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
장하석 지음 / 지식플러스 / 201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과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과학철학자 장하석 교수의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대답에 따르면 과학은 ‘진리’에 대한 탐구가 아니고 자연의 ‘진상’을 드러내는 유용한 도구일 뿐이다. 과학 이론, 과학하는 방법에 단 하나의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가 제안하는 것은 여러 경쟁하는 이론--‘실천체계system of practice’--가 서로 보완하는 과학적 다양성, ‘과학의 다원주의pluralism’이다. 그가 과학의 다원주의의 예, 특히 지적 분업의 예로 드는 것은 로켓을 쏘는 데 유용한 뉴튼역학, 미시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양자역학, 태양계보다 훨씬 큰 것들을 논할 때 쓰는 일반상대성 이론이다. 각각 유용한 범위에서 잘 쓰면 되는 것이지, 이것을 하나로 통일하는 것에 무슨 유용성이 있느냐는 것이다. 끈이론 하는 물리학자들이 들으면 분명 기함할 이야기이다. 그가 ‘진리’ 추구를 하는데 관심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이야기이고, 많은 자연과학자들이 그동안 생각해 왔던 ‘과학’과는 좀 다른 이야기이다. 하지만 다 읽고 나서 생각해 보면 딱히 어떻게 반박하기가 쉽지 않다. 약간 포커스는 다르지만 리 스몰린의 <The Trouble with Physics>에서 끈이론 연구자들이 다른 접근 방법을 어떻게 배척하는지 읽은 터라 과학의 다원주의에 동의하지 않기가 어렵다. 과학이 무엇인지, 과학하는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여러 생각할 거리를 주는 책이다. 일반인이나 과학 전공자 누구나 읽으면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은 책 속에서 발췌한 부분이다.

… 현대 과학철학 논의에서 실재론을 강하게 뒷받침하는 중요한 직감이 있습니다. 현대과학은 너무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성공적인데, 그 과학이론에 진실성이 없다면 그런 성공은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저명한 철학자 퍼트넘Hilary Putnam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과학의 성공을 기적으로 간주하지 않을 수 있는 철학은 실재론뿐이다.” 핵폭탄을 맞고도 핵물리학의 진리를 의심할 것인가? 몇 메가헤르츠MHz 주파수를 맞춰서 FM 라디오를 들으면서 맥스웰과 헤르츠Heinrich Hertz의 전자기학 이론을 부정할 것인가? (158 페이지)
  실재론자들의 직감에 대해 반프라센은 멋진 ‘진화론적’ 반론을 제시했습니다. 반프라센은 캐나다 사람인데 미국에서 쭉 활동했고, 현재 전 세계에서 반실재론 철학자 중 제1인자로 꼽힙니다. 과학이 성공적이므로 실재론을 믿어야 한다는 주장에 반박하면서, 반프라센은 과학의 성공은 생물이 성공적으로 진화한 것과 같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과학자들은 다양한 이론을 계속해서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 경험적으로 엄격히 시험해서 그중에 성공적인 것만 놓아두고 나머지는 다 없애버립니다. 그러니 살아남은 것은 당연히 성공적일 수밖에 없지요. 그 결과만 보고 과학이 어떻게 이렇게 성공적인 이론만 만드느냐며 탄복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했습니다… 성공했다는 말 자체가 살아남았다는 뜻이고, 살아남은 것은 다 성공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과학이 성공적이라고 해서 실재론을 믿어야 한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159 페이지)

  저는 인간이 진리를 갈구하는 것은 종교적 열망이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이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는 생각은 특히 일신교인 기독교의 독실한 신자였던 유럽인들이 과학을 처음으로 제대로 발전시켰을 때 가지고 있던 관념의 유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시대의 많은 유럽 사람들은 현재의 우리 기준으로 보면 광신자들이었다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유럽여행을 가본 독자들은 느꼈을 것이고, 안 가본 독자들도 사진만으로도 느꼈을 겁니다. 유럽 전역에 퍼져 있는 대성당들, 기가 막히게 조립한 그 거대한 석조 건물들을 트럭도 없고 크레인도 없을 때 엄청난 비용을 들여 지었습니다. 그들은 짓다가 사고가 나서 죽어가면서도 몇 백 년씩 걸려서 대성당을 올려낸 정도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국가 권력도 교회가 좌지우지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성전을 한답시고 중동까지 말 타고 가서 난동을 부리고, 기독교끼리도 종교전쟁을 해서 서로 죽이고, 종교재판을 해서 이단자를 고문하고 처형하고, 그렇게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유럽의 과학적 문명이 더없이 훌륭하고 그렇기 때문에 저도 거기서 살고 있지만, 그 역사를 보면 엄청나게 경건하고 광신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과학자들도 많은 경우 그 문화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뉴튼도 천문학이나 물리학 연구를 통해 궁극적으로 우주를 창조한 신의 섭리를 알아내고자 했고, 신학 연구 자체도 정말 많이 했습니다. 물리적 운동량이 보존된다는 데카르트나 라이프니츠G. W. Leibniz의 주장 역시 신이 창조한 것이니 더 이상 늘지도 않고 파괴될 수도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통상적인 의미에서 종교를 열심히 믿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아인슈타인도 물리학의 기본원리는 신이 정해주신 것으로 생각했고, 그렇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단순하고 아름답고 완벽한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는 양자역학을 확률적으로 이해하는 보어의 ‘코펜하겐 해석’에 반대할 때도,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저는 학생 때 그 이야기를 듣고 아인슈타인이 참 멋지다고 생각했었는데, 나중에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신이 뭘 하고 노는지 그가 어떻게 안다는 것입니까? 그리고 보어는 왜 신과 연락이 안 되고 자신은 된다고 하는지, 굉장히 교만하게 느껴집니다. 제가 아인슈타인을 정말 존경하면서 자랐는데 ‘이 사람이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 배반감을 느꼈습니다. 아인슈타인 이후에도 많은 이론물리학자들은 대통일이론grand unified theory 등을 추구하며 우주를 움직이는 기본적 원리는 궁극적 진리를 표현하는 단 한 가지 이론에 들어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는 일신교의 종교적 태도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현재 과학이 실행되는 형태를 보면, 이런 진리의 추구는 많이 사라졌습니다. 노벨상을 받은 유명한 옛날 과학자의 영웅담만 듣지 말고, 현재 과학이나 공학을 연구하는 보통으로 훌륭한 동료나 친구 들이 있으면 그 사람들이 매일 무엇을 하는지 한번 물어보십시오. 그 수많은 과학자들 중 초끈이론이나 우주론 같은 것을 연구하는 사람들 빼고 ‘진리’ 같은 것은 걱정 안 하고 세세한 내용의 ‘모델링’을 하고 있습니다. 과학자를 꿈꾸던 시절, 저는 그런 실태를 알고 나서 그런 식의 과학은 공학에 불과하다고 천시했습니다. 또 1장에서 얘기했던 대로 문제나 풀라는 식의 과학교육에 강한 불만을 품었습니다. 저는 적어도 진리의 후보라도 될 수 있는 이론적 원리를 기반으로 해야 자연을 깊이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고, 이해를 저버린 채 데이터 수집이나 문제 풀기나 기술적 응용에만 신경을 쓰는 과학이 너무 싫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포기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때는 이러한 철학용어를 몰랐지만 실재론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제는 사람이 패기가 없어져서 그런지, 어떤 형태가 되었건 지식의 추구는 다 존중하는 것이 좋다고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과학자는 사실을 배우고, 밝혀낸 사실들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설명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넘는 ‘진리’를 꿈꾸는 것은 주제넘고, ‘진리’가 정말 궁극적인 것이라면 과학이 다루기 힘겨운 일 아닌가 생각합니다. (163~166 페이지)

