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팬티가 지금처럼 유행하기 전 얘긴데, 일본에 갔더니 반바지를 아주 싸게 팔더라구. 몇개 사가지고 남편한테 입혔지. 남편은 '이거 반바지 맞아?' 이러면서도 잘 입더라구. 언젠가 남편하고 같이 옷을 사러 갔는데, 종업원이 갑자기 사장한테 가더니 이러는거야. 저사람 미쳤나봐요. 빤스만 입고 왔어요"

그녀가 입힌 건 그러니까 사각팬티, 아내 덕분에 남편은 스타일을 구기고 말았다. 살다보면 믿지못할 실수를 연발하는 사람이 있는데, 어제 만난 초등동창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동창 몇몇이 모여 식사를 했는데, 두시간 내내 그녀는 자신의 실수담을 얘기했다. 피로연장에서 초고추장을 짜다가 터뜨리는 바람에 신랑신부 옷을 작살낸 얘기, 얼굴의 반만 화장을 하고 나갔던 일화, 맨홀에 빠진 일, 공업용 미싱으로 손가락을 박은 얘기 등등...보통 사람은 일생에 한번 겪을까 말까한 일들을 그녀 혼자서 해치운 것에 우린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 헤어져 집에 가면서 난 살아오면서 어떤 실수를 했는지 생각을 해봤다. 유머를 잘하진 못해도 좋아하긴 하는 성격 탓에 실수를 많이 할 것 같지만, 난 그다지 실수한 게 없는 편이다. 그래도 기억나는 몇가지를 적어본다면 다음과 같다.

1. 초등학교 동창 모임을 나갔다. 동창이긴 해도 난 여자애들 앞에서는 좀 쑥스러움을 타는데, 투피스를 유난히 멋있게 차려입은 여자애가 내 앞에 앉았다. 아구찜을 먹었는데, 그 여자가 게 다리를 가위로 자르려고 한다. 난 잘보일 마음에 가위를 뺐어서 다리들을 잘랐다. 그러다 그만... 커다란 게 다리 조각이 튀면서 그 여자애의 투피스에 적중했다. 사태를 파악한 친구들은 그저 할말을 잃었고, "괜찮다"는 그녀의 말에도 난 죽고 싶어 어쩔 줄을 몰랐다. 그 때문은 아니지만 그녀는 동창 모임에 더이상 나오지 않았고, 지금은 미국에 있다.

2. 친구가 교육문화회관에서 결혼을 했다. 주례의 말이 너무도 길어지자 난 좀 따분했다. "아이 지겨워" 하면서 벽에 기댔는데, 그만 메인 스위치를 꺼버린 거다. 식장이 어두워지는 것과 동시에 난 밖으로 도망갔는데, 잠시 웅성웅성하긴 했어도 잘 수습이 되었다. 그 탓은 아니지만 그 친구와 별것 아닌 일로 싸웠고, 지금도 잘 못지낸다.

3. 복사카드라는 게 있다. 그걸 가지고 복사를 하고 소변을 보는데, 그만 그게 소변기에 빠져 버렸다. 물로 대충 씻은 뒤 원래 자리에 넣어 뒀는데, 나랑 같이 일하던 얘가 복사를 하러 가면서 그걸 입에 문다. 그저 놀랄 뿐,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4. 아주 어릴 적, 주사기의 피스톤을 빼면 "뽕" 소리가 나는 게 신기해 여러번 반복하다가 주사기 바늘로 남동생 이마를 찍었다. 동생은 곧 병원에 실려갔고, 집에 있던 난 그저 죽고 싶었다.

