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도 말한 적이 있지만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다. <개미혁명>을 읽은 뒤부터 그의 팬이 되었는데, 그 뒤부터 그의 책이 나오는 족족 사고 있다. 어제 책방에 그가 쓴 <뇌>라는 작품이 있기에 대번에 사버렸는데, 그책을 사고나자 갑자기 베르베르에 관해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르베르는 17살 때부터인가 그의 데뷔작 <개미>를 쓰기 시작한 천재임에도 그의 조국인 프랑스에서는 도통 인기가 없었다. 그런 베르베르가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작가"라는 평을 들으며 대부분의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들고 있으니 괴이한 일이다. 외국 책을 번역하는 경우는 그 나라에서 뜬 책을 하는 게 일반적인데, 베르베르의 가치를 알아본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탁월한 선택이라 할만하다. 베르베르도 이에 대해 매우 고마왔는지 <개미혁명>에서도 한국 남자가 나오고, <천사들의 제국>에서도 한국 여자 한명을 등장시킨다.

한국인이 베르베르를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 버스안에서 잠시 생각해 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1) 천재에 대한 경배: 다른 나라는 안가봐서 모르겠지만 우리 부모들은 자녀교육에 정말 열성이다. 특히나 영재에 대한 관심은 가히 메가톤급인데, 베르베르는 보기드문 천재이니 그가 인기있는 건 당연하지 않는가.
2) 교양; 마광수 교수는 이문열이 뜬 이유를 "교양주의" 탓이라고 했다. 즉, 읽는 독자에게 뭔가 많은 게 머리에 남았다는 뿌듯함을 준다는 거다. 베르베르의 책 역시 그런 지적 포만감을 독자에게 제공한다. <개미혁명>을 비롯한 그의 책은 에드몽 웰스라는 가공의 인물이 쓴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이 곳곳에 소개되어 있는데, 다른 곳에 가서 써먹기 딱 좋을 그런 내용들이다. 내가 다른 애들한테 아는 체를 한다고 하면 그 소스는 다 그거다. '상대적...'은 나중에 단행본으로 나오기도 했다.

3) 유머: 다른 사람들은 숀 코너리라고 답하던데 난 007 시리즈 중 가장 좋아하는 제임스 본드가 로저 무어다. 로저 무어는 숀 코너리나 브로스넌이 갖지 못한 '유머'를 갖고 있다. 자연스러우면서 세련된 그의 유머는 외양만 비슷하다고 흉내낼 수 있는 건 아니다. 베르베르의 책은 교양과 더불어 유머가 넘친다. 90년대 이후 우리 나라는 못웃기는 사람이 나쁜 인간으로 취급받을 정도로 유머가 존중되고 있다. 유머감각이 뛰어난 베르베르가 90년대부터 뜨기 시작한 건 그래서 당연하다.

4) 이름: 우리 조상들은 자고로 3.4조나 4.4조를 좋아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4.4조로, 듣기에 아주 편하다. 문학성이 뛰어난 요시모토 바나나가 4.3조라는 이유로 배척받는 걸 보면 그의 이름이 인기에 한몫을 했음을 알 수 있다.

"http://lestis.wo.to"라는 홈페이지를 운영 중인 최계현님은 <천사들의 제국> 독후감에서 이런 말을 한다.
1) '개미혁명'은 '개미'의 속편격이므로 "전작 '개미'를 읽지 않는다면 스토리 이해가 다소 무리가 있을지 모"른다.
2) "천사들의 제국은 그 '타나토노트'의 후속편이다. 혹시나 타나토노트를 읽지 않고 천사들의 제국을 읽은 사람의 감상은 어떨지가 궁금하다"

1)에 대한 답변: 난 아직 <개미>를 읽지 않았다. 베르베르의 팬을 자처하면서 그의 출세작을 읽지 않은 게 쑥스럽지만, 3권으로 된 <개미혁명>을 읽으면서 개미 이야기를 지겹게 들었는지라 다시금 3권짜리 <개미>를 읽고 싶진 않았다. <개미혁명>만 읽어도 스토리 이해에 전혀 문제가 없는 건 물론이고. 이런 얘기를 하고 싶다. <다이하드 2>를 본 사람이 전작인 <다이하드>를 보면 재미있을까?

