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이 온전한 의미를 채우며 만들어내는 독학의 영역이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은 모든 형태의 ‘배움’이 제도교육으로 빨려드는 시대의 이상 열기 속에서 그가 ‘배움’ 자체의 의미 영역을 구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정일이 명실상부한 독학자인 것은 그가 지칠 줄 모르는 탐독가여서가 아니다. 독서가 배움을 둘러싼 ‘왜 무엇’의 답안을 곧바로 마련해주지는 않는다.

그는 활자에서 삶의 현장으로, 나아가 읽기의 대상과 배움의 영역을 삶의 한 복판에 선 사람들로 재설정해갔다. 그 과정에서 좁은 내면에 갇혀 있던 인식이 거듭된 성찰을 통해 끝내 이 땅의 현실에 가닿게 하는 것, 그것이 독서이며 공부이고 배움임을 보여주었다.

신불출은 기성의 체제와 평가에 스스로를 기입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착된 틀을 깨야 한다고 외치며 더 나은 가능성들을 만들기 위해 분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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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쓰는 것과 읽는 것은 분리되지 않는다. 읽지는 않고 쓰기만 하는 사람은 없다. 읽었으니 쓰고, 쓰려면 읽어야 한다.

생명을 조존하려면 자연의 이치와 천성을 알아야 한다. 갓난 아기처럼 호흡하는 것, 사물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것, 그것이 생명을 보존하는 도다. 그 도를 터득하려면 알아야 한다. 길흉을 알고 멈춰야 할 때를 알고 자연의 속도와 리듬을 알아야 한다. 그 앎이 바로 생명의 원동력이다.

이 시점에서 되새겨야 할 것은 ;어떤 책을 읽느냐, 몇 권을 읽느냐‘ ‘다독이냐, 정독이냐‘가 아니다. 책이 본디 무엇이었는지, 책과 문명, 책과 인생이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깊이 환기하는 것이다. 그러면 알게 되리라.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책과의 만남보다 더 신성한 순간은 없다는 것을.

현대인은 참으로 유능하지만 아주 심각하게 무능한 영역이 하나 있다. 바로 휴식이다. 휴식은 능력이다. 잘 놀고 잘 쉬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도 삶의 내공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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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준에서 볼 때, 동정심에는 세 가지 필수적인 사유가 수반된다. .. 첫째는 진지함seriousness이라는 생각 방식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동정심을 경험할 때, 이 감정을 느끼는 사람은 타인의 고통이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라 중대한 것이라고 여긴다.

둘째는 무과실nonfault에 대한 생각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누군가가 스스로 선택한 혹은 자초한 곤경에 대해서는 동정심을 갖지 않는다.

세 번째는 전통적으로는 동정심의 필수 요소라고 여겨지는 유사성 자각similar possibilities이라는 생각이다. 동정심을 가진 사람은 대개 고통받는 타인이 자신과 비슷하다고 여기며, 삶의 가능성 또한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전통적인 사유와 관련해서 반드시 언급되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행복주의적 사고eudaimonistic thought다. 이것은 동정심을 느끼는 주체가 고통받는 한 사람 혹은 여럿을 자기 삶의 중요한 부분으로 두고자 하는 판단 혹은 사고라고 할 수 있다.

공정한 국가는 인간의 나쁜 행동이 갖는 뿌리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무엇에 대항하여 싸워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시민들의 존엄과 평등을 어떻게 보호할 수 있는지 알기 힘들다.

교육과 공적 문화를 통해 비판적 사고와 독립성을 사회적으로 권장한다면 우리 사회는 개인의 책임을 극대화하고 타인을 온전한 인간 존재로 인식하는 문화를 국축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는 저항의 문화를 촉진하고, 개인적 책임감을 고양하며, 관료적 익명성을 제거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타인의 눈으로 세상을 볼 줄 아는 능력과 개인의 독자성을 인정할 줄 아는 역량을 조성함으로써 공감의 문화를 건설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사회는 사람들의 염원을 좌절시키지 않도록 공적인 슬픔을 잘 다루어야 하며, 동정의 대상을 일부에서 전체로 적절히 확장시켜야 한다. 또한 시민들이 쉽게 공격적인 것으로 전환될 수 있는 신체적 혐오를 극복할 수 있도록, 타인의 신체에 대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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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생각보다 자신에 무지하고 자기와 서먹하기에, 글을 쓰면서 나를 알아가는 쾌감도크다. 그렇게 마음을 다 쏟는 태도로 삶을 기록할 때라야 신체에 닿는 언어를 낳고 그런 언어만이 타자에게 전해진다.

