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복음서에 포함된 예수 관련 자료들이 (i) 지금까지 언급한 모든 평가를 고려해 볼 때, 특정 증거들이 진정한 것으로 설명되고 역사적으로 개연성 있는 모습을 보여 주는지, (ii) 증거들 간의 차이가 고려되면서도 그 속에 어떤 일관성 있고 통합된 모습을 보여 주는지, (iii) 추종자들이 구성해 낸 예수의 모습에 어떤 것이 적절한 기초인지, 달리 말해 그것들이 교회의 예수상을 형성하는 데 필요한 기초인지 물어야 한다.

대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비록 세부적인 사안에 있어 많은 작업을 수행해야 하고, 앞으로도 이에 대한 모욕들에 맞서 끊임없이 방어해야 하더라도, 기독론을 위한 역사적 기초는 존재하며 언제나 가능한 대안이 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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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은 역사의 중심에 민중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민중의 아픔, 민중의 고난이 없는 자긍심의 역사는 거짓이다.

그런 자긍심의 철학 역시 위선의 철학이며, 거짓의 철학이다.

민중을 말 잘 듣는 사람으로 두고 민족지상주의니 국가지상주의이니 하는 것은 제대로 된 한국철학이 될 수 없다.

진정한 한국철학에서 민중은 통치와 교화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있어야 한다.

역사의 혁명은 스스로 생각하는 민중에게 있지 말 잘 듣는 민중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철학은 주체성 속에서 가능하다. 그 주체성은 지금 나의 반성적 자각을 무시하고 얻어질 수 없다.

나의 반성적 자각은 나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나는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그렇다면 나의 반성적 자각도 지금 여기 있는 ‘나‘에게서 시작되어야 한다.

지금 여기 ‘나‘의 본질이 외부에서 강제되고 그 강제된 본질 속에서 구금된다면, 과연 그런 철헉아 ‘나‘의 철학이 될 수 있겠는가?

‘나는 나다‘라는 기본적인 명제 속에는 나의 개체성에 대한 긍정이 있다.

한 사람으로 역사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전체‘가 역사를 만든다. 민중 말이다.

그 민중에 대한 철학적 고민 없이 그 민중을 철학의 주체로 삼지 않으면서 단군 기원만을 찾아서는 진정 참된 한국철학을 할 수 없다.

자기 삶의 주인은 바로 자신이다.

민중 역시 스스로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구경꾼도 아니고 발전하는 역사 옆에서 시중을 드는 노예도 아니다.

권력자와 경제인이 역사의 중심인 곳에서 민중은 언제나 변두리다. 언제나 제삼자다.

그저 권력자와 경제인의 말에 의존하는 존재일 뿐이다. 과연 이것이 바른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민중이 자신의 역사를 스스로 만들어갈 것이며, 어떻게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겠는가?

천명이라며 순종하는 민중이 아니라 생각하는 민중으로, 스스로의 생각으로 자기 인생의 구경꾼이 아닌 주체가 되어야 한다. 생각하는 나! 그것이 가장 큰 희망이다.

한국철학은 한국을 구성하는 일부 계층만의 자기인식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한국 민중 전체의 자기 돌아봄의 행위여야 한다.

이 땅 민중의 언어로 이 땅 민중의 고난 가운데 깊어지는 그런 이 땅 민중의 반성적 사유 속에서 시작되는 것이어야만 한다.

모두 한국의 밖, 동굴의 밖을 보았다. 한국학이라고 하면서 한국이 얼마나 유럽적인 것을 품고 있는지 이야기하는 이들의 논의는 그리 큰 울림을 주지 못했다.

결국 진리의 기준은 ‘밖‘이고, ‘우리‘라는 이름의 ‘안‘은 변두리에서 ‘밖‘을 그리워하는 존재일 뿐이었다.

함석헌 철학의 시작은 ‘지금 여기의 긍정‘이다. 삶의 긍정이고 역사의 긍정이다. 바로 여기 무엇인가 끝없이 부족한 결핍의 공간에 대한 긍정이다.

함석헌은 외적 초월이 결국은 민중을 무시하는 데로 이어질 것임을 알았다.

내적 초월의 형이상학에서도 한국은 결핍의 공간이며, 결핍의 공간이어야 한다.

답이 ‘남‘에게 있다는 의미에서 결핍이 아니다.

어떤 하나의 답으로 채워진 강요된 공간이 아닌 빛이 빛으로 뜻을 품을 수 있는 공간이란 의미에서 비워진 공간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와 너를 마주할 수 있는 공간, 빛이 빛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란 의미에서 비워진 공간이다.