2)에 대한 답변: 역시 난 <타나토노트>를 읽지 않고 <천사들의 제국>만 읽었다. 베르베르의 팬이 된 게 <타나토노트>가 나온 한참 후이기 때문이다. <천사...> 역시 그 자체로 충분히 재미있었고, 굳이 타타토노트를 읽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팬이라면 그사람이 쓰던 휴지 한조각까지 모아야 할테지만, 난 베르베르의 진정한 팬은 아닌 모양이다. 내가 팬을 자처하는 스타가 내겐 너무도 많다보니-유선미도 있지 않은가-모든 스타에게 정성을 쏟을 수가 없는 게 안타깝다. 뭐, 이제부터 잘하면 되지 않겠나. 하여튼 베르베르를 알게 된 걸 난 큰 행운으로 여긴다.

끝으로 최계현님의 홈에서 몰래 훔쳐온, 자기나라에선 안떴는데 한국서 히트친 경우 몇가지를 소개한다.

[자국 또는 다른 나라에서는 안뜨는데 유독 한국에서 인기를 끄는 몇가지 케이스가 있다. 영국 그룹 '리알토'가 그런 케이스였는데, 영국 차트에서는 별 반응이 없다가 무슨 연유였는지 유독 유리나라에서만 인기가 있었다. (Monday Morning 5:19을 기억하는지..) 그러다가 한국에서 적당히 인기가 시들어져가고 있을때 뒤늦게 빌보드에 올라 한동안 높은 순위를 유지하며 대박을 터뜨렸다. 그후 그들은(베르베르와 마찬가지로) 한국이 행운의 나라로 여기게 되었을 게다. 그들을 볼때 마다 한국 공연때 베이스드럼 전면에다 어설프게 '리알토'라는 한글을 검정테이프로 붙였던 것이 기억난다. 또 다른 케이스로는 '소리가 좋은 나라'라고 말하는 케니G와 'Betty'의 덴마크 그룹 Blink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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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07-12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쓰고난지 한참 후, 동네 책 대여점이 망했습니다. 책을 대방출할 때 몇권을 샀는데, 그중의 하나가 <타나토노트>입니다. 역시나 재미있더군요. 베르베르가 재미있는 건 <천사들의 제국>까지인 것 같습니다. 그 다음에 나온 <나무>랑 <뇌>는 그다지 재미가 없었으니까요. 그리고...4.3조에 대한 얘기, 농담인 거 아시면서^^
 

 

 

 

단골서점에서 이 책을 봤을 때, 솔직히 사고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그런 책이 한두권이 아니긴 해도, 여기저기에 기고한 소위 잡글들을 모아서 책을 펴낸 건 왠지 성의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자가 귀에 익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내가 망설인 이유였다. 내게 낯익은 저자들은 최소한 기본은 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내가 그책을 산 건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라는 저자의 이력 때문이었다. 진보적인 분의 책으로부터 뭔가 배울 점이 있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감... 하지만 당장 읽고싶게 만드는 카리스마가 없던 탓에 난 책을 사고 나서도 한달 이상 구석에 쳐박아 놓았었다.

엊그제 새벽, 잠이 안와 뒹굴다가 우연히 이책이 눈에 띄었기에, 담담한 맘으로 첫페이지를 펼쳤다. 진흙 속의 진주라고나 할까, 책은 의외로 재미있었고, 번번히 내 무릎을 치게 만들었다. 의미와 재미를 모두 겸비한 그런 좋은 책... 책을 보느라 밤을 꼴딱 샌 건 실로 오랜만의 일이다.

잠시 생각을 해봤다. 우리는 책을 왜 읽는가? 뭔가를 배우기 위해서? 그저 시간을 떼우기 위해? 킬링타임용 책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책'이라 함은 남에게 뭔가를 줄 수 있는 그런 것이어야지 않을까? 최소한 난 그런 목적으로 책을 읽는 것 같다. 하지만, 뭔가를 배우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열린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과연 난 그런 자세를 갖추고 책을 읽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보자. 일전에 김종찬 씨가 쓴 <신문전쟁, 속지않고 읽는 법>을 읽은 적이 있다. '정부가 비판언론을 길들이기 위해 세무조사를 하고, 다른 신문을 동원해 비판언론을 공격한다'는 내용을 아주 잘난척을 하면서 써놓은 책이었는데, 난 그걸 읽는 내내 맘이 불편했다. 그래서 다 읽고 나서는 "이인간 책 다신 안읽어!"라는 생각을 하기까지 했는데, 그와는 대조적으로 <시대유감>을 읽으면서는 마음이 아주 편했다. 그건, 군가산점, 구성애의 아우성, 남녀평등 등 일련의 소재들에 관해 저자와 나의 생각이 비슷한 데서 오는 편안함이었다.

