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동창들과 오대산에 다녀왔다. 이 나이에도 친구들과 그렇게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니, 내가 너무 행복한 놈이라는 생각이 든다.

멤버; 여행을 간 멤버는 화려하기 그지 없었다. 유부녀, 이혼녀, 이혼남, 독신남에, 이혼을 앞두고 있는 친구-얘는 요즘 걸핏하면 나한테 술마시자고 전화를 건다-임신한 아내와 싸우고 집을 뛰쳐나온 친구, 그야말로 드림팀 아닌가? 남편을 버리고 여행을 온 유부녀가 준재벌에다 뻑하면 "오늘은 내가 쏠께!"라고 외치던 애였고, 또한 알아주는 미식가였던 덕분에, 편하고 즐겁고 맛있는 이틀을 보낼 수 있었다.

갈 때; 내 특기는 수다다. 차를 타고 있는 동안 난 쉴새없이 수다를 떨었는데, 이따금씩 대화에 참여한 친구의 말에 의하면 수다를 떠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피곤하단다. 어쨌든 그 수다 덕분에 차들이 꽉 밀린 머나먼 길을 즐겁게 갈 수 있었다. 허물없는 친구들이라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이 편했다.

1차: 감자전, 닭도리탕, 만두국을 안주로 각자 취향에 따라 술을 마셨다. 나와 친구1, 친구2는 소주를, 여인1은 백세주를 마셨고, 친구3은 유부녀가 가져온 '설화'-정종이란다-를 두병이나 마셨다. 소주 4병을 셋이서 나눠 먹었으니, 내가 마신 건 한병이 조금 넘을게다. 손님이 다 없어지자 우린 구석에 놓여 있던 기타를 집어들고 노래를 불렀다. 취미로 그룹활동도 하고있는 친구3이 기타를 쳤으며, 80년대 학번답게 이문세, 비틀즈, 최호섭-세월이 가면-동물원, 김현식, 유제하의 노래들을 불렀다. 나보다 노래 가사를 더 많이 아는 애들이 있다는 걸 알았다.

2차: 유부녀가 가져온 양주를 놓고 숙소에 모여앉았다. 너무 혹사했는지 내 몸이 술을 잘 받지 않았지만, 그래도 열심히 마셨다. 술이 약한 친구3은 가자마자 뻗었고, 강적인 친구1은 새벽 2시에 나가떨어졌다. 잘하면 우승하겠네, 했지만 3시가 조금 못되어 뻗어 버렸다. 그래도 2등은 했으니 그런대로 만족하련다. 그런 일이 별로 없었는데,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몸이 좀 힘들었다.

안주: 숙소에서 마실 때, 내가 먹을 안주로 참치캔을 하나 샀다. 젊은 시절, 너무 속이 상할 때마다 난 참치캔을 안주로 소주를 마셨었는데, 오랜만에 그 생각이 나서였다. 하지만 막상 먹으려고 하니 젓가락이 없었고, 결정적으로 캔을 따는데 꼭지만 떨어져 버렸다. 캔만 딸 수 있었어도 1등할 수 있었는데....

동성애: 이반 분들에게는 죄송하지만, 우리들은 남자 친구들끼리 서로 좋아한다는 식의 농담을 가끔 한다. 오는 차 안에서 내가 친구2와 사귀니 뭐니 했는데, 그만 결정적인 장면을 들켜버렸다. 내가 친구2와 껴안고 있는데 유부녀가 우리방에 왔다가 그걸 보고 놀란 것. "너희들, 진짜였구나!"라고 말하는 그녀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전모는 이렇다. 내가 쓴 책을 그에게 주면서 "다 네 덕분이다"는 뜻으로 포옹을 한 것. 그 순간에 들어오다니, 정말 드라마가 따로없다.

귀가; 원래 일정은 2박3일이고, 지금 다른 친구들은 속초에서-오대산서 1박을 한 후 속초로 왔다-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지만, 난 사정상 먼저 왔다. 이유인즉슨 내가 없으면 벤지가 밥을 잘 먹지 않으며, 내일 아침 테니스를 쳐야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내가 없으면 벤지가 변을 보지 않는다는 것. 대변도 많이 누는 녀석이라 사흘을 참는다면 몸의 3분의 1 이상이 대변으로 가득찰 터, 그래서 난 1박2일 이상의 여행은 거의 하지 못한다. 원래는 친구2 차로 서울에 오기로 했는데, 그가 미녀의 유혹에 넘어가 안가기로 했단다. 배신을 당한 나는 어떻게 서울에 올까 고민하다가, 양양에 공항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두 번밖에 없는 서울행 비행기에 극적으로 올라탔다. 차를 탔으면 엄청나게 밀렸을테고, 피로가 쌓여 내일 테니스도 대충 쳤겠지만, 난 8시도 못된 시각에 서울에 왔고, 지금 집에서 편안히 글을 쓰고 있다. 출혈이 크긴 했지만 역시 돈이 좋다. 돈=편안함.

