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명 입자


                       우주선에서 발견된 입자는 대부분 오래 산다. 물론 오래 산다는 말도 상대적이다. 실험물리학자들은 어떤 입자가 10^-8초에서 10^-10초 정도 살다 가면, 그 입자는 수명이 길다고 하고, 심지어 안정된 입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주선에서 발견된 케이온이나 람다, 시그마, 크시 하이퍼론은 모두 이 정도로 오래 산다. 수명이 긴 입자는 모두 약력에 의해 붕괴한다. 그러니까 힘의 세기가 약할수록 입자의 붕괴는 천천히 일어난다. 이런 입자들은 가늘고 길게 산다. 전자기력은 약력보다는 강하지만 강력과 비교하면 훨씬 약하다. 전하가 없는 시그마는 전자기력에 의해 람다와 광자로 붕괴하는데, 대략 10^-20초 정도 산다. 전자기력에 의해 붕괴하는 입자들의 수명은 10^-15초에서 10^-20초 정도다.

  그런데 어떤 입자들은 정말이지 눈 깜짝할 사이에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그런 입자를 통칭해서 공명 입자(reonaince particle)라고 부른 다. 이런 입자는 대략 10^-23초 동안 존재한다. 이 시간이 얼마나 짧은 시간인지 한번 비유로 느껴보자, 우주의 나이는 대략 138억 년으로 알려져 있다. 우주의 나이를 1년이라고 하면, 백 년을 사는 인간은 0.2초 정도 살다 가는 찰나의 존재다. 케이온의 수명을 1년이라고 하면, 공명 입자는 1억 분의 1초 남짓 존재한다. 공명 입자와 비교하면 케이온 같은 낯선 입자는 그야말로 영겁의 시간을 사는 셈 이다.

  공명 입자는 양자역학에서 나오는 공명 현상과 다를 바가 없다. 어떤 원자에 파장이 짧은 빛을 쪼여주면 원자는 들뜬 상태가 된다. 그러니까 바닥 상태에 있던 전자가 광자가 전해 주는 에너지를 받아 들뜬 상태로 양자 도약을 한 것이다. 들뜬 상태로 올라간 전자는 아주 잠깐 그곳에 머물다가 광자를 내놓으며 다시 바닥 상태로 내려온다. 이때 원자에서 나오는 광자의 에너지는 수 전자볼트밖에 되지 않는다. 원자핵도 마찬가지다. 감마선을 쪼여주면 들뜬 원자핵이 되었다가 감마선을 내놓으며 다시 바닥 상태로 내려온다. 이 때 나오는 감마선의 에너지는 수백만 전자볼트다. 공명 입자도 비슷하다. 양성자가 파이온이나 광자와 충돌하면 들뜬 양성자가 되거나 아니면 새로운 중입자가 되었다가 다시 양성자로 돌아온다. 그런데 원자나 원자핵과 달리 들뜬 상태의 양성자나 새로 생긴 공명 입자는 에너지가 매우 높아서 바닥 상태의 양성자로 내려오면서 중간자를 내놓거나 수억 전자볼트의 광자를 방출한다. 게다가 공명 입자는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 에너지와 질량이 서로 같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다. 공명 입자의 질량은 양성자에 가해진 수억 전자볼트의 에너지와 양성자의 질량을 합한 것과 같다. 그래서 공명 입자는 에너지와 질량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입자이기도 하다.

  공명 입자의 흔적은 우주선 연구가 한창이던 1940년대 초부터 어렴풋이 알려져 있었다. 볼프강 파울리와 시드니 댄코프(Sidney M. Dancoff)는 이미 1942년에 파이온과 핵자가 충돌하면 공명 입자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예언했다. 파이온이 발견되기 전인 1946년에 파울리는 《핵력의 중간자 이론》이라는 책을 썼다. 여기서 파울리는 파이온과 양성자가 결합하면 스핀이 3/2인 새로운 입자가 생긴다고 주장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스핀이 3/2인 입자를 언급한 것이었다. (185~187 페이지)

