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돈키호테
김호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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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편의점의 작가 김호연의 신작의 제목은 나의 돈키호테다. 돈키호테처럼, 특이하지만 자신만의 가치관이 뚜렷한 돈키호테 비디오의 주인이자 돈 아저씨로 불리는 장영수 아저씨. 돈키호테의 배경인 스페인의 도시를 우리나라의 도시와 겹쳐서 이야기하는 그와의 추억이 가득한 대전. 바로 그곳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격무 속에서 대박 아이템을 뽑아내지만, 결국 번아웃에 팽 당하는 전직 PD 진솔은 엄마가 있는 대전으로 내려온다. 며칠을 먹고 자고만 하던 진솔은 추억이 깃들었던 곳을 찾았다가 돈 아저씨와의 기억을 떠올린다. 북한도 무서워서 못 쳐들어 온다는 중2. 그 시절 진솔은 돈키호테 비디오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낸다. 돈 아저씨가 바쁘면 가게도 봐주고, 독촉 전화도 돌리는 무서울 게 없던 그 시절 진솔은 산초로 불리며 돈키호테 비디오에서 라만차 클럽의 일원으로 활약한다. 십수 년 후에 다시 돌아온 그곳에는 1층에서 지하로 장소만 옮겼지 아저씨를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돈 아저씨의 아들 한빈은 돈 아저씨가 사라졌다고 이야기한다. 한빈이 아저씨를 애타게 찾는 이유는, 돌아가신 건물주 할머니의 손자이자, 그 시절 진솔이 짝사랑했던 성민이 지하실 짐을 빼라는 말을 전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진솔은 그 시절 찐산초가 되어 돈 아저씨를 찾기 시작한다. 전직 PD였던지라, 이번에는 유튜버가 되어서 아저씨를 찾는다. 아저씨의 향수가 남아있는 지하실에서 그렇게 찐산초는 아저씨가 추천해 줬던, 아저씨와 함께 봤던 비디오를 기억하며 리뷰하기도 하고 아저씨 주변 인물들을 찾아 아저씨의 과거와 현재를 찾아 나선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던 라만차 회원들과의 만남도, 아저씨의 과거도 마주하게 된다.

마냥 돈키호테 같았던 아저씨를 돌아보는 진솔은 아저씨와 함께 지냈던 사람들을 하나 둘 만나며 자신이 몰랐던 인간 장영수의 삶을 마주하게 된다. 법학도로 같이 공부하던 아저씨의 동기를 통해 아저씨가 학원 강사가 된 이유가 과거 노동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간 이력 때문에 취업이 쉽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접하게 되고, 같이 학원 강사를 했던 현직 원장을 통해 잘나가던 영어강사 일을 그만둔 이유를 알게 된다. 유명한 대학교수의 책을 대리 번역했던 출판사 직원을 대신해 고군분투하며 결국은 사과까지 받아내는 아저씨의 모습까지 마주하게 되며 진솔도, 한빈도 돈 아저씨의 삶을 새롭게 마주하게 된다. 한빈은 아빠에 대한 기억이 좋지 않았는데, 바깥에서는 사람 좋은 사람이었지만 엄마와 자신에게는 누구보다 무능력한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돈 아저씨의 과거뿐 아니라, 책 속에 소개되는 비디오 이야기도 흥미롭다. 큰 인기를 끈 작품이 아닌, 생각할 여지를 주는 작품들을 마주하니 나 역시 다시금 찐산초가 소개해 주는 작품들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우리의 돈 아저씨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찐산초와 한빈은 돈 아저씨를 찾을 수 있을까? 아저씨는 어떤 모습으로 이들 앞에 나타날까? 이번에도 잔잔한 여운이 남는 김호연 작가만의 색이 담긴 작품을 만났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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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빠의 안부를 물어야겠습니다
윤여준 지음 / 다그림책(키다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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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아빠에 관한 책이 붐을 이룬 적이 있었다. 상대적으로 엄마보다 찬밥(?) 신세인 아빠인지라, 시중에도 엄마의 삶을 그린 책은 많지만 아빠의 삶에 포커스를 맞춘 그림책은 드문 것 같다. 나 역시 아빠의 도움을 상당히 많이 받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엄마가 편한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우리 아이들만 봐도 아빠를 좋아하지만, 아프거나 잠잘 때는 꼭 엄마를 찾는다. 10개월 동안 엄마 뱃속에서 공생하며, 인생에서 상당한 시간을 아빠보다 엄마와 가까이 지낸 탓이라 해야 할까?

