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의 원리 속에서 생명을 발견하는 방법은 생명을 잃는 것이다(막 8:35). 이와 마찬가지로, 가족을 되찾는 길은 우리의 가족 가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면, 가족의 복리를 더 잘 추구할 수 있다.

결혼식이 종종 긴장감으로 가득 찬 것은 그것이 너무 이상화되기 때문이다.

결혼식에서 뭔가 문제가 생기면 그 사람의 인생의 틀이 되는 완벽한 하루가 위험에 처했다고 생각한다.

결혼을 그렇게 이상화하게 되면 비단 결혼하는 사람뿐 아니라 미혼인 사람에게도 문제가 생긴다.

하나님이 결혼하지 않은 삶으로 부르신 사람들도 때로 자신의 상황을 원망하거나 결혼한 사람들을 샘낼 수 있다.

훈육은 곧 제자 훈련이다. 함께하는 삶을 통해 우리는 서로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달하고, 그들의 미래에 필요할 애정이나 직관, 기술을 가지고 새로운 세대를 훈련시킨다.

우리가 가족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면 자유를 얻게 되어 가족을 어느 때보다 더 사랑하게 된다.

우리가 가족에 대해 움켜잡고 숨 막히게 하던 것을 놓게 되면, 그것이 현재의 가족에 대한 기대이든, 오래 전 가족에 대한 향수든, 가족 안의 상처에 대한 흔적이든, 미래의 가족에 대한 걱정이든, 자유로운 가족이 되어, 교회 가족이라는 새 피조물 안에서 우리의 자리를 찾고 거기서부터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양육과 훈육은 그런 것이다. 최종 목표는 아이가 올바른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행동이 올바른 사람이 지옥에 가장 가까울 수도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현재 가장 힘 있는 사람 앞에 굴복하는 법을 배운다면, 이 시대에 강해 보이는 마귀에게 굴복하게 될 것이다.

더 나쁜 것은 회개 없이 복종하는 법을 배우는 사람은 절망하거나 자신의 의를 세우려 할 것이다. 물론 그것은 의를 이루지 못한다.

훈육의 핵심은 행동을 배우는 것이라기보다 회개를 배우는 것이다.

가족은 복음이 아니다. 만일 가족이 삶의 궁극적 의미의 원천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가족이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고 당신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길 바랄 것이다.

만약 가족을 부드럽게 붙잡는다면, 가족이 번성하는 모습을 보는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십자가의 삶은 우리를 자유케 하여 가족을 이상화하지도 않고 악한 것으로 여기지도 않게 한다.

십자가에서 짐이 축복인 것을 볼 때, 우리는 가족을 짐으로 여기거나 싫어하지 않게 된다.

또한 우리의 가족이 우리의 모든 욕구와 갈망을 채워 주기를 바라지 않게 된다. 우리 앞에 영광스럽고 영원한 삶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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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자와 역사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로제 샤르티에 지음, 이상길.배세진 옮김 / 킹콩북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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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이든 독자는 자신의 관점 안에서 텍스트를 이해하고 통합하려고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회학도의 관점에서 사회학적 방법론과 부르디외의 사회학에 대하여 조금 더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이 책은 『구별짓기』라는 책으로 국내에 이미 많이 알려진 프랑스의 대표적인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와 아날학파의 4세대를 대표하는 역사학의 권위자인 '로제 샤르티에'의 대담집이다. 