그러니깐 난 책을 통해 내 생각을 교정한다든지 할 마음이 없는 거다. 다시 말해 내가 책을 읽는 목적은 책을 읽으면서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었던 생각들이 옳은 것임을 확인하고픈 거였다. 진보적이라 이름난 한신대 교수의 책을 산 것도 같은 맥락이었고.

공부가 많이 부족한 탓에, 내 사상은 아직 허점이 많다.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려 노력하지만, 잘먹고 잘사는 내 환경 탓인지 진보에 어긋나는 주장을 펼 때도 많고,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굉장히 극우적인 판단을 내리기도 한다. 즉, 일관된 어떤 신념의 체계를 갖지 못했다는 얘기다. 내가 다른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닌 바에야 책을 통해서 그 체계를 갖출 수밖에 없는데, 나처럼 닫힌 자세로 책을 읽는다면 책에서 뭔가를 배우는 건 불가능하게 된다. 맘을 비우고 책을 읽는다고 해도 나와 조금만 다른 주장을 접하면 금방 털이 곤두선다.

30이 넘으면 생각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는 건 그래서 그런 것 같다. 역시나 책은 10대, 20대 때 읽어야 한다. 30이 훨씬 넘은 이제사 책을 읽는다고 허둥대 봤자 이미 때는 늦었다. 이제라도 독서를 하는 게 안하는 것보단 나을 것이지만,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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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령 하나를 만났다. 군견들에게 동양안충이란 기생충이 많이 걸려있기에, 동양안충 일을 함에 있어서 협조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일전에 촌지를 준 적이 있어서 그런지 이번에도 노골적으로 촌지를 바라는 듯 보였고, 다방에 앉아 논문 사이에 돈봉투를 내밀었더니 아주 능숙하게 받더니 "잘 읽어보겠다"고 한다. 흥분할 일은 아니다. 우리 사회란 게 촌지 없이 돌아간다고 믿는 순진한 사람이 어디 있는가. 군인들도 나름대로 어려운 게 많을테고.

언젠가 아버님을 입원시킬 때의 얘기다. 의사는 수술을 받으러 입원하라고 하는데 원무과에선 입원실이 없단다. "연락해 주겠다"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고, 전화를 걸면 "입원실이 안났다"고 했다. 할수없이 원무과 직원에게 찾아가 30만원을 건넸다. 입원실은 그 즉시 났다.
그사람: 미스김, 10x5호 내줘!"
미스김: 그병동에 빈방 없다고 했쟎아요?
그사람: 방금 생겼어.

따지고보면 우리 나라는 촌지 공화국이다. 의사들은 물론이고 어느 직종이나 일이 잘되게 하기 위해선 촌지가 필요하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촌지를 당연하게 들어가는 비용 쯤으로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갖는 의문. 그런데 왜 사람들은 교사의 촌지 얘기만 나오면 입에 거품을 물고 비난할까?

한사람에게 물어봤더니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대답한다. 글쎄다. 과연 우리가 선생님들을 도덕적 존재라고 믿고 있을까. 고교 때까지 모범생이었던 나도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 그렇게 많지 않다.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우리 선생님들을 그리 존경하는 것 같진 않다. 은희경이 쓴 <마이너리그>를 봐도 교사들이 그리 긍정적으로 그려져 있지 않고, 공지영 자신의 체험으로 추측되는 단편 <광기의 역사>는 읽는내내 전율을 느껴야 했다. 한때 큰 인기를 끌었던 <여고괴담>이나 <친구> 같은 영화에서도 교사들은 성희롱을 일삼거나 폭력에 물든 존재일 뿐이다. 그런 영화를 보면서도 별반 거부감이 들지 않는 건, 나 역시 그와 비슷한 선생님들 슬하에서 중고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리라.

'도덕적이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이유로 교사의 촌지가 비난받아야 한다면 국민의 공복인 공무원들의 촌지는 괜챦다는 것일까? 공무원은 지켜야 할 도덕도 없나?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김종엽 씨가 쓴 책을 읽다가 풀렸다. 그의 말이다.