착각: 애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먼저 와서 미안했다. 더 미안한 건, 내가 없으면 수다떨 사람도, 술자리를 주도할 사람도 없으니 남은 애들이 재미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집에 와서 메시지를 보내니 웬걸, "우리 너무 재밌게 놀고있어!"라는 답이 날아온다. 으음, 그렇군. 내가 뭔가를 착각하고 있었군!

회상; 2월의 마지막 이틀간을 다시 떠올려 본다.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이 추억은 오래도록 내 머리에 남아, 내가 힘들 때마다 완충제가 되어 주리라. 내게 이런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준 친구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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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04-02-29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벤지를 위해 비행기를 타시다니.......놀라움이었습니다....하긴 저사진과 흡사하다면 사랑스러울만한데.......그리고 혹 친구분들이 우리가 벤지만도 못하단거지??...그럼서 보란듯이 더 잘노신게 아닌지....ㅋㅋ.....근데.....저그림의 벤지는 어린시절 만화에 나왔던 그강아지 아니어여??.....예전에 그 뭐지??....덩치 큰 흰강아지옆에 또 쪼그만 푸치(?)인가 쬐그만 강아지도 있었던.....자꾸 그강아지가 생각나네요.........^^

비로그인 2004-03-01 0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벤지사랑이 정말 눈물겹네요...ㅠㅜ 참치캔 얘기를 들으니 저두 옛생각이 나고, 착각 부분에선 또 실실 웃고 말았다는..ㅎㅎ 4년에 한번 온다는 2월의 29일을, 너무 즐겁게 잘 보내신거 같아서 좋네요~~ ^^

쎈연필 2004-03-01 0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야말로 드림팀... 이 대목에서 뒤집어집니다 ㅎㅎㅎㅎㅎㅎ

플라시보 2004-03-01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두상자님 의견과 동일. 그 외에도 수시로 뒤집어지다 갑니다.^^

paviana 2004-03-02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등학교 동창들 정말 좋죠..저도 그때 친구들이랑 같이 있으면 호칭의 반이 욕이랍니다.이나이에 그애들 아니면 언제 그렇게 불려보겠습니까? 말달리자는 노래에서 제일 제가 감명받은 부분이 `차 있으면 빨리 가지' 인데, 비행기는 더 빠르군요..좋은 여행 부럽네요..

마태우스 2004-03-02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라시보님/또 놀러 오세요!
파비아나님/인터넷이 아니었던들 그들을 다시 만날 수는 없었을테니, 인터넷에 감사하렵니다.
자두상자님/어, 그말이 웃겼나보죠? 드림팀 맞는데...
책읽는나무님, 앤티크님/지금 현재에 있어서 벤지는 제게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벤지에게 저는 우주일 테고요. 그런 벤지에 비하면 제가 벤지에게 소홀한 편이죠.
 

 

 

 

 

 

"암행어사 박문수!"
지하철 5호선, 파란 추리닝을 입은 아저씨가 소리를 지른다. 모든 이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가 이내 돌아간다. 그 말만으로도 아저씨의 상태를 알기에는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아저씨는 계속 외친다.
"내가 암행어사 박문수의 40대 후손이여! 한때는 천하가 내것이었어!"
거기서 그쳤으면 좋으련만 아저씨는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한다. 전철을 탄 젊은 여성에게 "안녕하세요?"라고 하고-머리를 빡빡 깎은 아저씨라 외모가 무섭다-그네들이 도망치자 "도망가는 사람은 내 칼에 죽을 것이오"라고 하질 않나, 어린애가 자신을 피하자 "야, 임마!"라고 하질 않나. 나처럼 험악하게 생긴 사람은 건들지 않는 걸로 보아, 정신은 혼미해도 만만한 상대는 알아보나보다.