… ‘참’에는 적어도 … 세 가지의 중요한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그 의미를 어느 정도라도 구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진상, 진실, 진리라는 세 가지의 다른 단어가 있습니다. 전부 한문 ‘참 진(眞)’ 자를 앞에 둔 후 어떤 참이냐를 구분해 주는데, 참 훌륭합니다. 영어에는 이렇게 세분된 단어가 없고 다 뭉뚱그려서 ‘truth’라고 합니다. 영어권의 법정에서 증인들은 ‘truth’를 이야기하겠다고 맹세해야 합니다. 그건 진실을 이야기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나라 법정에서 증인이 나와서 ‘진리’를 말하겠다고 하면 아마 예수님이나 부처님이 아니라면 정신병자일 것입니다(예수나 부처일 확률은 적고, 정신병자이겠지요).

  제 생각에는 이렇게 필요한 개념분화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영어권 철학에서는 실재론을 버리기가 참 힘듭니다. 우리말로는 ‘진리에 집착하지 말고 진상을 밝히는 데 집중하자’고 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은데, 영어로 ‘truth’를 포기하자면 진상도 밝히지 말자는 이야기로 이해되어버리기 때문에 큰 반대에 부딪힙니다. 그러면 한국어가 영어보다 철학적으로 더 훌륭한가요? 꼭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는 싫습니다. 우리말에서도 뭉뚱그려진 ‘참’이라는 개념은 영어의 ‘truth’라는 개념과 상당히 비슷합니다. 또 우리나라에서 하는 철학논의를 봐도 ‘참’의 개념이 그리 명확하게 정리되어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언어적 우월감을 느끼자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이 경우에 있어서 영어의 제한성 때문에 발생되는 철학의 어려움을 우리가 그대로 이어받지는 말자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우리 나름대로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언어마다 각각 개념적 장단점이 있고 그 때문에 다국어를 알면 도움이 될 때가 있습니다. (167~168 페이지)

  제가 볼 때 과학적 실재론은 실재에 대한 것을 최대한 배운다는 우리 자신과의 약속 또는 결심commitment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 태도는 우리가 이렇게 행동하고 이렇게 살아야 하겠다는 일종의 이념, 이데올로기입니다. 과학을 추구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아주 기본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맥락에서 ‘실재론’이라는 표현이 별로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론(論)’은 무엇이 어떻게 생겼다는 ‘이론’과 같은 어감이 강하기 때문에, 그보다는 이데올로기 등을 지칭하는 ‘주의’라는 단어를 써서 ‘실재주의’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규범성을 내포한 말입니다. ‘과학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과학을 이렇게 해보자’ 하는 것입니다…

  제가 가진 실재주의의 입장은 능동적인 것으로, 과학은 가능한 한 실재에 대해 최대로 연구해서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실재주의에 의하면, 과학은 실재에 대해 배울 수 있는 모든 길을 우리 능력이 닿는 대로 추구하면서, 그 과정에 도움이 된다면 서로 상충하는 이론체계들도 동시에 허용하고 유지해야 합니다. (171~172 페이지)

… 진리의 대응론은 무슨 의미인지 잘 알 수 없고, 정합론은 이해는 되지만 이론과 실재의 관계를 잘 이야기해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면 이론과 실재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말로 하기가 어려워서 일단 그림으로 표현해보겠습니다… 잔잔한 연못 위에 비친 그 집의 모습이 너무 멋져서 사진을 찍었는데, 이 사진이 보통 실재론자들이 생각하는 이론과 실재의 관계를 은유적으로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사진의 윗부분에 명확히 나타난 건물이 실재의 모습입니다. 그 실재가 우리의 과학이론을 통해 표상되는 것이 물에 비친 모습입니다. 물에 비친 모습은 실재의 모습과 비슷하기는 한데 실재를 완벽하게 표현하지는 못합니다. 물결이 일어서 가장자리는 본래 모습과 달라진 데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수면에 반사된 모습은 약간 흐릿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 표상하는 이론들을 더 잘 발전시켜서 실재와 가능한 한 똑같이 하느냐’가 실재론적 과학의 목표라고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 그림을 거꾸로 보자고 제안합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 복잡하고 간결하지 못한 것이 실재의 모습이고, 실재를 표현하고 기술하기 위해 우리가 만들어낸 이론은 깨끗하고 단정하다고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재의 모습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지만, 우리가 만드는 이론은 노력해서 깨끗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게 만들어놓은 이론은 관측내용과 정확히 맞아떨어지지 않기 쉽고, 또 실재를 그대로 보여준다고 할 수도 없지만 인간의 사고와 이해를 돕기 때문에 무척 유용합니다. 또, 아름다운 이론을 세워놓고 그것에 감탄하다 보면, 일종의 경건한 마음까지도 듭니다. 