이 책의 주인공은 아빠다. 아침부터 식구들의 아침밥을 챙기는 아빠. 모두가 바쁜 아침을 보내고, 마지막 남은 저자 역시 밥 보다 잠을 택하는 현실에서 아빠는 외롭다. 그리고 그렇게 아빠의 과거와 현재가 담담하게 책 속에 담긴다. 회사일로 바쁜 아빠가 갑자기 사장의 호출을 받는다. 그 방 안에서 무슨 말을 들었던 것일까? 아빠는 박스 안에 자신의 짐을 주섬주섬 챙겨서 돌아온다. 갑작스러운 퇴직에 아빠는 갑자기 삶의 시간이 마구 주어진다. 갑작스러운 여유에 아빠는 처음에는 괜찮은 것 같았다. 그동안 못했던 취미생활도 하고, 만나지 못했던 친구도 만나며 여유로운 시간을 즐겼다. 처음으로 자녀의 졸업식에도 참석해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아빠의 삶은 여유가 쌓여 무료해지고 있었다. 결국 가족들의 아침밥을 준비하기로 한 아빠는 재취업을 준비했지만 쉽지 않았다.

어느 날, 저자는 비를 맞고 가는 아빠를 마주한다. 왜 비를 맞고 다니냐는 딸의 말에 아빠는 비가 많이 오지도 않는데, 집이 멀지 않은 데 등의 이유를 대며 우산을 쓰지 않고 걷는다. 물론 우산 없이 걷는 게 처음은 아니었다. 아빠는 퇴직 전에도 그런 모습을 보였으니 말이다. 내가 가진 작은 우산 앞에서, 아빠는 괜찮다는 말로 애써 내 우산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단지 우산이 작아서였을까?

처음에는 왜 우산 이야기가 중간중간 나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가는 딸의 우산을 보고 딸의 성장을 마주하게 되었다. 아빠를 이해할 수 없는 어린 나이의 딸에서, 아빠의 삶을 이해해가는 우산처럼 큰마음을 지닌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딸은 과연 아빠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책 속에는 유난히 검은색이 많이 사용되는데, 유난히 눈에 띄는 주황색이 보인다. 바로 아빠의 것들이다. 상대적으로 파란색으로 표현되는 딸과 주황색으로 표현되는 아빠. 매일같이 피곤한 일상에서, 아침밥 먹을 여유조차 없는 딸은 어느 순간 아빠의 마음을, 아빠의 모습을 마주한다. 딸의 그 한마디에 미소가 번지는 아빠의 얼굴.

어느 순간 큰 산 같았던 아빠가 왜 이렇게 작게 보이는지... 나이를 먹으면서 아버지의 모습에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그렇게 무섭고 컸던 아빠가 언제 이렇게 왜소해진 걸까? 하는 생각 말이다.

언젠가부터 아빠한테 전화를 걸 때는 늘 무언가 부탁이 있을 때뿐이었다. 그래서 책의 이야기가 더 마음에 박혔던 시간이었다. 오늘은 정말 아빠의 안부를 물어야겠다. 나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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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너는 속고 있다
시가 아키라 지음, 양윤옥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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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너는 속고 있다. 이 책을 읽고 알았다. 이 책에 "너"는 독자라는 것을...!

누마지리 다카요는 딸 아야나를 키우고 있다. 학창 시절 테니스 선수로, 테니스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던 터라 막상 테니스를 그만두고 나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우연히 만난 남자가 테니스로 유명한 학교에서 주전으로 활약했다는 말에 급 관심이 생겼던 다카요는 그의 언변에 넘어가 결국 그와 연인이 된다. 그리고 예정에 없던 임신으로 결혼까지 하고 만다. 언변이 뛰어났던 남편은 다카요의 부모를 포섭하여 레스토랑 투자금을 받지만, 사업은 실패하게 되고 그 일로 다카요의 아버지는 충격을 받고 사망한다. 아버지의 사망에 어머니 역시 치매를 앓게 된다. 남편은 사업 실패 이후, 가정폭력이 날로 심해지고 결국 다카요는 남편 몰래 아야나를 데리고 도쿄로 도망을 친다. 도쿄에서 콜센터 일을 하며 딸을 양육하지만, 막말을 내뱉는 고객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일상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결국 일을 그만두게 되지만, 딸과 생활할 자금이 없던 터라 연체금은 계속 쌓이고 결국은 거리에 나앉을 지경이 되고 만다. 주변에 돈을 빌릴만한 곳이 없는 다카요는 결국 여기저기 금융권에 손을 벌리지만, 현재 직업이 없는 다카요에게 돈을 대출해 줄 곳은 없다. 사채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불법 개인 사채를 알아보던 다카요는 돈을 빌려주겠다는 남자에게 강간을 당할 뻔하지만 겨우 모면하고 도망친다. 돈을 갚아야 할 마지막 날, 오누마 미나미라는 사채업자와 연락이 된 다카요. 혼자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라는 다카요에게 유난히 친절했던 미나미의 도움으로 겨우 자금을 마련해서 한숨을 돌린다. 하지만 이렇게 저렇게 미나미로부터 빌린 돈은 점점 늘어난다. 결국 큰돈을 갚지 못한 다카요는 딜리버리 헬스케어라고 하는 성매매 업소까지 소개받게 되는데...

