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미국 대표로 육상 5,000미터 경기에 출전했던 루이스 잠페리니에 얽힌 이야기이다. 1941년, 그는 미육군 항공대에 입대해 B-24 리버레이터의 폭격수로 태평양 전선에서 복무한다. 


1943년 4월, 그는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중부 태평양의 나우루 섬 폭격에 나서서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하지만, 3대의 제로 전투기에게 공격 당해 폭격기가 심각한 피해를 입고 승조원 5명이 부상을 입는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된다. 


얼마 후, 실종 폭격기를 찾으러 나선 다른 임무에서 그가 탄 폭격기가 엔진 고장으로 태평양에 추락한다. 승조원 11명 중 잠페리니를 포함한 단 3명 만이 추락에서 살아남았다. 이후, 그는 47일간 조류에 떠밀리며 태평양을 표류하다가, 결국 마셜 제도에서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힌다. 이후 일본 본토의 포로 수용소에서 고초를 겪으며 지내다가 종전을 맞이한다. 


영화배우 안젤리나 졸리는 이 이야기를 2014년 동명의 영화로 만들었다. 유튜브에는 영화 클립들이 있는데, 이중 나우루 폭격과 추락에 대한 부분을 모아 놓는다.


나우루 섬 폭격 부분


엔진 고장으로 태평양에 추락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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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책 2권'이 '내 인생 최고의 책 2권'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 2권의 책은, 내가 고등학생 때 처음 알게 되어 읽어보고 싶었으나 아직도 읽지 못하고 있는 책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시작은 했으나 아직 앞의 몇 페이지만 읽고 끝내지 못하고 있는 책이다. 
















아직 끝내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잘 모르겠다. 시급하지 않아서? 다른 책들이 더 재미있어 보여서? 어찌 보면 진정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엉뚱한 일로 변죽만 울리고 있는 나를 상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막상 다 읽으면 그때는? 평생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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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에서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가 언급되어, 전부터 생각했던 것을 적어 놓는다. 왜 <코스모스>는 좀 더 널리 읽히지 못하는가. 왜 그렇게 많이 언급되면서도, 아직도 못 읽은 사람이 많은가. 난 여기에 번역도 한 몫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우리말로 두 번 번역되었다. 첫 번째는 한국일보 기자이자 작가였던 서광운이 번역하고 경희대 교수였던 조경철이 감수했으며, 두 번째는 서울대 교수였던 홍승수가 번역했다. 난 서광운 역의 <코스모스>를 읽었다. 이후, 서광운 역의 <코스모스>는 절판되고 홍승수 역의 <코스모스>가 나왔는데, 난 단연코 서광운 역 <코스모스>가 낫다고 생각한다. 뒤에 나왔다고 더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하면 당연히 안되며, 그 좋은 예가 <코스모스>의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헌사를 보자. 세이건이 그의 영혼의 반려자 Ann Druyan에게 바치는 글이다.


For Ann Druyan

In the vastness of space and the immensity of time,

it is my joy to share a planet and an epoch with Annie.


서광운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앤 드루언에게


광대한 우주, 그리고 무한한 시간.

이 속에서 같은 행성, 같은 시대를

앤과 함께 살아 가는 것을 기뻐하면서.


다음은 홍승수 역이다.


앤 드루얀에게 바친다


광막한 공간과 영겁의 시간 속에서

행성 하나와 찰라의 순간을

앤과 공유할 수 있었음은 나에게는 커다란 기쁨이었다.


어느 번역이 더 멋진가? 난 서광운이 번역한 헌사를 보고 가슴이 뛰었다. 이후 홍승수 역의 헌사를 보고는 이 멋진 글을 망쳤다고 생각했다. 이 두 예가 두 번역자의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서광운 역은 훨씬 간결하며 시적으로 멋있게 칼 세이건의 경이와 감탄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홍승수 역은, 끝까지 제대로 읽지는 않았지만, 몇 구절만 살펴봐도 훨씬 건조하고 길며 딱딱하다.


제1장을 보자. 원제는 "The Shores of the Cosmic Ocean"이다. 서광운은 이를 "우주의 바닷가에서"라고 번역했고, 홍승수는 "코스모스의 바닷가에서"라고 번역했다. 먼저 서광운의 번역이다.


  우주Cosmos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우리의 사고력은 극히 빈약하지만 우주를 생각하노라면 우리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다. 등골이 오싹해지고 목소리는 달뜨며 먼 옛날을 회상하는 것 같은,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와 같은 그런 기분이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참으로 위대한 신비의 세계로 다가간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흥분한다.