  과학이론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는 우리가 잘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을 쓰고, 우리가 잘 다루는 수학으로 풀고, 여러 가지 현상을 이상적으로 단순화하기도 하는 식으로 아주 깨끗한 그림을 그려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엿볼 수 있는 자연의 모습은 사실 굉장히 복잡하고 지저분한 것 같기도 하고 좀 이해하기도 힘들고 참 오묘하게도 복잡합니다. 즉, 여러 가지 실험이나 관측을 해보면 결과는 그렇게 단순하고 깨끗하게 나오지 않습니다. 전통적 실재론적 입장에서는 실험기구가 부정확하거나 혼선을 일으키는 다른 요인들이 작용했을 수도 있고 여러 가지로 우리가 관측을 완벽하게 해내지 못해서 관측결과가 깔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실재 그 자체는 궁극적으로 단순하고 깨끗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저는 그것 또한 일신론적인 종교적 관념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이 왜 자연을 그렇게 지저분하게 창조했겠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신이 어떤 마음으로 자연을 창조하셨는지 인간이 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이런 맥락에서 저는 제 박사과정 지도교수였던 카트라잇Nancy Cartwright 교수님의 가르침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카트라잇은 과학이론에 나오는 자연의 법칙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현상적 법칙phenomenological law은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아낸 자연의 진상을 가능한 한 그대로 표현합니다. 그 내용은 굉장히 복잡하고, 특정한 상황의 세세한 조건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 반면, 기초이론 또는 기본적 법칙fundamental law은 그 복잡하고 지저분한 현상적 법칙들을 단순화하고 통합해서 표현합니다. 기본적 법칙들은 사실 관측 데이터와 정확히 맞아들지는 않지만, 우리의 이해를 돕고 설명력이 있습니다. 간단한 모양으로 만들어낸 기본적 법칙들이 이렇게 이해와 응용을 돕기 때문에 간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위력은 진상을 밝히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확실히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본적 법칙이 그려주는 그림이 진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이해하기 쉬운 모양으로 표현한 것이 꼭 실재의 모습이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주제넘고 어리석은 일 아니겠습니까? (175~178 페이지)

  지식과 확실성의 동일시는 데카르트로부터 내려오는 근대 서양철학 전통의 큰 결함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한 것만이 지식이라는 관념이 뿌리 깊게 박혀 있는데, 과학의 역사와 과학의 실체를 냉정하게 보면 확실한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확실하지만 지식은 있습니다… 확실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리고 나면 ‘어떻게 지식을 좀 더 쌓고 좀 더 개량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더 자유롭고 유연하게 해볼 수 있습니다. 그 반면, 확실한 것을 찾다 보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확실성에 관해서 굉장히 고민했던 철학자로 비트겐슈타인이 있습니다… 그가 남겨놓고 죽은 원고를 제자들이 모아서 펴낸 <확실성에 관하여On Certainty>라는 조그만 책자가 있습니다. 그 책은 지식을 정당화하는 작업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는 생각은 실수라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끝없는 거북 이야기에서 나왔듯이, 비트겐슈타인은 “정당화가 잘된 믿음의 토대에는 정당화가 안 된 믿음이 놓여있다”고 했습니다. 데카르트처럼 뭔가 확실한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지식을 쌓으려는 시도를 떠나서, 인간이 실제로 태어나서 어떻게 지식을 얻는지를 생각해보라고 했습니다. 처음에 어린아이가 회의적인 질문을 하나요? 아닙니다. 무조건 어머니, 아버지가 하는 말을 믿고 시작합니다. 그러니 않으면 언어조차도 배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확실한 증거나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믿는 것이 참 많습니다…

  직접적인 경험을 근거로 하지 않는 말들을 많이 받아들이고 나서야 우리는 인식행위 자체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정당화한 후 시작할 수는 없습니다. 집 짓은 비유로 돌아가보면, 우리는 지구에 태어났으니까 지구에 집을 짓는 것이지 지구가 객관적인 기준으로 볼 때 전 우주에서 제일 훌륭해서 여기다 짓는 것은 아닙니다… 확실성을 포기하면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불완전한 지식을 미래의 지식을 쌓아올리는 토대로 충분히 사용할 수 있습니다. (200~201 페이지)

  헤시[Mary Hesse, 필자가 가지고 있는 교수직의 전, 전, 전임자라고 한다]와 비슷하게 과학에서 은유가 갖는 중요성을 강조한 사람으로 홀튼Genrald Holton[필자의 박사후 연구원 당시 지도교수라고 한다]을 들 수 있습니다. 홀튼은 ‘은유는 미지의 세계로 가는 유일한 다리’라고 멋지게 표현했습니다… 과학연구를 하면서 전혀 새로운 현상에 부딪혔을 때 우리에게는 그러한 것들을 서술할 적합한 개념조차 없기 때문에, 이미 가지고 있는 개념을 은유적으로 사용해서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경험이나 이미 가지고 있는 개념체계를 기반으로 하지 않고, 갑자기 정말 전혀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직유도 아니고 은유가 필요한 이유는 직유적으로 표현하려면 A가 가진 성질 a는 B가 가진 성질 b와 비슷하다고 명확히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홀튼이 말하는 그러한 상황에서는 B가 무엇이고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지 충분히 아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자를 생각할 때 아주 작은 당구공으로 여기고, 소리나 빛을 생각할 때 물결로 이해하는 등의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보어의 상황도 그러했습니다. 그에게는 원자의 구조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언어 자체가 없었는데, 이것을 태양계에 비유함으로써 기본적 서술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은유가 어느 정도까지 적합할지는 몰랐고, 거기서 헤시가 말하는 중립적 비유가 발동되어 연구를 계속하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370~371 페이지)