내가 매일 오가는 천안역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 약간 모자란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는데, 그는 역 어딘가에 앉아 있다가 기차에서 사람들이 내리면 잽싸게 광장으로 뛰어나오고, 사람들에게 손바닥을 내밀며 이런다. "어이, 아저씨!!!" 대개 모른척하고 그를 지나치는데, 그러면 그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시발놈!" 지금이야 아무렇지도 않지만, 처음에는  남자한테는 그러지만, 여자한테는 쫓아가서 때리는 시늉을 하며 이렇게 외친다. "칵!" 만만한 상대에게 좀 더 과격한 것은 이사람도 똑같다.

육체에 장애를 가진 사람이 있듯이, 이 사람들처럼 정신에 장애를 가진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우리나라는 장애자의 지옥이다. 인도에 설치된 턱은 수많은 장애자를 절망케 하고, 혜화역서 휠체어로 전동차를 오르던 사람이 굴러떨어져 죽는 일도 발생한다. 장애자 대표인 박래군 님이 수없이 시위를 해도, 그의 주장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장애자들은 모두 어디론가 숨어 버려, 서울 거리는 장애자를 보기가 가장 힘든 곳이다. 이를테면 장애자들의 자발적인 격리가 이루어진 것이다.

예전에는 나도 힘들게 휠체어를 미는 사람을 보고 "저 사람들은 왜 나와서 저래?"라고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책을 읽은 지금은 장애인에게 열악한 우리 사회의 현실을 깨닫게 되었고, "한명도 이용하지 않더라도 장애인 시설은 있어야 한다"고 말할 정도가 되었다 (물론 실천은 하나도 안한다). 난 더 많은 장애인들이 거리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들과 공존함으로써 사람들이 장애인에 대해 갖는 편견이 교정될 수 있다고 믿는다. 난 뇌성마비자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그런 이유로 영화 <오아시스>조차 보지 못했지만, 그들 역시 우리가 더불어 살아야 할 이땅의 성원들이 아니겠는가.

이런 생각은 정신에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난 정신적 장애인에게는 그다지 관대하지 못하다.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는 정신에 어느 정도의 장애를 가지고 있으며, 정신적 장애인이 일으키는 범죄가 거의 없으며 대부분의 범죄는 우리가 멀쩡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가끔씩 눈에 띄는 정신적 장애인은 내게 당장의 위협으로 느껴진다. 격리가 아닌 공존이 최선의 해법임을 알면서도 "저 사람 어디 좀 데려갔으면" 하는 마음이 이따금씩 드는 것은 그때문이다. 그런 걸로 미루어 볼 때, 말은 번지르르하게 할지언정, 난 그들을 내가 더불어 살 사람들로 여기지 않는 거다. 철학자 김상봉님에 의하면, 그들의 고통을 내 것인 양 느끼고, 그들을 내 형제로서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세계시민이 된 것'이란다. 난 언제쯤 세계시민이 될 수 있을까?

* 시간이 없어서 졸속 마무리를 했습니다. 오대산 잘 다녀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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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02-29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은비님/그렇죠. 국가적인 대책이 있어야겠죠... 검은비님 이미지가 얼마 전에 바뀌어졌지요? 훨씬 더 멋져진 건 틀림없지만, 아직은 그전 이미지가 더 친숙합니다. 적응하는데 며칠 걸리겠지요... 참, 저 잘 다녀왔습니다.

진/우맘 2004-03-01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지하철을 탔었는데 말입니다...저는 매번 드는 생각이, 장애인용 리프트가 오르내릴 때 왜 그렇게 큰 소리로 듣기 싫은 '즐거운 곳에서는~'이 울려퍼져야 할까요? 생각해보면, 아마도 리프트가 가니 비키세요~하는 것 같지만, 제가 그 리프트 위에 타고 있다면 시끄러운 단화음의 음악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아지는 것이 상당히 부담스럽고 싫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즐거운 나의집'은 안타깝게도 지하철에서 구걸하시는 분들이 가장 선호하시는 음악이라 더더욱...
 

 

 

 

 

 

어제는 십며칠만에 술을 안마시는 날이었다. 정말 간만에 저녁을 집에서 먹기로 어머님과 약속까지 한 터. 학교 일이 늦게끝나 딴지에 도착한 건 밤 8시 15분이었고, 그때부터 싸인을 시작해 9시 40분쯤 끝을 냈다. 내가 싸인을 하는 동안 딴지 친구들은 맞고를 치거나,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싸인을 마친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말했다.