더이상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게 다인가보다. 역시 난 착실한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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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2-22 0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갈대 2004-02-22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릴 적, 동생 머리 위에 사과를 올려놓고 다트로 던져서 맞히려다가 동생 이마에 맞아서 다크가 이마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던 적이 있음. 집 안에서 뛰어 놀다가 거실 유리 몸으로 뚫은 적 있음(당시 동네사람들 우리집으로 다 모임) 좀 엽기적인가요?^^

비로그인 2004-02-22 0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2번은 정말 쉽게 일어나기 힘든 일인거 같은데요. ^^ 전 어릴때 문득 손에 가위가 잡혀서 서걱서걱 하다가, 느낌이 이상해서 보니 여동생 머리에 땜통을 만들어논거 있죠. 그거말곤 그다지..ㅎㅎ

마태우스 2004-02-22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갈대님/다트가 이마에... 상상을 하니 매우 엽기적이군요. 거실 유리를 뚫는 건 영화에도 많이 나와 엽기성이 떨어진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앤티크님/그거 말곤 별게 없으시다니, 정말 착하게 사셨군요. 그럴 줄 알았어요!^^

슈퍼곰돌이 2004-02-22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저는 동생하고 우산 버튼 눌르면 슝 나가는거 있잔아요;; 그걸로 동생 눈 앞에서 했는데
1,2 번은 뒤로가면서 쏴서 동생이 안다쳤는데 제가 한번만 더해본다고 하구서 눈 맞춰서
동생이 엉엉..ㅋㅋ 그래서 계란가지고 계속 문질러 줬어요

슈퍼곰돌이 2004-02-22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앤티크님은 하나라도 정말 대형사고를..ㅋㅋ

chaire 2004-02-23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수를 해도 역시 마태우스 님 답습니다. 어정쩡한 웃음은 용서하지 않는... ㅋㅋ
 

 

 

 

 

 

오늘 아침, 조카가 보내준 메시지를 확인하고, 잠시 멍했다. 내 책을 재미있게 읽은 것은 분명 좋은 일이지만, 문제는 조카가 이번에 막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이라는 것. <해리포터>처럼 세대를 뛰어넘어 읽히는 책도 있을 수 있겠지만, 내 책이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이며, 내 조카가 여느 초등학생과는 달리 높은 지성과 감성을 가졌다든지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래,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 그게 내 책의 수준이라는 것을. 내 책을 출간한 출판사에서는 "기생충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30, 40대"를 타깃으로 잡고 있는 모양이지만, 아무래도 "기생충에 대해 전혀 모르는 초등학생"을 주 대상으로 바꿔야 할 것 같다.

사실 난 내 알라딘 서재를 방문하시는 분들이 내 책의 존재를 모르길 바랐다 (무의식에서는 알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지만). 내 서재를 오가는 분들과 호형호제하며 알고 지내게 된 걸 큰 즐거움으로 알고 지냈는데, 그분들 중 몇분이라도 내 책을 읽는다면 언젠가 플라시보님이 그랬듯 즐겨찾기로 등록한 분들의 숫자가 추풍낙엽처럼 떨어지지 않겠는가. 더구나 알라딘 분들은 유명 저자들의 책도 매섭게 비판하는 고강한 내공을 가진 분들인데, 그런 분들이 내 책을 본다면? 상상만 해도 두렵기 짝이없다. 내 창작물이 과히 좋은 책이 아니라는 게 첫 번째 이유라면, 책을 감추고 싶은 두 번째 이유는 내 책의 존재를 알리는 게 마치 책을 사달라는 강요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책을 읽는 것은 책을 통해 서로 소통하는 행위일테고, 책을 통해 어떤 유익함을 얻을 수도 있는 노릇이지만, 구매를 통해 저자를 돕는 측면도 분명히 있다. 그런데 별반 유익함을 주지 못하는 내 책을 산다는 건, 그저 나를 돕는 것밖에 안될 것이다. 그게 난 미안했다.

그러나... 어찌어찌해서 내 책의 존재가 드러나 버렸다. 그래서 부탁드립니다. 부디 모른체 해주시고, 예전처럼 잘 지내요, 네? 진우맘님은 내 책이 "문학부문 베스터 23위"라며 놀라시던데, 그건 전혀 놀랄 게 없습니다. 제 지인들에게 돌릴 책을 마련하기 위해 제 스스로 산 결과니까 말입니다. 어제밤 저희 어머니가 20권을 더 주문하셨는데, 그러고 나니까 오늘 아침에는 글쎄 10위더군요. 베스트순위에 있다고 절대 현혹되지 마시고, 예전처럼 편한 맘으로 제 서재를 찾아 주시길 바랍니다.

