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까지도 같은 제목으로 똑같이 찍히는 책이 수천 부에 이르고 판도 수십 개가 될 텐데도 나는 내 손에 쥐어진 책만이, 다른 어느 책도 아니고 바로 그 책만이 ‘책‘이라고 믿고 있다. 주석(註釋), 얼룩, 이런저런 표시, 어떤 특정한 순간과 장소, 이런 것들이 그 책에 값으로 매기기 어려운 가치, 필사본과 같은 성격을 부여한다.
독서 행위는 신체의 모든 감각이 개입하여 친밀한 육체 관계를 구축한다. 두 눈은 책장에서 단어를 끌어내고, 두 귀는 읽는 소리를 듣고, 코는 종이와 잉크, 접착제, 판지나 가죽 냄새를 맡고, 손으로는 거칠거나 부드러운 책장, 아니면 부드럽거나 딱딱한 표지를 어루만진다. 심지어 독서가의 손가락이 혓바닥에 닿을 때에는 간혹 미각가지도 독서 행위에 동참하기도 한다.
무지, 맹신, 지성, 기만, 교활함, 그리고 계몽을 통해 책 읽는 사람은 원전과 똑같은 단어로 그 텍스트를 다시 쓰면서도 원본과는 다른 이름으로, 다시 말해 그것을 재창조해 내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텍스트에 독서가 자신의 환경이 스며들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의미 변질은 텍스트 자체를 확장시키거나 퇴보시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