이런 공간에서 가장 우리다운 우리는 우리의 ‘밖‘ 본질에 답이 있지 않다. 우리 ‘안‘에 있다.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마주한 우리 자신은 우리 스스로 우리의 주인이 되려 하지 다른 주인을 찾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다운 ‘나‘가 되기 위해 나는 나의 ‘안‘에 충실하면 된다.

나다운 나가 되기 위해 나를 더욱 긍정하며 나의 살을 찢고 싹을 내야 한다.

고난을 이기고 희망을 ‘나‘의 안에서 내야 한다.

내적 초월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외부에서 나를 억누르는 그 억압의 존재론적 속박을 이기고 ‘나‘의 안에서 ‘나‘의 살을 찢고 안으로부터 희망의 싹을 내는 그 초월, 더욱 나다운 ‘나‘가 되기 위해 ‘나‘의 안에 더욱 충실한 바로 그런 의미에서의 초월이 내적 초월이다.

고난의 주체는 ‘우리‘이고 ‘나‘다. 그러면 그 고난으로 만들어진 ‘우리의 역사‘와 ‘나의 삶‘은 남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고 나의 것이 되어야 한다.

남의 답으로 지금 여기 ‘나‘와 ‘우리‘의 아픔을 치유할 수 없다.

고난의 주체인 ‘우리‘와 ‘나‘가 온전히 ‘우리‘와 ‘나‘의 철학에서 주체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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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역사 속에서 자기 주체성을 만들어낸 것이 이 땅의 민중이다.

그리고 고난 속에서‘나‘라는 인간의 주체성을 만든 것이 나란 존재다.

고난의 언어를 알지 못하는 철학은 이 땅 민중과 나에 대한 어떤 철학적 행위도 온전히 할 수 없다.

한다 해도 그것은 가짜 철학일 뿐이다. 진짜 철학은 이 땅 가득한 고난, 그 고난의 언어를 알아야 한다.

가만히 앉아 자해(自害)한 역사가 아니다.

수난의 역사, 당함의 역사, 억울함의 역사를 살았다.

정말 이 땅에서 이 땅 민중을 위한 철학을 하기 위해서는 그 고난의 역사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그 고난의 주체성 앞에 마주 서야 한다.

한국철학의 ‘회임‘과 ‘출산‘은 한국 사회의 부조리 속에서 가능했다.

낡은 시대의 고난 속에서 가능했다. 그 고난은 죽으라는 고난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새로운 것이 스스로 출산해내는 과정이다.

고난은 새로운 희망을 품은 공간이며, 진짜 한국철학은 바로 그 품은 공간에서 새로운 질서와 정신을 출산해냄으로 가능하다.

이 땅 민중의 ‘고난의 언어‘로 민중의 이성으로 치열하게 고민함으로 스스로 "너 자신을 알라"는 철학의 명령에 반응하는 진짜 한국철학은 바로 그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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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주체성은 자기반성으로 가능해진다.

그러나 반성과 돌아봄, 바로 그 회상은 나와 더불어 있는 ‘너‘없이는 불가능하다.

너를 만난 ‘나‘가 진짜 나이며, 너와의 시간과 공간이 비록 지난 일이라도 지난 일이 아닌 ‘나‘란 존재의 한 부분이 되어 있는 것이 바로 ‘나‘이다.

우리 가운데 ‘나‘는 ‘너‘와 더불어 존재하며, 너의 고난을 ‘남‘의 고난으로 두지 않고 ‘우리‘의 고난으로 두며, 고난 앞에서 더 깊게 ‘우리‘를 사유하게 한다.

우리가 한낱 ‘사유의 존재‘(ens rationis)가 아닌 ‘현실의 존재‘(ens reale)가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조건이 있을 때 가능하다. 그때 고난 앞에서 우리는 더욱더 단단해진다.

고난의 역사는 이어진다.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고난은 절망의 순간이 아니다. 아픔의 순간이고 슬픔의 순간이지만 절망의 순간이 아니다.

고난은 희망의 시작이다. 희망은 ‘나‘의 앞에 누군가를 ‘우리‘ 가운데 ‘너‘로 부르며 시작한다.

손잡고 나갈 이가 있다는 것에서 시작한다. ‘홀로 있는 나‘가 아닌 ‘더불어 있는 나‘가 되면서 시작한다.

역사 속 ‘나‘는 오직 홀로 있지 않다.

더욱 깊어지는 철학이란 그 슬픔 가운데 아파하는 이들의 슬픔, 그 슬픔 기억으로 아파하는 이들의 슬픔. 그 슬픔을 남의 슬픔으로 돌리지 않는 철학을 말한다.

