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으로 갈라디아서 5장과 6장은 1-4장의 신학적 논증과 분명히 구분되는 윤리적 권면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최근 갈라디아서 연구자들은 이 두 부분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1-4장의 농도 짙은 신학적 서술이 5-6장의 윤리 지침에 토대를 제공하고, 이 윤리 지침은 신학적 사실을 실제적인 삶 가운데 구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일상적 삶은 복음을 통해 변화된 자신의 정체성을 다른 사람이 쉽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공적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5:1은 바로 전 단락의 결론이자 새로운 권면을 시작하는 이중의 기능을 수행한다. 첫 두 절(5:1-2)은 할례와 노예를 연결한 이전의 논증을 더 강화한다.

5:2은 갈라디아의 예수 따르미들에게 심사숙고하고 유용한 선택을 하라는 권면의 효과를 가진다

유익, 그것도 그리스도가 주시는 유익을 제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행동은 어리석다.

이어지는 3-4절에서 바울은 할례를 포함한 율법의 행위들을 받아들이려는 갈라디아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점층법을 사용한다.

먼저 바울은 할례받는 사람은 율법을 전체적으로 준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면서 한껏 부담감을 준 다음, 4절에서는 무시무시한 경고를 덧붙여 청자를 극도로 두렵고 부담스럽게 만든다.

바울은 유익과 의무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쉬운 선택지를 갈라디아인 앞에 제시하고 있다. 두 단어는 발음은 비슷하지만, 그 의미는 정반대이다.

은혜에서 떨어져 나간 상황은 하나님과 분리되고 그분의 부르심에서 이탈한 상태이다. 복음 안에서 받은 복이 모두 취소된 것이다.

칭의는 현재가 아닌 미래에 있고, 따라서 그러한 미래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에게서 분리’될 가능성은 상존한다.

5:6은 갈라디아서 전체의 내용을 압축해 담고 있다. 할례를 받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이미 했기 때문에 할례받는 것이 아무 효력이 없다는 결론은 쉽게 가능하다. 이 구절에서 흥미로운 점은 ‘할례받지 않는 것도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 효력이 없다’고 하는 주장이다.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은 바로 이 지점에서 곤경에 빠진다. ‘새 관점’ 학자들은 바울이 ‘율법의 행위들’에 반대한 이유를 유대민족 중심주의 혹은 유대인 언약 우월의식에서 찾기 때문이다. 할례받지 않는 것도 의미 없다는 바울의 선언은 유대민족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도출될 수 없다.

할례나 무할례 모두 ‘새 관점 학파’처럼 민족적 가치로 환원해서 해석하기보다는 인간이 구축한 가치 체계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러한 기존 가치 체계의 철저한 부정은, 당시 스토아 철학에서도 볼 수 있듯, 지고至高의 가치가 뚜렷할 때 가능하다

최고의 가치는 그 외의 모든 가치를 상대화한다

바울은 이 지고의 가치를 "사랑을 통해 효력을 드러내는 피스티스"라고 말한다

신앙과 행위는 일치해야 한다.

믿음에 부응하는 행동만이 지고의 가치를 지닌다

바울은 선한 행위 일반을 가리키지 않고 ‘사랑’이라는 행위를 특정해 부각한다.

‘그리스도-사건’이 자신을 내어 주신 예수의 사랑이자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면(1:4, 2:20), 이 사랑을 받은 신자가 사랑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진리에 순종하는 것이 예수 따르미가 삶으로 구현해야 할 모습인데(안디옥 사건에서 게바가 복음의 진리를 향해 바르게 걷지 않았다고 바울이 책망한 것을 기억하라), 바울의 적대자들은 갈라디아인이 진리에 순종하는 것을 방해했다.

그리스도인이 행해야 할 핵심을 방해했으니 이 적대자들은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 이것이 5:8-10에서 바울이 하는 말이다.

5:1이 4장의 끝마무리를 다시 명확하게 했다면, 5:13은 ‘부르심’과 ‘자유’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앞의 논증 전체와 이 단락과의 관계를 단단하게 엮는 역할을 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그토록 빨리 저버린"(1:6) 갈라디아인들의 결정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그들을 진정한 자유로 이끈다는 점을 놓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노예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다(3:24-25, 4:9, 22-31).

5:13의 내용 중 현대 독자들의 피부에 확 와닿지 않는 것이 있다. 바울이 살던 시대는 명예의 획득과 유지가 오늘날 21세기 사회의 돈에 맞먹는, 가치 추구의 대상이었다.

바울은 명예라는 당시 최고의 가치에 도전하며 그것을 해체하고 완전히 새롭게 정의한다.

모두 그리스도의 선물이라는 최고의 가치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노예는 당시 가장 수치스러운 신분, 즉 명예와 대척점에 있는 것인데,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이자 아브라함의(진정한) 후손이라는 최고의 명예를 획득한 갈라디아인에게 노예 노릇 하라고 권면한다!