결국 그동안 돈을 빌려줬던 사부와 일을 같이 하게 되는 누마지리는, 사부로부터 돈뿐 아니라 채권자들을 관리하는 방법 등의 노하우를 배우며 겨우 사채 일을 해나간다. 하지만 불법 사채업자 중에서도 이자를 덜 받는 편인지라, 남는 돈이 많지 않다. 겨우 사부에게 빌린 돈을 조금씩 갚아나가고 있을 뿐이다. 사실 사부라 불리는 인물은, 불법 사채업 외에도 딜리버리 헬스케어도 여러 개 하고 있다. 누마지리의 고객 중 50만 엔 이상 대출금이 불어난 사람들에게 이곳을 소개하여 겨우 빌려준 돈을 받기도 한다. 역시 경험이 없던 터라, 남자 손님들에게 큰돈을 떼이는 일이 발생하자 결국 누마지리는 타깃을 바꾸기로 한다. 전부터 자신과 같은 처지의 싱글맘들에게 마음이 쓰이는 누마지리. 결국 그녀들을 중심으로 더 많은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사부님에게 돈을 더 많이 빌리게 된다. 점점 사업이 커지고, 관리해야 할 고객(?)들이 많아지자 사부는 함께 할 동업자를 구해보라고 하는데...

책을 읽고 난 후, 나도 모르게 주위를 의심하기 시작하는 부작용(?)이 생겼다. 대출을 받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참고로 나처럼 뒤통수를 제대로 얻어맞는 독자들이 많을 거라 예상된다. 물론 나 혼자만의 착각 때문에 벌어진 일일 테지만, 어안이 벙벙한 상태에서 책을 읽다가 혼자 멘붕이 왔다. 결국 옮긴이의 글을 읽고 나서...;;;;;; 사태를 제대로 파악했다. 그만큼 몰입도가 좋다는 뜻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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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혼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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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었어" 하고 내가 너에게 말했을 때, "

나도" 하고 네가 나에게 대답해 주기까지 단 1초도 걸리지 않았던 그 순간을,

나는 행복이라고 기억해.

P.36

청혼이라는 제목과 SF라는 장르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청혼은 어떤 장르에 어울릴까? 아마도 로맨스물이 아닐까? 물론 SF가 그리는 세상에도 감정의 교류는 있을 테고, 그 안에서 사랑과 미움 등 다양한 감정들이 드러날 텐데... 왜였을까?

요즘은 국제결혼이 낯선 이야기가 아니긴 하지만, 여전히 자라온 환경과 배경, 문화와 언어가 다른 사람들 간의 관계는 쉽지 않은 것 같다. 같은 문화에서 자라난 우리 부부도 서로 다르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데, 타 문화권의 사람과의 결혼은 얼마나 힘들까 싶다. 근데 이 책에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지구인과 외계인이라 불리는 우주인의 사랑이 담겨있다.

