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네카의 화 다스리기 메이트북스 클래식 4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지음, 강현규 엮음, 정윤희 옮김 / 메이트북스 / 2019년 4월
평점 :
절판



고대 로마 제국시대의 정치인이자 철학자이며, 문학자인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B.C 4 ~ A.D 65)의 글.



세네카는 스토아학파의 대가 중 하나로, 

자신의 철학과 삶을 일치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이 책은 그의 동생 노바투스에서 서간문 형태로 보낸 글.

화에 대해 거의 모든 것을 다루고 있다.



세네카에 의하면, 화는 본질적으로 불필요하다.

그는 화라는 감정의 실체를 명확하게 이해해야 함을 역설한다.



3장과 4장에서는 그러한 화로부터 벗어나는 법과

화를 억제하고 다스리는 실제적 방법을 다룬다.



이 책을 통해 '화'를 이해하고, 그 감정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과 대안을 익힐 수 있다.



더불어 고대의 철학자로부터 

삶의 본질과 핵심에 다가갈 수 있는 자세를 배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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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라고 다른 이가 좀 시끄럽게 굴었다고 해서 죄인 취급을 한단 말인가?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적을 용서한 바 있다. 다소 게으르고 조심성이 없고 말수가 많다고 해서 용서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 P200

우리를 화나게 만들고 자극하는 사람을 못 본 척 넘어가는 사람은 언제라도 사람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꿋꿋한 태도로 버텨낸다. 엄청난 타격을 받아도 미동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위대함이다. - P202

지금 우리가 살아 숨 쉬고 있는 소중한 시간들은 얼마 후면 사라질 것이다. 그때까지 최대한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 타인을 위협하거나 공포를 느끼게 해서는 안 된다. - P239

엄청난 손해를 입거나 부당한 일을 겪더라도, 경멸을 당하고 비웃음을 듣더라도 덧없는 인생사를 초월해 인내하자. 세상사에 휘둘려 살다 보면 어느새 우리 앞에 죽음이 다가와 있을 테니까.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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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게 복수를 하려다가 오히려 자기 마음에 상처를 얻게 마련이다. 정말 위대하고 고귀한 사람들은 거대한 맹수와 같아서 작은 강아지들이 짖어대는 소리에 미동도 하지 않는다. - P155

고결한 영혼은 악행에 쉽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당신에게 해를 가한 사람이 당신보다 강할 수도 있고 약할 수도 있다. 만약 상대가 약하다면 용서를 베풀고 상대가 강하다면 스스로를 다스려라.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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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에서 전도서는 신약의 빈 무덤에 해당한다. 빈 무덤, 정경의 복음서들이 한 목소리로 부활을 이해하는 데에 필수적이라고 말하는 이야기는 위대한 ‘아니오’의 경험이다.

이것은 사실 인간이 할 필요 없는, 사실 할 수 없는 일을 표상한다.

나는 하나님을 돌볼 필요가 없다. 그분은 스스로 돌보신다

나는 그분을 관리하거나 방어하거나 그분께 다음에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말할 필요가 없다.

그 말은 곧 이제 나는 집으로 가 내가 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명령을 받은 일을 하기만 하면 된다는 뜻이다.

목회자가 함께 일하는 사람들(그리고 목회자 자신 역시 예외가 아니다)은 전혀 복음의 일부가 아닌 도덕적이며 종교적 짐을 엄청나게 많이 짊어지고 다닌다

우리는 신앙에 관해 매우 열심히 노력한다. 그것에 대해 번민한다. 그것과 씨름한다. 우리는 그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이를 악문다. 빈 무덤은 그런 태도에 반대하는 순간이다.

거짓된 겸손한 태도로 하나님을 대하며 그분을 마치 우리가 돌보아야 할 사람인 것처럼 취급하는 종교적 지도자들이 너무나도 많다. 우리가 하는 일이 그분의 유효성을 결정한다고 생각하며, 그런 태도가 창조주 앞에 조아리는 피조물의 자세가 아니라 우상을 대하는 이방인의 모습임을 깨닫지 못한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까지 예수님은 권위 있는 치유와 가르침으로 확실히 모든 것을 통제하셨다. 그러나 십자가 죽음은 너무나 극단적이었기에 제자들은 이제 자신들이 상황을 넘겨받아야 한다고 느꼈다. 예수님이 그런 곤경에 처하셨으므로 그분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들이 향유를 바르고 슬퍼하고 방어하는 행동을 통해 그분을 구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은 해야 할 일을 이미 다 하셨다.

코헬렛은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라고 말한다(12:13).

어떤 신약에는 마지막에 시편이 덧붙여져 있다. 시편은 결론으로서 너무나도 적합하다. 시편은 찬양과 간구, 믿음과 회의를 통해 은총의 경험을 우리 삶에 결합시킨다.

