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감시원 코니 윌리스 걸작선 1
코니 윌리스 지음, 김세경 외 옮김 / 아작 / 201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웃음의 코드가 나하고는 맞지 않는 듯... SF는 과학소설이란 말이다. 양자물리학이 나오고 시간여행이 나온다고 다 과학소설이라는 데에는 동의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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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사이언티스트> 특별기사(2016.09.03)의 마지막 주제는 ‘신이 존재하는지 우리가 알 수 있을까?Can we ever know if God exists?’이다. 종교의 문제로 서로 죽고 죽인 역사의 현장에 직접 가본다면 아마 종교를 믿고 싶은 생각이 싹 달아날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종교의 이름으로 수많은 살육이 벌어지고 있다. 정말 한 종교는 맞고 다른 종교는 틀린 것일까? 


과학은 이제 신이 진화의 부산물로서 만들어진 개념일 뿐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도킨스의 책 제목을 보라). 인지적 부산물 가설은 인간의 뇌가 종교적 믿음을 갖도록 준비되어 있다고 말한다. 생존을 위해서는 주변의 모든 현상에서 원인을 찾는 성향이 이득이라는 것이다. 부스럭거리는 나뭇가지를 보고 맹수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분명 도망갈 때 커다란 이득을 준다. 오늘날 이러한 성향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서 보이지 않는 손을 종종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의 존재 증거는 과연 있을까? 예전의 많은 형이상학적 증명은 더 이상 타당하게 생각되지 않는다. 유신론자들은 자연의 미묘한 복잡성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이 주장의 현대판이 지적설계론이다). 하지만 과학은, 오랜 세월에 걸친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로 이러한 주장을 반박했다. 이제 현대의 유신론적 철학자들은 개혁주의 인식론reformed epistemology으로 후퇴했다. 이들은 신의 존재는 어떠한 정당화나 증거가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존재한다. 이걸로 충분하다.


하지만 신의 개념은 논리적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고 지적된다. 전지전능한 신은 과연 자신이 알 수 없는 비밀을 창조할 수 있을까? 현재로서는 신이 존재한다는 과학적(객관적) 증거는 없다. 많은 이들은 ‘증거의 부재’가 ‘부재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논리적 결론은 아니다. 


여전히 종교는 ‘결단’의 영역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브라함적 종교는 과학의 눈으로 볼 때 점점 시대에 뒤처지고 있다. 도킨스가 공격하는 신도 아브라함적 신이다. 특히 아직도 미국 개신교의 강고한 영향 아래 빅뱅 우주론이나 진화론을 성경의 창세기와 양립시키지 못하고 있는 우리 개신교의 현실은 이러한 사실을 더욱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기사가 얘기하듯이, 불가지론만이 논리적, 이성적 선택일지 모른다. 하지만 캄캄한 밤하늘, 쏟아지는 별을 한 번이라도 경험한 사람은 자연에 대한 경외감이 종교적 감정이라는 데에 동의할 것이다. 우주라는 관점을 통해 내가 나를 벗어나는 것, 초월, 존재의 본질을 봄, … 이러한 것은 언어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다음에 옮긴 칼 세이건의 아름다운 표현을 통해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다. 


우주Cosmos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우리의 사고력은 극히 빈약하지만 우주를 생각하노라면 우리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다. 등골이 오싹해지고 목소리는 달뜨며 먼 옛날을 회상하는 것 같은,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와 같은 그런 기분이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참으로 위대한 신비의 세계로 다가간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흥분한다. (코스모스, 서광운 역)


칼 세이건은 자연에 대한 경외감과 회의주의가 인류의 소중한 가치라고 주장했다. 그 두 가지가 오늘날의 인간과 문명을 만들었다는 데에 (이과생인 나는) 동의한다. 개인적 결론은, 인간은 원래 종교적이며 종교적 감정은 여전히 중요하다는 것, 하지만 현대의 종교는(특히 한국 개신교는) 시대에 뒤처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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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9일, 오늘은 칼 세이건이 82년 전(1934년)에 태어난 날이다. 1996년 12월 20일, 만 62세의 나이로 그가 타계했으니 20주기도 곧 다가온다. 뭔가 그럴 듯한 헌사라도 쓰고 싶었으나, 아래의 사진(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을 두고 그가 했던 강연 한 조각 번역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사진과 원문은 Wikipedia에서).



저 위에서, 우리가 들어봤던 모든 이들이 살았다. 우리 기쁨과 고통의 모든 것, 수 천의 확신에 찬 종교와 이념과 경제 교리, 사냥꾼과 수렵꾼, 영웅과 겁쟁이, 문명의 창조자와 파괴자, 왕과 농부, 사랑에 빠진 젊은 연인들, 희망에 찬 아이, 아비와 어미, 발명가와 탐험가, 도덕의 스승, 타락한 정치가, 수퍼스타, 최고 지도자, 성인과 죄인, 인류 역사 속 모든 이들이 저 햇빛에 떠 있는 조그만 티끌 위에서 살았다.