‘남’의 슬픔이 아니라 ‘우리’ 안에 ‘너’의 슬픔으로 안아주는 철학이어야 한다. 이들을 안아주지 않는 철학 앞에서 민중은 ‘철학의 부재’ ‘생각의 부재’를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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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임시정부로 시작했다. 임시정부는 아직 있지 않은 나라의 정부다.

그들이 생각한 철학이 반영된, 아직 오지 않은 미래 국가를 위한 정부다.

아직 온전히 현실화되지 않은 가능성 속 국가에 대한 정부다.

그러나 그저 가능성으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3·1혁명을 통해 표출된 독립에 대한 민중의 요구로 일어난 정부다.

민중이 불러 세운 정부다. 지금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미래에 대한 정부다.

이렇게 생각하면 한국이란 국가가 임시정부에서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철학적이다.

한글은 소리 문자이기에 한글이 철학의 언어로 사용된다는 말은 민중의 언어 자체가 철학의 언어로 기능하게 되었다는 말이 된다.

서서히 한글 사용이 확대되면서 ‘나‘의 생각을 담은 ‘나‘의 말을 ‘나‘의 글로 적을 수 있게 되었다.

‘나‘의 글로 송사(訟事)를 하게 되고, 문학 활동도 이루어졌다. 당연히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고, 글이 민중 사이에 녹아들어가면서 서서히 민중의 생각이 민중의 글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글‘이 없는 민중은 ‘말‘이 없는 민중과 같다. 아무리 큰 소리로 ‘말‘해도 조선 전체를 울리지 못한다.

그러나 ‘글‘은 달랐다. ‘생각‘을 담은 ‘말‘을 기록한 ‘글‘은 조선 전체에 퍼져갔다.

이런 가운데 민중은 일종의 언어 공동체로서 자신들의 ‘하나 됨‘과 그 ‘하나 됨‘의 주체성을 자각하게 된다.

이런 자각은 스스로에 대한 존재 긍정으로 이어졌고, 존재를 긍정하게 된 민중은 부당함에 대해 자신의 방식으로 표현하게 되었다.

근본적으로 한국철학의 공간은 ‘민중‘이다. ‘민중의 고난‘은 한국철학을 가장 철학다워지게 만든다.

민중의 아픔이 있는 곳에서 철학은 ‘뜻‘있는 철학이 된다. 대학이 아니라, 바로 민중이다.

‘한국철학의 회임‘은 바로 여기에 있다. 《주교요지》와 같은 서학서로 본격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회임‘은 ‘평등의 희망을 품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한국철학의 회임‘은 ‘한국철학의 출산‘으로 이어졌다.

‘품은 희망‘이 현실의 절망 가운데 현실의 희망으로 드러난 것이다.

고난의 주체가 스스로 고난의 짐을 피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스스로의 철학으로 스스로의 존재를 결정하겠다고 하는 순간, 부조리한 권력자의 지배는 더 이상 당연한 것이 아니다.

비록 동학혁명군의 눈에 보이는 혁명은 실패했지만, 동학은 실패하지 않았다.

죽은 듯 죽지 않은 것, 죽어 보이지만 죽지 않은 것, 아니 있음으로 보이지만 있음으로 있는 것이 부활이다.

동학의 철학은 부활의 힘이었다. 동학의 철학은 자기 내어줌을 통해 3·1혁명의 이념이 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태동이 되고, 이후 한국 현대사 민중의 주체적 자각으로 일어난 수많은 순간의 기본 혈맥의 시작이 되었다.

희망을 ‘나‘의 밖이 아닌 ‘나‘의 안에서 구한 동학의 철학은 이와 같이 제대로 한국철학의 출발점이며, ‘한국철학의 출산‘이라 할 수 있다.

한국철학은 민중이 주체가 되어 민중의 고난 가운데 민중의 언어로 민중의 궁리로 이루어져가는 지혜의 사랑이다.

나는 나의 과거를 나의 기억에 근거해 스스로 복원해야 한다.

스스로 회상해내야 한다. 이것이 나라는 주체성의 초석이다.

무엇보다 나와 우리의 눈물이 시작이 되는 곳에서 나의 기억으로 스스로 돌아보는 주체성을 가진 철학이 되어야 한다.

아무리 슬픈 첫사랑이라도 스스로 기억해야 한다. 스스로!

그때 나와 나의 그 연인은 죽지 않고 지금 이 순간 나란 존재의 조각이 된다.

힘들어도 스스로 돌아보아야 한다. 그것이 나란 주체성의 정당한 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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