다음은 창의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간의 창의성은 실제로 해결해야 할 절박한 문제가 생겼을 때 저절로 발휘됩니다. 저는 이것을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로 생각합니다. 실제로 생활하면서, 또는 일하면서 어려운 일에 부딪혔는데 남이 해결해주지 않고 자기 스스로 해결하고자 할 때 진정한 창의력을 발휘하고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음 세대의 창의성을 길러주고 싶다면, 우선은 그런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실제 상황을 마련해주어야 합니다. 부모가 다 돌봐주고 아무 어려움 없도록 뒷받침해줄 테니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하는 것은 창의성을 죽이는 지름길입니다. 딴짓하지 말고 빨리 창의력 학원이나 열심히 다니라는 말이 나올까 두렵습니다… 우리 세상에는 풀어야 할 크고 작은 어려운 문제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학생들도 그런 데 도전해본다면, 성과를 크게 올리지는 못하더라도 경험과 훈련은 될 것입니다. 학생들도 진짜 사회와 과학의 문제를 풀어낼 수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인생의 진짜 문제들과 부딪히게 해주고, 크게 다치지만 않게 보호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상황에서 자생적으로 솟아나는 창의력을 위에서 찍어 누르고 옆에서 잡아 앉혀서 소멸되게 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 자생적인 창의성을 인간이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더 잘 발휘될 수 있도록 도울 수는 없을까요? 여기서 쿤이 짤막하게 내놓은 유용한 관찰결과가 있습니다. 과학혁명이 일어날 때 많은 경우에 핵심적인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은 젊은이거나 아니면 다른 과학을 하다가 분야를 옮겨 새로 들어온 사람인 경우가 많다고 했습니다. 쿤이 든 예는 아니지만, 왓슨과 함께 DNA의 이중나선 구조라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은 크릭을 생각해봅시다. 그는 물리학을 연구하다가 분자생물학으로 넘어가서 생물학자들이 갖고 있던 고정관념에 강하게 구애받지 않는 연구를 했습니다. 

  더 광범위하게 해석해보면, 기존의 패러다임이 제시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경험과 사고방식이 어느 정도 저변에 깔려 있어야 혁명적인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을 수 있다고 봅니다. 진짜로 정상과학만 배워가지고는 아주 특출한 사람이 아닐 경우 깊은 창의성을 발휘하기 힘들 것입니다. 창의성이 솟아나는 사람들의 집단을 만들려면 각각 서로 다른 다양한 경험을 갖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창의력 있는 사회를 만들려면 획일주의를 타파해야 합니다. (375~376 페이지)


과학의 다원주의에 관하여:

… 과학의 다원주의가 왜 유리하며 어떤 이득을 가져다주는지 좀 더 체계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다원주의의 이득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관용의 이득’과 ‘상호작용의 이득’이라고 하겠습니다. 

  여기서 관용이란 한 과학 분야를 한 실천체계가 독점하지 않고 다른 실천체계도 공존할 수 있게끔 학문을 추구하는 형태를 말합니다. [이후 설명되는 관용의 이득 요약: 예측불허의 상황에 대비하는 보험, 지적 분업 가능, 한 가지 목적도 여러 방식으로 달성 가능, 여러 가지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도와줌] 

  수준 높은 다원주의를 실행하려면 관용으로 그쳐서는 안됩니다. 관용이 가져다주는 이득과는 또 달리, 서로 다른 실천체계 간에 교류하면서 얻는 상호작용의 이득도 중요합니다. [상호작용의 방법 요약: 다른 실천체계를 융합, 다른 체계의 유용한 면 채택, 체계 사이의 경쟁] (389~400 페이지)


다원주의에 대한 우려:

… 과학이 한 가지로 통일되지 않으면 세상이 난장판이 되지 않겠느냐는 우려가 있습니다. 다들 자기 마음대로 원하는 것을 믿고 자기 마음대로 방향을 정해서 연구한다면 과학이 완전히 혼란상태에 빠지지 않겠습니까? … 그런데 이런 걱정은 잘 생각해보면 다원주의에 대한 우려가 아니고, 상대주의relativism에 대한 경계입니다.

… 상대주의란 판단을 거부하는 입장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 너도 좋고, 네 말도 맞고, 난 상관없어’ 하는 태도인데, 다원주의는 그렇지 않습니다. 다원주의가 표방하는 것은 한 가지만 하지 말자는 것이지, 아무거나 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몇 가지의 체계를 동시에 유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관용의 이점과 상호작용의 이점을 추구하는 것이지, 모든 체계를 다 허용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다원주의는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의 체계를 원하는 입장이지만, 여 개라 해도 현실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체계의 수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판단해서 가장 훌륭하고 전망 있는 체계들을 골라내야 합니다. 그러나 다원주의 자체가 그 판단의 기준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 기준의 문제는 다원주의자나 일원주의자 모두가 풀어야 하는 중요한 과제입니다. (401~402 페이지)


과학의 겸허에 대해:

  과학의 초창기에는 많은 과학자들이 패기만만한 야심을 보였습니다. 데카르트가 자신의 인식론적 판단으로 모든 지식의 토대를 세우겠다고 한 것이나, 뉴튼이 온 우주에 적용되는 중력법칙을 세웠다고 한 것이나, 왓슨과 크릭이 DNA 구조를 통해 생명의 모든 비밀이 풀리리라 생각한 것과 같은 꿈은 과학의 청년기에 적당한 것이었습니다… 과학의 행태는 자신만만한 젊은이의 오만함이 점점 없어지는 방향으로 형성될 것입니다. 현대로 나아갈수록 더 많은 과학자들이 겸허하게 과학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특정한 주제 하나를 잡아서 연구하여 뭔가를 좀 배워보겠다는 것이지, 영원한 진리를 들먹이면서 ‘내가 혁명을 일으켜서 모든 것을 밝히겠다!’ 하는 사람은 소수가 되었습니다. (406 페이지)

