았지만 중국집에 전화해 가짜 주소로 요리를 시킨다든지, 119에 전화해 불이 났다고

거짓말을 하는 건, 나쁘긴 해도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 문제다. 어떻게 아이를 잃은

아버지에게 장난을 칠 생각이 날까? 지하철에 불이 나서 수많은 인명이 피해를 당한 날,

"지하철역에 불지르겠다"며 장난전화를 걸었던 사람들 역시 인간이 아니긴 마찬가지다. 공자와

맹자는 인간은 원래 착하다고 주장했지만, 이런 작태를 보고도 계속 그런 주장을 고수할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휴 그랜트가 나오는 영화는 뻔하지 않을까? 별점순위에서 <올드보이>와 더불어 수위를 다투고,

본 사람이면 누구나 강추를 해대는 이 영화를 안본 이유는 그런 거였다. <노팅힐>은 봐줄 수 있어도,

아류작은 보기 싫다! 아무리 달콤한 사탕이라도 자꾸 먹으면 질린다!

내가 마음을 돌리게 된 것은 어느 분의 적극적인 설득 때문이다.
"너무너무 재미있어요. 꼭 보세요!"

 

이런 식으로, 영화를 본 사람들이 전하는 입소문은 많은 사람들을 극장으로 달려가게 한다.

자신이 받은 즐거움을 남과 공유하고픈 마음은 인간이 이기적인 동물이라는 기존의 가치관을

헷갈리게 만드는 것 같다. 내가 영화를 본다고 해서 그 자신에게 손톱만큼의 이익도 돌아가지

않을텐데 말이다. 최근에 읽은 책에 의하면 이렇게 입소문을 내주는 소비자를 알파 소비자라고

한단다. 흥행 전망이 어두웠던 영화 <타이타닉>이 성공한 게 10대 소녀들의 바람몰이 때문이었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인데, 제임스 카메론이 <타이타닉>을 재난영화가 아닌 러브스토리로 만든

것도 그렇게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러브 액츄얼리>는 너무나도 재미있는 영화였다. <반지의 제왕 3>을

볼 때는 "언제 끝나나"는 심정으로 시계를 몇 번이나 봤지만-재미없어서는 결코 아니다-이 영화를

보는 도중 거푸 시계를 본 건 "우 씨, 벌써 이렇게 지났어?"라며 안타까워하기 위해서였다.

이러저러한 인연으로 얽힌 십여명의 등장인물들이 동시에 사랑을 시작하고, 갈등을 일으키며,

해결을 하는 과정이 너무도 아름답고 로맨틱하게 그려져, 시종일관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느끼하게 생각했던 휴 그랜트도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웠는데, 특히나 그가 수상 관저에서 춤을

추는 장면은 이 영화의 압권이라 할 만한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그리다 보니 그 해결이

억지스러운 부분도 없지 않지만, 그 정도는 얼마든지 봐줄 용의가 있다. 영화는 일단 재미있어야

한다는 게 빈곤하기 짝이 없는 내 철학이니까.

 

어제가 천안 멀티플렉스에서 <러브 액츄얼리>가 상영되는 마지막 날이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극장에서 영화의 간판을 내렸을 테니, 못본 분들은 비디오가 출시되기를 기다려야 할 듯하다.

나 역시 약간의 이타심을 가지고 있는지라 내가 본 재미있는 장면들을 몇 개만 적어본다. 못본

분들에게 위안이 되었으면 하고.

 

1) 수상인 휴 그랜트가 눈독을 들이는 여자가 있다.
휴: 남자친구는 있어?
여자: 헤어졌어요. 내 허벅지가 굵다고 했어요 (내가 봐도 굵은 건 맞다).
휴: 나쁜 놈 같으니... 내 권력 이용해서 놈을 암살해줄까? 전화만 하면 공수부대가 떠.

 

2) 마약으로 젊은 시절을 허송세월한 원로가수가 희한한 노래로 뜬다. 그 사람이 나올 때마다 난

배꼽을 잡았는데, 그 중 가장 재미있던 장면이다.
생방송에 나온 그 가수: 어린이 여러분들! 마약하지 마세요!(처음으로 바른말 하네 싶었다)
팝스타되면 공짜로 얻을 수 있거든요!
방송MC: (당황하며) 광고듣죠!