  우주의 크기와 나이는 인간의 보통의 이해력을 초월한다. 우리의 조그만 고향인 지구는 끝없이 영원한 우주 속의 미아이다. 우주를 생각해 보면 지구상의 많은 사람들의 걱정거리 같은 것은 보잘 것 없는 하찮은 것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인류는 아직도 정열적이고 호기심에 넘쳐 있으며 용감하고 풍부한 장래성을 지니고 있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우리들은 우주와 지구에 대하여 예기치 않았던 놀랄 만한 발견을 이룩했다. 그리고 생각만 해도 가슴 두근거리는 탐험을 해 냈다.

  생각해 보면 인간은 원래 의문을 갖도록 되어 있으며 인간에게 있어 안다는 것은 바로 기쁨이요, 즐거움이다. 지식은 또 생존해 나가는 전제 조건이기도 하다.

  우리들은 아침 햇살 속에 떠돌아다니는 먼지 같은 존재에 불과하나, 우리들의 미래는 우주에 대하여 우리가 얼마만큼 알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멋지다. 예전에 유시민 작가가 글쓰기 관련 책에서 다른 좋은 글을 필사하는 것도 권장한다며 예로 든 책 중에 <코스모스>가 있었는데, 난 유시민 작가도 서광운 역을 읽었다고 생각한다[*].


다음은 홍승수 역이다.


  코스모스COSMOS는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그 모든 것이다. 코스모스를 정관靜觀하노라면 깊은 울림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나는 그때마다 등골이 오싹해지고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며 아득히 높은 데서 어렴풋한 기억의 심연으로 떨어지는 듯한, 아주 묘한 느낌에 사로잡히고는 한다. 코스모스를 정관한다는 것이 미지未知 중 미지의 세계와 마주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울림, 그 느낌, 그 감정이야말로 인간이라면 그 누구나 하게 되는 당연한 반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인류는 영원 무한의 시공간에 파묻힌 하나의 점, 지구를 보금자리 삼아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주제에 코스모스의 크기와 나이를 헤아리고자 한다는 것은 인류의 이해 수준을 훌쩍 뛰어 넘는 무모한 도전일지도 모른다. 모든 인간사는, 우주적 입장과 관점에서 바라볼 때 중요키는커녕 지극히 하찮고 자질구레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인류는 아직 젊고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으로 충만하며 용기 또한 대단해서 '될 성싶은 떡잎'임에 틀림이 없는 특별한 생물 종이다. 인류가 최근 수천 년 동안 코스모스에서 자신의 위상과, 코스모스에 관하여 이룩한 발견의 폭과 인식의 깊이는 예상 밖의 놀라움을 인류 자신에게 가져다주었다. 우주 탐험, 그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가슴은 설렌다.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는다. 진화는 인류로 하여금 삼라만상에 대하여 의문을 품도록 유전자 속에 프로그램을 잘 짜놓았다. 그러므로 안다는 것은 사람에게 기쁨이자 생존의 도구이다. 인류라는 존재는 코스모스라는 찬란한 아침 하늘에 떠다니는 한 점 티끌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인류의 미래는 우리가 오늘 코스모스를 얼마나 잘 이해하는가에 따라 크게 좌우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나만 앞의 글이 더 좋다고 느끼는지 모르겠다. 예전에 <부분과 전체>의 번역에 관한 글을 썼을 때와는 다른 차이를 느낀다. <부분과 전체>의 새 번역은 너무 우리말로 풀어 적느라 오히려 의미 전달이 부정확해지는 면이 있었다. <코스모스>의 새 번역은 나중에 나왔음에도 오히려 한자어가 더 많으며 딱딱해진 느낌이다. 이에 따라 감흥이 줄어든다. 


원문은 이렇다.


The Cosmos is all that is or ever was or ever will be. Our feeblest contemplations of the Cosmos stir us--there is a tingling in the spine, a catch in the voice, a faint sensation, as if a distant memory, of falling from a height. We know we are approaching the greatest of mysteries.

  The size and age of the Cosmos are beyond ordinary human understanding. Lost somewhere between immensity and eternity is our tiny planetary home. In a cosmic perspective, most human concerns seem insignificant, even petty. And yet our species is young and curious and brave and shows much promise. In the last few millennia we have made the most astonishing and unexpected discoveries about the Cosmos and our place within it, explorations that are exhilarating to consider. They remind us that humans have evolved to wonder, that understanding is a joy, that knowledge is prerequisite to survival. I believe our future depends on how well we know this Cosmos in which we float like a mote of dust in the morning sky.


어느 번역이 더 나은지? 난 종종 잃어버린 것이 아쉽다.