* 참고로 출판사에서는 제게 20권을 줬고, 그중 4권을 출판사 분들에게 싸인해서 드렸으니 16권을 받은 셈이지요. 그게 동이 나는 데는 하루면 충분했습니다. 제가 요즘 술을 많이 마시는 건, 책을 주고 같이 술한잔씩 하다보니 그리 된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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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4-02-21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제 신조는 여전히 '책을 읽는 가장 큰 이유는 재미!'입니다. 책이 유익해야 한다고, 책에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고, 누가 그럽니까! 여하간, 평소 마태우스님을 볼 때 재미는 거의 90% 이상 보장될 것이고...아마 덤으로 기생충에 대한 지식도 쌓을 수 있겠지요.^^
단 한 권도 무료배송 해 준다고 달랑 한 권 주문하기가 미안해서 아직 안 시켰는데, 여하간 순전히 내켜서 보는 것이므로 절대 우려하지 마시길!!!

쎈연필 2004-02-21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평소의 마태우스님의 글을 볼 때 재미는 거의 99% 보장이겠지요. 사서 봐야겠습니다. 건필하세요^^

mannerist 2004-02-22 0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생충 이야기? 설마하고 베스트셀러 명단 확인한 순간, 모든 의문이 풀렸습니다!(이 무슨 김전일스러운 멘트인지. ㅋㅋㅋ...)푸하하하... 이제야 닉넴이 매칭되는군요. 모처의 애독자라 간혹 님의 글 읽고 뒤집어지곤 했거든요. 어여 정좌하고 다시 읽어봐야겠군요. 윤문 작업 많이 하셨을 테니까 느낌이 많이 틀려졌겠죠?

왜 진작 몰랐을까요. ㅋㅋㅋ...
 

 

 

 

 

 

2승 7패. 그전까지 그와 싸워 이룬 전적이다. 전패를 했다면 더 이상 도전하는 것이 무의미할테지만, 그는 두 번이나 내 앞에서 고꾸라졌다. 그때의 기억이 나로 하여금 계속 그에게 도전장을 내밀게 하는가보다. 하지만 어제, 또다시 정신을 잃음으로써 전적은 2승8패가 되어 버렸다. 최근 들어 3연패. 부끄럽다.

잠에서 깼을 때는 새벽 4시. 컴퓨터 앞에 엎드려 잤나보다. 화면에는 알라딘 '나의 서재'가 떠 있다. 그렇게 취한 와중에 알라딘은 왜 들어갔을까? 정말이지 알라딘 폐인이 되어가고 있나보다. 손톱은 깨졌고, 손바닥에는 상처가 있다. 결정적으로 팔꿈치가 너무 아프다. 나중에 전화를 해보니 그가 나를 우리집까지 데려다 줬으며, 그 와중에 내가 여러번 넘어졌단다. 부끄럽다.

아주 잠깐이지만, 술을 먹던 그가 조는 기색을 보였었다. 난 쾌재를 불렀다.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된다는 생각에, 몇잔을 같이 원샷을 했다. 거길 나와 3차를 간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의 일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보나마나 엎드려 잤을게다. 패인이 뭘까? 그와 난 똑같이 술잔을 비웠고, 모르긴 해도 한두잔은 그가 더 마셨을텐데.

결정적인 패착은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것. 카드야 정지를 시켰지만, 그 안에 있는 교통카드는 하필이면 어제 충전을 한 거다. 주민증, 면허증도 그렇고, 하필이면 어제 천안에서 쓰는 회수권을 10장이나 산 건 안타까운 일이다. 전화카드도, 파파이스 카드도, 모두 다 아깝다. 돈은 얼마나 있었는지 기억에 없지만, 그것 역시 아까워 죽겠다.

