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이들, 특히 교회의 회원들은 여기서 반드시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그들은 교만하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며 겸손으로 옷 입어야 합니다.

겸손이란 올바르게 말하자면, 우리에게 항상 어울리는 옷입니다.

겸손은 반드시 우리의 집에서, 여행지에서, 결혼식에서, 장례식에서 입어야 할 예복입니다.

말씀 아래 침묵하며 고요히 앉아있는 것이 그들의 강점이었으나, 이제는 그들의 생각에서 그것이 와해되고 말았습니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당신이 손으로 행한 일로 당신의 믿음을 보여주어야 하며,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주고 있는지 무엇을 성취하고 있는지 말해야 합니다.

우리가 왜 교회에 가는지, 교회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완전히 무시되고 있습니다. 교회의 공적 예배에 대한 올바른 개념은 상실되었습니다.

주의 백성들이 공적으로 그리고 공동체적으로 부르심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공적으로는 그 부르심이 하나님의 가치와 일치하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그 백성의 하나님으로 인정받으실 때 온 세상이 그것을 듣는 것이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는 자신의 청중들의 주의를 집중시키고 회중의 회원들에게 집을 떠나 단순히 설교자의 설교를 듣기 위해 교회를 가서는 안 된다는 사실, 설교가 [교회 예배의] 가장 고상하며 유일한 특징도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제사장들로서 함께 섬기고 신자들로서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와 사랑과 예물을 올려드리기 위해 함께 모인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늘어나는 과실에 대한 회중들의 책임이(시대 정신의 영향으로) 그 영광스러운 부르심을 인식하지 못하는 회중들에게 있다 할지라도, 더 중대한 책임은 상당 부분 설교자 자신들에게 있습니다.

분명하게도 설교가 유일한 예배의 요소는 아니며 심지어 우리의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는 신자들의 제사장적 사역이다-도 아니지만, 확실히 설교는 제사장적 모임과 예배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상당 부분이 설교에 좌우되는데 특히 우리의 종교 예식에서 설교는 가장 위대하며 고상한 부분입니다.

로마 교회를 미사의 교회라고 부를 수 있다면 개신교 교회들은 말씀의 교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만 다스리신다는 사상은 영광스럽고 훌륭한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읽거나 노래 부르는 말씀이 아니라 입으로설교된 말씀의 방편으로 그렇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믿음은들음에서 나는 법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을 설교하는 일에 그분의 복을 더하여 주십니다.

회중들이 강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설교로 말미암음이요, 이는 역사를 통해서 입증되었습니다.

언약의 표와 인과 관계된 설교를 통하여, 회중들은 거룩한 믿음 안에서 더 강해지고 세워지며,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집니다.

설교를 통하여, 회중들은 순결함 안에서 보호 받고, 전투 가운데 격려를 얻으며, 고난 가운데 치유 받고. 신앙 고백 안에서 굳게 세워집니다.

양떼는 설교를 통하여 교회에 머무르게 되며, 교회는 그 양떼와 함께 권위와 존경과 예배가 더욱 흥왕하게 됩니다.

설교의 중요성은 쉽게 간과할 수 없으며 설교자라는 직무의 가치 또한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감추심으로부터 나누어주는, 곧 영생의 말씀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종(verbi divini minister)이 된다는 것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직책과도 비견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합니다. 따라서 책임과 부르심은, 전달하는 사람에게도 막중한 것입니다.

설교자가 그의 다른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한다면, 그는 항상 신선하고 새롭고 최신식이 될 수는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설교자들이 자신의 재능을 최대한 발휘하는 일에 실패하는지요! 그들은 재능을 낭비하고 오용합니다. 그들의 설교에는 종종 그 용어와 어조가 상투적이고 진부하며, 부정확한 어투와 조악한 표현들, 그리고 자연스럽지 못한 자세와 손짓이 있습니다.

그 내용에는 열정적인 준비와 단순성과 진실이 결핍되어 있고, 속도와 사상, 믿음과 영감 그리고 무엇보다도 엄숙함과 기름 부으심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작금의 설교가 시의적절하지 못하며 그 필요를 채워주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강단이 다시 한 번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면 이런 상황이 개선될 터인데, 그런 일은 우리가 성경을 연구하는 일로 돌아갈 때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의 설교는 성경으로부터 나오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설교는 성경을 영감하신 성령의 세례를 받지 않습니다.

성경 연구는 설교자에게 가장 근본적이며 일차적인 요구사항입니다. 주석 없이도, 필요하다면 명석한 관찰, 기도하는 마음, 경건함, 잘 수용하는 영혼, 그리고 거룩하고 정결한 양심을 가지고, 성경을 체계적이며, 집요하게, 지속적으로 연구해야 합니다.

