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놓고 다정하진 않지만 - 카렐 차페크의 세상 어디에도 없는 영국 여행기 흄세 에세이 5
카렐 차페크 지음, 박아람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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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작가인 카렐 차페크의 영국 여행기이다. 차페크는 1924년 펜클럽 등의 초대로 영국을 두 달 정도 방문하여 여행하며 당시 영국인들에게도 꽤 인기를 끌었던 이 여행기를 남겼다. 1924년은 1차 대전이 끝난 지 6년 정도 지난 후로 아직 대영제국의 위세가 남아 있던 때이다. 이 책에서 차페크는 직접 그린 펜 그림을 곁들이며 그가 여행하며 겪은 영국인과 영국의 자연, 도시 등에 대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영국이라고 뭉뚱그려 얘기하지만 차페크는 잉글랜드 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와 웨일즈도 여행했다. 아일랜드는 위험하다고 해서 가보지 못했다고 한다. 글 속 그의 농담과 해학을 읽으며 그가 쓴 다른 책도 읽고 싶어졌다. (난 이 유명한 체코 작가의 다른 책을 읽은 것이 없다!)


영국인들의 근엄함, 그 속의 다정함, 유머, 영국의 자연, 문화, 산업 등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은 그였지만, 언제나 그의 관심과 애정은 그의 고국 체코로 돌아간다. 체코는 1939년 3월 나치 독일에 병합되며 사라지게 되지만, 차페크는 1938년 12월 크리스마스에 4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며 이 비극을 직접 목도하지는 않았다. 


조국에 대한 애정과 삶에 대한 통찰이 묻어나는 한 구절을 다음에 옮긴다. 


  영국에서 저는 거대함과 막강함, 부유함, 번영, 비할 데 없는 발전상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아직 작고 미완성의 상태라는 사실이 결코 슬프지는 않았습니다. 작고 어수선하고 불완전한 것은 그 나름대로 용감한 사명이거든요. 바다에는 세 개의 굴뚝과 일등석, 욕실을 갖추고 반짝거리는 황동으로 장식한 크고 호화로운 대서양 여객선이 있는가 하면, 공해에서 연기를 내뿜으며 흔들거리는 작은 증기선도 있으니까요. 여러분, 이처럼 작고 불편한 고물 선박으로 살아가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우리나라가 가난하다고 불평하지 마세요. 감사하게도 우리나 대영제국이나 같은 우주에 존재하고 있잖아요. 작은 증기선은 대영제국처럼 커다란 배만큼 많은 짐을 실을 수 없죠. 하하, 하지만 작은 증기선도 큰 배와 똑같이 멀리까지, 혹은 그와는 다른 곳까지 항해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거기에 누가 타고 있느냐입니다. (186~18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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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발견한 책인데, 조금 어려울 수 있지만, 수학 그리고 물리학의 여러 주제에 대해 잘 정돈된 저자의 생각을 읽으며 내 생각도 함께 정리해 볼 수 있다. <최무영 교수의 물리학 강의> 느낌도 조금 난다. 하지만 이 책은 물리학에 관한 교양 강의를 정리한 책은 아니다. 저자는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수학과에서 수리물리학을 연구했는데, 이 책은 그의 평소 생각을 정리한 '수필집'이라고 머리말에서 언급된다. '수필집'이라는 말이 정겹다. 


다음은 수학과 물리학의 차이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다.