 

3) 시종 무례한 요구만 하던 미국 대통령이 휴 그랜트가 좋아하는 여자를 건드린다. 열이 받은

그랜트 왈, "우리나라는 위대한 나라입니다. 세익스피어, 처칠...어쩌고....그리고 베컴의 나라....

위협만 하는 자는 친구가 아닙니다!"
이 말과 동시에 휴 그랜트는 영웅으로 떠오른다. 어떤 가수는 "나의 영웅에게 이 노래를 바칩니다"

라며 노래를 시작하는데, 그랜트가 춤을 추는 건 바로 이장면이다. 블레어 총리가 시종일관

부시의 푸들 노릇만 하는 게 영국인들로서도 자존심이 상할테니, 영화 속에서나마 이런 한풀이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나중에 된서리를 맞더라도, 미국 대통령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대통령을

살아생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간 노무현 자식.... 그런데 우리나라의

위대성은 어떻게 설명할까? "광개토대왕, 안중근.유관순, 서태지의 나라" 이렇게?

우리야 다 알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다. 위대하다는 게 공감을 얻으려면

그런 사람이 필요한데....

 

4) 목걸이
목걸이 판매상으로 <미스터 빈>으로 유명한 로안 왓킨슨이 깜짝출연한다. 얼굴만 봐도 어찌나

웃긴지. 하여간 영화 속의 사장은 젊고 아름다운 부하직원으로부터 구애를 받는데, 그녀를 위해

잠깐 짬을 내서 비싼 목걸이를 산다. 남편의 주머니에서 그 목걸이를 본 아내, "올해도 스카프인

줄 알았는데 이게 웬일이야?"라며 감동한다. "여보, 앞으로 툴툴거리지 않을게요"라는 카드도

쓰고. 하지만 그녀가 받은 선물은 고작 CD 한 장. 인간은 그럴 때 가장 배신감을 느끼는 법이다.

여인은 혼자 방으로 올라가 오열하는데, 그때 의기양양하게 그 목걸이를 건 젊은 여직원의 모습이

클로즈업된다. 오죽하면 보는 내가 그 여인이 불쌍할까. 남자들이여, 바람을 피우려면 들키지나

마라. 들키는 건 아내를 두 번 죽이는 결과다.

 

5)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 나왔던 멋진 남자-사실 휴 그랜트의 반도 안되는-는 포루투칼 여자를

좋아한다. 그녀를 위해 포루투칼어를 열심히 배우고, 그녀가 일하는 카페에 가서 청혼을 한다.

물론 포루투칼어로. 그러자 여자는 유창한 영어로 대답을-예스!라고-하는데, 그 남자가 묻는다.
남자: 영어 배웠어?
여자: 혹시 몰라서요.

 

아이, 응큼해요 둘다!

 

6) 샘이라는 애도 가끔 사람을 웃기는데, 드럼을 치는 그는 보컬을 맡은 여자애를 좋아한다.

여자가 노래한다. "사랑해요, 그대!" 그러면서 여자는 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데, 그때 샘의

표정은 의기양양 그 자체. 하지만 노래 가사에는 '그대(and you!)'가 무지 여러번 나온다.

그때마다 손가락을 바꿔 다른 사람을 가리키는 보컬 여자. 그때 배신감에 젖은 샘의 표정은

휴 그랜트의 춤과 더불어 <러브액츄얼리>의 3대 유머 안에 들만하다. 깜찍한 녀석...

 

7) 마지막 교훈. 남녀가 잘 때는 휴대폰을 끄자! 무슨 소리인지는 보면 안다.
8) 의문점. 휴 그랜트에 관해 쓰다가 느낀 건데, 걔는 누가 옆에서 "휴-" 하고 한숨쉬면

"나 불렀어?"라고 말하지 않을까?
9) 의문점 2. 샘의 아버지는 영화 속에서 아내를 잃은 걸로 나온다. 샘이 왜 재혼하지 않냐고 묻자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한다. "클라우디아 쉬퍼가 아니면 재혼 안할거야" 그런데, 아버지는

학예회에서 다른 학부형의 어머니를 만나는데, 첫눈에 전기가 통한다. 샘이 말한다.