… 화학혁명의 영예로운 패배자로 등장했던 프리스틀리는 이 맥락[인간이 갖는 자연에 대한 지식은 ‘단면적’일 수밖에 없음]에서 아주 좋은 교훈을 남겨주었습니다. “우리는 뭔가 하나를 발견할 때 그로써 그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여러 가지를 볼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볼 수 있게 된다고 한 것은, 알게 된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무엇을 모르는지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우리가 그걸 모른다는 것도 몰랐던 내용들입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뭘 모르는지도 모릅니다. 프리스틀리는 이를 멋진 비유로 표현했습니다: “어둠 속에 빛이 동그랗게 비쳐진 면적이 클수록, 그 환한 부분을 둘러싼 어두운 경계선의 길이도 늘어난다.” …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만 더 늘어나는데 더 알아서 무엇 하느냐? 그러나 프리스틀리의 태도는 정 반대였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빛을 더 얻게 될 때 감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럼으로써 우리는 모르는 것을 보고 연구하는 만족을 더 많이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신과 신의 창조물은 무한한 것이므로, 우리는 끝없이 탐구하며 진보할 수 있다. 이것을 정말로 숭고하고 영광스러운 전망이다.”

… 과학은 무슨 진리를 알아내고 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배우면 배울수록 연구할 내용이 더 늘어나는 사업입니다. 그것을 깨달은 겸허함은 다원주의의 기초가 됩니다. 이렇게 넓고 무궁무진한 것을 배우는데 자기가 뭐 그리 잘나서 본인이 추구하는 특정한 방향에서 모든 답이 나오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은 오만하고 유치합니다. (408~410 페이지)


별을 4개만 준 이유: 나는 아직 완전히 실재론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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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1-07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중력파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해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공부하게 됐어요. 아인슈타인의 생각을 확인하다가 뉴턴의 고전역학이 궁금해졌어요. 정말로 과학은 공부할수록 공부해야 할 내용이 늘어나는 학문인 것 같아요. ^^

blueyonder 2017-11-07 14:38   좋아요 0 | URL
중력파 검출은 정말 노벨물리학상을 받을만한 업적인 것 같습니다. 검출된 중력파로부터 충돌한 물질의 질량을 거꾸로 계산하는 것도 정말 대단합니다. 많이 알수록 모르는 것도 늘어난다는 건 정말 적확한 지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교양인을 위한 물리지식 - 자연현상과 일상, 가전기기에 숨어 있는 물리의 40가지 핵심 원리!
이남영.정태문 지음 / 반니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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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 나오는 생활 속 물리 내용들을 좀 더 쉽게 해설하려 한 책이다. 하지만 그림도 성의가 없고 오타도 보이고(에너지 ‘보전‘ 법칙, p. 101), 아쉽지만 별 장점이 보이지 않는다. 국내 저자이고 최근 책이라는 거? 오래 됐지만 <일상 속의 물리학>이나 <물리와 세상>이 훨씬 나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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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rouble with Physics: The Rise of String Theory, the Fall of a Science, and What Comes Next (Paperback)
Lee Smolin / Mariner Books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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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발견한 책인데 현대물리학에 대한 많은 의문을 해소시켜 주었다. 끈이론 연구자들이 어떻게 다른 이론을 배척하는지, 그럼으로써 물리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는지에 대해 저자가 얘기할 때, 그의 비분강개가 느껴졌다. 책은 단순한 비분강개만이 아니다. 끈이론의 역사와 현재, 양자중력이론에 대한 다른 접근 방법 소개, 물리와 과학에 대한 저자의 생각 등이 잘 어우러져 있다. 존경 받는 이론물리학자의 하나—하지만 끈이론에서 벗어난 비주류인—로저 펜로즈는 책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을 했다.


“Lee Smolin’s understanding of theoretical physics is unusually broad and deep, and his critical judgements are exceptionally penetrating, so his claim that string theory is responsible for the lack of real progress in fundamental physics for the past quarter of century carries considerable weight. Read this fascinating book and form your own judgement.”


스몰린의 끈이론에 대한 비판은 결국 다음으로 귀결된다. 끈이론은 수학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완결된 이론이 아니며,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다. 처음에 이런 얘기를 읽었을 때 눈을 의심했다. 아니 그렇게 ‘만물의 이론’이라고 홍보되었고 다들 그렇게 알고 있는데? 결국 이러한 상황은 끈이론 연구자들이 입자물리학의 주류를 차지하면서 다른 접근 방법을 억압한 결과로 나타난 상황일 뿐이다. 저자는 이 책이 끈이론 연구자들에 대한 직접적 공격은 아니며, 다양성이 상실된, 그리하여 정체된 입자물리학계 현재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지적하고자 할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끈이론 연구자들은 정말 아플 것 같다. 이 책을 읽는다면 말이다.


저자는 끈이론이 궁극의 이론일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음을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한다. 판단하는 중요한 지표의 하나는 ‘background independence’이다. ‘배경독립성’이라고 번역될 만한 이 개념은, 시공간 자체가 이론의 결과로 dynamic하게 변하는지를 말한다. 일반상대성 이론은 배경독립성을 갖는 대표적 이론이다. 반면 양자역학은 배경독립적이지 않다. 주어진 시공간에서 이론이 전개되기 때문이다. 끈이론은 양자역학과 중력을 통합하고자 함에도 불구하고 배경독립적이지 않다. 


저자는 현대물리학이 해결해야 할 다음의 5가지 문제(양자중력의 문제)를 나열한다(1장).