  수학과 물리학의 근본적인 차이는 물리학은 "실험과학"이지만 수학은 실험과학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연수계에서 무한개의 소수들(prime numbers)이 있다는 사실은 이미 유클리드(B.C. 300)에 의하여 증명되었고 그것은 앞으로도 변할 수 없는 수학적 진실이다. 하지만 한 물리학 이론이 수학적으로 아름답고 지금까지의 관측과 실험결과들을 잘 설명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이론은 태생적으로 유한성(finiteness)을 갖고 있다. 관측과 실험으로 이론을 검증하는 것은 유한번이며, 앞으로 한 번이라도 실험결과와 이론이 일치하지 못할 때에는 일치하지 않는 정도와 상황에 따라서 그 이론은 고전역학과 같이 하나의 근사이론으로 살아남거나 아니면 수정되거나 완전히 포기될 수밖에 없다. 물리학자가 물리이론의 수학적 엄밀성보다는 물리적 진실에 더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 (21~2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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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시사인) 제904호 : 2025.01.13
시사IN 편집국 지음 / 참언론(잡지)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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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검은 글씨로 된 '시사IN' 표제가 슬프다. 하지만 그래도 떠오르는 붉은 태양의 사진이 일말의 희망을 주는 것 같다. 지난 연말부터 이런저런 책을 읽어 젖혔다. 자꾸만 인터넷 뉴스를 켜 보게 되는 내게 다른 집중할 거리를 찾아주고 싶은 마음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다가 현실이 너무 답답하지만 역사라는 긴 안목으로 바라보면 조급한 마음이 조금은 줄어들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한 달이 길지만, 일 주일이 길지만 그래도 세월은 흐르며 기본적으로 우리 사회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 않은가. 이 세상에 이상한 사람도 많지만, 그래도 좋은 사람이 더 많기에 살 만하다고 생각한다. 국회가 64년 만에 "국민께 드리는 감사문"을 의결했다. "대한민국 국민과 이 시대를 함께 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라는 문구가 있다. 나도 우리 국민과 이 시대를 함께 할 수 있어서 영광이다. 문득 외쳐본다. "영광입니다,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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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5-01-13 2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두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blueyonder 2025-01-13 21:56   좋아요 0 | URL
친절한 공쟝쟝님, 감사합니다! 공쟝쟝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세상 끝의 살인 첩혈쌍녀
아라키 아카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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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배경에 이끌려 책을 읽기 시작했다. 소설은 2024년 12월 30일에 시작한다. 세상은 2025년 3월 7일 멸망할 예정이다. 직경 7.7 km가 넘는 소행성이 일본 구마모토 현에 충돌하기 때문이다. 능력 있는 이들은 지구 반대편인 브라질로, 또는 충돌지점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멀리 도망가려고 떠났다. 하지만 여러 이유로 남아 있는 이들도 있다. 책 소개에 나오는 것처럼, 12월 31일, 운전학원 차 트렁크에서 발견된 살해당한 시체를 둘러싸고 이야기는 전개된다. 범인을 쫓는 이는 운전학원 강사와 연수생. 흥미로운 설정이다. 난 아마 종말을 앞둔 사람들의 심정을 좀 더 엿보고 싶었던 것 같은데, 책은 그런 부분보다 사건의 전개에 더 신경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재미있게 읽었지만, 기대에는 조금 못 미쳤다. 


책은 2022년에 처음 출간됐다. 현실 세계에서 2025년으로 막 넘어온 지금이 정말 읽기 좋은 타이밍이 아닐까 생각하며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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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5-01-13 14: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마모토면 저는 나쓰메 소세키와 강상중 교수 때문에 알게 된 곳이네요...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blueyonder 2025-01-13 14:37   좋아요 1 | URL
저는 구마모토를 이름만 들어봤지, 가본 적이 없어서 사실 잘 몰랐습니다. 지도를 찾아보니 나가사키와 후쿠오카가 근처에 있네요.
서곡 님께서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좋은 글 늘 감사합니다~

서곡 2025-01-13 14: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가본 적은 없고요 나쓰메 소세키가 구마모토에서 선생님으로 일했고 재일한국인 강상중 교수는 거기가 고향이라고 합니다...네 감사합니다 !!! 블루욘더님 오늘 오후 잘 보내시길요~~~

blueyonder 2025-01-13 15:09   좋아요 1 | URL
나쓰메 소세키와 강상중 교수가 구마모토와 그런 인연이 있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서곡 님께서도 좋은 오후 보내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에 양자가 있다
요시다 노부오 지음, 김정환 옮김, 강형구 감수 / 문학수첩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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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을까 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저자의 주관이 상당히 개입된 주장이 제시된다. "빛이나 전자는 파동이라고 잘라 말해도 상관 없는 것이다."(85페이지), "즉 전자는 파동이다. 조건에 따라서 때때로 입자처럼 움직이는 경우가 있을 뿐이다."(86 페이지)와 같은 주장이 계속된다. 저자는 양자론을 '양자장론'을 통해 파동으로 이해하면 모든 현상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얘기하며, 이전의 뛰어난 물리학자들, 보어, 하이젠베르크, 디랙 등이 입자에 기반하여 양자론을 펼쳤기 때문에 양자론이 비상식적이라는 인상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그의 영웅은 양자장론에 기여했다는 아인슈타인, 슈뢰딩거, 요르단, 보른, 파울리 등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견해는 책을 읽어도 잘 납득이 되지 않아 안타깝다. 


물리학자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이론으로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할 때 종종 발생하는 문제점이 있다. 이론이란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라는 점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궁극의 최종 이론 하나만으로 자연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전의 이론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도 옛날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현상을 설명하는 여러 이론이 있으면, 관점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이론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고, 자연이 실제로 이론이 기술하는 대로 행동하리란 보장은 없다. 이론의 가치는 예측성에 있다. 그 이론을 가지고 현상을 예측할 수 있으면 유용한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이론의 한계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듯 싶다. 