애매함을 배척하고 확실함을 동경했다. 표류보다 안착을 원했다. 어영부영 이만큼 떠밀려오고 나서야 짐작한다. 인간이 명료함을 갈구하는 존재라는 건 삶의 본질이 어정쩡함에 있다는 뜻이겠구나.

글쓰기를 시작하는 용기, 그리고 방법은 내 안에 있다. "자기 자신을 단서 삼아 이야기를 밀고 나가"야 글쓰기에 힘이 붙고 논의가 섬세해지면서 자기의 고유한 목소리가 나온다.

자신이 용감해지는 자리를 알기. 내가 글을 쓰는 이유도 이것이다. 글을 쓸 때 나는 그나마 용감하다. 글 바깥에선 비겁하고 부산스럽지만 글 안에서만은 일관되고 침착하려 애쓴다. 글과 삶의 (불)일치는 내 삶의 영원한 화두다.

우리가 배워야 하는 건 어머니의 은혜가 아니라 어머니의 고통이어야 했다. ‘평생 밥 당번‘으로 사느라 뼈가 녹는 고충을 당사자들은 제대로 말하지 않았고, 구구절절 말하지 않는 고통을 남들이 먼저 알아주는 법이 없다. 하지만 그 고통을 알아보는 능력이 부족하면 나쁜 어른으로 오래 늙는다.

한 사람의 공감 능력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계속 질문하는 중이다. 여자라서, 아이를 키워봐서, 딸이 있어서처럼 저절로 주어지는 것들은 계기가 될 순 있어도 공감의 지속 조건을 될 순 없다. 배움이 필요하다.

내가 아는 공감 방법은 듣는 것이다. 남의 처지와 고통의 서사를 듣는 일은 간단치 않다.

자기 판단과 가치를 내려놓으면서, 가령 ‘왜 이제 말하느냐‘ 심판하는 게 아니라 왜 이제 말할 수 밖에 없었을까 이해하려 애쓰면서, 동시에 자기 경험과 아픔을 불러내는 고강도의 정서 작업이다.

온몸이 귀가 되어야 하는 일. 얼마 전 본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당신이 할 말을 생각하는 동안 나는 들을 준비를 할 거예요."

우리가 무서워해야 할 건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페미니스트가 가리키는 여성이 처한 현실의 참담함이다. 여자는 밥하려고 태어나지 않았고 꽃처럼 꺽어도 되는 존재가 아닌데 밥 안한다고 죽이고 꽃 꺽듯 존엄을 꺽어버리는 무수한 사건들에도, 우리는 계속 놀라고 말리고 떠들고 분노해야 한다.

왜 반응이 없냐고 물었더니 수레가 말한다. "엄마, 고양이 관점에서 생각해야지. 몸을 그렇게 뻣뻣이 세우고 있으면 오겠어?" 수레는 늘 엎드려서 네 발로 무지랑 눈을 맞추었다. 이것이 "되기"인가. 자신의 고정된 위치를 버리고 다른 존재로 넘어가기.

추상적인 다짐이 아닌 구체적인 상황을 예를 들어 복기해보면 자기 감정과 생각 ・ 욕망의 여러 층위와 갈래가 보이고, 나라는 사람은 하나로 정리되기 어려운 복합적인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자기에 대해 섣불리 장담하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서 타인도 함부로 재단하기 어려워진다.

조심스러워지는 일은 섬세해지는 일. 그렇게 내 판단을 내려놓고 남의 처지가 되어보는 게 공감의 시작이다.