  핵자로 통칭하는 양성자와 중성자는 전하 외에는 같은 입자라 해도 무방했다. 아이소스핀 대칭성 아래 양성자와 중성자는 한 형제였다. 양과 밀스는 아이소스핀 대칭성을 게이지 대칭성의 하나로 간주했다. 게이지라는 말은 1929년에 수학자 헤르만 바일(Hermann Weyl)이 전자기력과 중력을 합쳐 보려고 전개한 이론에서 나온 말이다. 어떤 물체의 길이를 잴 때, 센티미터 자를 쓰든 인치 자를 쓰든 물체의 길이는 변하지 않는다. 게이지 대칭성이란 자를 바꿔 재더라도 성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양자전기역학은 게이지 대칭성을 만족하는 이론 중에서 가장 단순하다. 게이지를 변환해도 전하는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양자전기역학은 게이지 불변이라고 말한다. 게이지 불변이면 입자들 사이에 힘을 매개하는 게이지 입자가 반드시 존재한다. 양자전기역학에서는 광자가 전하를 띤 입자들 사이에 힘을 매개하는 게이지 보손(gauge boson)이다. (328~329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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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우리의 지식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담는 데 실패한다. 언어가 정말로 담는 것은 통제하려는 우리의 시도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언어에 매달린다. 실험 보고서를 작성하고, 숫자를 매기고 중요도를 합의하고, 무언가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그것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묘사한다. 경외, 역겨움, 공포, 모든 것이 거기에 있다. 우리가 붙인 이름에 그 모든 것이 들어 있다. 

  가끔 나는 과학자가 하는 일이라고는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한다--이름을 붙이는 것. 볼 수 있는 것, 추론할 수밖에 없는 것, 존재했으면 하고 바라는 것에.

  과학자란 자연 세계의 시인인가? 아니면 시인이 상상 세계의 과학자인가? 시만큼 긴 이름들, 과학 논문만큼 긴 이름들, 양쪽 다 우리가 언어라 칭하는 이름들로 적혀 있다. 우리는 이름을 짓고 이 이름들을 후대에 남겨주고 그런 뒤에 죽는다. 목구멍에 마지막 숨이 걸린 채로. (33~34 페이지)


  그러나 이제 그것은 사라지고 없다. 작약은 전성기를 누렸고, 넘치도록 충분하게 누렸다. 그토록 순수한 것이 불멸이라는 지옥에 갇혀서는 안 된다. (57 페이지)


  결말이 의미를 만든다. 죽음은 영원한 의미 생성자인데, 오로지 죽음 속에서만 어떤 새로운 것이 일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새로운 것이 망각과 불확실성일지라도 말이다. 나는 새로운 몸속에서 세계를 헤매었고, 감각이 주는 황홀한 기쁨과 창작과 발견이라는 지적 자극을 받아들였으나 이는 모두 끝났고, 바로 끝났기 때문에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내 사랑들은 그 경험에 적절한 의미를 주기 위해 끝나야만 했으나 나 자신이 끝날 수 없었기 때문에 대신 나는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는 고통을 멈추기 위해 내 심장을 단단하게 굳혔다. 나는 내부로 침잠했고 곧 내 안에서 질식했다. 삶은 독이다. 모든 독이 그러하듯 적은 용량은 치료제이지만 많은 분량은 치명적이다. 그리고 나는 삶을 너무 많이 맛보았다. (152 페이지)


삶이 행복하게 끝나든 슬프게 끝나든 차이점은 당사자가 느끼는 감정의 무게, 좋든 나쁘든 지구에서 살아 있는 동안 가졌던 선명하게 의미 있는 순간들이 가지는 무게뿐이 아닌가? 그 무게가 결국은 우리를 진정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닌가? (284 페이지)


  유전자가 우리 삶의 서사를 엮는 몇 줄이 아니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의 모든 코드도, 문학도 그러하지 않은가? 이들은 우리가 존재하기 전부터 존재한다. 우리는 이들을 영속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이야기를 영속시키기 위해. 우리는 그저 매개체일 뿐이다. 우리는 몸으로, 삶으로 이야기를 하고, 그리고 죽는다.

  이야기는 계속 남는다. (306~30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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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을 향하여
안톤 허 지음, 정보라 옮김 / 반타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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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이자 작가인 안톤 허가 영어로 쓴 과학소설이다. 그가 영어로 번역했던 <저주토끼>의 작가 정보라가 한국어로 번역했다. 이런 사실이 재밌어서, 그리고 제목이 흥미로워서 읽기 시작했다. 