이 책을 읽고 위에 인용한 문구 외에 내가 얻은 것이 있을까. 별로 없는 것 같다. '양자장론'을 공부해 보고 싶은 생각은 들었다. 


글 속의 문장 몇 개를 옮겨 놓는다. 


  하이젠베르크나 디랙은 전자가 입자라고 가정한 상태에서 그 움직임이 파동적이라는 이론을 구축했는데, 이는 자연계의 실태를 적절히 파악한 게 아니다. 가령 원자에 속박된 전자에 대해서는 어떤 궤도를 그리면서 운동하는지 결정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상황을 '전자는 입자인데 어째서인지 궤도가 정해져 있지 않다'라고 해석하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사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슈뢰딩거 혹은 요르단처럼 '전자는 파동이며, 외부로부터의 작용으로 정상파가 흐트러지지 않을 때에 한해 입자처럼 움직인다'라고 생각하면 그다지 기묘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원자 내부에서 전자의 궤도를 특정할 수 없는 이유는, 원자핵으로부터 전기적인 힘이 지속적으로 작용해서 전자의 파동이 안정된 공명 상태를 형성하지 못하는 까닭에 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176~177 페이지)

  베타붕괴가 일어나는 사례에서는 초보다 몇 자리는 짧은 순간마다 다른 역사로 분기하게 된다. 화학반응의 경우도 반응 전후의 상태는 서로 간섭하지 않으므로, 세계 어딘가에서 분자 1개가 화학반응을 일으킬 때마다 별개의 역사가 탄생한다. 이런 무수한 역사가 전부 평행 우주로 실현된다고는 도저히 믿기 어렵다. 베타붕괴나 화학반응 같은 간섭하지 않는 상태로의 변화(탈간섭)에 따라 구별되는 역사는 식으로 표현될 뿐인 가상적인 것으로, 실제로는 그중 하나가 실현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220 페이지)

...

  '관측자까지 포함해서 모든 것이 개별적인 평행 우주에 실재한다'라는 해석도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너무나도 비상식적이기 때문에 이를 진지하게 주장하는 물리학자는 거의 없다. (221 페이지)


평행 우주를 진지하게 주장하는 유명한 물리학자로는 MIT의 맥스 테그마크가 있다. 그는 심지어 우주가 수학구조의 일부라고 주장한다(mathematical universe hypothesis). 


  하이젠베르크 등의 이론에서는 인간의 관측이 물리현상의 귀추를 좌우한다. 그러나 상상이 불가능할 정도로 광대한 우주에서 먼지 정도밖에 안 되는 행성에 달라붙어 살고 있는 인간이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간섭의 유무에 따라 양자론적인 과정을 구별한다는 견해는 내가 아는 한 양자론의 가장 합리적인 해석이다. (222 페이지)

  양자론은 결코 상식을 벗어난 이해할 수 없는 이론이 아니다. 기본이 되는 것은 물리현상의 근간에 미세한 파동이 존재한다는 발상이며, 세상은 이 파동을 통해 안정과 질서를 얻는다. 갇힌 파동이 공명 패턴이 되는 정상파를 형성함으로써 일정 질량을 가진 소립자가 생겨나고 원자의 에너지가 이산적인 값이 된다. 파동의 패턴이 반복된 결정(結晶)이 거시적인 물질을 형성하며, 고분자로 보이는 다양한 에너지 상태 사이의 전이가 복잡 정묘한 생명현상을 가능케 한다. (245 페이지)

  양자론이 너무나도 이해하기 어려운 이론이 된 원인은 아마도 하이젠베르크나 디랙이 추상적인 수학을 바탕으로 체계화를 진행한 데 있을 것이다. 하이젠베르크는 보른과 요르단이 발견한 '교환관계'를 원리로 삼는 체계적인 이론을 세 사람의 공동 논문에서 전개했고, 디랙도 독자적으로 같은 방향의 연구를 진행했다. 이 조류에 20세기 최고의 수학자로도 불리는 존 폰 노이만이 가세함으로써 힐베르트 공간이라는 추상 수학의 도구를 사용한 양자론의 체계가 완성된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얻은 수학적 체계가 물리현상을 정확히 기술한다고는 도저히 믿기 어렵다. 애초에 제5장에서 설명한 교환관계가 정말로 원리라는 증거도 없다. (246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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