당시 사람들이 듣기에는 너무나 거북하고 충격적인 가르침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회 전복적 삶에 대한 가르침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충격량을 잃었다는 사실이 애통하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4장에서 주로 복음을 통해 새롭게 형성된 신자의 정체성을 다루었고, 이제부터는 그 정체성이 개인의 삶과 공동체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현되어야 하는가를 말한다.

자유로운 사람이자 아브라함의 자녀라는 정체성은 자연스레 삶의 모습에서 나타나기 마련이다.

마치 빛이 그 본성상 외부로 발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신자의 믿음은 그 사람의 행동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새로운 정체성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삶의 방식을 바울이 ‘사랑’으로 압축해 표현했음을 우리는 이미 보았다(5:6).

사랑이 무엇일까? 15절 이하를 보면, ‘육신에서 기인하는 일체의 행동’에서 멀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이 말하는 "사랑으로 효력을 드러내는 피스티스"(5:6)는 타인에게 종노릇하면서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제한하고(5:13), 자신을 아끼는 만큼 타인을 아끼며(5:14), 육신의 열매를 맺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5:19-20).

부족하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을까? 바로 ‘영의 일들’을 해야 한다

5장의 많은 문장이 명령법으로 표현되어 있다. 5:5을 해설할 때 ‘영으로’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5:16부터 바울은 ‘영으로(πνε?ματι)’라는 단어를 빈번하게 사용한다. "영으로 걸어가는(살아가는)" 삶이 참 인간이 영위해야 할 삶이다.

바울에게 욕망의 제어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욕망은 5:13의 ‘육신의 기회’라는 표현을 연상시킨다.

"영에 이끌린다면"(5:18) 영의 열매를 맺게 되고, 이 영의 열매들 안에 "자기 통제"가 있으므로(5:23) 육신이 "욕망하는" 것(5:17)을 제어할 수 있다.

영에 이끌려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현주소이기 때문에 바울은 13절과 16절에서 명령법을 사용한다. 5:24-25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주제에 대한 더 깊은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십자가 처형이라는 주제는 2:19과 3:12에 이미 나온 적이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 처형을 당한 신자는(2:19)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고(2:20),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정욕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만들어진 인간은 욕망을 죽이는 열매를 맺는다.

신앙과 행동은 하나다. 그러나 신자가 손 놓고 있으면 이러한 욕망의 제어를 실현할 수 없다.

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사실기술事實記述이다.

복음 안에서 주어진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정체성은 신학적으로 볼 때 이미 이루어진 사실이지만, 너무 급작스럽고 세상의 이해를 뛰어넘는 것이어서 신자 자신도 충분히 깨닫고 체현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바울은 평서문과 명령문을 동시에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성령이 더 많이 활동할수록 사람의 의지는 더 고무되어 모든 일을 충분하게 생각하고, 자유로운 의사 결정을 내리며, 고된 노력으로만 얻을 수 있는 훌륭한 생활 습관을 개발하고, 반대로 나쁜 습관, 때로는 강요된 것이 명백한 죽음의 습관을 제거하게 된다.

진정한 자유는 성령의 선물이며 … 여기서 자유란, 노예 상태에서 책임의 상태로 해방되는 것으로, 마침내 스스로 도덕적인 근육을 선택하여 훈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도 그 일을 하고 있으며 성령도 그 안에서 행하고 있음을 알게 되며, 내가 하는 그 일을 하나님 자신이 하고 계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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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을 그대로 보여주세요. 내 몸이 머물렀던 공간, 시간, 대화, 움직임을 따라가며 써주세요. 그러면 글이 입체적으로 살아 숨 쉬어요. - P116

읽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자리를 이탈해 글을 쓰는 나의 자리로 옮겨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써보는 거예요. - P116

상황을 뭉뚱그리지 않아야 나도 글을 쓰면서 그때의 나와 타자를 이해하거나, 위로하거나, 정확한 대상을 향해 분노할 수 있어요. - P116

나는 글의 고유성과 힘은 문장력 이전에 서사와 질문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 P117

내 표현이 누구에게 향하는지, 누구의 얼굴을 지우는지, 그 표현으로 누가 사회적 공간에서 밀려나는지 살펴야 한다. - P174

그렇지 않으면 편견에 휩싸여 소중한 존재에게 "그러다가 너 맘충돼"라거나 "너 된장녀 같아"라고 말하는 무지한 폭력을 행사할 수 있으니까. - P174

비문이나 맞춤법은 수정하면 그만이지만, 차별적인 언어는 누군가의 상처를 찌르고 눈물샘을 건드린다.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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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3장에서 여러 가지 이유를 들면서 율법을 폄하하는데, 그가 제시하는 이유 사이에 긴밀한 연관성이나 일관성이 없다.