그는 언어와 시와 이야기의 힘을 믿는다. 그것이 영원까지 이어지리라 생각한다. 더불어, 희망과 사랑의 힘도. 이 책을 과학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나노기술과 인공지능을 소재로 했기 때문인데, 난 그가 보여준 전개 방식이 과학적으로는 큰 개연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어찌 보면 과학적 소재는 단지 그의 생각을 펼쳐 보이기 위한 은유일 뿐인지도 모른다. 딱딱한 과학을 기반으로 하는 좀 더 정통적 과학소설을 내가 더 좋아함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가 석사 공부할 때 전공했다는 19세기 영시가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감흥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한국인이 썼음에도 한국 문학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하는 시 하나를 정보라의 번역과 원문으로 다음에 옮겨 놓는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 '내가 죽음을 위해 멈춰줄 수 없어서'이다. 


내가 죽음을 위해 멈춰줄 수 없어서

죽음이 친절하게 나를 위해 멈추었네

마차에는 우리들만 타고 있었네

그리고 불멸이.


우리는 천천히 타고 갔네— 그는 서두름을 알지 못했고 

나는 치워두었네 

나의 노동과 여유를, 

그의 정중함 때문에


우리는 학교를 지났고 아이들이 힘쓰고 있었네

쉬는 시간에 고리 속에서

우리는 바라보는 곡식들의 들판을 지났네

우리는 저무는 해를 지났네


아니 차라리 그가 우리를 지났네

이슬이 떨림과 냉기를 끌어내었네

내 드레스는 오로지 얇고 가벼웠으며

나의 숄은 오로지 그물 비단이었으니


우리는 어느 집 앞에서 잠시 멈추었는데

그 집은 땅이 부풀어 오른 듯 보였네

지붕은 거의 보이지 않았네

처마 장식은— 땅속에


그때부터 수 세기였네 그런데도 

그날보다 더 짧게 느껴지네 

내가 처음 짐작했던 날, 말들의 머리가 

영원을 향해 있다고 (289~290 페이지)


Because I could not stop for Death—

He kindly stopped for me—

The Carriage held but just Ourselves— 

And Immortality.


We slowly drove—He knew no haste

And I had put away

My labor and my leisure too,

For His Civility—


We passed the School, where Children strove

At Recess—in the Ring—

We passed the Fields of Gazing Grain—

We passed the Setting Sun—


Or rather—He passed us—

The Dews drew quivering and chill—

For only Gossamer, my Gown—

My Tippet—only Tulle—


We paused before a House that seemed

A Swelling of the Ground—

The Roof was scarcely visible—

The Cornice—in the Ground—


Since then—’tis Centuries—and yet

Feels shorter than the Day

I first surmised the Horses’ Heads

Were toward Eter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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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yonder 2025-09-19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다가 이상한 부분 하나:
301페이지(‘크리스티나‘ 챕터)를 보면 ˝‘이주‘ 이후에 난 10년 정도 보존 처리 됐어.˝라고 알레프가 말한다. 하지만 303페이지를 보면 ˝알레프는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90년 동안 보존 처리되었던 것이다.˝라고 나온다. 둘 중 무엇이 맞는지? 원문의 실수인지, 아니면 번역 과정의 실수인지?
 















<세 개의 쿼크>를 읽다가 발견한 오식 2개만 지적해 놓는다. 


  쿼크로 이루어진 모든 강입자는 무색이다. 중입자는 세 개의 쿼크로 이루어져 있지만, 중간자는 쿼크 한 개와 반쿼크 한 개로 되어 있다. 반쿼크의 색깔도 정해줘야 한다. 빨간 쿼크에 대응되는 반쿼크는 노란(vellow)색이 되고, 초록 쿼크에는 심홍색(magenta) 반쿼크, 파란 쿼크에는 청록색(cyan) 반쿼크가 대응된다. 이렇게 쿼크와 반쿼크에 색깔을 부여하면, 쿼크와 반쿼크로 이루어진 중간자도 무색이 된다. (262 페이지, 밑줄 추가)


반쿼크의 색깔에 오류가 있다. 빨간 쿼크에 대응되는 반쿼크는 청록색이고, 파란 쿼크에 대응되는 반쿼크는 노란색이다[*]. 382페이지에는 올바르게 언급되어 있다. 