"저... 제가 맥주라도 한잔 대접해야 하는데, 집에 일이 좀 있어서...핫핫"

그의 말이다. "무슨 말이어요? 맥주라도 한잔 해야지!"

알고보니 그들은 일을 다 끝내놓은 뒤 날 기다린 거였다. 그런 충정을 어찌 거절할 수가 있겠는가. 난 영등포 근처의 맛집 <벽돌집>으로 갔고, 고기를 안주삼아 소주 두병을 나누어 먹었다. 하지만 그 둘이 마신 건 잘해야 반병 정도일테고, 나머진 모두 내 입으로 들어갔다. 소주 한병 초과부터는 술 한번으로 치는 관행상, 어제도 '쉬는 날'이 아니었다. 주당들과 오대산에 놀러가는 오늘도 정신을 잃을 때까지 술을 마실 것은 당연한데, 난 언제나 쉬게 될까?

집에 갔더니 어머님이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날 기다리고 계신다.

"저...어머니...사실은..."

여기까지 말했을 때 엄마가 소리를 치신다. "너, 오늘은 약속했어!"

그 서슬에 놀라 이렇게 반격했다. "누가 뭐랬나요? 빨리 밥 줘요!"

난 낚지볶음에다 밥 한공기를 비벼서 꾸역꾸역 다 먹었다. 술도 알딸딸하고 배가 불러 잠이 오지 않았고,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그렇다고 어제의 술자리가 전혀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액자가 딸린 이효리 사진(산사춘 광고)을 얻었으니까! 담주에 출근하면 내 연구실에 걸어놓아야겠다. 음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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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2-28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되요~ 제발 한번쯤 쉬어주세요~ 옥체보존하시라니까요~ >0< 어머니는 서운하셨겠어요...전화라도 주시지...

nalchong 2004-04-26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오늘 장마처럼 댓비가 쏟아져도 기분이 좋을 것같습니다. 연구실 틈새로 목격한 이효리 사진의 출처를 알게되었으니까요!! 이래저래 '잰 뭐지~'하는 뒷끝을 남기게 될까봐 글을 남기는 것이 조심스러웠는데요...저의 궁금함의 한토막이 해결되는 기쁨에 그만 글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앞방 교실의 연구원으로 잠시 있었더랬거든요. '그 이효리 액자는 어디서 난 것일까'하는 생각에 너무 골몰한 나머지, 직접 여쭈어볼까도 생각했었다니까요....우연의 음악에 정말 놀라울 따름입니다. 주절주절..
 

 

 

 

 

 

(외)할머니는 자주, 여동생 집에 가신다. 애를 봐주기 위해서다. 여동생은 애를 둘 낳았는데, 이제 두살인 둘째는 내가 아는 애들 중 가장 산만하다. 엊그제 우리집에 와서 잠깐 머무는 동안, 그는 컴퓨터를 고장내고, TV 리모콘을 없애놓고, 벤지밥을 먹었으며, 금붕어 먹이를 어항에 몽땅 쏟아붓는 등 갖은 만행을 저질렀다. 7개월만에 태어난 그 아이는 낳고나서 몸이 안좋아 헌혈을 해줘야 했는데, 그때 피를 준 사람이 나다. 그래서 그런지 그 녀석은 나를 많이 닮았고, 말 안듣는 것도 비슷하다. 정이 많이 갈만 하지만, 워낙 말썽을 피우는 통에 요즘은 그가 오는 것 자체가 두려울 정도다. 그런 애들을 우리 할머니더러 보게 하는 것이 난 영 마땅치 않다. 할머니가 1917년생이니 올해 벌써 88세, 그런 분에게 아이를 맡기는 건 너무하지 않는가?