따지고 보면 내가 술을 마신 역사는 이런저런 잃어버림으로 점철되어 있다. 10년 전, 금융실명제가 시작되는 날, 난 엄청 술을 마셨고-실명제 때문은 아니다-깨어났을 때는 우리집 근처 골목에 앉아있었다. 지갑을 털린 채. 나중에 들은 얘긴데, 그날 내가 엄청 취한 상태에서 술값을 계산했단다. 휴, 다행이다. 어차피 잃어버릴 건데, 하는 생각을 그말을 듣고나서 했었다. 그땐 신용카드 현금서비스로 생활하고 있었기에, 그 후 한동안 생활고에 시달렸었다.

그것 말고도 많다. 지하철에서 자다가 종점까지 갔는데, 깨보니 지갑이 없었던 적은 대충 헤아려도 세 번인가 된다. 휴대폰은 더하다. 술먹고 휴대폰을 분실하는 건, 내게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내가 새로산 휴대폰을 6개월쯤 쓰자 애들이 "이번엔 오래 가네"라고 할 정도니까. 열 번의 분실 중 내가 찾은 건 두 번밖에 없다.

생각해보니 어제 술값도 내가 그었다. 지갑도, 카드도 없으니 이젠 좀 건전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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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4-02-20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테우스님은 다른 면에선 안그러실 것 같은데, '술'에서만은 전투의욕이 불타시는 것 같네요.
저희 남편도 '술'에 관한 무용담이라면 지고 싶어하지 않는답니다. 아~ 그 끝없는 무용담!
그래도 지갑이나 집을 잃어버린 적은 없어서 다행입니다.
전 술 많이 마시면 담날 괴롭던데, 주당들은 잘도 버티는 것 같아요.
마치 '무보수 명예직'으로 여기는 것 같아요. ^^

참! 현재 세일즈 포인트 3080! 와우!
근데요, 도청장치를 주장했다는 청년(이건 실화)과 '유구낭충'은 실재로 연관되었나요? (나 으사 맞나 몰라... 그래도.. 궁금한것보다 쪽팔린게 낫죠...)

paviana 2004-02-20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동사무소에 가서 주민증을 먼저 만드셔야 합니다.주민증이 있어야 면허증이 나옵니다.물론 여권이 있으면 면허증도 신청할 수 있지만요..글구 담부터는 주민증이나 면허증 둘중 하나만 가지고 다니세요..둘다 없으면 무지하게 괴찮답니다.시간도 훨씬 많이 걸리고..너무 속상하시겠어요...
글구 제가 굉장한 분의 서재에 무단침입한 거 같다는 생각이 마구 듭니다,.몰라뵈서 죄송해요.정말 모르고 들어 왔는데.^^ 괜찮지요?

waho 2004-02-20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면허증은 차에 두고 다녀요. 핸펀 잃어 버림 넘 속상하던데...전 거기다 연락처를 다 메모리 해놓는 버릇이 있어서...술 마시고 실수하면 뒷 일이 넘 귀찮죠? 전 술 마시고 가끔 그러는데 울 남편은 술을 못해서 이해를 못하죠

비로그인 2004-02-21 0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너무 슬픈 이야기네요. 상처까지 입구, 지갑도 잃어버리구, 패배도 하구. 그 와중에 알라딘 사랑은 정말 감격적이네요. ㅠㅜ 마태우스님의 화려한 승리를 한번은 바라고 있지만, 제발 옥체보존하시와요~~

마태우스 2004-02-21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님/도청장치와 유구낭미충은 사실 관계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근데 그 책에 보면 사실과 뻥이 혼재되어 있어, '무엇이 하늘이고 어디가 뭍인지' 저도 헷갈리더군요.

마태우스 2004-02-21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비아나님/ 굉장한 분이라니 무슨 말씀을!! 아, 술은 정말 굉장하게 먹죠. 신분증 다시 만들 생각을 하니 정말 심난하네요. 며칠만 기다려 보려고 해요. 혹시 압니까? 돌아올지...
강릉댁님/오오, 부군께서 술을 안드신다니, 그건 정말 좋은 거 아닙니까? 음...낭만을 모른다고도 생각할 수 있겠군요. 특히 님처럼 술을 잘 드시는 경우에는요...