[다른 거래에서 촌지를 주지 않아 손해를 입게 된다면, 그 손해를 감수해야 할 사람은 바로 촌지를 주지 않은 사람이 된다. 이것은 도덕적 자유의 행사 댓가이며, 자유인은 자유의 행사 대가를 스스로 부담하는 자이다. 그러나 교사와의 관계에서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사람은 촌지를 주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그의 자녀가 된다. 그리고 그 손해는 바로 어린이의 인격, 자유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의 손상으로 나타난다. 그러니 이런 상황은 일종의 인질극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교사는 아이들을 인질로 잡고 있는 사람이며, 촌지는 몸값이 되는 것이다 (<시대유감>, 138쪽)]

어려운 환경에서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물을 흐리는 건 언제나 그 '일부'며, 그 '일부'는 부정적인 선입견을 확대재생산한다. 어찌되었건, 내게 학교를 다니는 아이가 없다는 건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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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고나서 나에게 정착된 두가지 경향이 있다. 첫번째는 이제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게 굉장히 힘들어졌기에, 기존에 있던 친구들을 유지, 보수, 관리하며 여생을 살아야겠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만나서 불편한 사람을 억지로 보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불편한 자리에 나가 억지로 만든티가 역력한 웃음을 짓곤 했는데, 이제 그런 짓을 하기가 귀챦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지라 때로는 만나기 싫은 사람도 봐야 하지만, 앞으론 피할 수 있으면 피하겠다는 얘기다.

두번째 원칙에 너무 충실해져서인지 최근 들어서 친구를 만나면 단점만 보이고, 그래서 안만나는 친구들이 늘어나는 느낌이다. 엊그제 얘기. 초등학교 때부터 만나는 친구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야구를 보잔다. 20분쯤 고민하다 "간만에 연락했는데..."란 맘에 그러자고 했다. 두산이 안타를 4개인가 치고 7-0으로 지는 바람에 경기 자체는 하나도 재미가 없었는데, 엘지팬인 내 친구 두명, 특히나 엘지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친구 하나는 신이 났다. 날도 덥고해서 집에 가고픈 날 붙잡더니 "술이나 한잔 하자"고 한다. 그러자고 했다. 간만에 만났으니깐.

술마시는 건 사실 별 문제가 아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문제는 장소다. 이것들은 만나기만 하면 단란주점으로 날 끌고간다. 몇번 끌려가 봤지만 사실 난 단란주점에서는 어떠한 재미도 못느낀다. 돈 10만원에 여성이 두시간 동안 성적으로 착취를 당하는 것도 영 맘이 불편하지만, 파트너로 나온 여자의 손도 안잡는 내가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내가 손을 안잡는 건 그런 맘이 없어서가 아니라, 친구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러고 싶지가 않아서다). 정말 웃기는 건 계산을 할때다. 카드로 계산을 하면서 그 친구는 늘 이런다. "야, N분의 1이야" 머리숫자대로 똑같이 내잔 말이다. 난 그게 싫다. 싫다는 사람을 끌고 갔으면 지가 돈을 내던지 하지, 두시간 동안 우두커니 앉아 여자랑 몇마디 주고받고선 30만원씩 내라는 게 잘 용납이 안되었다.

그래서 난 언제나 단란주점 가는 것에 저항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숫자의 논리'에 밀려 말처럼 끌려갔다. 그런데 그날 역시 그 친구들이 X-point라는 아주 후진 단란주점에 가잔다. 이번엔 좀 세게 버티었다. 십분 가량 싸우다 결국 타협을 본 게, 자기가 아는 Bar에 가잔다. 그동네에도 맥주를 마실 곳은 많았지만 굳이 차를 타고 그 Bar로 갔다. 아주 귀여운 사이즈의 양주 한병, 그리고 과일안주 하나. 술을 끊은 난 양주 한잔만 받아놓고선 물만 마셨고, 노래도 가능한 곳인지라 친구들은 노래도 몇곡 했다. 좀 화려해 보이는 Bar라 만만치는 않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막상 36만원이 나온 계산서를 보곤 좀 놀랐다. 노래 5곡을 부른 게 5만원이라나. 친구의 말이다. "N분의 1이야!"

내가 12만원을 내야 한다는 얘긴데, 그보다 더 많은 돈을 쓸 때도 물론 있지만 이번엔 왜이렇게 돈이 아까운지. 우아한 카페에 가서 맥주를 아무리 많이 마셔도 십만원이 안될테고, 좀 덜 우아한 곳-내가 좋아하는 양재동 바라든지-에 가서 양주 두병을 마신다 해도 그렇게까지 나오진 않을 것이다. 아, 돈아까와....