---

[*] 유시민 작가의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2023년 출간)를 보면 그가 코스모스를 처음 접한 때는 2009년 봄이다. 내 생각보다 훨씬 늦게 그는 코스모스를 읽었다. 그렇다면 그는 홍승수 역을 읽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문장은 아마 잘못되었으니 수정해야겠지만 그냥 남겨두고 이렇게 주를 달아 놓는다(2023.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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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9-27 20: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코스모스 최근에 출간 된 책의 번역에 문제가 많습니다
오역 만큼 번역 하지 않고 건너띈것 부터 수치나 계량 숫자도 틀려서 감수를 했다는것도 믿기 힘듭니다
편집에도 문제가 있겠지만
올려주신 첫 문장 부터 서광운님 번역이 빛이 납니다.

헌사에서 칼 세이건이 쓴
[In the vastness of space and the immensity of time,]
의 번역에서 vastnes 번역을 두 번역자가 ‘광대한‘과 ‘광막한‘으로 번역 했는데
광대한은 더 넓은 범위의 땅과 대지를 의미하고 광막한은 사막이나 평야를 의미 할때 쓰는 단어 입니다.
그러니 우주라는 공간을 의미하는 ‘광대한‘ 이라는 표현이 맞습니다
[the immensity of time] 번역도 ‘무한한‘과 ‘영겁‘으로 번역한것도
영겁은 세상이 한번 이루어 졌다가 없어지는 긴 시간을 의미 하기 때문에 영어로는 Eternal time이라고 표현 합니다
저는 어린 시절 서광운 번역본으로 읽고 너무 낡아서 새 번역본을 서점에서 읽다고 그냥 내려 놓았습니다
블루 욘더님이 이렇게 비교 해주시니
새삼 명문장을 빛나게 하는 번역이 어떤건지 곰곰히 생각해 봅니다 ^ㅅ^




blueyonder 2021-09-27 21:31   좋아요 2 | URL
scott 님께서 잘 지적해 주신 것처럼 번역한 용어도 이상한 곳이 여러 군데입니다. epoch를 왜 ‘찰라의 순간‘이라고 번역하는지 이해불가입니다. 새 번역 <코스모스>가 여전히 과학분야의 스테디셀러인 것 같은데, 사 놓고는 번역 때문에 읽다가 마는 일이 있을까 하는 노파심이 듭니다.
사실 원로 학자께서 번역한 것을 제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영어를 아는 것과 ‘잘‘ 번역한다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제가 이러쿵저러쿵 불평을 얘기하지만 번역은 어려운 일이 맞습니다. 잃어버린 것이 너무 아쉬워서 글을 올렸습니다.

그렇게혜윰 2021-09-27 21: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서문부터도....전 원래 집중이 안 되는 글인가 내 탓인가 이러면서 꾸역꾸역 읽었는데 번역 핑계를 좀 대도 되겠는걸요??

blueyonder 2021-09-27 22:06   좋아요 2 | URL
저만 옛 번역이 더 좋은 건 아닌 모양이군요. ^^

yamoo 2021-09-28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수가 번역한 코스모스는 비문이 넘치네요~
국어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걸 해석문을 통해 알겠네요. 저건 번역이 아닙니다. 기자분이 번역한게 진짜 번역이지요~
저두 교수 번역본은 갖다 버려야겠습니다~~

blueyonder 2021-09-28 10:54   좋아요 1 | URL
문제는 오래전 절판된 옛 번역은 이제 찾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ㅠ

2021-09-28 1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쿠우 2021-10-01 1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번역이 엉망이라 가독성이 떨어져서 차라리 원서로 읽으려고 찾다가 이 글을 봤어요. 전 예전 번역판이 있는줄도 몰랐네요. 영미권에서 오래 살았어도 한글책을 읽는 재미가 있는데 번역이 명작을 망치는 경우를 종종 봐서 참 아쉬워요. 요즘은 영어 잘하는 사람도 많은데 왜 굳이 저런 올드한 사람을 번역가로 내세워서 독자들을 힘들게 하는지 모르겠네요.

blueyonder 2021-10-01 21:31   좋아요 1 | URL
번역가 선정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요. 홍승수 교수께서는 유학을 다녀오신 천문학 전문가이시니, 어찌 보면 적임자라고 출판사에서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앞에서도 썼듯이, 영어와 전문지식만이 좋은 번역의 충분조건은 아닙니다.
물론 현 번역본이 완전히 못 읽을 수준은 아니겠지요. 여전히 잘 읽고 감동을 받으실 분도 계실 겁니다. 어쨌든 저는 옛 번역본이 더 좋다고 생각하고요, 이 옛 번역본의 절판이 아쉽습니다.