대신 율법에 대한 그의 견해는 살아 움직이는 동물처럼 상황에 적응하는 역동성을 가지고 있다.

현대의 바울 해석자들은 대개 바울이 논쟁이나 논증을 할 때 당대의 유다이즘을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제시했을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는 고대인들이 치열한 논쟁 상황에 있을 때 활용하는 수사 기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저지르는 실수이다.

바울은 필요하다면 여느 고대인과 마찬가지로 사실을 왜곡할 수도 있었다. 그가 유대인들의 믿음과 율법 이해를 공정하게 제시했을 것이라는 추정은 너무 순진하다.

사회의 모든 구별이 그리스도 안에서 철폐된다는 선언처럼 들리는 3:27-28은 현대인이 듣기에 매우 놀라운 내용이지만, 사실 그 핵심은 다른 곳에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세운 모든 가치 체계와 분류를 무시하신다는 말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을 규정짓는 정체성은 그리스도뿐이라는 말이다.

‘율법의 행위들’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말이다.

유대인으로 태어났느냐, 이방인으로 태어났느냐는 하나님의 눈에 중요하지 않다. 바울은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의 동등성을 다시 한 번 말하는 것이다.

‘약속에 따른 아브라함의 자녀’는 하나님께서 갈라디아에 있는 예수 따르미들에게 주신 새로운 정체성이다.

4장에서 특히 강조되는 점은 ‘아브라함의 진정한 후손’은 자유로운 신분의 소유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영(πνε?μα)을 통해 새롭게 창조하시고(3:2-5, 6:15 참고) 자유롭게 하신 이들이 누리는 자유를 강압적으로 빼앗는 행위는 하나님의 업적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2:3, 14 참고).

결국 갈라디아 신자들이 깊이 자각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사건’을 통해 새롭게 탄생한 자아(‘하나님의 입양아’)의 눈으로 율법의 무능력과 한시성을 직시하며 이전의 허탄한 종교생활로 되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실內住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바울이 정교한 논리나 객관적 증거에 의지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율법 아래 사는 삶을 부정적으로 묘사한다는 점이다.

바울의 주장은 논리적 설득이 아니라 청중의 감정에 호소하는 파토스의 수사학에 의지하고 있다

이방인인 갈라디아인들 역시 바울의 사라와 하갈 이야기 재해석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본문의 요지와 바울의 주장에 담긴 목적을 알 수 있다.

‘하갈이 현재의 예루살렘과 같고 이 예루살렘이 노예의 상황에 있다’는 말은 논리적 근거와 경험적 근거가 미비하지만, 청중에게 충격을 주기에는 충분한 단언이다.

바울의 사라와 하갈 해석이 갈라디아서 전반에 흐르는 감정에 호소하는 설득 노력 안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울은 본문의 단순한 스토리에 몇 가지 알레고리의 겹을 쌓으며 이해하기 어려운 논증을 편다. 그의 재해석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바울은 4:21에서 사라와 하갈 이야기 재해석의 청자를 "율법 아래 있기 원하는 사람들"로 한정한다. 그들은 율법이 말하는 바를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있다.

그의 대적자들과 ‘율법의 행위들’을 받아들이는 갈라디아인들이 율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난으로 볼 수 있다.

바울의 급진적 해석은 노예와 자유인이라는 대조를 골격으로 하고, 이 대조는 육체와 약속의 대립 관계로 이어진다.

‘내 목적과 이익에 적합한’ 해석을 가능한 한 다 끌어다 사용하고, 심지어 문서에 없는 내용까지 추가하면서도, ‘내 이익에 반하는 본문’은 언급하지 않는 모습은 그리스-로마 세계의 사람들과 고대 유대인들의 문헌 해석에서 자주 볼 수 있다.

구멍이 많은 바울의 ‘다시 이야기하기’는 사실 그리스-로마 시대의 수사학자들이 알레고리의 장점으로 꼽은 요소를 가지고 있다.

키케로Cicero는 "명확한 것들을 뛰어넘으며 말이 안 될 정도의 억지스러운 것들을 택하는 것"이 청중으로 하여금 더욱 이야기에 집중하게 만들 뿐 아니라 그들의 감정과 상상력을 자극한다고 말했다(deoratore, 3.160).

구멍을 메우도록 청중의 상상력을 북돋우면 청중은 즐거움이나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데메트리우스Demetrius는 알레고리가 특히 청중에게 ‘위협’을 가할 때 유용하다는 점을 지적했다(OnStyle, 99).

