낸터킷으로 떠나기 전 들린 예배당에서, 먼저 스러진 고래잡이들을 기리는 대리석 추도비를 보며 떠올리는 이슈마엘의 상념. 


  낸터컷으로 떠나기 전날 대리석 추도비를 보는 내 심정이 어떠했으며, 어둡고 우울한 날의 음산한 빛 속에서 앞서 간 고래잡이들의 운명을 읽는 마음이 어땠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맞아, 이슈마엘. 저게 바로 네 운명이 될 수도 있어. 하지만 웬일인지 나는 다시 명랑해졌다. 배에 오르라는 기꺼운 권유이자 출세를 위한 좋은 기회처럼 보였다. 구멍 뚫린 보트는 나를 불멸의 존재로 단번에 진급시켜 줄 것 아닌가. 그래, 고래잡이는 죽음을 불사하는 일이야. 입술 한 번 달싹할 틈 없는 순간적인 혼란 속에서 사람들을 영원에 던져넣지. 하지만 그 다음엔? 내가 보기에 우리가 생사의 문제를 대단히 잘못 생각해 온 듯하다. 내가 생각하기엔 이승에서 그림자라고 부르는 게 실은 나의 실체인 듯하다. 또 영적인 것을 보는 우리는 물속에서 태양을 보며 탁한 물을 더없이 맑은 공기라고 생각하는 굴조개와 흡사하다. 내 생각엔 몸뚱이는 더 나은 실체의 찌꺼기에 불과하다. 몸뚱이 따윈 누구라도 가져가라지. 가져가라니까. 이건 내가 아니라고. 그러니 낸터컷을 위해 만세 삼창을 부르자. 그리고 배나 몸뚱이에는 언제 구멍이 뚫리더라도 상관없어. 내 영혼은 제우스가 온다 해도 뚫을 수 없을 테니까(85~86 페이지)


  It needs scarcely to be told, with what feelings, on the eve of a Nantucket voyage, I regarded those marble tablets, and by the murky light of that darkened, doleful day read the fate of the whalemen who had gone before me. Yes, Ishmael, the same fate may be thine. But somehow I grew merry again. Delightful inducements to embark, fine chance for promotion, it seems—aye, a stove boat will make me an immortal by brevet. Yes, there is death in this business of whaling—a speechlessly quick chaotic bundling of a man into Eternity. But what then? Methinks we have hugely mistaken this matter of Life and Death. Methinks that what they call my shadow here on earth is my true substance. Methinks that in looking at things spiritual, we are too much like oysters observing the sun through the water, and thinking that thick water the thinnest of air. Methinks my body is but the lees of my better being. In fact take my body who will, take it I say, it is not me. And therefore three cheers for Nantucket; and come a stove boat and stove body when they will, for stave my soul, Jove himself cannot. (p. 42)


육체는 스러질지라도 영혼은 영원히 남는다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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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5-07-02 1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저도 열린책들 번역으로 모비딕 완독했는데요 읽을 땐 좀 징글징글하기도 했는데 다시 읽고 싶어지기도 하네요 만일 또 읽는다면 딴 역자 걸로 보는 게 더 낫겠지요 많이 더워졌어요 7월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blueyonder 2025-07-02 13:27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서곡 님~ 첫 몇 장 보고 마음에 들어서 열린책들 번역을 선택했는데요, 읽다 보면 꼭 100퍼센트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네요. 그래도 비교적 간결히 잘 번역된 듯 싶습니다. <모비딕>이 워낙 번역본이 많기 때문에 또 읽으신다면 다른 역자의 번역을 선택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책을 이것저것 많이 펴놓고 읽는지라 <모비딕>은 진도가 너무 늦네요. 그냥 영문판과 가끔씩 비교하며 읽으려고 합니다.