김형섭 2024-05-14 0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는 둘 다 좋아보여요. 서광운 님이 번역하신 것은 좀 더 이해하기 쉬워요, 그러나 의역이 많아요. 애초에 코스모스 책 자체가 감정을 담은, 현학적 표현이 많으니 의역이 많을 수 밖에 없죠. 홍승수 님이 번역하신 것은 의미가 바로 와닿는 느낌은 아니지만, 곱씹으면서 읽으면 원작의 템포와 감정이 느껴져요.

blueyonder 2024-05-14 09:21   좋아요 1 | URL
네 개인의 취향을 존중합니다. 읽고 원작의 감흥을 느끼실 수 있으면 나름으로 좋은 번역입니다. 저는 제 개인의 느낌을 얘기했을 뿐입니다.

adfair7 2025-05-19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울대 교수라고 해서 뭘 좀 더 알겠지 라고 넘겨짚은 것이 무색하게 ㅡ 헌사부터가 잘못 오역 되었다 ㅡ 찰나의 순간 ㅡ이라는 말이 원문 어디에 있는가? ㅡ 차라리 기자 분이 한 첫 번역이 더 원문에 가깝다 ㅡ 서울대 교수가 한 번역은 한자어가 많은 걸로 봐서 ㅡ 일본어판 중역 이거나 ㅡ 자기 멋대로 단어를 바꿔서 번역이랍시고 썼나본데 ㅡ 저렇게 잘못된 오역에 한자어 범벅된 두번째 번역 본을 읽느니 ㅡ 차라리 원서를 읽는 편이 읽기가 쉬울 듯 하다 ㅡ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리커버)
심채경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2월
평점 :
품절


어떤 계기로 '열 번의 계절'을 거치며 글을 써 책을 내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글솜씨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며 읽었다. 요즘 같은 (물신주의) 세상에, 불모지 한국에서 천문학으로 학위를 하며, 결혼을 하고, 애를 키우며, 학위 후에는 계약직 맞벌이 엄마로 생활하며 연구하는 젊은 천문학자에게 박수를 보낸다.


글은 매우 솔직하게, 천문학과 학부생 때 일화부터 행성학자로서 타이탄과 달에 대해 연구하며 겪었던 일과 느꼈던 생각을 잘 풀어낸다. 이과생이 이런 글솜씨 갖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학창시절 백일장에 나갔다면 수상을 여러 번 했을 것 같다. 김상욱 교수의 글을 처음 읽었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감탄이 나오는 글솜씨임에는 틀림없다.


흥미로운 것이, 천문학을 전공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없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그나마 언급되는 것은 그림과 사진이 대부분인 과학잡지 <뉴턴>인데, 이마저도 큰 의미가 없는 것처럼 얘기한다. 재미있게도,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아직 다 읽지 못했다고 고백하는데, 이것 참, 세대차를 느낀다고 해야 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은, 여러모로 재미와 감탄을 자아낸다. 예컨대 '창백한 푸른 점'이라는 글에서는, 보이저 탐사선이 태양계를 떠나며 찍은 지구 사진 얘기와 엮어 자신과 아이의 어른으로의 성장에 대한 감상을 풀어낸다.


지구를 떠난 탐사선처럼, 내가 나의 삶을 향해 가열차게 나아갈수록 부모님과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줄어든다. 그렇게 점차 멀어져만 가는 것이다. (154 페이지)

보이저는... 춥고 어둡고 광활한 우주로 묵묵히 나아간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우주를 만들어 간다. 그렇게, 어른이 된다. (156 페이지)


한 구절만 더 인용한다.


  지구 밖으로 나간 우주비행사처럼 우리 역시 지구라는 최고로 멋진 우주선에 올라탄 여행자들이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의 생이 그토록 찬란한 것일까. 여행길에서 만나면 무엇이든 다 아름다워 보이니까. 손에 무엇 하나 쥔 게 없어도 콧노래가 흘러나오니까. (259페이지)


여러가지로 재능 있는 젊은 연구자의 앞길에 밝은 미래가 함께 하기를 빈다.


---

[*] '프롤로그'에서 연주시차에 대한 고등학교 시절의 일화를 언급하는데, 이해가 가지 않아 기록해 놓는다. 선생님이 칠판에 점 두 개를 가깝게 찍어 놓고, 맨 뒤에 앉은 학생에게 몇 개냐고 물었더니 '한 개'라는 대답을 얻었고, 맨 앞에 앉은 학생에게는 '두 개'라는 답을 얻었다는 것이다(10 페이지). 그러고는 연주시차에 대한 설명을 하는데, 이 일화가 왜 연주시차의 예가 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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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ner (Paperback)
John Edward Williams / New York Review of Books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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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환경, 우정, 결혼, 사랑, 자녀, 그리고 학문과 일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스토너의 소망이었던 선생이라는 일과 대학의 기능에 대해 다시금 돌아보게 만든다. 다시 읽으면 다른 부분에 눈길이 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번에 읽으며 가장 감동 받았던 부분은 역시 핀치와의 우정과 드리스콜과의 사랑이었다. 그는 헛되지 않은 삶을 살았다. 열심히 산 삶은 결코 헛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누구의 삶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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