해석의 여지가 열려 있어 두려움이나 경외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의 알레고리 사용은 지금껏 우리가 관찰해온, 반복되는 저주 모티프와 두려움을 자극하는 설득의 기술 사용과 일맥상통하며, 바로 그 맥락 안에서만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새롭고 진정한 생명의 탄생은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라는 난해한 표현 역시 신자들의 정체성이 하나님 존재 자체와 그분의 행동에 달려 있음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결국 갈라디아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면서 그들을 종으로 만들려는 바울의 적대자들과 그 동조자들을 공동체에서 쫓아내라는 매우 강력한 권고인 셈이다. 무려 ‘성서’의 명령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자신들의 정체성을 바로 깨닫고 더 이상 신이 아닌 것들에 노예 노릇 하는 것을 그만두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박해하는 이들’을 공동체에서 내쫓는 일이다.

하나님의 자녀이자 자유로운 신분의 소유자라는 정체성은 지고의 명예이다.

늘 그렇듯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망각하기 쉬우므로 바울은 기억을 되살리며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그렇게 살라Bewhatyoualreadyare!’고 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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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실천의 적지 않은 기능과 가치에도 불구하고 결국 글은, 혹은 글쓰기는 삶의 결핍과 어긋남을 드러내는 표식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 P7

우리가 쓰고 있는 논문은 다른 여러 형태의 글과 공정한 경쟁관계에 있지 않다. 이미 우리에게 하나의 강박으로 군림하고 있는 논문은, 글을 쓰는 학자의 삶과 경험 그리고 표현하고 전달하려는 대상의 성격과 층위에 따라서 주체적이고 탄력성 있게 ‘선택‘되는 것이 아니다. - P28

논문이 우리 의식세계를 지배하는 하나의 강박증으로 나타나는 것은 바로 이 허위의식이 명백한 병증으로 진전되었다는 증거로 봐야 한다. - P33

의식과 언어의 관계는 일단 특정 시대와 장소의 문화사적 역학에 따라서 다양하게 해석될 것이며, 어느 한쪽이 다른 쪽에 일방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통제한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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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그들이 바울 복음과 다른 메시지를 전했으므로 저주의 대상임을 암시하는(1:8-9) 동시에 ‘사악한 눈’의 저주를 내리는 자들이라고 묘사함으로써 갈라디아인의 두려움을 건드려, ‘할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불신하도록 유도한다.

그에게 ‘영’은 하나님의 힘을 드러나게 하는 매개체이기도 하고, 인간 안에 내주하며 인간을 변화시키는 주체이기도 하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아주 대담한 주장을 한다. 즉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 바로 ‘영’이라는 것이다. 오경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갈라디아인이 도저히 부인하려 해도 부인할 수 없는 경험은, 그들이 듣고 믿어서 ‘영’을 받았다는 것이며,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서 기적을 행하셨다는 것이다.

결국 ‘영’으로 시작한 갈라디아인의 새로운 삶은 ‘영’ 안에서 영위되어야 하고 ‘영’으로 마쳐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그들이 몸에 흔적을 남기는 할례와 같이 ‘육’에 의지하는 것은 틀렸다고 바울은 지적하는 것이다.

3장과 4장을 아우르는 뚜렷한 주제는 ‘누가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인가’라는 질문과 연결되어 있다. 3:7에서 바울은 "피스티스에서 비롯된 사람들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못을 박는다.

바울은 신명기를 인용하면서 "책에 기록된"이라는 살짝 다른 표현을 덧붙이지만, 율법을 지키는 사람의 행위 자체보다는 의도와 목적이 중요하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따라서 이 구절을 율법의 완벽한 준수 없이는 모두 저주에 떨어진다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으며, 이는 당대 유다이즘의 보편적 신념을 통해서도 확증될 수 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쓴 이유는 갈라디아 신자들을설득하기 위해서였다. 설득에 있어 사람의 감정, 특히 두려움을 자극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 본문을 해석할 때 바울의 논증이 지니는 정합성 자체보다는 바울이 청중에게 영향을 끼치려는 의도에 집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갈라디아에 있는 바울의 적대자들의 정체를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유대인 출신 예수 따르미이자 선교사들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바울은 이미 자신이 개진한 저주 모티프를 이어가면서, ‘율법의 행위들’을 받아들이려는 갈라디아인들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려고 가장 적절한 구절을 인용했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복에 대해 ‘영의 약속을 피스티스를 통해 받는 것’이라고 새롭게 정의한다.

창세기에 나오지 않는 바울만의 새로운 해석이다. ‘영의 약속’은 ‘약속, 곧 영’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이 곧 ‘영을 받음’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사건’을 고대의 묶는 주술에서 자주 쓰인 ‘주다’라는 동사를 사용해 표현한 점(1:4), 이중으로 저주 걸기(1:8-9), 안디옥 사건에서 게바가 정죄당한 일(2:11), 그리고 바울의 적대자들을 악한 주술사로 묘사한 것(3:1)이 차곡차곡 쌓인 가운데 3:10에 이르렀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저주 모티프는 갈라디아 청중의 두려움을 겨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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