돈도 돈이지만, 그들과 있는 내내 맘이 편치 않았다. 가장 친한 친구라면 같이있는 것만으로 편해야 할텐데,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타인에 대한 배려가 별로 없다. 둘다 사업을 하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업 얘기만 계속해 날 멍청하게 만든 것도 그렇고, 친구 차를 타고 오는 동안 계속 어디론가 전화만 해 굉장히 심심했다. 무료함을 달래려 나도 아는 애한테 전화를 했다가 잠자는 걸 깨워버렸다. 아무리 이쁜 여자라 해도 자다 일어난 목소리-"여-보-쇼?"-는 과히 이쁘지 않으며, 인간의 소리가 아닌 것처럼 들리기 마련이다. 물론 굉장히 미안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관계가 지금까지 이어올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그건 내가 "재는 원래 그런 애야"라면서 친구의 특성을 인정하고 그걸 기꺼이 감내해 왔던 데 있다 (참고로 그 친구의 별명이 '파쇼' 혹은 '장군'이다). 그러던 것이 나이가 들고 사회적 지위가 조금 올라가자 내 인내력이 많이 감소했고, 그래서 그 단점들이 눈에 보이는 것이리라. 물론 나 자신도 그렇게 편한 인간이 아닐 것이며, 내 친구들 중에는 나의 그런 점을 알면서도 그러려니 하고 참은 애들이 많을 것이다. 30세가 넘어서 "너 이런 게 나쁘니 고쳐라"라고 말하는 것은 "우린 안맞아. 그러니 그만 만나자"라고 말하는 것과 같을 것이니깐.

편하기 짝이없는 친구 관계지만 그 관계를 잘 유지하는 건 이렇듯 어려운 일이다. 사소한 단점을 빌미로 인해 하나씩 하나씩 맘 속에서 지워 나간다면 내 주위에는 친구가 하나도 남지 않겠지. 친구의 단점을 보기보단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인내력을 키워 나가는 게 더 중요한 게 아닐까?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막상 가슴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그래서 갈수록 편협해지는 내 자신이 굉장히 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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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1-23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정말 원문이 여기 있었군요?? 가르쳐주신 주소는 이게 아니라 딴게 연결되서 날짜로 찾으니 나오네요...아까는 왜 못찾았지?? ^^;; 고롬 이걸로 다시 퍼갈께요. 원문 위치 가르쳐주셔서 감사해요~~^^
 

 

 

 

 

'농담'은 쿤데라의 소설제목이다. 까뮈나 카프카에 주눅이 들어 유명소설가들의 책은 아예 안보는 나였지만 얼마 전 읽었던 쿤데라의 책이 너무도 재미있어, 그가 쓴 책을 다 샀고, '농담'은 그중 하나다. 거기 나온 얘기를 조금만 한다.

주인공(그냥 '루'라고 하자)은 농담을 잘못해 군대에 끌려가 탄광 일을 하게 되는데, 군대에 있으면 알다시피 정력이 뻗치지 않는가. 그런 루가 외박을 하다가 한여자를 알게 된다. 당연하게도 루는 그녀에게 한번 하자고 조른다. 하지만 그녀는 좀처럼 주지 않고, 루는 그녀에게 "왜 처녀성에 집착하느냐. 한번 하자. 그건 좋은 거다"고 설득한다.

그러던 중 부대의 중대장이 바뀌었는데, 아주 악독한 인간이라 외출, 외박을 아예 못하게 해버린다. 루의 부대로 찾아와 철조망 너머로 그를 바라보는 그녀, 루는 그녀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한다.
"외박이 금지되었쟎아. 그때 하잘 때 할껄 그랬지!"
그녀는 그때의 일을 무지하게 후회한다고 말한다. 다시금 땡기는 루, 사람들을 돈으로 구워삶아, 인근 주민의 집을 빌리고, 거기서 한번 하기로 한다. 그거 한번 하려고 루는 엄청난 위험을 감수했고, 적쟎은 돈을 써야했다. 철조망을 통과해 그녀를 만난 루, 키스를 조금 하고 본격적으로 하려는데, 이게 웬일인가. 그녀는 또 거부한다!