삶은 그저 살아가는 것이지, 불행해지기 위해 살아가는 게 아니듯 행복해지기 위해 사는 것도 아니다.

작가를 꿈꾸는 학생에게 말했다. "쓰고 싶으면 빨리 쓰세요. 작가는 쓰는 사람이지 쓰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이 아니예요."

침묵은 정지의 시간이 아니라 생성의 시간이다. 무슨 말이든 하고 싶지만 아무 말이나 하지 않으려 언어를 고르는 시간, 글을 쓴 이의 삶으로 걸어들어가 문장들을 경험하고 행간을 서성이고 감정을 길어내는 활발한 사고 작업의 과정이다.

글쓰기의 목적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이렇게 정리해본다. 삶이 고차함수인데 글이 쉽게 써지면 반칙이다. 정확한 단어와 표현을 고심하다 보면 자신을 스스로 속일 가능성이 줄어들고, 몸을 숙여 한 사람의 내면의 갱도에 들어가는 훈련으로 남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을 수 있다고.

예술과 정치, 아이와 어른, 공과 사, 무대와 일상 등을 나누는 분리 기획은 권력자에게 유리하고 약자들이 고립된다는 면에서 위험하다. 직업 ・ 나이 ・ 성별에 무관하게 저마다 자기 자리에서 목소리를 낸다면 세상이 좀 더 좋아지리라는 믿음이 내겐 있다.

한 아이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든 신체적 온전함과 존엄성이 지켜지기 위해서는, 후원금을 척척 내는 어른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부모님 뭐하시느냐‘고 다짜고짜 묻지 않는 어른이 많아져야 하고 이력서에 가족관계를 쓰지 않도록 하는 제도가 생겨야 한다.

이 세상에 ‘불쌍한 아이‘는 없다. 부모 없이 자란 자식이라는 굴레를 씌우고 불쌍한 아이를 만들어내는 집요한 어른들이 있고, 정상가족이라는 틀로 자율적 존재를 가두거나 배제하는 닫힌 사회가 있을 뿐이다.

인간 사회는 민폐 사슬이다.
인간은 나약하기에 사회성을 갖는다.
살자면 기대지 않을 수도 기댐을 안 받을 수도 없다.
건강한 의존성을 확장해나가는 과정을 통해서만
우리는 관계에 눈뜨고 삶을 배우는
어른이 될 수 있다.

기성의 관념에 갇히는 건 게으름 탓 같다. 특히 이분법은 사유의 적이다. 생각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생각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누구나 기성세대가 된다. 선입관이 현실을 만나 깨지는 쾌감은 세상에 자기를 개방할 때만 누리는 복락이다.

글은 정자세로 앉아 시간을 바치지 않으면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 목뒤부터 어깨를 타고 손끝까지 흐르는 저림을 겪으며 문장의 길을 터나가야 한다.

늘 단순한 상황 판단은 타인의 구체적 처지에 대한 고려 없음에 기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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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는 대개 경이로움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 기저에는 반항과 전복에 대한 사랑이 깔려 있다.

사람들이 사회의 보편적 목표와 그에 대한 정확한 해석 모두에 동의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실현하는 전략에 관한 한 큰 차이를 보일 수 있다. 또한 감정에 대한 공적인 동조는 그러한 논쟁의 공간을 폐쇄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공적 감정은 훌륭한 정치적 원칙의 안정성과 효율적인 구현을 위한 원천이다.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사람들로 하여금 특정한 맥락 속에서 특정한 대상(국가 자체, 국가의 목표, 특수한 과제나 문제, 국민)에 대해 특정한 감정을 경험하게 만드는 일이 중요해진다.

하지만 감정들 자체가 안정화를 요구한다. 심지어 (확장된 공감과 같은) 가장 긍정적이고 유익한 감정조차 그것에 대한 관심의 집중이 확장되거나 분산됨에 따라 큰 폭으로 요동칠 수 있다.

우리는 감정적 경험이 종종 제도의 형태로 더욱 견고해질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 그러한 형식적 구조만이 인간의 감정이 쉽게 빠질 수 있는 공허함과 편향성의 문제들을 해결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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