게다가 여동생이 할머니한테 잘한 것도 아니다. 할아버지가 쓰러지신 뒤 2년간, 그 무거운 할아버지를 할머니 혼자 간병을 하셨는데, 여동생은 애 핑계를 대면서 단 한번도 문병을 가지 않았었다. 그러더니 할아버지가 돌아 가시자마자 잽싸게 전화를 해 애를 맡겼으니, 내가 얼마나 얄밉겠는가? 그래서 난 '할머니를 놓아주라!'며 시위도 하고, 때로는 단식투쟁도 했는데, 나만 허기졌을 뿐 별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생각해 보니, 여동생의 행위가 할머니에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애봐주는 사람을 구해 애보기에서 해방되자 할머니는 매우 심심해하셨다. 그러자 심난해지는 것은 우리 어머니. 안그래도 바쁘신 분이 할머니와 놀아 드려야 하니 얼마나 초조하겠는가? 오늘 아침 어머니는 애들을 보러 누나집에, 혹은 여동생 집에 가자고 보채는 할머니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엄마, 노인정에 한번 가보시겠어요? 거기 가면 얼마나 재미있는데요"
피, 노인정이 뭐가 재미있담? 내가 제대로 된 손자라면 어머니를 대신해서 할머니를 여기저기 모시고 다니겠지만, 알다시피 난 나 혼자만의 쾌락을 즐기느라 어머니보다 더 바쁜 삶을 살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할머니는 오늘 또 여동생 집에 가시게 되었다.

요즘 한창 청춘을 불사르고 있는 내게도 노년은 찾아온다. 눈이 침침해 책도 못읽고 인터넷도 할 수 없다면, 난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까? 그때도 지금처럼 내 곁에 있어주는 친구들이 많이 있을까? 별로 자신이 없다. 그 전에 조용히 간다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하고 무료한 삶을 보내야 한다면, 난 도대체 뭘 해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면 두려워지지만, 그런다고 노년이 안오는 건 아니다. 무작정 노년을 두려워하기보다는, 그때 뭘 하고 살 것인지를 지금부터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거동이 불편해지더라도 제발 눈만 침침하지 않기만을 바란다. 눈만 잘 보인다면, 지금처럼 책이 내 좋은 친구가 되어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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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ire 2004-02-28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댓글을 넘 많이 다는 것 같아서(특히 마태우스 님 방에다) 좀 자제하려고 해도, 이 글을 읽으니 참아지지가 않는군요. 정말 좋은, 따뜻한, 암튼... 좋은 글입니다. 전 이런 글이 좋더라구요. 마음이 묻어나는 글...^^

비로그인 2004-02-28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생각'과 같은글 말입니끼??

책읽는나무 2004-02-28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리한 노동(?)이 아니라면.....손주들 커가는 모습 보시면서 사시는것도 괜찮으리라 봅니다....사실 노인들끼리 앉아서 어떤 희망을 얘기한다는것도 그렇고...손주들 새록새록 크는것은 무언가 희망을 품어봄직도하고..(망구 내생각인가??)....암튼...전 가끔 친정에서 일주일동안 묵었다가 오는데...그때 울시부모님...울민이 보고싶었다고...이놈이 없으니..집안이 적막하고 웃을낙이 없다고 매번 그러시더군요...그래서 노인들께 손주들은 애틋한 존재인듯하더군요...넘 동생분 구박하시지마세요...오히려 외할머님은 그것을 즐기시는지 모르시거든요...^^....대신 무리하게 애를 보시기엔 좀 연세가 많으시네요...^^....근데 그조카는 정말 대단하네요...^^

sooninara 2004-02-28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0~60대 젊은 할머니들은 손자 안보려고하시죠..본인이 놀기에 바쁘니까..하지만 여든이 넘으신 할머니에겐 증손자보는것도 재미가 있겠네요..
조카가 너무나 활동적이라 할머니가 힘드시긴 하겠습니다. 여동생이 육아우울증이 없나요?
저는 얌전한 아이만 키웠는데도 힘들던데..그렇게 일저지르면 못키울것 같아요..
 

 

 

 

 

 

딴지일보에서 내 책을 팔아주기로 했다. 내가 책에다 싸인을 해서 팔면 좀 인기를 끌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딴지 측의 생각이었다. 가격은 택배까지 해서 9천원, 알라딘에서는 10%가 할인되어 8,100원이지만, 내 싸인의 값어치가 900원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터였다. 그 숫자가 딴지에서 목표로 삼는 50명이 될지는 의문스럽지만, 어찌되었건 내겐 고마운 일이다.

그래서 어제 저녁, 난 배달된 책에다 싸인을 하러 딴지일보에 갔다. 가면서 내내 고민한 것은, 내 싸인이라고 할 게 없다는 거였다. 내 싸인은 '서'자를 조금 빠르게 쓴, 누구나 위조할 수 있는 특징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다른 이들에게 책을 줄 때는 싸인 대신 내 이름과 그에게 해줄 덕담 몇마디를 첨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물론 제대로 된 싸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안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싸인할 기회라봤자 신용카드 전표에다 하는 것 말고 뭐가 있담? (그나마 신용카드를 잃어버렸으니...) 그런데, 50권이나 되는 책에다 싸인을 할 기회가 덜컥 생겨버린 거다.