현재 둘은 떨어져 있다. 주인공이 있는 곳에서 지구까지 가려면 170시간이 소요되고, 다시 복귀하는데 180시간이 소요된다. 물론 그동안 기술의 진보로 앞으로는 130시간가량으로 줄어든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둘의 사이에는 이렇게 긴 시차가 존재한다. 이동에만 350시간이 소요되는데... 둘이 같이 있는 시간은 고작 40시간이라니... 그나마 400시간의 휴가를 받아서 가능한 것이었다. 시차보다 힘든 것은 그 시간을 들여 우주선을 타고 가는데 겪는 어마어마한 멀미(?)다. 물론 그 모든 것보다 더 힘든 것은 서로를 향한 그리움일 테지만 말이다. 연인에게 쓰는 편지 속에는, 주인공이 우주에서 겪는 전쟁의 이야기가 상당한 페이지를 차지한다. 각종 사유서를 써 내야 했는데, 그나마 여러 번 쓰다 보니 익숙해지긴 했지만 무엇을 이유로 사유서를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뿐 아니라 반란군 사령관으로 지목되어 출두 명령으로 감찰 장교를 만나고, 훗날 함선의 장군의 오른팔로 지목되었다는 이야기 등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모습은 일반적인 연인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물론 전쟁의 이야기를 나누는 연인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반지를 마치고, 청혼을 기다리는 주인공 앞에 실제적인 문제들이 등장한다. 우선 연인이 자신의 청혼을 받아들여줄 것인가의 문제다. 지구의 중력에 길들여진 연인이 과연 무중력 상태의 우주로 올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문화가 다른 우리의 상황에서도 지극히 현실적으로 비친다.

길지 않은 소설임에도, 중간중간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전쟁과 과학의 발전 이야기가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어서였다고 핑계를 대고 싶다. 그럼에도 책 안에 깔린 연인에 대한 깊은 순애보는 어떤 문화에 있던 지 감출 수 없는 감정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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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잔혹사 - 약탈, 살인, 고문으로 얼룩진 과학과 의학의 역사
샘 킨 지음,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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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과 연구를 위해서는 누군가 혹은 무언가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말에 동의한다. 부모의 희생(육체적, 시간적, 재정적) 덕분에 아이는 태어나고 자란다. 과학과 의학에서의 희생은 어떨까? 오늘도 출근길에 임상실험에 관한 광고를 보았다. 질병에 관한 신약을 개발 중인데, 해당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 중 신약을 투여받고 싶은 피험자를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피험자로 지원하는 사람들의 경우, 해당 분야의 전문가에게 돈을 내지 않고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좋게 보고 지원을 할 것이다. 좋게만 진행된다면 연구자도, 피험자도 윈윈 할 수 있는 상황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과학사에 등장하는 모든 상황이 결국 모두에게 윈윈 효과를 가져왔을까?

이 책은 과학과 의학의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진 참혹한 과거사에 관한 내용이 담겨있다. 제목 그대로 어느 정도 감수하고 읽기 시작했지만, 프롤로그의 클레오파트라부터 당황스러웠다. 일제가 자행했던 마루타나, 책 속에 등장하는 각 사건들이나 시대만 달랐을 뿐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닮지 않아 보였던, 관련이 없어 보였던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어떤 결과를 도출해 내었는지를 만날 수 있다.

물론 처음부터 악랄하고 잔혹한 방법으로 과학을 발전시키려고 한 것은 아니다.(그렇다면 그건 발전 이전을 논하기 전에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 볼 수 있다.) 때론 잔인한 현실을 벗어나고자, 그에 대한 거부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처음 한 번이 어려운 거지, 한번 실행하고 나면 조금씩 현실에 안주하고 적응하며 상황을 합리화시킨다. 박물학자와 노예무역의 관계, 건강과 안녕을 위해서라는 미명하에 벌어진 각종 잔인한 실험들, 해부학자들과 시신 도굴 및 살인 등 입에 담기도 쉽지 않은 내용들이 책 여기저기에 등장한다. 책을 읽으며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었다. 과정과 결과에 관한 것이었다. 과정이 아무리 잔혹하고, 문제가 많아도 결과가 좋다면 정당하다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일까? 소위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었을 때, 주객전도의 상황이 벌어졌을 때 특히 더 결과에 치중하게 된다고는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씁쓸하기만 하다. 그들을 마냥 비난할 수만은 없는 현실이 책 여기저기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런 잔혹한 과정을 거쳐서 발전한 과학과 의학의 수해를 우리가 받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두둔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 역시 읽는 내내 조금씩 합리화 시키게 되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나 보다. 과거의 그들이 벌인 것들에 대한 죄책감이나, 잘못되었다는 생각들이, 성인지 감수성이나 인격권, 평등사상 등의 정신적 진보가 일어나지 않은 상태였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합리화 말이다. 물론 그럼에도 같은 인간으로, 생명체로 차마 해서는 안 되는 행위들을 했다는 사실에 비난을 면하기는 어렵다. 양면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임에도 끊임없이 도덕적인 판단의 잣대와 정신적 진보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진정한 의미의 과학과 의학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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