마태우스 2004-02-21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앤티크님/제 슬픔을 이렇게 자신의 슬픔으로 느끼고 안타까워해주는 마음을 김상봉님이 어느 책에서 칭찬하던데요. 그런 면에서 앤티크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은 이미 주체의식을 가진 세계시민이십니다. 꼭 다시 재기하겠습니다.
 

 

 

 

 

 

* 이왕 화장실 얘기를 한김에, 전에 썼던 글을 여기다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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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화장실 문제에 천착해온 나, 어젯밤 술을 먹다가 우리나라 화장실에 내재된 심각한 문제에 부닥쳐 좌절해야 했고, 이에 분개해 여기다 글을 쓴다.

<봉추>라는 닭집에 앉아 술을 먹다가 닭만 먹기 뭐해서 공기밥을 하나 시켰다. 그게 좀 부담이 되었는지, 설사가 나오려 했다. 그래서 주머니에 휴지가 있는 걸 확인하고 화장실로 갔는데, 남녀공용에, 큰일을 볼 수 있는 변기는 딱 하나다. 많은 식당, 술집에서 돈을 아끼려 남녀공용 화장실을 만들지만, 사실 그건 야만스러운 일이다. 남녀가 유별할진대 어떻게 화장실을 같이 쓴단 말인가?

하지만 급할 땐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는 법, 난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두드렸다. 웬걸, 곧바로 노크가 이어진다. 누군가 있단 얘기, 난 다시금 자리로 와 술을 마셨다. 화장실 문을 계속 응시하면서. 하지만 20분이 지나도 화장실에서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닐까 하고 다시 노크를 해봤는데, 아까와 같은 노크 소리가 응답한다. 그 사람은 그러니까 20분이 넘도록 그 안에 버티고 있는 거였다. 안나오는 사람이 얄미운 건 둘째문제고 급한 불은 꺼야 했다. 난 인근 지하철 역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방은 만원이었고, 세면대에 서있던 사람이 날 보고 긴장한 듯 굳게 닫힌 문 주위를 돌면서 기득권을 주장한다. 더이상 기다릴 수 없기에, 난 쭈뼜쭈뼜 걸어 다른 곳으로 갔다. 아주 다행스럽게, 내가 잘가는 서점 근처에 비밀스런 화장실이 있었다.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다....

다시금 술집으로 돌아갔다. 아까 있던 멤버는 다 그대로고, 추가된 사람은 없다. 그러니 그 사람은 그때까지도 화장실 안에 앉아있던 것이다. 그사람이 나온 건 내가 돌아온 후 십분쯤 후였는데, 긴머리를 가진 그녀는 마치 아무일도 없던 것처럼 일행과 합류한다. 평소처럼 웃고 술을 마시는 그녀를 난 말없이 째려봤다. 그녀로 인해 내가 겪어야 했던 고통을 생각하면서.

그녀는 아마도 변비일 것이다. 변비란 신호가 올 때 바로 일을 봐야지, 안그러면 300그램짜리 물체를 계속 몸안에 담고 살아야 한다. 그 고통은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른다. 화장실에서 십분 이상의 시간을 보내는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사연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변비 환자들이 화장실의 변기를 모두 독점하는 게 옳은 일일까? 단지 먼저 왔다는 이유로? 변비의 고통은 변과 더불어 사는 거지만, 제때 화장실을 확보하지 못한 설사 환자에 비하면 그 고통은 약과다. 설사 환자의 실수는 패가망신으로 이어진다. 옛날의 삼각팬티는 그런 고통을 어느정도 막아줬지만, 사각은 대책이 없다. 실수를 해버리면 당장 쪽팔리는 것도 그렇지만, 실수한 그를 태워줄 택시도 없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건 더 못할 짓, 축축함, 찝찝함, 이런 것들을 이겨가며 집까지 걸어가야 한다. 새 팬티와 바지를 사면 되겠지만, 문제는 대개 옷가게가 이미 문을 닫은 후에 생기는 법이다.