시편은 정직한 고백을 통해 감사와 갈등을 표현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해진 사람은 시편이 여러 방식으로 인격적 친밀함을 길러주고, 이로써 우리 믿음을 "아침마다 새롭게" 해준다는 것을 깨닫는다.

목회자는 개인적 갱신과 목회 사역 모두를 위해 성경의 다른 어떤 부분보다 시편을 잘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시편이 신약에 대한 적합한 결론인 것과 마찬가지로, 전도서는 적합한 서문이다.

사람들은 복음에 대해 너무나도 많은 오해와 너무나도 많은 어리석은 감정, 너무나도 많은 성급한 요구를 가지고 있어서 복음의 진정한 메시지를 듣지 못하고 그 실질적인 약속을 대면하지 못하고 있다.

코헬렛은 이 모든 것을 제거한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종교라고 생각하는 내부의 소음과 우리가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산만한 경건을 버리게 만든다. 그는 잔뜩 쌓여 있는 종교적인 쓰레기를 내다버리고 신앙으로 가장한 속임수를 내쫓는다.

짜임새 있게 배치된 코헬렛의 헤벨(hebel, 헛됨)을 신약 서문으로 삼는 것은, 복음의 메시지를 왜곡하거나 들리지 않게 만드는 혼란과 기만을 제거하고, 단순하고 바르게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일에 목회적 지침을 제공한다.

"한 통에 두 종류의 음료수를 동시에 담을 수는 없다. 만약 통에 포도주를 담고자 한다면, 먼저 그 안의 물을 따라내고 통을 깨끗이 비워야 한다. 만약 하나님이 주신 기쁨을 누리고자 한다면, 먼저 당신이 만들어낸 모든 것을 따라내거나 내다버려야 한다."

모든 목회 사역은 교회, 즉 신앙 공동체라는 배경 속에서 일어난다. 목회자는 결코 개인들을 섬기는 사적인 종교 전문가가 아니다. 목회자는 결코 군중을 상대하는 비인격적 연설가가 아니다. 목회자는 공동체에 자리 잡고 그 공동체를 세우는 책무를 맡고 있다.

목회 사역은 사람들에 대해, 그리고 그들이 그들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에 의해 주어진 인간성을 성취하지 못하는 문제에 대해 관심을 기울인다. 그런 사람들과 더불어 일하는 목회자는 그들을 단세포적 유기체가 아니라 "그 몸의 지체들"로 바라본다.

인간은 관계 속의 개인이다. 사람들은 공동체를 부인할 때조차도, 공동체를 모를 때조차도 언제나 공동체의 일부다.

회중(카할)은 하나님과 히브리 백성 사이의 관계에서 기본적인 작동 단위였다. 그들의 법적 체계에서 최악의 처벌은 공동체로부터의 단절이었다.

추방당해 혼자서 살아가야 할 때 개인은 온전한 인격체가 아니었다.

무리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내 그들 자체로 독립적인 실체인 것처럼 그들과 대화하고 그들을 우주 안의 고독한 단자처럼 대하는 목회 사역에서는, 그들을 성서에서 인정하는 인격체에 미치는 못하는 존재로 축소시킨다. 성경적 인간관은 공동체 안의 인격체, "하나님의 백성"이다.

상자 안의 자갈처럼 개인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한 몸이라는 의식,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그 몸의 지체들이라는 의식이 있었다.

그리스도인은 개인이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이 확장된다고 생각했다.

개인을 강조하는 미국적 경향과 공동체를 강조하는 성경적 전통 사이에서 목회 사역은 단일한 개인들이 아니라 ‘백성’을 다루는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사람들은 신앙 공동체 안에서 전인적 인격체들을 구속하는 복음의 통전성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개인주의로부터 탈피해야만 한다.

명백한 사실은, 신앙 공동체, 즉 교회는 매우 전문화된 공동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독특한 공동체다. 교회와 비슷한 조직은 없다. 어떤 유비나 유사한 경험도 교회의 본질을 설명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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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헬렛을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전통 속에 위치시킬 때 그의 목회적 중요성을 더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 흐름-제사장, 예언자, 현자-속에 자리 잡고 있다("…우리에게는 율법을 가르쳐줄 제사장이 있고, 지혜를 가르쳐줄 현자가 있으며, 말씀을 전하여줄 예언자가 있다"[렘 18:18]).

(이른 시기의) 잠언과(늦은 시기의) 집회서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지혜가 건전한 상태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보여준다. 그 사이에 자리한 욥기와 전도서에서는 지혜의 타락에 대해 항의한다.

현자들이 입을 닫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도록 해야만 할 때가 있다.

욥기는 지혜를 거부하지 않는다. 사실 이 책은 지혜 운동 안에서 쓰였다. 이 책이 거부하는 것은 상투적인 글귀로 축소된 지혜, 성공 이야기로 선전하는 지혜다.