무더운 7월이 시작됐네요. 건강한 여름 보내시기 바래요~~
 
양자역학 이야기 - 빛의 개념부터 시간여행까지,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양자역학 안내서
팀 제임스 지음, 김주희 옮김 / 한빛비즈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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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팀 제임스는 영국의 과학교사로 유튜브 등을 통해 과학대중화에 힘쓰고 있다고 책날개 소개에 나온다. 양자역학은 상대성이론과 더불어 늘 일반인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중요한 물리학 주제이다. 이 책은 양자역학 입문서라고 볼 수 있으며, 근래 출간되는 비슷한 성격의 책들 중 하나이다. 재밌고 쉽게 설명하려는 시도가 돋보이지만 종종 설명이 부정확하다는 단점이 있다. 번역의 문제도 조금 있지만, 내가 볼 때는 원문에도 문제가 있다. 나중에 정리하려고 이상한 부분 표시하며 읽다가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이 책은 표지 일러스트도 마음에 안 든다. 과학 관련한 그림을 그냥 예쁘게 마음대로 바꾸면 되는 건가? 일례로 렌즈 관련한 그림을 보시라. 저자의 다른 책을 찾아 읽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이상한 부분 표시해 놓은 포스트잇 떼다가 다른 책에서도 봤던 번역 문제 한 가지만 지적하려고 한다. wave는 '파동'이다. 물결처럼 퍼져나가는 현상 자체를 말한다. 파동의 길이(예컨대 파동의 마루에서 마루까지 거리)를 나타내는 '파장wavelength'과는 분명 다르다. 48페이지를 보면 이렇게 번역되어 있다: "전자와 광자가 파장과 입자를 오가며 다르게 행동하는 신비한 현상을 '파장-입자 이중성wave-particle duality'이라 부른다." (밑줄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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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ch-22 (Paperback, 50, Anniversary) - 『캐치-22』원서
조지프 헬러 지음, 크리스토퍼 버클리 그림 / Simon & Schuster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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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잘 안 읽히다가 책의 스타일과 템포에 적응되면 비교적 잘 읽히기 시작한다. 아니면 뒤로 갈수록 앞에서 언급된 사건이 드러나고 마감되기 때문에, 그리고 전쟁이란 비극이 더욱 극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읽으면서 난 풍자와 블랙코미디에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조지프 헬러가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는 알 것 같다. 한 마디로, "전쟁은 미친 짓이다." 전쟁에 승자는 없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모두 깊은 상흔을 안고 살아야 하는 희생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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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코스믹코믹 - 빅뱅을 발견한 사람들 푸른지식 그래픽로직 1
아메데오 발비 지음, 김현주 옮김, 로사노 피치오니 그림, 이강환 감수 / 푸른지식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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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페이지의 얇은 책이다. 빅뱅의 증거로 얘기되는 우주배경복사를 발견한 아노 펜지아스와 로버트 윌슨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허블, 아인슈타인, 프리드만, 르메트르, 가모프 등의 관련 업적을 설명한다. 영화를 보듯 생생하게 대화를 통해 논의가 전개되는 장점이 있지만, 짧은 분량에 거의 대부분이 대화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 주제에 대해 잘 모르는 이에게는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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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문학사상 가장 뛰어난 반전소설 중 하나로 평가 받는 <Catch-22>. 블랙 유머와 부조리한 상황이 도처에 있다. 시간적 순서가 뒤섞여 있을뿐더러 저자의 현란한 영어 구사 때문인지 잘 읽히지 않아 오랫동안 붙잡고 있다. 풍자와 부조리는 좀 덜하지만 책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급박한 장면 하나를 다음에 옮겨 놓는다. 주인공은 폭격수인 Yossarian이다. 다음 장면에서 그는 임무 수행을 위해 B-25 폭격기를 타고 대공포화 속을 비행 중이다.


... Then he realized he was sopping wet. He looked down at his crotch with a sinking, sick sensation. A wild crimson blot was crawling upward rapidly along his shirt front like an enormous sea monster rising to devour him. He was hit! Separate trickles of blood spilled to a puddle on the floor through one saturated trouser leg like countless unstoppable swarms of wriggling red worms. His heart stopped. A second solid jolt struck the plane. Yossarian shuddered with revulsion at the queer sight of his wound and screamed at Aarfy for help.

  "I lost my balls! Aarty, I lost my balls!" Aarfy didn't hear, and Yossarian bent forward and tugged at his arm. "Aarfy, help me," he pleaded, almost weeping. "I'm hit! I'm hit!"

  Aarfy turned slowly with a blind, quizzical grin. "What?"

  "I'm hit, Aarfy! Help me!"

  Aarfy grinned again and shrugged amiably. "I can't hear you," he said.

  "Can't you see me?" Yossarian cried incredulously, and he pointed to the deepening pool of blood he felt splashing down all around him and spreading out underneath. "I'm wounded! Help me, for God's sake! Aarfy, help me!"