변비 환자들에게 제안한다. 그대들의 고통은 십분 이해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화장실을 나누어 쓰는 지혜를 발휘하자고. 신호가 와서 화장실에 들어가는 건 좋은데, 아이낳는 것과 무관한 거짓산통처럼 그 신호가 대변으로 이어지는 게 아니었다는 걸 깨닫는다면, 미련없이 화장실을 나와주면 안될까. 밖에서 기다리다가 다시 신호가 나면 그때 들어가야지, 지금처럼 신호가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오기로 뭔가를 밀어내 보려는 건 모두의 고통이다. 변비 환자 자신은 물론 밖에서 변을 참느라 온갖 기묘한 자세를 취해야 하는 설사 환자에게도. 변비도 아니면서 쓸데없이 늦게 나오는-신문을 본다든지, 담배를 피운다든지-사람은 더더욱 반성할 일이다. 화장실은 우리 모두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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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곰돌이 2004-02-19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마이리뷰도 짱많이 쓰셨고!! 마이페이퍼의 달인같네요!! +_+ 그리고 제가 꼬릿말 단지 얼마 안됬는데 답방 정말 신속하네요!!킼키킼 펌프. 디디알에서 좀 변형된거예요 ㅋㅋ 제 친구하고 맨날 하는데 친구가 이사가서.. 청춘..아직 청춘까진 아니구요 ㅡㅡ;; 이제 중학교 들어가요 ㅋㅋㅋ 제 페이퍼 정말 재미 없는데 꼭 답방 오지 않으셔도 되요 ^^ㅋ

마태우스 2004-02-19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슈퍼곰돌이님/앗! 외모로 보아 고교생 정도로 생각했었는데...으음... 그렇군요. 앞날이 창창하시군요. 혹자는 고생길이라고 하지만, 순수함이 있고 많은 추억을 만들수도 있는 때인 건 사실입니다. 전 별로 추억을 못만들었지만요 T.T

비로그인 2004-02-19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장실을 오래 독점하는 사람들 덕에, 전 화장실이 한칸인데를 가면 마음이 불안하구...다음엔 안가게 된답니다. ^^;;

갈대 2004-02-19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각의 패가망신.. 안돼!! 상상하지말란 말이야!!

_ 2004-02-20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상상해 버렸습니다. ( __);;

마태우스 2004-02-20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갈대님/상상의 힘은 참 위대하죠?

sooninara 2004-02-21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 팬티에 그런 비밀이 있군요...삼각과 사각이라..당연히 상상이 됩니다..
그리고 화장실에 귀신이 그림을 보니.."노란종이 줄까? 파란종이 줄까?"물어보는 귀신이 상상된다는..

젊은느티나무 2004-02-21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사 환자의 실수는 패가망신으로 이어진다.'ㅋ 뒤로 넘어갈 정도로 재밌네요....갑자기 '목포는 항구다'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설사환자의 실수.. 화장실 안에서 벌어진 일이긴 해도.. 보면서 너무 찝찝해서 토할뻔 했지요.....ㅠ.ㅠ
 

 

 

 

 

 

우리 회사의 화장실은 방이 두 개씩 있다. 거기 앉아 일을 볼 때마다 난 화장실을 왜 이렇게 개방된 구조로 만들었는지 의문스럽다. 위, 아래가 터졌으니 안에서 나는 모든 소리가 밖에 들리지 않는가. 난 그런 것에 워낙 민감해서, 옆방에 누군가 있으면 다른 층으로 내려가곤 한다. 내가 안에 있는데 다른 이가 소변을 보러 오는 발자국 소리가 나면, 난 온몸의 근육을 긴장시키고 어떤 것도-고체나 기체 모두-내 몸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다. 내가 내는 소리를 그가 듣는다면 속으로 이럴 거 아닌가. "에이, 재수없어!"

오늘도 그런 일이 생겨 온몸의 힘을 줬다. 그런데 세상에, 나도 모르게 방귀를 뀐 것이다. "뽀옹" 소변을 보던 이가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역시나 화장실은, 폐쇄된 구조로 만들어져야 한다. 안에서 무슨 소리가 나도 밖에 전달되지 않도록 말이다. 물론 그러다보면 냄새에 질식할 수도 있겠지만, 그거야 환기 시설을 잘 갖추면 되지 않을까?