회중은 성경을 더욱 잘 이해하고 더 분명히 경험해야 하며, 그 유기적이며 일관성 있는 통일성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 시대의 불신앙과 관련된 이론들과 의심들을 대적하여 회중들이 더욱 확고하게 서게 할 것이며, 경건함을 수반되는 진리의 말씀으로부터 젊은 세대들이 멀어지지 않게 해 줄 것입니다.

말씀의 사역자들이 이런 요구를 실천에 옮긴다면, 설교를 손상시키는 모든 결함들은 점점 줄어들 것입니다.

회중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설교자들에게 교훈을 제공하십시오. 하지만 그들의 배를 그저 덧없는 세상 견해나 시대의 새로운 사상으로만 채워서는 안 됩니다.

도리어 그들에게 힘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의 음식과 충분한 영양소를 제공하십시오.

성경에서 나온 그 내용은 점점 건강해지고 생명력 넘치게 되며 신선해질 것입니다.

누구든지 성경을 진지하고도 솔직하게 연구한다면, 그는 모든 교만함과 오만불손함, 그리고 헛된 철학을 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화법은 성령에 의해 형성될 것이고, 성경의 화법과 하나가 될 것이며, 최고의 설교자요 유일한 교사이며 교회의 의사이자 보혜사이신 성령님(Doctor et Consolator Ecclesiae)의 화법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더불어 회중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열어 선포해야 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럴 권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설교가 보잘 것 없는 논리가 아니라 단순함과 능력 가운데, 그들 자신의 언어 안에서, 선명하고 명료하며 쉽게 이해할 수 있기를 갈망며, 지성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잘 준비된 설교를 고대합니다.

회중들의 설교자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과 그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설교한다면, 그들은 감사를 모르는 냉담한 사람들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순결하고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하고 진실하게, 믿음 안에서 열정적으로 설교하는 일은 자유 교회(De Vrije Kerk)의 존재와 성장을 보존하고 보증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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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내 책 내는 법 - 투고의 왕도 땅콩문고
정상태 지음 / 유유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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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직자들이 넘쳐난다. 

저마다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자신을 어필한다.



직장에서는 성실하고 탁월한 사람을 찾는다. 요즘엔 인품까지도 주요한 요소가 된다.

하지만 '뽑을 만한 사람이 없다'는 탄식. 



수요와 공급의 아이러니.

어떤 영역이든 거의 적용된다.



글쓰기에 관련된 책들이 쏟아진다.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다며, 책 쓰기를 독려하는 책도 많다.



예외 없이 여기서도 적용되는 법칙.

작가가 되고픈 사람은 많고, 투고 원고는 늘지만, 정작 좋은 글은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원고다. 

내용이다. 그것이 핵심이다. 



하지만 '내용'과 더불어 또한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이 어떻게 전달될까 하는 '방법'이다.

'what'이 핵심이지만, 'how'도 매우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일목요연하게 방법을 가르쳐준다.

그것도 아주 적은 분량으로 핵심만 간추렸다.



글쓰기에 비해 많이 다뤄지지 않았던, 

원고를 어떻게 투고해야 하는지에 대한 책이다.



저자는 재차 원고의 내용을 계속 강조하지만,

매우 구체적으로 원고 투고의 방법을 가르쳐준다.



투고를 할 때에 던져야 하는 중요한 질문부터,

기획서를 어떻게 작성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까지.



출판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이 이 작은 책에 담겨있다.

편집자의 관점은 저자와 독자의 시선과는 다른 신선함이 느껴진다.



곳곳에 인용된 책들과 간단하지만 정성스러운 서평까지 곁들인 '도움이 되는 책들'은 

정말 큰 도움이 된다. 저자의 노고에 감사할 뿐이다.



이제 독자가 원하고 출판사가 원하는,

뽑힐만한 저자가 되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출판사에서내책내는법_투고의왕도

#정상태

#유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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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3-27 1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흥미롭네요 투고의 방법 :-)

모찌모찌 2021-03-27 10:53   좋아요 0 | URL
넴^^ 얇은데 있을것은 다 있네요 ㅎ
 

‘이 원고가 무슨 원고인지‘ 간단명료하게 그리고 가능한 한 독창적으로 정의하라. 객관적인 관점에서 원고의 콘셉트가 스스로 경쟁력을 갖추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 P69

정녕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독자를 원한다면 그보다 먼저 ‘손에 잡힐 듯 구체적인‘ 독자를 떠올려야 한다. - P78

예상 독자를 염두에 둔 적절한 문체, 문장의 난이도, 흥미로운 주제에 부합하는 소재, 창의적인 논리 전개, 소재와 사례의 신선함・・・・・・. 이 모든 것이 기획안이 지시하는 방향과 일치해야 하며, ‘당신 자신의 문장‘ 속에서 최대한으로 발휘되어야 한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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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과 그 대답은 단지 글쓰기 기술을 연마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진정성 있는 삶의 태도나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 타인을 바라보는 애정 어린 시선으로 나아가곤 한다. - P12