다른 학문분과와의 대화는 보통 각 분과의 전문적 용어 사용이나 연구방법론의 차이 등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다. 또한 자신의 학문 이외에 대한 폭넓은 지식이 없다면, 의미있는 대화를 진행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러한 어려움을 너끈히 뛰어넘을뿐만 아니라 오히려 각각의 학문에 더욱 풍성한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이미 두 사람은 오랜 친분 관계와 더불어 서로의 학문에 대한 전반적 이해를 가지고 있기에 심도있고 유의미한 대화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담집을 통해 부르디외의 사회학과 그의 연구 방법론, 역사학과의 차이와 유사점, 그의 학문에 대한 태도 등을 가감없이 볼 수 있다. 공중파 방송에서의 대담이니만큼 그의 저작들에 비해 최대한 쉬운 언어로 다가가고 있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그렇기에 그의 풍부하지만 다소 난해한 지적 담론들을 간명하게 볼 수 있는 최고의 입문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사회학의 ‘진실‘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겪게 합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사람들은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외견상 그런 고통을 초래한 사람[사회학자]에게 자신이 받은 상처를 전가하는 것이죠. - P26

사회학에서 우리는 언제나 화급한 현장에 서있고 우리가 다투는 문제는 언제나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이런 문제는 죽은 것도 아니고, 땅속에 묻혀 있는 것도 아닙니다. - P28

막스 베버에 따르면, 예언자란 삶과 죽음 따위의 총체적 질문에 총체적으로 답하는 인간입니다. 사르트르가 구현한 철학자는 바로 그 용어의 정확한 의미에서, 그러니깐 존재, 삶, 정치 등 온갖 문제에 포괄적으로 답한다는 점에서 예언자의 형상입니다. 우리는 이런 총체적 역할에 조금은 눌려 있었고 조금은 지치기도 했어요. 그런 탓에 우리 세대는 사르트르의 입장에서 멀어진 것이죠. 그를 닮는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 P29

적어도 사회과학은 중요한 질문들을 제기하고 있으며, 일상의 사회세계에서 제기하는 것보다 훨씬 더 훌륭하게 제기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언론계나 평론계, 또는 사이비 과학계에서 제기하는 방식보다 훨씬 더 훌륭하게 문제를 제기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회과학의 임무입니다. - P31

제 작업이 기여한 바가 있다면, 그중 하나는 과학 그 자체에 과학적 시선을 돌려줬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 P36

사회학자는 [자기 자신의] 특수한 사례를 보편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회학자인] 저는 남성/여성, 뜨거운/차가운, 건조한/습한, 높은/낮은, 지배계급/피지배계급 등으로 구성된 저만의 고유한 사고범주, 분류체계, 분류틀, 구분법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보편화하는 것이죠. 이는 어떤 경우에 시대 착오를 빚어내고, 다른 경우에는 자계급 중심주의를 가져옵니다. 각각의 경우에 문제는 자기 자신의 질문체계를 문제화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나옵니다. - P39

우리는 결정된 채로 태어나지만, 자유로운 상태로 생을 마칠 수 있는 작은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사유하지 않는 상태로 태어나지만, 주체가 될 수 있는 아주 작은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무조건 자유, 주체, 인간 등등에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저는 이들이 사회적 행위자를 자유라는 환상 속에 가둔다는 점 때문에 책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P49

저는 사회학이 다른 수단에 의해 철학을 연장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만일 사회학이 명예로운 계보 안에 자리를 가질 수 있다면, 저는 최초의 사회학자 자리에 소크라테스를 놓고 싶습니다. 철학자들은 크게 화를 내겠죠. 소크라테스를 철학의 아버지라고 주장하니까요. 그런데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거리로 내려가 질문을 던지곤 했습니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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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결정된 채로 태어나지만, 자유로운 상태로 생을 마칠 수 있는 작은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사유하지 않는 상태로 태어나지만, 주체가 될 수 있는 아주 작은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무조건 자유, 주체, 인간 등등에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저는 이들이 사회적 행위자를 자유라는 환상 속에 가둔다는 점 때문에 책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사회학이 다른 수단에 의해 철학을 연장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만일 사회학이 명예로운 계보 안에 자리를 가질 수 있다면, 저는 최초의 사회학자 자리에 소크라테스를 놓고 싶습니다. 철학자들은 크게 화를 내겠죠. 소크라테스를 철학의 아버지라고 주장하니까요. 그런데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거리로 내려가 질문을 던지곤 했습니다.