내 싸인을 본 딴지측 관계자는 역시나 실망했다. '조금 약한데요' 그래서 난 '기생충은 영원하다! 서민 드림'이라는 문구를 제시했지만, 그것도 좀 이상했다. 순간, 8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 난 가수 김현철이 진행하는 케이블방송에 출연하던 중이었는데, 시간이 남아 소파에 앉아있는 내게 묘령의 여자가 다가오더니 싸인을 요구한다. "전 싸인이 없는데요?"라고 했더니 지금 하나 만들란다. 잠시 생각을 하던 끝에 난 말 그림을 그렸다. '마태우스'는 한자로 쓰면 '馬太優秀'니 말 그림이 그런대로 어울렸다. 말의 몸에다 '마태우스 서민'이라고 쓰고, 말의 몸체 밑에다 날짜를 썼다. 말의 입 근처에 말풍선을 그린 후 '누구누구님, 행복하세요'라고 썼더니 그럴 듯 했다. 그 여자도 꽤 만족했는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이거, 저랑 같이 개발한 거라는 거, 꼭 기억하세요"

물론 난 그녀의 이름이 뭐였는지 까먹었다. 그녀 역시 나의 존재를 잊었을 것이다.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난 그로부터 얼마 못가서 몇 개 안되는 방송에서 모두 잘렸고, 그 후부터는 알아보는 사람도 없어졌으니까 말이다. 내가 그 싸인을 사용해 본 것은 그때를 포함해 세 번밖에 안된다.

어제, 싸인을 해야 할 50권의 책 앞에서 그 생각이 불현 듯 떠올랐고, 딴지 관계자도 좋다는 반응을 보였다. 50권을 다하는 데는 한시간이 조금 더 결렸다. 원래 그림에는 일가견이 있었는데, 말 그림은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다. 그리다 보니 '개' 같고, 말 다리는 앞뒤 길이가 달랐다. 그렇긴 해도, 그냥 이름만 써넣는 것보다는 그게 훨씬 더 멋져 보인다. 그래, 앞으로 내 싸인은 무조건 말 컨셉이다! 물론 신용카드에도!


* 수니나라님까지는 제가 그냥 이름만 썼지만요, 실론티님에게는 말 싸인을 그려넣었습니다. 앞으로 주문하시는 분께는 계속 말 싸인을 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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쎈연필 2004-02-28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알라딘에서 주문하면 마태우스님 싸인은 받을 수 없는 건가요? 마태우스님 주소 가르쳐주시면 책사서 보내드릴게요(그냥 받을 순 없고요). 말 싸인 보내주세요-^^

mannerist 2004-02-28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 제 서재에서 보셨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제껏 제가 본 사인 중 최고는 이겁니다.


 

 

 

 

 

 

 

 

Sviatoslav Richter라는 피아노 연주자의 사인입니다. 사인 이상으로 연주도 최고구요. 음악하는 예술가 기질이 대번에 드러나지 않나요? ㅋㅋㅋ...


마태우스 2004-02-28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너리스트님/우와, 정말 대단하군요...
자두상자님/으음... 그냥 주소 가르쳐 주시면 안될까요?

chaire 2004-02-28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리을)태우스님, 저도 자두상자 님처럼 주소로 책 보낼게요. 말그림 넣어주세요.

마태우스 2004-02-28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이레님/님도 빨랑 주소 대세요!!! 말그림 큼지막하게 그려드립니다.

책읽는나무 2004-02-28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요??.......어젯밤에 구슬프고도 긴사연을 적어서 멜로 보내드렸는데.........못보셨나요??.....답이 없으시네요...흑흑

비로그인 2004-02-28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말그려진 싸인이라...참신한데요?? 어느분이 스캔해서 보여주시면 재밌을꺼 같은데...^^

sooninara 2004-02-28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사인이 눈앞에 아른거립니다..시간나면 고속철타고 천안으로 가볼까요? 책들고서...
사인 A/S는 해주실거죠

비로그인 2004-03-01 0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마을 분들을 위한 싸인회를 개최하는게 좋을지도 모르겠는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