한쪽은 편집자의 눈으로 다른 한쪽은 독자의 눈으로 글을 읽지 못하면 편집자는 책을 만들 수 없다. - P14

사실 편집자들은 원고를 ‘심판‘하는 판관이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예비 저자의 가능성, 아직 다듬어지지는 않았지만 적절한 조언과 도움이 수반되면 극대화될 글쓴이만의 장점 등을 살피고 그것이 효과적으로 발휘될 수 있도록 돕는 조력자에 가깝다. - P14

우리가 이토록 매력적인 책의 세계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까닭은 책 속에 확고부동한 길이 있어서가 아니라 책이 더 자주, 더 많이 길을 잃게 만들어 또 다른 책의 세계로 계속 항해하도록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P16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내가 읽어 온 책들 중에서도 오랫동안 길잡이 역할을 해 준 책들은 정답이나 해법을 알려 주는 게 아니라 그 책을 읽기 전보다 좀 더 나은 질문을 가능하게 하는 책, 그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을 다른 관점에서 새롭게 질문할 수 있게 한 책이었다. - P16

여전히 많은 예비 저자가 ‘유리창‘ 같은 원고가 아니라 ‘거울‘ 같은 원고를 보낸다. 이렇게 물어보고 싶다. 당신의 원고는 유리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세상)과 사람들(독자)에게 말을 걸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거울 앞에 선 채 당신 자신만을 비추며 독백하고 있는가? 어쩌면 여기에서 "왜 투고하는가?"라는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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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아름다움은 즉각적인 현현(incarnation)을 추구합니다

웅변술에서는 형식과 언어와 표현이 전적으로 내용의 영향을 받습니다.

우리 모두가 단 하나의 모델을 채택하는 것은 불필요하며 유익하지도 않습니다.

개인의 다양성은 그 자체로 대중 연설에서 나타납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말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각각은 자신만의 연설의 [종류]를 소유합니다.

삶은 목가적 휴식이 아니라, 오히려 심각한 투쟁입니다. 씨앗 형태로, 재능으로 행하는 훌륭하고 적절한 하나의 연설을 통해 우리는, 한편으로는 조잡함과 진부함과 사소함을 정복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경직됨과 기만과 꾸밈과 부자연스러움을 정복해야 합니다.

유일하게 우리 자신만이 소유할 수 있는 그런 좋은 연설은, 스스로 존재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과 분리해서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설교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을 때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단련하는 일에는 전적으로 소홀히 하면서 그저 일어나서 자신의 말에만 집중하는 것은 전적으로 부적절하며 헛된 일이 될 것입니다.

좋은 연설은 이러한 총체적인 품위를 대중 앞에서 말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특정한 정황 속에 적용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일상생활에서, 사회 활동에서, 품행이 단정한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은 그러한 작은 훈련으로도 좋은 설교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더욱이 대중 연설은 단순히 우리 몸의 한 부분에만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대중 연설은 음성이나 몸짓이 아니라 우리 전 존재를 차지합니다.

설교의 권리와 필요성은 육체와 영혼의 긴밀한 연합과 내면과 외면의 조화에 기초합니다

연설의 내용과 그 제시 사이에는 바로 이러한 친밀한 조화가 있어야만 합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육체와 영혼, 화법과 목소리, 말과 몸짓, 그리고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와 그가 어떻게 말하는지 사이에 조화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말할 때는 반드시 우리 전 영혼과 육체를 통해, 우리의 온 힘을 다해 말해야만 합니다.

모든 것을 우리에게, 우리를 통해, 우리 안에서 말해야 합니다.

음성의 색조, 각각의 몸짓, 손의 움직임, 눈동자의 응시는 각각 그 고유의 표현과 능력이 있습니다.

웅변술이란 전인격을 통해 생산되는 것입니다.

설교의 황금률은 "현재의 당신 자신이 아니라 당신이 될 수 있는 그리고 반드시 되어야만 하는 그 자신을 주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여러분 자신이나 여러분이 가진 것 이상의 것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특별히 말씀 사역자는 평민이나 그저 저속한 사람들(vulgus)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회 앞과 주님의 기업 앞에 서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자신의 영혼에서 이런 우월한 생각을 막아야 합니다.

사람의 전 존재와 관계하는 설교에서, 음성은 최우선의 위치를 차지합니다. 좋은 목소리는 귀한 선물입니다.

연설가가 명료하고 강력한 목소리를 가졌다면 이에 비교될 수 있는 다른 특권은 없을 것입니다.