"어서 고백하세요!" 그 여자, 클라우디아 쉬퍼를 닮았던데, 맞는지 모르겠다. 유명한 사람이 워낙

많이 나오긴 했지만, 쉬퍼도 나온 걸까?  나중에 알아보니 쉬퍼 맞단다. 카퍼필드의 애인인 그 쉬퍼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축구 경기에서, 종료를 몇분 남기지 않고 리드를 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 리드가 한골차라면, 시간이 빨리 가기만을 바라게 된다. 그리고 대개는 그 바램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노력한다.

먼 옛날, 박정희가 만들어 축구열기의 확산에 공헌했던 박스컵이 기억난다. 그때 우리나라는 꼭 화랑-충무 두팀이 출전을 했는데, B팀 격인 충무 팀도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선전을 하곤 했다. 1진은 아니었지만 이름만큼은 위압적이었던 모 팀과 가진 4강전에서 충무는 후반을 얼마 안 남기고 센터링을 헤딩으로 연결, 2-1로 리드를 잡았다. 나도, 관중도, 선수도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때 충무 선수들이 공을 밖으로 걷어 내는데, 어찌나 세게 차는지 스탠드 중단까지 공을 차냈다. 지는 팀이야 얄밉겠지만, 그 장면들이 어찌나 자랑스럽던지. 하지만 지금은 한 경기에 사용하는 공이 워낙 많고, 멀리 차내봤자 옆에서 바로 던져주는 바람에 이런 식의 시간끌기는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

또 흔히 사용하는 게 부상 빙자다. 이기는 팀의 선수들은 별 접촉이 없어도 혼자 나자빠지고, 아파 죽겠다면서 뒹군다. 오버가 심하면 들것에 실려가기도 하는데, 이런 짓은 워낙 얄미운 느낌을 줘서 엘로우카드를 받기 십상이다. 게다가 요즘은 이런 것도 다 계산을 해 추가시간을 정하니까 심리적인 면 외에는 별 효과가 없는 듯하다.

그다음으로 쉬운 게 골킥을 한다든지, 프리킥을 할 때 시간을 끄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끌 수 있는 시간은 몇초가 고작인데다 심판의 엄격한 경기진행으로 인해 필히 경고가 주어진다. 지금까지 말했던 게 고전적인 방법이라면, 현대축구는 좀더 세련된 방법으로 시간을 끈다. 그 중 하나가 골라인 근처에서 상대 선수를 등진 채 서 있는 것. 상대선수는 공을 빼앗기 위해 파울을 해야하고, 그게 아니면 공은 옆줄 밖으로 나가 드로잉을 허용한다. 개인기가 좀 되는 브라질 애들이 이 방법을 쓰는 걸 꽤 여러번 봤는데, 우리나라같이 다리가 짧고 개인기가 떨어지는 팀이 쓰기엔 어려운 방법이다.

이번 청소년축구 결승에서 스페인과 만난 브라질 팀은 좀더 고차원적인 시간끌기를 선보였다. 상대 골라인 근처에서 공을 가지고 있다가, 수비가 달라붙으면 터치아웃을 시킨다. 코너킥이 주어지며, 그 코너킥을 바로 옆에 있는 선수에게 패스, 시간을 보낸다. 다시 수비가 달라붙고, 그 수비를 향해 열나게 세게 공을 찬다. 다시 코너킥. 이런 광경이 몇차례 계속되자 급기야 심판은 경고를 줬는데, 이 광경을 보던 해설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런 식의 시간끌기는 처음 보네요"