1. 일반상대론과 양자이론의 통합

2. 양자역학의 기초문제 – 관측과 해석의 문제

3. 여러 입자와 힘들이 통합되어 더 근원적인 실체의 나타남(manifestation)인지 결정

4. 입자물리학 표준모형의 상수들이 어떻게 선택되는지 설명

5.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 설명


그리고 끈이론이 이러한 질문에 대한 궁극적 해답을 주지 않음을 여러 장에 걸쳐 설명하고 있다. 그 중 한 구절:


  What about the first problem in chapter 1, the problem of quantum gravity? Here the situation is mixed. The good news is that the particles carrying the gravitational force come out of the vibrations of strings, as does the fact that gravitational force exerted by a particle is proportional to its mass. Does this lead to a consistent unification of gravity with quantum theory? As I stressed in chapters 1 and 6, Einstein’s general theory of relativity is a background-independent theory. This means that the whole geometry of space and time is dynamical; nothing is fixed. A quantum theory of gravity should also be background-independent. Space and time should arise from it, not serve as a backdrop for the actions of strings.


  String theory is not currently formulated as a background-independent theory. This is its chief weakness as a candidate for a quantum theory of gravity. We understand string theory in terms of strings and other objects moving on fixed classical background geometries of space that don’t evolve in time. So Einstein’s discovery that the geometry of space and time is dynamical has not been incorporated into string theory. (p. 184)


결국 이 책은 다양성에 대한 옹호이며, 세상(이론물리학계)의 ‘주류’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젊은이들을 쥐고 흔드는 상황에 대한 고발이다. 그가 경험한 학계의 일화와 교수 채용 방식의 문제, 과학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견 등 여러 면에서 곱씹을 것이 많은,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책의 몇몇 구절들:

… The idea that string theory gave us not one theory but a landscape consisting of many possible theories had been proposed in the late 1980s and early 1990s, but it had been rejected by most theorists. As noted, Andrew Strominger had found in 1986 that there was [sic] a huge number of apparently consistent string theories, and a few string theorists had continued to worry about the resulting loss of predictivity, while most of them had remained confident that a condition would emerge that would settle on a unique and correct theory. But the work of Bousso and Polchinski and Stanford group finally tipped the balance. It gave us an enormous number of new string theories, as Strominger had, but what was new was that these numbers were needed to solve two big problems: that is, to make string theory consistent with the observation of a positive vacuum energy and to stabilize the theories. Probably for these reasons, the vast landscape of theories finally came to be seen not as a freak result to be ignored but as a means of saving string theory from being falsified. (p. 158)

… Even if we limit ourselves to theories that agree with observation, there appear to be so many of those that some of them will almost certainly give you the outcome you want. Why not just take this situation as a reductio ad absurdum? That sounds better in Latin, but it’s more honest in English, so let’s say it: If an attempt to construct a unique theory of nature leads instead to 10^500 theories, that approach has been reduced to absurdity. (pp. 158-159)

   “I think it’s quite plausible that the landscape is real.”

—MAX TEGMARK (MIT)


… A theory has failed to make any predictions by which it can be tested, and some of its proponents, rather than admitting that, are seeking leave to change the rules so that their theory will not need to pass the usual tests we impose on scientific ideas. (p. 170)

  Science was not invented. It evolved over time, as people discovered tools and habits that worked to bring the physical world within the sphere of our understanding. Science, then, is the way it is because of the way nature is—and because of the way we are. (p. 298)

  I believe that science is one of those mechanisms [of correction]. It is a way to nurture and encourage the discovery of new knowledge, but more than anything else it is a collection of crafts and practices that, over time, have been shown to be effective in unmasking error. It is our best tool in the constant struggle to overcome our built-in tendency to fool ourselves and fool others. (p. 300)

… We have been trying to do so [make a revolution] with structures and styles of research best suited to normal science. The paradoxical situation of string theory—so much promise, so little fulfillment—is exactly what you get when a lot of highly trained master craftspeople try to do the work of seers. (p. 313)

  There is no more earnest or sincere person than 't Hooft. One thing we in the field of quantum gravity love about him is that he is so often there. He comes to many of our meetings, and there you never see him in the halls, politicking with the other prominent attendees. Instead, he comes to every session, something only the young students do. He arrives first thing each morning, impeccably dressed in a three-piece suit (the rest of us are generally in jeans and T-shirts), and he sits in the front row all day and listens to the talks by every single student and postdoc. He doesn’t always comment, and he may even doze off for a minute or two, but the respect he shows by being there for each of his colleagues is impressive. When it’s his turn to speak, he stands up and unpretentiously presents his ideas and results. He knows that his is a lonely road, and I would not be surprised if he resents it. How does a person give up the mantle of leadership, so richly deserved, just because he can’t make sense of quantum mechanics? Imagine what that says about someone’s character. (pp. 318-319)

  Over the years, I’ve noticed that a polarized distribution of responses is a strong predictor of future success and influence as a scientist. If some people think X is the future of science and others think X is a disaster, this may mean that X is the real thing, someone who aggressively pushes his or her own ideas and has the talent and perseverance to back them up. An environment that embraces risk takers will welcome such people, but a risk-averse environment will shun them. (p. 342)

  In fact, professors with tenure who lose their grant funding because of having switched to a more risky area can quickly find themselves in hot water. They cannot be fired, but they can be pressured with threats of heavy teaching and salary cuts to either go back to their low-risk, well-funded work or take early retirement. (p. 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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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e of Eternity (Mass Market Paperback)
Follett, Ken / Signet Book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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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에 걸친 유럽과 미국의 역사가 냉전을 거치며 마무리된다. 소련과 동구권 사람들의 공산주의 압제로부터의 자유, 미국내 흑인들의 차별로부터의 자유가 등장인물들의 삶으로 펼쳐진다.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점은 역사는 결국 발전한다는 것. 잠시 뒷걸음치는 것처럼 보이기는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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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사 3 - 베를린에서 미주리 협상까지 2차 세계대전사 3
제러드 L. 와인버그 지음, 홍희범 옮김 / 길찾기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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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에서 1941년, 추축국은 패배를 모르고 전진했다. 하지만 1942년과 1943년에 이르러서 전황은 반전되었고, 1944년에 이르자 추축국은 연합군의 반격을 어떻게 격퇴할지 고민해야 했다. 당시 상황에 관한 부분을 몇 군데 인용한다.