  "I still can't hear you," Aarfy complained tolerantly, cupping his podgy hand behind the blanched corolla of his ear. "What did you say?" 

  Yossarian answered in a collapsing voice, weary suddenly of shouting so much, of the whole frustrating, exasperating, ridiculous situation. He was dying, and no one took notice. "Never mind."

  "What?" Aarfy shouted.

  "I said I lost my balls! Can't you hear me? I'm wounded in the groin!"

  "I still can't hear you," Aarfy chided.

  "I said never mind!" Yossarian screamed with a trapped feeling of terror and began to shiver, feeling very cold suddenly and very weak.

  Aarfy shook his head regretfully again and lowered his obscene, lactescent ear almost directly into Yossarian's face. "You'll just have to speak up, my friend. You'll just have to speak up."

  "Leave me alone, you bastard! You dumb, insensitive bastard, leave me alone!" Yossarian sobbed. He wanted to pummel Aarfy, but lacked the strength to lift his arms. He decided to sleep instead and keeled over sideways into a dead faint. (pp. 288-289)


... 그러자 요사리안Yossarian은 자신이 축축히 젖고 있음을 깨달았다. 꺼지는 듯한 아픔을 느끼며 요사리안은 사타구니를 내려다 봤다. 시뻘건 얼룩이 그의 셔츠 앞을 타고 위로 재빨리 기어오르고 있었다. 마치 그를 집어삼키려고 솟아오르는 거대한 바다괴물 같았다. 맞았다! 흠뻑 젖은 바짓가랑이 하나를 타고 피가 줄줄 흘러내려 바닥에 고였다. 셀 수 없이 많아 막을 수 없는, 꼬물거리는 빨간 벌레무리들 같았다. 요사리안은 심장이 내려앉았다. 두 번째로 비행기가 확 흔들렸다. 요사리안은 자신의 부상이 야기한 기묘한 광경에 진저리치며 아피Aarfy에게 도와달라고 소리쳤다. 

  “불알이 사라졌어! 아피, 불알이 사라졌다고!” 아피는 듣지 못했다. 요사리안은 앞으로 수그려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아피, 도와줘.” 요사리안은 거의 울먹이며 간청했다. “맞았어! 맞았다고!”

  아피는 무표정의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돌아봤다. “뭐라고?”

  “나 맞았어, 아피! 도와줘!”

  아피는 다시 미소 지으며 정겹게 어깨를 으쓱했다. “뭐라는지 안 들려.” 그가 얘기했다.

  “여기 안 보여?” 믿을 수 없다는 듯 요사리안은 소리치며, 사방으로 흘러내려 이제 밑에서 퍼지며 흥건히 고이고 있는 피 웅덩이를 가리켰다. “나 다쳤다고! 제발 좀 도와줘! 아피, 도와달라고!”

  “뭐라는지 아직도 안 들려.” 아피는 참을성 있게 얘기하며 그의 두툼한 손을 희멀건한 귓바퀴 뒤에 대고 둥글게 모았다. “뭐라고 그랬어?”

  요사리안은 꺼져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무 많이 소리를 지른 데다가 어쩌지 못하는 분통 터지는 이 우스꽝스러운 상황에 갑자기 지쳐버렸다. 그는 죽어가고 있었지만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됐어.”

  “뭐라고?” 아피가 외쳤다.

  “불알이 사라졌다고 말했어! 뭐라는지 안 들려? 사타구니에 부상당했다고!”

  “뭐라는지 아직도 안 들려.” 아피가 훈계하듯 얘기했다.

  “됐다고!” 요사리안은 공포의 감정이 조여드는 것을 느끼며 소리쳤다. 갑자기 매우 춥고 기운이 쑥 빠지는 것을 느끼며 요사리안은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아피는 안타깝다는 듯 다시 고개를 저으며 음란하고 허여멀건 한 귀를 요사리안의 얼굴에 거의 처박았다. “더 크게 얘기해봐, 친구. 더 크게 얘기해보라고.”

  “내버려둬, 이 바보자식! 이 멍청하고 무신경한 바보자식아, 날 그냥 내버려두라고!” 요사리안은 흐느꼈다. 아피에게 주먹을 날리고 싶었지만 팔을 들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요사리안은 그냥 잠을 자기로 하고 옆으로 누워 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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