최근 브라질 축구는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작년 월드컵에서 우승을 했고, 올해 17세, 20세 팀이 우승을 했다 (중앙일보에 의하면 올림픽 금메달만 따면 싹쓸이를 하는 거란다). 그렇긴 해도 브라질 축구는 실력에 비해 더티 플레이가 너무도 많다. 작년 월드컵 터키와의 대결에서 상대 선수가 찬 볼에 무릎을 맞은 히바우두가 얼굴을 감싸며 쓰러진 것도 그중 하나다. 우리나라 심판은 그 액션에 속아 터키 선수에게 경고를 줬는데, 나중에 경기장 내에 설치된 카메라에 히바우드의 헐리웃 액션이 들통나 벌금을 물었었다. 이번 20세 팀이 우승을 하긴 했지만, 리드를 잡은 뒤에는 지금까지 언급한 시간끌기 전략이 총동원되어, 넘어진 뒤 안일어나다 레드카드를 받는 등 치사한 경기를 했다. 일본에 패한 우리나라 청소년팀이 바람만 불어도 넘어지고, 넘어진 뒤에는 언제나 애처로운 눈으로 심판을 쳐다보던 행위가 네티즌들의 엄청난 비난을 받았었다. 여러명을 제끼고 환상적인 골을 넣는 것을 배워야 할텐데, 그들은 왜 그런 건 관두고 단점만 배운 걸까. 그게 더 쉬워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분자생물학 기법이 개발된 1995년, 사람들 중에는 영구동토에 묻힌 시체에서 스페인독감의 바이러스를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이 두그룹 있었다. 한팀은 던컨이라는 엄청난 미녀였고, 또하나는 아까 언급한 의사와 1951년 알래스카에 갔었던 훌틴이었다. 두 팀의 스타일은 판이하게 달랐다.

먼저 미녀팀. 이 팀은 최고의 선수들로 연구팀을 꾸렸다. 지리학자, 바이러스학자, 국립 의학연구소장... 무덤 발굴 전문회사 (이런 회사도 있나?), 지반 조사 레이더팀....
"계획을 짜고 허가를 구하고 온갖 자질구레한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다국적 팀을 구성하는 일로 몇달이고 몇년이고 시간을 보냈다]
연구비도 많이 받았다. 국립보건원에서만 15만 달러를 받았다나. 모든 과정은 언론에 공개되었고, 미녀는 기자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일을 진행했다. 계획을 세우는 데만 6만달러가 넘게 들었을 정도.

다음으로 훌틴팀. 의사는 훌틴에게 물었다. 언제쯤 떠날 수 있느냐고. 72세의 훌틴은 이렇게 대답해 의사를 놀라게 했다.
"이번주는 곤란하고, 다음주엔 떠날 수 있을 것 같네"
훌틴은 결국 삽 한자루를 가지고 동토로 떠나고, 비만이라 지방이 많아 단열 효과를 냈던 여인의 허파를 얻는 데 성공한다. 그 조직에서 의사는 바이러스의 백신을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헴아글루티닌의 염기서열을 밝혀내는 쾌거를 이룩한다. 훌틴이 쓴 돈은 단돈 3천달러에 불과했다.

염기서열이 밝혀지고 난 뒤 한참 후, 던컨 팀이 아이슬란드에 도착했다. 땅을 파본 던컨은 깜짝 놀랐다. 그 땅이 녹았다 얼었다를 반복해서 시체가 다 부패해 있었던 것. 우주복을 입고, 안전에 대비한 장비들을 잔뜩 갖춰서 갔는데 말이다. 그렇게 많은 돈을 들이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운 그 프로젝트는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삽 한자루만 가지고 가는 무모한 면이 있지만, 힐튼은 치밀해야 할 부분에는 굉장히 치밀했다.
[...배송 중에 유실되면 복구할 수 없으니...표본을 나누어 4개의 소포로 보냈다...페더럴 익스프레스를 이용해서 하나를 보내고, 유나이티드 어쩌고를 통해 또 하나를...세째날엔 우체국의 속달 서비스를 이용해 또 하나...네째 날에는 다시 페더럴 익스프레스...]
4개 모두 의사의 연구실에 잘 도착했음은 물론이다.

나를 굳이 분류한다면 던컨 스타일에 가깝다. 뭘 하라고 하면 일단 공부를 한다고 몇달, 그다음에 뭘 주문한다고 다시 몇달...일은 결국 안되고, 다른 사람이 나선다. "그냥 내가 할께" 이럴 땐 삽 한자루만 달랑 가지고 현지로 간 훌틴의 무모함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일을 할 때는 갑자기 훌틴이 된다. 세번 원심분리를 하라면 두번쯤 하고 말고, 잘 섞으라면 대충 섞는다. 그러니 맨날 결과 나오는 게 엉망이지! 이럴 때는 던컨의 세심함을 배워야 하는데, 난 반대로 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훌틴이라는 병리학자가 있다. 이 사람은 1918년 독감으로 죽은 사람들로부터 바이러스를 부활시킬 수 있는 기발한 방법을 생각해 냈다. 영구동토, 그러니까 북극에 가까워서 언제나 땅이 얼어 있는 지역-예를 들면 알래스카-에는 시체가 부패하지 않고 남아있을 것이며, 바이러스도 얻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발상이었다. 물론 자기 생각은 아니고 어떤 나이든 교수가 한 말에서 힌트를 얻었지만, 그 말을 들은 사람들 중 실천으로 연결한 사람은 훌틴이 유일했다.