  독일군은 1944년 여름에 심각한 패배를 겪었고, 그 과정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정확한 수효는 여전히 파악하기 어렵지만 1944년 6월부터 9월까지 독일군에서 발생한 사상자와 포로, 실종자(확인되지 않은 사망자와 포로를 포함)는 최소 100만 이상, 최대 150만 전후로 추정된다. 동부와 서부, 남부 전역의 패배로 인한 물적인 손실도 막대했다. 엄청난 양의 전차와 야포가 전투에서 소모되었고 소모분에 필적하는 다수의 장비들이 연합군에 노획당하지 않기 위해 독일군의 손에 의해 파괴되었다. 

 손실은 지상에 한정되지 않았다. 항공전 분야에서도 1944년 초반부터 미국의 장거리 전투기들이 투입되자 독일의 방공망은 심각한 손실을 입기 시작했다. 독일 공군은 그 이전부터 상당한 손상을 입은 상황이었다. 이제 루프트바페(독일 공군)는 제대로 훈련조차 받지 못한 조종사들로 최소한의 제공권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서유럽 상공을 지배한 미 육군항공대와 영국 공군은 그 지배권을 점차 중부와 남부유럽까지 확대해 나갔고, 동유럽의 하늘 역시 소련 공군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그리고 미국의 폭격으로 독일의 합성 석유 공장들이 잇따라 파괴되면서 독일 공군의 재건 가능성은 크게 하락했다. 연료 부족으로 비행기할[원문오타] 수 없는 비행기들이 지상에서 파괴당했다.

  바다에서도 독일의 수상전투함들은 오래 전에 격침당했거나 발트 해의 지원임무에만 투입되는 신세로 전락했다. 잠수함들 역시 1943년의 패배 이후 과거의 능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독일 잠수함은 1944년 10월에 전 세계를 통틀어 단 한 척의 수송선(6000t)만을 격침시켰다. 흑해와 지중해에서 밀려난 독일 잠수함들은 프랑스의 대서양 연안 기지들마저 상실했다. 반면 연합국 해군은 손실이 크게 감소하면서 구축함이나 호위 항공모함 등의 호위함정 전력이 급증했고, 이 함정들을 운용하는 연합군 승무원의 숙련도 역시 크게 향상되었다. 그 결과는 연합군 호위전력의 방어력 향상과 수송선의 손실률 하락으로 이어졌다. 설령 독일이 잠수함전을 재개한다 하더라도 (연합군의 선박 건조량이 손실을 처음으로 능가한 시점인) 1943년 가을보다 훨씬 불리한 상황에서 시작해야 했다. (96~97 페이지) 

  독일은 7월 20일 이전부터 가능한 모든 자원을 동원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전쟁 물자의 생산은 슈페어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크게 개선되었으며 무기 생산량은 연합국의 폭격에도 불구하고 크게 증가했다. 슈페어는 7월에 노동 인력을 최대한 이용하기 위한 조치를 단행했고 그간 총력전 수행에서 소외되었던 괴벨스도 7월에는 인력 동원을 위한 획기적 조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7월 20일 이후에는 힘러의 뒤를 잇는 권력자로 등극했다. 이런 조치들로 전쟁에 동원되는 인력과 자원이 확충되었지만 전쟁의 부담이 공평하게 나눠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많은 독일인들의 불평을 샀다.

  하지만 독일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더이상 불평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수십만 명의 독일 남성(주로 노동자들)이 군으로 추가 징집되어 새로운 국민척탄병(Volksgrenadier) 사단들을 편성한 것이다. 독일군은 이 국민척탄병 사단들이 적을 막아내고 새로운 공세를 실시할 때 주력이 되어 주기를 기대했다. 여기에 더해 독일 국내에 일종의 민병대인 국민돌격대(Volkssturm)까지 편성되었다. 1944년 9월 25일에 창설된 국민돌격대는 16세에서 60세 사이의 총을 잡을 수 있는 남자는 누구나 가입해야 했다-- 물론 이들에게 지급할 총의 확보는 별개의 문제였다. 연합군이 동부와 서부 양면에서 독일로 진격하자 독일 정규군과 무장SS는 국민돌격대에게 방어전의 보조 임무를 부여하려 했다. 하지만 국민돌격대에 복무하는 사람들은 전투력의 문제 이전에 적에게 포로가 되었을 경우 정식 전투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총살당할 가능성부터 고민해야 했다. 독일인들은 자신들이 지난 5년간 후방에서 체포한 파르티잔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군 복무는 공장과 농장에서 일하고 틈틈이 훈련을 받는 국민돌격대의 성인 남자들에게 국한되지 않았다. 히틀러는 계속 주저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많은 여성들이 군수산업은 물론 군에도 행정병이나 통신병 등 다양한 업무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밖에도 1943년 이후 많은 10대 소년들이 대공포 부대 보조원(Flakhelfer)으로 복무했다. 많은 소년들이 공포에 떨었고 때로는 죽거나 다쳤지만, 이 소년들은 독일 국내의 수많은 대공포와 서치라이트를 조작했고, 상당한 수의 연합국 폭격기를 격추했다. 많은 소년들은 밤새 대공포를 발사하고 귀가하는 길에 사라진 가족과 집을 목격하곤 했다. 1944년 10월에 이르면 10대 소녀들도 여기에 가세했다. 수십만의 여성들이 병원과 통신소에서 군 보조요원으로 이미 복무 중이었고, 이제 일부는 대공포를 쏘는 훈련까지 받았다. (101~102 페이지)

  1944년 여름, 계속해서 패배를 겪은 일본은 대규모 자살 공격 부대를 편성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일본 조종사들은 훈련 수준이 하락하고 연합군에 비해 항공기의 성능도 부족했던 반면 미군은 조종사들의 훈련 수준과 실전경험이 모두 향상되고 항공기도 강력해졌다. 그리고 연합군 함정들의 수효가 증가하면서 함정들의 강력한 대공화망에 일본군의 항공기가 격추당할 확률은 급격히 상승했다. 이제 일본군 항공기 중 대부분은 단 한대의 연합군기도, 단 한 척의 연합군 함정도 파괴하지 못하고 격추될 운명이었다.