전도서는 "제자리를 아는" 지혜이기 때문이다. 코헬렛은 "지혜로울 뿐만 아니라"(12:9) 자신이 맡은 일의 중요성과 그 한계를 확실히 알고 교사와 율법학자로서 자신의 일에 임했다.

지식이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분리되지 않게 막는 유일한 방법은 예배의 신앙고백적 기초-신명기의 설교와 예배-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 안에서 선포하고 순종하는 성서로부터 나온다.

마음은 영원과 맞닿아 언제나 하나님의 존재의 신비를 알고자 애쓴다. 그런 마음은 단순한 대답만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고, 대답보다 훨씬 크신 하나님으로만 만족할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타자이시다. 기적은 하나님께는 우리가 우리의 모든 지식으로도 기대할 수 없었던 차원이 있다는 증거다

하나님이 자유로우신-자유롭게 새로운 일을 하시는-분이라고 말하는 유일한 방법은 기적을 믿는 것이다.

그분은 자연적인 원인과 결과라는 결정론적 창조에 구속을 받지 않으신다. 그분은 자신이 지으신 우주적인 기계 안에 갇혀 있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초월해 자유로우시다.

목회자는 기적을 행하시는-아픈 이들을 고치시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키시고, 길 잃은 자를 구원하시는-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북돋는 동시에 기적 자체에 대한 믿음-즉, 하나님이나 그분의 백성과의 인격적 관계로부터 분리된 채 초자연적인 것을 추구하는 태도-에 대해 경고하는 어려운 책무를 맡고 있다.

정말로 기적은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증거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성경적으로 기적의 기능은 현실을 깨뜨리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실존을 그 본질에 따라 바라보고, 우리가 큰 그림이라고 여겼던 표층적 일상의 이면을 보며, 감각 자료에 대한 우리의 완고한 고집이나 우리의 둔한 믿음 때문에 감춰져 있던 것을 우리 자신에게 드러나게 하고, 우리 삶을 인격적 사랑의 치유하고 구원하시는 궤도 안으로 점점 더 이끌려 들어가게 한다.

이사異事와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께 무조건적으로 헌신했던 이스라엘 역시 모든 기적의 세속화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했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인간과 하나님의 올바른 관계(겸손한 신뢰, 순종의 예배)는 그들의 예배에서 인간이 신께 압력을 가하는 수단으로 삼는 모든 마술적 행위를 배제함으로써 보존되었다

전도서에서는 기적을 조달하는 이들(마술사, 신접하는 자, 점쟁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모든 얼빠진 종교적 행위에 대한 신랄한 거부를 통해 그런 마술적 행위를 효과적으로 미리 차단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길을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길을 가기 위해서, 어떤 능력을 얻어 친구들을 감동시키기 위한 수단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분의 구원으로 우리를 영원히 감동시키시도록 그분께 우리를 맡겨드리기 위해서 그분께 나아간다.

야훼 신앙은 언약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을 그 중심으로 삼는 예배 형태였다. 감정이 아니라 의지에 호소했다.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응답하라는 부르심을 받을 때 인간의 합리적 지성이 각성되었다.

야훼 신앙에서는 무언가-사람들에게 섬기고 사랑하고 순종하고 책임 있게 행동하고 결단하라고 촉구하는 말-를 말했다.

이스라엘에서 예배는 제사장 혼자의 일이 아니었다. 그는 예언자와 함께 일했으며, 예언자적 말씀이 성전 예배와 결합되었다. 이스라엘이 성숙했을 때는 예언자적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예배를 지배했다.

이스라엘에서 예배는 절대로 부차적인 일이 아니었다. 예배는 인간 삶 전체를 관통하는 살아 있는 종교를 참되게 표현하고자 노력했으며 많은 부분에서 그렇게 하는 데에 성공을 거두었다.

예배는 개인적, 영적, 민족적 삶을 사로잡는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매개체로서 삶의 물질적인 측면(건물과 몸)까지 하나로 모았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예배를 시작하고 통제했지만, 감각을 통한 참여도 배제되지 않았다. 기도하며 무릎을 꿇고 엎드리는 신체적인 동작도 포함되었다. 거룩한 춤과 교창交唱으로 공동체의 연대를 표현했다.

아무리 풍성하고 다양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규정되고 통제되는 한 부분이었다. 그 어떤 행위도 그저 감각적 경험만을 위해 행하는 것은 없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라는 맥락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예배에 관해 이야기한다.

성경적 자료와 예전적 역사 속에서 예배는 개인이 경험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그것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와는 관계없이, 혹은 느낌의 여부와 관계없이 우리가 행하는 무언가다. 경험은 예배를 통해서 생겨난다.

이스라엘과 교회에서는 예배가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그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촉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말씀은 권위 있고 분명하다.

하나님은 자신의 본성을 계시하시고 그에 대해 순종을 요구하셨다. 예배는 그 계시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에 순종하는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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