1951년, 훌틴은 계획서를 써서 연구비 신청을 했다. 2달이 지나도 답이 안온다. 아는 사람의 백을 동원해 알아봤다. 백으로 동원된 하원의원의 대답이다.
[육군에서 훌틴의 아이디어를 도용해, 훌틴이 하겠다고 제안한 바로 그 일을 하기 위해 알래스카 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세상에나, 이런 나쁜 놈들이 다 있나. 학문하는 사람이 이러면 되겠나. 열이 받은 훌틴은 다른 루트로 돈을 구해 알래스카로 떠나고, 그보다 먼저 시체의 허파 조직을 채취한다. 사필귀정이라 할만하지만, 유감스럽게 바이러스를 얻는 데는 실패하고 만다.

또다른 얘기. 그로부터 40여년이 지났을 때, 한 무명 의사가 포르말린에 담궈져 보관되고 있던 1918년 독감의 희생자 샘플로부터 바이러스의 일부를 얻는 데 성공하고, PCR로 증폭한 뒤 염기서열을 알아낸다. 대단히 획기적인 결과였다.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연구팀은 <<네이쳐>>에 논문을 보내기로 했다 (다 알다시피 네이쳐는 세계에서 제일 좋은 잡지로, 나도 초창기엔 여기다 논문을 실을 생각을 했었다). 런던 편집실에서 전화가 왔다. "정말 대단합니다. 당장 논문을 보내세요".... 하지만 어이없게도 <<네이쳐>>는 논문을 다시 돌려보냈다. 심지어 전문가들에게 검토조차 의뢰하지 않고 거절한 거다...그들이 보낸 논문이 검토를 요청할 만큼 흥미롭지 않다고 되어 있었다]

이게 말이 되는가? 그래서 그 의사는 라이벌 잡지인 <<사이언스>>에다 논문을 보냈다. 역시 게재불가. 이유가 뭘까? 논문을 검토한 과학자들에게 그 의사가 너무 생소했던 거였다. "독감의 비전문가들이 이런 걸 한 게 충격이었을 거다"라고 그 의사는 말했다. 결국 몇몇 중견 과학자들이 그를 대신해 중재를 한 끝에 논문이 게재되었는데, 그러자 난리가 났다. 대단한 업적이니 뭐니 하면서.

그 의사의 회상이다. "나는 뭔가 중요한 일을 해내면 권위 있는 학술지에서 앞을 다투어 출판해 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의 결론이다. "그들은 평범하고 고리타분한 논문을 출판하기 위해 혁명적인 논문을 거절한다"

2년 쯤 전, 나랑 나이도 비슷하고 외모도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네이쳐'에 논문을 실은 적이 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난 놀라서 숟가락을 떨어뜨렸는데, 나중에 그가 강연을 할 때 이런 말을 했다. 자기가 이러이러한 일을 해서 네이쳐에 보냈는데, 출판이 자꾸 미뤄졌다. 나중에 알고보니 심사를 맡은 놈이 그 논문을 붙잡고 있으면서 독일의 연구팀에게 연락해서 그 일을 빨리 해버리라고 했다는 거다. 술을 못하던 그는 그 얘기를 듣고 안하던 소주를 마셨다는데, 그는 그 사건을 '약소국의 비애'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보니 강대국인 미국에서도 이런 일은 있다. 그러니 약소국의 비애라기보다는 못가진 자들의 비애라고 하는 게 옳을 것 같다.

논문을 싣는 것도 이렇듯 정치역학이 중요하다. 최고 권위를 가진 학술원 회원이 되는 것도 정치가 빠질 수 없다는 것을 최근에 알았다. 정치, 그놈의 정치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