달래보기도 하고, 내가 얼마나 비싼 댓가를 치룬 줄 아느냐고 협박도 하고 해서 다시 하려는데 또 거부. 결국 그는 강제로 그녀의 옷을 벗기려 한다. 브라자를 찢자 아주 격렬하게 저항하는 그녀, 죽어도 못준단다. 화가난 루는 결국 그녀의 따귀를 때렸고, 당장 가버리라고 소리를 지른다. 그녀는 울면서 나가고, 허탈해진 루는 부대로 복귀했는데, 분노에 휩싸여 잠을 설친다. 자신이 너무했다는 생각에 편지를 보내 보지만, 답장이 없다. 나중에 무단이탈을 해서 찾아가보니 그녀는 이미 떠나고 없었고, 그 이탈로 인해 그는 열달간 영창에 가야했다.


루에게서 충격을 받은 그녀는 어찌어찌하다 루의 친구를 만나는데, 그 친구는 그녀로부터 그녀가 어릴 적 나쁜 애들한테 집단으로 성폭행을, 그것도 상습적으로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친구는 그녀를 달래 성에 대한 왜곡된 마음을 풀어주고, 그녀랑 한다. 근데 그 친구는 아내와 자식이 있었고....어찌고 저찌고...

이 책을 읽다보니 갑자기 햇볕정책 생각이 난다. 강제로 하려던 루가 실패한 반면, 따뜻하게 대해주며 때를 기다린 친구는 성공했쟎는가.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건 바람이 아닌 햇볕인 걸까. 중요한 건, 여자를 성적 욕구의 충족만을 위해 이용하면 안된다는 것. 자기는 하고 싶어도 여자가 싫다면 참을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잘나가던 루가 군대로 끌려간 건 물론 농담 때문이었는데, 그 사건의 주심을 맡았던 건 자신의 절친한 친구. 루는 안심하지만, 그 친구는 루를 파렴치범으로 만들면서 루를 군대로 보내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다. 그뒤부터 루는 그 친구에 대한 복수심에 사로잡히는데-당연하다-어느날 만난 라디오 기자(헬레나)가 알고보니 그 친구의 부인이다. 루는 감미로운 말로 권태기에 이르렀을 중년의 헬레나를 꼬시는데 성공, 거하게 한다. 그런데 알고보니 둘은 별거중이었고, 친구는 20대 초반의 아름다운 애인이 있는 것. 즉, 친구가 중요하게 생각지 않으니 그 부인이랑 하는 건 전혀 복수가 아니다.

오히려 길가에서 루를 만난 그 친구는 아내로부터 둘이 했단 소리를 듣더니 "둘이 잘해봐라. 헬레나는 좋은 여자다"면서 아름다운 20대 애인과 걸어간다.

아주 당연하게도 루는 다시한번 하자고 졸라대는 헬레나한테 이렇게 말한다. "난 너를 사랑하지 않아. 우린 끝이야" 침통해진 헬레나는 "난 이제 세상을 하직한다. 루, 잘먹고 잘살아라"는 편지를 쓴 뒤 카메라 기자를 시켜 루에게 전달한다. 편지를 읽은 루, 자리에서 일어나 헬레나를 찾아나서는데, 방송국 건물을 다 뒤져도 그녀는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 남은 곳은 화장실. 문을 부수고 들어갔더니 그녀가 치마를 걷고 변기에 앉아있다. "뭐에요!!"

알고보니 그녀는 카메라기자의 주머니에 든 진통제를 통째로 먹었는데, 카메라 기자는 변비환자였다. 그런데 변비라고 하면 창피하니깐 진통제 약병에다 변비약을 넣어 두었으니 그걸 원샷한 헬레나가 설사를 엄청나게 할 껀 당연했다.

이 이야기의 교훈.
1) 변비를 부끄럽게 생각한 카메라기자의 재치가 헬레나를 살렸다.
2) 어떤 사람이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걸 건드리는 건 복수가 아니다.
3) 맘만 먹으면 여자를 꼬실 수 있는 루의 능력도 대단하지만, 중년의 여성은 언제나 위험하다. 참고로 헬레나의 나이는 35살로 나온다.
4) 변비약을 먹으면 설사를 한다.
5) 친구한테 해꼬지를 당할지 모르니 원한 살 일은 절대 하지 말자. 특히나 친구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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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07-12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쥴님, 문학에 관한 제 역량은 별로 보잘 것이 없습니다. 작품을 관통하는 정신을 이해할 수 없기에, 전 그저 주변적인 얘기를 끄적끄적 리뷰로 쓰고 있지요. 사실 리뷰라고 하기도 뭐합니다^^ 하여간 제가 쓰려는 리뷰는 그런 것이구요, <농담>은 제가 쓴 것 중 가장 맘에 드는 리뷰이니, 말 다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