... 수병들의 반란은 시민과 노동자의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 1918년 11월 4일 저녁, 킬은 혁명군에게 점령 당했다. 혁명의 불길은 독일 전역으로 거세게 번져나갔다. 1919년 11월 9일, 베를린에서는 빌헬름 2세의 퇴위가 발표되었고, 독일이 민주 공화국임이 선포되었다. 빌헬름 2세는 분노했지만, 그렇다고 적을 눈앞에 두고 베를린을 향해 진격할 수도 없었다. 황제는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11월 혁명'이라고도 부르는 이 무혈 혁명은 바이마르 공화국을 탄생시켰다. (390 페이지, 밑줄 추가)


빌헬름 2세는 1919년 11월 9일이 아니라 1918년 11월 9일에 퇴위했다. 킬에서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킨지 며칠 안 되어서다. 


위의 오식이 이 책의 가치를 크게 떨어뜨리는 것은 아니다. 난 여전히 이 책이 매우 좋은 책이라고 생각하며, 저자의 노력에 큰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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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https://en.wikipedia.org/wiki/Color_char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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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쿼크 - 강력의 본질, 양자색역학은 어떻게 태어났는가
김현철 지음 / 계단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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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는 네 개의 근본적 힘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중력, 전자기력, 약력, 그리고 강력이다. 전자기력은 전하를 통해 물질(원자)의 구성에 기여하며 전자기파를 발생시킨다. 약력은 핵의 붕괴에 작용하는 힘이고, 강력은 핵을 결합하는 힘이다. 전자기력과 약력은 전기약력으로 통합되었으며, 강력은 양자색역학으로 설명되었다. 전기약력과 양자색역학은 모두 양자장론에 기반한 '게이지이론'의 틀로 이해되어 '입자물리학의 표준모형'으로 알려지게 된다. 단, 중력만은 위의 통합 노력에서 벗어나 아직까지 별개의 '힘'으로 취급된다. 중력과 나머지 세 개의 힘을 통합하고자 하는 노력이 양자중력 이론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이며, 초끈이론도 이러한 노력의 일부이다. 


김현철 교수의 <세 개의 쿼크>는 강력을 설명하는 양자색역학이 어떻게 탄생하는지를, 그 역사와 물리학자들의 삶과 일화와 의의를 일일이 짚어가며 우리 앞에 펼쳐 보여준다. 워낙 다양한 인물과 물리적 내용이 논의되므로, 읽을 때는 매우 흥미롭게 읽었지만 다 읽고 난 후 온전히 기억하기는 어렵다. 자연현상에 숨어 있는 규칙을 발견하기 위한 물리학자들의 노력에 대한 감탄과 여운이 깊게 남는다. 읽으면서 이러한 세세한 역사적 사실들을 집대성한 저자의 연구 분야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은 강력에 대한 3개의 시리즈 중 <강력의 탄생>을 잇는 두 번째 책이다. 세 번째는 아직 출간되지 않았으며, 1979년 이후의 이야기를 다룰 것이라고 한다. 


책 속 구절을 다음에 인용한다.


  데모크리토스는 세상을 이루는 건 아토모스(atomos)와 공허뿐이라고 주장했다. 물질을 이루는 아토모스와 원자가 숨 쉴 공간인 공허. 오늘날 진정한 아토모스는 쿼크이고, 공허는 양자색역학의 진공이었다. 진공이란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다. 진공 속에 전자 하나를 두면, 진공에서는 음전하와 양전하가 생겨났다 없어지길 끝없이 반복한다. 그래도 이건 양자전기역학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다루기가 까다롭지만 풀 수 있다. 그러나 양자색역학에서 진공은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복잡하고 끔찍할 정도로 어렵다. 그리고 쿼크는 강입자 속에 영원히 갇혀 있고, 그 사실을 명징하게 증명할 수학적인 방법은 여전히 부재하다. 강력의 근본 이론을 찾았다고 해서 종착지에 도달한 건 아니다. 이제 절반을 이뤘고, 강력은 여전히 우리 앞에 놓인 문제다. (434~43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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