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적 목사는시인이다. 성 요한은 기독교 교회의 첫 주요 시인이었다. 그는 새로운 방식으로 말을 사용해서 우리 눈앞에서 진리를 만들어내고(그리스어로 시인을 뜻하는 poetes는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우리 귀에 새로운 울림을 준다

목사가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은 목회에 매우 중요하다.

기독교 복음은 언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이 창조 세계를 있게 하셨다

우리 구세주는 육신이 되신 말씀이시다

시인은 정보 전달이 우선 목적이 아니라 관계를만들고, 아름다움을이루고, 진리를형성하기 위해 말을 사용하는 사람이다

내 말은 모든 목사가 시를 쓰거나 운을 맞춰 말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존경심으로 말을 대하고, 하나님 말씀뿐 아니라 평범한 말 앞에서도 경외심을 가지고, 언어에도 거룩함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목사의 임무는 복음 앞에서 기도의 상상력을 형성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서 계시된 이 하나님은 너무도 크고 에너지로 가득 차 있는 반면, 믿고 사랑하고 소망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너무 위축되어 있어서 능력 있는 그 말을 듣고, 활력 넘치는 그 이미지를 보려면 도움이 필요하다.

성경을 해석하는 책임을 맡은 목사들이 시에 그토록 무관심한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성경의 많은 부분이 시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말이다.

기독교 공동체 전체가 시를 재발견해야 하고, 목사는 그 일에 앞장서야 한다.

시는 목회 소명의 본질이다. 왜냐하면 시는 근원적인 언어이기 때문이다

말은 창조적이다. 인지, 관계, 신앙 등 전에는 없던 것들을 존재하게 한다

침묵의 심연에서 소리가 형성된다.

사람들은 전에 듣지 못했던 것을 듣고 그 소리 때문에 외로움이 사랑으로 변한다. 텅 빈 심연에서 은유를 통해 그림이 형성된다

사람들은 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보고 그 이미지 때문에 익명에서 사랑으로 변한다

말은 창조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한다. 우리의 말은 그 창조에 참여할 수 있다.

산문으로 몇 년간 이야기하다보면 우리의 말은 진부해져버린다.

그때 묵시는 우리의 말을 멈추게 한다.

믿음을 창조하는 말의 능력, 악의 합리주의에 저항하는 상상력의 힘, 예배와 증언을 통해 인격적으로 말하고 들을 사람을 만들어낼 필요성이 우리를 멈추게 한다.

묵시의 긴박함은 언어의 뿌리까지 흔들고 우리는 시인이 된다. 핵심 언어, 인격적 언어, 성경적 언어에 주의를 집중하게 된다.

같다. 목사가 말로 해야 하는 일은 의사소통이 아니라 교제다.

단순히 진리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만드는 말. 전례와 이야기와 노래와 기도는 시인인 목사들이 하는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도와 비유는 전복적 목사의 밑천이다. 조용한(혹은 시끄러운) 골방 기도 생활을 통해 모든 인간의 마음과 계속해서 씨름하시는, 거룩함의 대결을 벌이시는 성령과 동반자 관계가 된다.

비유는 거짓된 진부함을 넘어서 그리스도의 진리로 인간의 정신을 침범하고 의식을 바꾼다.

우리가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과 우리가 비유를 들려주는 사람들은 자신의 돈과 야망으로 이 세상이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도록 유혹을 받고 있다

이 세상의 진짜 일은 말이 다 한다. 하나님과 함께한 기도의 말, 사람들과 함께한 비유의 말. 말과 성례전, 비유와 기도가 무대 뒤에서 벌이는 일이 유혹받은 세상을 전복한다.

아무도 그 일로 돈을 받지도 않고 알아보는 사람도 거의 없지만 구원의 세상을 만들어내는 의미와 가치와 목적, 사랑과 희망과 믿음의 세상, 짧게 말해서 하나님나라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묵시적이라는 단어에는 야생적 울림이 있다. 종말의 광란, 재난 같은 긴박감이 있다.

목사는 위로가 되는 단어다. 어두운 그늘에서 덜덜 떨고 있을 때 자신 있게 시편 23편을 인용하는 사람. 목사는 하나님을 조용히 경배하도록 우리를 불러모은다

목사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신실함과 사랑을 대변하고 일요일마다 제시간에 나타나 하나님이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신다고 다시 말해준다.

목사는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 방황하는 발을 인도해 다시 길을 가게 한다

목사라는 단어는 안전과 축복, 연대와 평화를 계속해서 연상시킨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새 시대를 열었다고 믿었다. 그들은 보이는 것과는 달리 실제로는 하나님나라에서, 진리와 치유와 은혜의 나라에서 살고 있었다. 이것은 실재이지만 믿지 않는 눈은 볼 수 없고 믿지 않는 귀는 들을 수 없다.