장군과 황제가 흐르게 만든 피의 강을 생각해 보라. 영광과 승리 속에서, 이들이 잠시 동안 이 점 일부의 지배자가 되기 위해 흐르게 만든 피의 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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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사이언티스트> 특별기사(2016.09.03)의 여덟 번째 주제는 ‘시간은 환상인가?Is time an illusion?’이다. 제목부터가 의미심장하다. 시간이 환상이라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인데, 그럼 시간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시간이 흐른다는 느낌을 모두 알고 있다. 시간은 한 번 흐르면 되돌릴 수 없다. 시간은 항상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 노벨상 수상자인 텍사스 대학의 스티븐 와인버그Steven Weinberg 교수는 이런 농담을 인용한다: “시간은 모든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자연의 방식이다.” 우리는 계절이 바뀌고 얼굴에 주름이 늘어남으로 시간의 흐름을 경험한다. 우리는 현재에 살며, 이 현재는 일정한 보폭으로 행진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우주 전체의 시간 진행을 관할하는 시계가 있는 것처럼.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우주에는 단 하나의 시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은 공간과 함께 4차원 시공간을 구성하며, 시간이 얼마나 빨리 흐르는지는 물체의 운동 속도, 또는 주변 중력장의 세기에 따라 달라진다(영화 인터스텔라의 주요한 주제 중 하나!). 하지만 4차원 시공간에서도 시간과 공간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시간은 여전히 특별하다: 우리는 한 공간에서 미래(나중 시간)의 사건을 예측할 수 있지만, 동일한 시간에 다른 공간에서의 사건을 예측할 수는 없다.


현대 물리학의 다른 기둥인 양자역학도 시간을 특별히 취급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시간은 단순히 매개변수일 뿐이다. 양자역학에서는 물리변수들이 모두 연산자로 바뀌어 계산가능한 양observable으로 취급되지만 시간은 계산가능한 양이 아닌, 그냥 주어진 변수로 취급된다.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을 통합하여 시간의 진정한 본성에 대해 알려주는 이론이 있으면 좋겠지만 아직 우리는 그런 이론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옥스포드 대학의 데이비드 도이치David Deutsch 교수는 돈 페이지Don Page와 윌리엄 우터즈William Wooters가 30년도 전에 했던 계산이 우리에게 실마리를 준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얽혀있는entangled’ 한 쌍의 입자가 변하면서 우주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시간이 흐른다는 환상을 줌을 보였다. 하지만 우주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2013년에 수행된 실험은 시간이 환상과 같은, 창발하는emergent 현상이라는 이 생각이 맞을 수 있음을 보였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지구 표면에 있기 때문에 굽어 있는 지구의 본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우주 안에 있기 때문에 시간의 본 모습을 경험할 수 없다는 얘기이다. 이러한 얘기는 아직 가설일 뿐이고 시간에 관한 일반 이론은 아니다. 시간은 정말 환상인 것일까?


우리는 태어나고 죽는다. 이 두 사건 사이의 간격을 우리는 시간이라고 부른다. 시간의 흐름은 아마도 인간이 경험하는 가장 근본적인 속성일 것이다. 시간에 대한 일반 이론을 안다고 해도 우리의 인생이 유한하다는 사실은 아마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매 순간을 의미 있게 보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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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사이언티스트> 특별기사(2016.09.03)의 일곱 번째 주제는 ‘실재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What is reality made of?’이다. 여기서 ‘실재’란 실제로 존재하는 모든 것, 곧 우주universe를 얘기한다. 고대 철학자들은 우주의 근본 원소를 흙, 공기, 물, 불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현대 과학자들은 물질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원자는 적은 종류의 기본입자들 – 빈 공간을 채우고 있는 양자 장의 요동 – 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결론 내린 상태이다. 그럼 이제 모든 것은 해결된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물질은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의 약 5 퍼센트 밖에 안되고, 나머지 95 퍼센트는 ‘암흑’ 물질(약 27 퍼센트)과 ‘암흑’ 에너지(약 68 퍼센트)로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다. ‘암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은 우리가 잘 모른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실재의 중요한 다른 요소인 시간과 공간도 제대로 이해되지 않고 있다.


이 실재의 문제는 양자역학의 해석과도 연관된다. 양자이론은 물질세계를 기술하는 가장 정확한 이론이지만, 해석 문제에 들어가면 아직 답이 없다. 표준 해석은 양자적 대상의 가능한 상태는 모두 '동등하게 실재적’이며(즉, ‘중첩’되어 존재하며), 측정에 의해 이 가능한 상태 중 하나가 실현된다고 말한다. 이 해석에 반기를 든 에르빈 슈뢰딩어는, 1930년대에 그의 유명한 고양이를 이용한 사고실험을 통해, 측정 전에 고양이는 동시에 ‘죽어 있고 살아 있는’ 상태냐고 질문한 바 있다. 측정이 죽은 고양이라는 결과를 준다면, 산 고양이는 어디로 갔을까? 이러한 난제를 해결하고자 제안된 것이 다세계(평행우주) 해석이다. 측정이 일어나면 둘 중 하나만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둘 다 실현된다는 것이다. 단 우주가 갈라져서 다른 우주에서.


양자이론은 물질세계의 측정 결과를 정확히 설명하지만 그 이론의 해석이 이런 문제를 야기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혹시 이것은 수학만이 실재적 존재이고 물질은 부수적 존재라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이렇게 믿는 물리학자들도 많다(특히 이론물리학자들). 이들은 물질과 에너지가 근원적 존재가 아니라 정보가 근원적 존재라고 말한다. 이 생각에 따르면, 우주의 본질적 모습은 추상적인 수학에 따라 정보를 처리하는 거대한 컴퓨터이다.


수학만이 실재적 존재라는 생각은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 당시부터 있던 생각이다. 이데아의 세계가 있고 물질의 세계에 사는 우리는 단지 그 그림자를 볼 뿐이라는. 플라톤의 비유처럼 우리는 아직도 동굴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인가? 수학을 통해 우리는 실재를 보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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