목소리는 훌륭한 악기입니다. 그것을 잘 연주하고 가장 아름다운 음색을 이끌어내는 사람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런 의미에서 틀리게 연주하고 노래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람도 틀리게 말할 수도 있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최고의 예술은 자신의 목소리를 완벽하고 철저하게 제어하며, 자신의 영혼 전체와 정서의 모든 의미를 듬뿍 담아 이를 통해 자신을 표현합니다.

인간의 목소리는 마음과 언어만큼이나 풍성합니다. 인간의 목소리는 가장 아름다운 최상의 음악입니다.

자연 전체에, 인간의 목소리가 표현할 수 없는 음조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목소리는 천둥처럼 울리고 폭풍우처럼 휘몰아칠 수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산의 강물처럼 세차게, 개울처럼 졸졸 흐를 수 있습니다.

설교를 통해 이 목소리라는 음악은 반드시 우리 몸 전체를 통해 전달되어야 합니다.

설교에서 그 어떤 부분도 중요하지 않은 측면이 없습니다. 우리 몸의 각 부분은 고유의 언어를 지닙니다.

입술의 언어가 있고 눈의 언어가 있으며, 손의 언어, 머리의 언어, 몸의 언어가 있습니다.

영혼의 각각의 정서는 마치 거울처럼 눈에 비칩니다. 사랑과 증오, 경멸과 동정, 우정과 분노, 신뢰와 두려움, 그리고 모든 다른 열정들을 사람의 눈에서 읽어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기쁠 때 빛나고 슬플 때 희미해집니다.

청중들은 연설가가 자신들을 바라보며 단순히 소리로만이 아니라 눈을 마주치면서 말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설교자는 그가 전하는 말의 내용이 그의 음성, 눈의 응시, 머리의 위치, 몸의 자세, 손짓, 심지어 그의 의복의 색깔과 모양과 같은 언어로 말할 때, 더불어 영혼과 몸, 내면과 외면, 음성과 어조, 언어와 몸짓이라는 모든 이원론적인 요소들이 완벽한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설교의 완성에 도달하게 됩니다.

설교자는 코미디언이 아니며 설교는 영화가 아니며 몸짓은 무언극이 아닙니다.

제스처는 설교 그 자체가 아닙니다. 몸짓은 단지 설교를 이끌고 지지하며 강화시켜 줍니다.

사람은 오직 생각과 말, 그리고 말과 몸짓의 완벽한 조화가 존재하는 기독교의 원리에 부합할 때만 웅변적일 수 있게 됩니다.

기독교의 출현은 생명력 넘치고 그 아름다움에 흥분하는 사상의 세계를 열어주었습니다.

예술에 새로운 내용이 주어졌고 생각은 영원한 대상을 사색했으며 언어에 영원한 내용을 복원시켰습니다

생각과 말, 행동과 설교의 모든 불일치는 본질적으로 기독교와 충돌합니다.

우리의 것이든 상대방의 것이든, 진실하고 선하고 조화로운 모든 예술과 학문 분야는 그리스도를 닮은 것입니다.

기독교의 중심점은 말씀의 성육신인데, 바로 이 안에 하나님과 사람, 영과 물질, 내용과 형식, 이상과 현실, 육체와 영혼, 사상과 언어, 말과 몸짓의 화목이 존재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설교자는 그가 전하는 말의 내용이 그의 음성, 눈의 응시, 머리의 위치, 몸의 자세, 손짓, 심지어 그의 의복의 색깔과 모양과 같은 언어로 말할 때, 더불어 영혼과 몸, 내면과 외면, 음성과 어조, 언어와 몸짓이라는 모든 이원론적인 요소들이 완벽한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설교의 완성에 도달하게 됩니다.

설교자는 코미디언이 아니며 설교는 영화가 아니며 몸짓은 무언극이 아닙니다.

제스처는 설교 그 자체가 아닙니다. 몸짓은 단지 설교를 이끌고 지지하며 강화시켜 줍니다.

사람은 오직 생각과 말, 그리고 말과 몸짓의 완벽한 조화가 존재하는 기독교의 원리에 부합할 때만 웅변적일 수 있게 됩니다.

기독교의 출현은 생명력 넘치고 그 아름다움에 흥분하는 사상의 세계를 열어주었습니다.

예술에 새로운 내용이 주어졌고 생각은 영원한 대상을 사색했으며 언어에 영원한 내용을 복원시켰습니다

생각과 말, 행동과 설교의 모든 불일치는 본질적으로 기독교와 충돌합니다.

우리의 것이든 상대방의 것이든, 진실하고 선하고 조화로운 모든 예술과 학문 분야는 그리스도를 닮은 것입니다.

기독교의 중심점은 말씀의 성육신인데, 바로 이 안에 하나님과 사람, 영과 물질, 내용과 형식, 이상과 현실, 육체와 영혼, 사상과 언어, 말과 몸짓의 화목이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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