목사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현재 보이는 세상과는 다른 이러한 하나님나라의 실재를 반복해서 강조하는 사람이고, 따라서 묵시적일 수밖에 없다

묵시는 방화다. 상상력에 몰래 불을 붙여서 비만한 문화 종교의 지방을 태우고 깨끗한 복음의 사랑, 순수한 복음의 희망, 정화된 복음의 믿음을 가져온다.

방법은 바로 이것이다. 내 상상력을 성 요한의 묵시, 즉 종말의 위기와 하나님이라는 긴박함의 결합에 굴복시키고 묵시의 에너지가 나를 목사로 정의하고 규정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목사로서 내 인생은 기도와 시와 인내로 단순해진다.

묵시적 목사는기도한다. 성 요한의 목회 소명은 그의 무릎에서 나왔다

그는 기도 행위를 자기 일의 축으로 삼고, 모든 사람의 일에서도 그것이 축임을 보여주었다

목사가 하는 일이 다른 그리스도인이 하는 일과 다를 바는 없지만, 때로는 더 집중적이고 가시적이다. 기도는 기독교 공동체의 축이 되는 행위이다.

고대의 성경도 현재의 사건도 자신에게 오는 대로 그냥 받아들이지 않고 전부 기도로 바꾼다.

성 요한은 성령이라는 보이지 않는 세계와 로마시대라는 보이는 세계의 경계에서 산다. 그 경계에서 그는 기도한다. 기도는 이 두 실재를 연결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장소와 우리를 찾고 계시는 하나님을 생생하게 연결한다.

묵시에 대한 의식은 그러한 메시아적 목회에 경고의 호루라기를 분다.

묵시를 조금이라도 인식하고 있다면, 인부들을 데려와서 집 정원의 도덕적(혹은 비도덕적) 일부분을 손보려는 쾌활한 현장 감독처럼 행동할 수는 없다.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침입했고, 우리는 그 하나님을 상대해야 한다.

기도는 우리가 인간으로서 하는 가장 철저한현재적 행위이며 가장 열정적 행위다.

기도는 이제 막 지나간 과거와 이제 곧 올 미래를 연결하여 유연하고 살아 있는 관절을 만든다.

아멘은 이제 막 일어난 일을 모아 이제 일어날 일의 마라타나 안으로 들어가게 하고 축복의 기도를 낳는다.

우리는 하나님께 집중하고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께 집중하도록 지도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집중하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생활수준이나 자기 이미지, 혹은 이 세상에 흔적을 남기고픈 열정에 집중하기를 원한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묵시는 실재에 틈새를 낸다. 이 실재는 하나님이다. 그 앞에서 예배하든 도망가든 할 수 있을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내가 전복적 존재임을 기억한다. 나의 장기적 효율성은 내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를 들키지 않는 데 달려 있다.

나는 새로운 방법론을 배워야 했다. 진리를 말하는 것, 사랑하는 것, 기도와 비유를 배워야 했다

자아의 나라는 강력하게 방어진을 치고 있는 영토다.

대부분의 죄는 단순한 도덕적 과오이거나 나약한 의지가 아니라, 비싼 비용을 들여 열심히 세운, 하나님을 막는 방어벽이다.

죄를 직접 가격하는 것은 마치 망치로 못을 박는 것과 같다. 못은 더 깊숙이 박힐 뿐이다.

때로 예외도 있고, 전략적으로 지시된 대결도 있지만, 성경이 선호하는 방법은 간접적인 조치다.

예수님은 체제 전복의 대가이셨다.

랍비는 중요한 존재이지만 아무 일도 일으키지 않는다.

예수님이 가장 좋아하셨던 연설 형식인 비유도 전복적이었다. 비유는 평범한 이야기로 들린다.

비유는 전복적으로 우리의 방어벽을 슬쩍 넘어 들어간다. 그러나 일단 성 안으로 들어오면 방법이 달라져서 갑자기 총검을 휘두르고 결국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우리 예상과는 달리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의 인격이 존중되고 보존된다. 하나님은 밖에서 강제로 자신의 실재를 우리에게 부과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안에서부터 꽃과 과일을 길러내신다.

하나님의 진리는 외부의 침입이 아니라 사랑에 찬 구애이다.

평범한 우리 생활은 그 나라에서 잉태와 성장과 성숙을 이루는 씨앗이다.

비유는 우리의 상상력을 신뢰한다

전복은 세 가지를 함의한다. 하나는 현재 상황이 잘못되었고 그것을 타도해야 이 세상이 살만해진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너무 심하게 잘못되었기 때문에 보수는 소용이 없다.

둘째, 살만한 다른 세상이 태어나려 하고 있다.

전복자는 이상주의적 꿈이 아니라, 실제 세상의 본질에 대한 확신에 따라 행동한다.