  현 시점에서는 서구 언어로 된 연구자료 가운데 윌리엄 머레이의 독일 공군 연구처럼 일본 공군의 구조나 일선 전력, 손실 등을 철저하게 파헤친 연구자료가 존재하지 않지만, 대체적인 정보는 비교적 명확하다. 일본은 1943년에 약 2만대, 이듬해에는 약 26,000대의 항공기를 생산했지만, 훈련이나 운반, 사고, 전투 등에 의한 손실이 커서 일선에 실제로 운용된 기체의 숫자는 거의 증가하지 않았다. 1941년의 일본 해군 및 육군 항공대 --언제나 철저하게 분리되어 운용되었다-- 는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베테랑 조종사들을 보유했지만, 1944년이 되면 사기는 왕성해도 훈련도 실전경험도 부족한, 첫 출격에서 대부분 격추당하는 미숙한 조종사들만 남았다.

  따라서 많은 일본군 지도자들은 자연스럽게 과거에 의도치 않게 발생하여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던 사례들을 의도적으로, 충분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형태로 시도하게 되었다. 항공기에 편도 연료만 주유한 뒤 연합군 함정을 향해 돌진해 자폭하도록 한 것이다. 어떻게 운용하더라도 대량의 항공기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면, 적어도 자폭 돌격을 하는 편이 결과를 낼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이 전술은 약간의 이점을 더 제공했다. 다소 낡은 구형 기체라도 쓸 수 있었고 조종사도 높은 숙련도를 갖출 필요가 없었으며 대규모 자살 공격 자체가 연합군 함대의 사기에 끼치는 영향도 무시할 수 없었다. 카미카제, 즉 13세기에 몽고의 침략함대를 무찌른 신이 보내준 바람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 자살공격은 1944년 10월의 필리핀 전투에서 처음 실시되었으며 그 뒤 점점 규모가 확대되었다. 일본 본토에는 무려 5,000대의 항공기가 카미카제 공격을 위해 집결해 있었다. 

  오키나와 전선이 끝날 무렵에는 2,550회의 카미카제 공격 가운데 475대가 연합군 함정에 직격하거나 피해를 입힐 만큼 가까운 위치에 추락했다. 사람들이 이 개념을 어떻게 생각하더라도, 보유 자원을 목적에 맞게 활용한다는 관점에 한정한다면 일본의 입장에서는 불합리하거나 터무니없는 선택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본은 현실적인 부분에서 뜻하지 않은 실수를 저질렀다. 카미카제에 동원된 항공기들은 대부분 가장 강력한 무장인 1,000파운드 폭탄을 장착하는 대신 500파운드 급 폭탄을 장착했기 때문에 수많은 항공기와 인명의 손실에도 불구하고 연합국 함정의 손실은 예상보다 작았던 것이다. (199~200 페이지)

  아놀드의 지원을 받은 르메이는 이제 이 새로운 전술[주간 정밀폭격 대신 야간 소이탄 폭격]을 실전에 적용했다. 일본의 표적 상공은 대부분 주간에도 구름에 덮여 있었기 때문에 레이더를 이용해 폭격해야 했지만, 당시의 불충분한 기술과 강력한 제트 기류로 인해 명중률은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반대로 밤에는 구름이 옅어지고 일본군의 대공포화는 독일에 비하면 밀도와 정확도 모두 떨어졌으며 일본의 야간전투기 전력은 극소수였다. 게다가 저공으로 비행하는 폭격기는 더 많은 소이탄을 실을 수 있었다. 르메이는 폭탄 탑재량을 더 늘리기 위해 방어 무장을 위한 탄약조차 싣지 않기로 했다. 오키나와 상륙은 겨우 3주 앞으로 다가왔으며 새로운 폭격전술은 다가올 상륙작전을 지원하기 위한 폭격 공세의 일환으로 도입되었다.

  1945년 3월 9~10일 밤, 르메이는 334대의 B-29를 도쿄 상공에 투입했다. 일본에게는 방어할 능력이 없었고, B-29들은 방어 무장도 없이 전투기에 맞서기 위한 밀집대형조차 형성하지 않은 채 저공으로 날아와 도쿄의 시타마치 구역에 엄청난 양의 소이탄을 투하했다. 일본인들은 완전히 허를 찔렸으며 대규모 화재에 대한 준비도 부족했다. 세 시간에 걸쳐 도쿄 상공을 맴돈 B-29들은 산업시설과 거주구역이 섞인 이 지역을 불지옥으로 변모시켰다.

  공습으로 8만에서 10만 명 가량의 일본인들이 사망했다. 완전히 불타버린 약 16제곱마일(41.44제곱킬로미터) 구역은 아마도 2차 대전에서 가장 많은 단위면적당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이다. 수십 개의 큰 공장과 수백 곳의 하청업체들이 파괴되었고, 이제 일본에 대한 새로운 형태의 항공전이 시작되었다. (223 페이지)


일본과 독일 국민들은 결국 총알(또는 폭탄)받이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잘못된 선택의 결과는 개인이나 국가에게나 마찬가지로 혹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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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8-19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ueyonder님은 전쟁 관련 책을 많이 읽으셨군요. 전쟁 관련 책을 뭐부터 읽어야할지 고민한 적이 많았는데, blueyonder님의 글을 많이 참고해야겠습니다. ^^

blueyonder 2017-08-21 17:35   좋아요 0 | URL
많이 읽었다고 내세울 바도 못 됩니다. 그냥 기록으로 몇 자 끄적여 놨을 뿐입니다. ^^;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