하기사, 남자끼리 쓰는 화장실이라면 별의별 소리가 나도 에라 모르겠다, 라고 넘어갈 수 있다. 문제는 남녀공용 화장실의 경우다. 난 우리나라 술집의 화장실은 왜 죄다 남녀공용인지 모르겠다. 내가 소변을 보는데 뒤로 여자가 왔다갔다 하는 것도 민망하기 짝이 없고, 여자와 좌변기를 같이 쓴다는 게 미안해 죽겠다. 내가 큰일을 보는데 여자가 밖에서 기다리는 것도 쑥스럽지만, 그 반대의 경우 역시 내가 무슨 죄를 짓는 기분이다. 왜 이런 야만의 상황을 만드는 것일까. 이왕 짓는 거 좀 크게 만들어 남녀를 구분한다면, 테이블이 줄어들긴 하겠지만 더 자주 갈텐데.

기차 화장실도 마찬가지다. 그건 전부다 남녀공용인데, 그래서 난 웬만하면 기차 화장실을 안쓰려고 한다. 힘이 들 땐 허벅지를 휴대폰 안테나로 찔러가며 참는다. 하지만 언젠가 한번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기차 화장실을 갔다. 먼젓번 사람이 그랬는지 변기에 대변이 강력하게 달라붙어있다. 두 번이나 물을 내렸지만 안내려간다. 그냥 앉아서 일을 본 뒤 물을 내렸다. 문을 열고 나가는데 웬 여인이 기다리고 있다. 낭패였다. 그녀는 아마도 변기에 붙은 대변이 내 소행인 줄 알겠지. 나 아닌데. 정말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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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곰돌이 2004-02-19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겨찾는 서재인데요 마태우스님의 글은 정말 재밌고 읽기 좋아요 너무 재밌어요 ^ ^♡ 앞으로 재미있는 페이퍼 많이 올려주세요 ^ ^*

2004-02-19 17: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04-02-19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슈퍼곰돌이님/아, 네.... 감사합니다. 역시 화장실 얘기가 제일이라니깐요^^

비로그인 2004-02-19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하~ 마지막 너무 웃겨요~ 여자끼리 써도 별의별 소리 다 날까 신경쓰이던데요? 공용이면... 한층 더 민망하지만. 특히, 들어갈땐 아무도 없었는데, 나올땐 남자분이 볼일 보고 계실때. 참, 전 남녀 따로 된 술집도 많이 봤는데요~

stella.K 2004-02-19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많이 웃었습니다. 우리나란 그게 문제라니까요. ㅎㅎㅎ!

진/우맘 2004-02-19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유행하던 유머가 생각나는데요. 그럴 땐, 잔뜩 째리면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짜샤, 김나나 봐!"
(혹여 이해 안 되는 분들을 위해 --- 모락모락 김이 나지 않으므로 이미 오래 전 버려진 응가라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강렬하고 당당한 짜샤!를 통해 믿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가을산 2004-02-19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크... 전 엘레베이터에서 방귀 냄새로 인해 마태우스님과 같은 오해를 받았을 것이 확실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저보다 앞서 탔던 사람이 참 원망스럽더군요... 가만, 그 사람도 억울했던것은? ^^

_ 2004-02-20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 역시 마지막 압권이었습니다~ 이러다 마태우스님 팬 되겠습니다 그려 ^^

마태우스 2004-02-20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ird나무님/부끄럽사옵니다. 팬이라뇨...
가을산님/제 생각에는 그사람(앞서 탔던 그 사람 말이죠)이 뀐 거 같습니다.

마태우스 2004-02-20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우맘님/요즘은 수세식이라 김이 잘 안나더군요...

sooninara 2004-02-20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장도가 아니라 휴대폰 안테나로..참아야하느니라..콕콕 찌르는 모습을 상상만해도..^^
그리고 변기에 묻은 흔적을 볼때면 기생충쪽 전문가이신 마태우스님은..여러가지 기생충이 상상될것 같네요. 화장실 유머도 이렇게 격이 있구나 느끼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