셋째, 군사력이나 민주적 선거처럼 한 나라가 타도되고 다른 나라가 세워지는 일반적 방법은 쓸 수 없다.

예수님은 진리이면서 동시에 길이시다. 복음이 전달되는 방법도 제시되는 진리와 마찬가지로 그 나라의 한 부분이다.

불행히도 목사들은 전복이라고 하는, 끊어진 적이 없는 이 성경적 방법론을 손쉽게 폐기하고 대신에 공격이나 선전을 택할 때가 많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럴 수 있는데, 바로 허영과 순진함이다.

허영. 우리는 잔치가 열리는 세상에서 짝도 없이 한쪽 구석에 서 있고 싶지 않다

순진함. 우리는 교회를 이미 하나님나라로 생각하고 더 잘 조직하고 동기부여만 잘하면 이 세상을 정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성경이나 역사 그 어디에도 교회가 하나님나라와 동의어였던 적은 없다.

교회는 많은 경우 세상보다 더 세상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욥기의 맨 처음에 욥이라는 사람을 어떤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는가가 핵심입니다. - P92

욥기 1장 1절은 그를 "온전"하고 "정직"한 사람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고 "악에서 떠난" 사람이라고 정의합니다. - P92

욥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이 네 가지 표현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욥은 잠언이 이야기하는 지혜를 정확히 구현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 P92

반성적 지혜가 다루는 가장 중요한 주제는 ‘의로운 자의 고난‘(innocent suffering)입니다. - P95

이 주제를 다룰 때 절대 흔들려서는 안 되는 대전제는 바로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고난을 받을 만한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 P95

하나님은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여기서 사탄은 역으로 질문합니다. 인간은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냐고. - P100

하나님에 대한 욥의 경외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재물 때문이니 재물을 빼앗으면 욥이 하나님을 경외할 이유가 없어질 거라는 논리입니다. - P100

"당신은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이 바로 욥기가 독자들에게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 P100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1장 12절 역시,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불행과 고통 또한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 P102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악의 세력에게 고통의 원인을 전가하는 것은 욥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닙니다. - P102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규범적 지혜의 인과응보의 원리대로 모든 것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비판,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보상을 초월한다는 신앙은 욥기의 핵심입니다. - P103

주시는 분이 거두시기도 하며, 좋은 것을 줄 수도 나쁜 것을 줄 수도 있다고 말입니다. - P109

하나님의 주권에는 이유가 없습니다("까닭 없이"). 마찬가지로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에도 이유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욥기의 반성적 지혜가 주는 가르침입니다. - P109

인간의 행동이 신의 운행 원리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 P10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학은 어떻게 신앙을 더 깊게 만드는가 - 시와 소설과 그리스도인
이정일 지음 / 예책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문학의 핵심은 문학, 역사, 철학이라 할 것이다. 문학이 첫 번째로 나오지만, 우선으로 두기가 힘들었다. 아마 조급함이 가장 큰 이유인 듯. 


사람마다 편차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문학을 읽으면 다른 장르에 비해 시간과 에너지가 몇 배나 더 든다. 그 장르에 대한 앎이 적어서다. 더불어 섬세한 문장을 좀처럼 지나칠 수가 없어서다. 


저자는 문학이 가진 힘을 말한다. 더하여 문학과 신앙의 관계를 설명한다. 문학이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성숙시켜갈 수 있는지를 주장한다.


언뜻 보면 연관되지 않는 두 가지 영역을 연결할 때의 불편함이 있다. 하지만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강요하지 않는다. 문학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문학으로 풀어간다. 그리스도인이 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문학이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될지 설득한다.


신과 인간, 세상에 대한 질문은 신학과 문학의 공통된 물음일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풀어내고 대답하는지가 다를 뿐. 굳이 나누자면 문학은 조금 더 인간과 세상의 소소한 물음에 답한다는 것.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이 문학을 통해 더욱 섬세하게 인간과 세상을 알아야 한다는 것. 


시종일관 따뜻하다. 그러면서도 날카롭다. 매우 예리하다. 문장 하나를 허투루 쓰지 않았다. 여러 문학 작품을 오가며 우리의 마음을 두드린다.


그의 마지막 외침은 매우 무겁게 가슴에 와 닿는다.


우리는 성경을 읽지만, 성경도 우리를 읽어야 한다. 이것을 놓치면 성경을 읽으면서 늘 교훈만 찾게 된다. 우리에게 영성도 필요하지만 감성도 필요하다. 사회적 지탄을 받는 사람들이 부족한 것은 감성이지, 영성이 아니다.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자신과 타인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문학은 그것을 읽는 법을 가르쳐 준다. 문학은 허구적 인물을 통해 우리 각자가 자신의 영혼을 보게 한다. 그래서 이야기는 나와 세상을 보는 눈을 열어 준다(36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