사회학자의 문제는 그가 아무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들을 말하려 애쓴다는 점입니다. 특히 사회학자의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즉 시간적 여유와 문화자본이 있는 이들]은 알려 하지 않는 것들 말입니다.

사회학자의 모든 작업은 행동의 관찰, 담론, 문서 자료 등에 기초해서 진실의 도출에 필요한 조건을 구축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사회세계 안에서 지식인의 것이건 프롤레타리아의 것이건 혹은 다른 누군가의 것이건 간에 일종의 본원적인 [진실의] 장소를 찾을 수 있다고 여긴다면, 이 같은 발상 속에는 일종의 신비주의적 사고가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식인들은 이런 사고를 통해서, 그리고 극적인 자기 신비화를 거쳐서 스스로에게 사기를 불어넣습니다.

사회학자는 남들의 말을 듣고 남들에게 질문하고 남들이 말을 하게 하지만, 모든 담론을 비판 아래 둔다는 점에서 자신을 위한 또 다른 수단을 갖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사회학은 상징적 공격, 또는 상징적 조작에 저항하는 자기 방어의 도구를 제공합니다. 이런 도구는 무엇보다도 전문가들이 생산하는 담론에 저항합니다.

일단 논쟁을 위해서는 불화의 지점들에 대한 합의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 우리는 갈등을 통해 서로 통합됩니다. 타협이나 회피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통합에 이르는 셈이죠.

사회학은 ‘말썽쟁이‘ 학문입니다. 갖가지 문제를 일으키고, 심지어 없던 문제를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회학은 존재 자체를 의심받곤 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 때문에 사회학은, 적어도 어떤 사회학은 자기 존재를 끊임없이 통찰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런 조바심, 밑바닥에 있는 이런 불안이 [역설적으로] 과학적 진보를 촉진하게 됩니다. 이것이 사회학의 기본 동력입니다.

사회학자는 즉각적인 직관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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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축복의 원천이기도 하고, 때로는 엄청난 공포의 원천이기도 하다. 그리고 대개는 이 두가지가 동시에 일어난다.

십자가도 그렇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죄의 무시무시한 저주와 하나님의 심판 및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동시에 본다(갈 3:13-14).

우리의 가정은 기쁨으로 충만할 수도 있지만 우리를 항상 고통에 취약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 기쁨과 고통은 우리가 한 곳을 바라보도록 한다. 바로 십자가다.

우리는 가족에 대한 실제적인 지혜가 필요하고 성경은 그 지혜를 우리에게 준다.

우리는 부모에게 매몰되지 않으면서도 부모를 공경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결혼생활을 우상화하지 않으면서도 결혼생활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차세대에게 가혹하지 않고, 그들을 방임하지 않으면서 훈윤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 앞서 우리는 가족의 취약성을 십자가를 지는 관점에서 볼 줄 알아야 한다.

십자가는 우리가 가족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알려 주고,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삶은 우리를 십자가로 돌아가게 해준다. 하나님 나라가 침노하고 있다. 가족은 이 왕국의 상징이며, 이는 어둠의 세력이 가족을 공격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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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의 ‘진실‘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겪게 합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사람들은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외견상 그런 고통을 초래한 사람[사회학자]에게 자신이 받은 상처를 전가하는 것이죠.

사회학에서 우리는 언제나 화급한 현장에 서있고 우리가 다투는 문제는 언제나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이런 문제는 죽은 것도 아니고, 땅속에 묻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부르디외: 제 생각에 푸코와 제가 완전히 합의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면, 그중 하나는 이른바 ‘총체적 지식인‘의 형상을 거부한 데 있습니다. 이는 예언자 역할을 수행하는 위대한 지식인의 형상으로, 그 누구보다도 사르트르가 탁월하게 구현한 바 있습니다.

막스 베버에 따르면, 예언자란 삶과 죽음 따위의 총체적 질문에 총체적으로 답하는 인간입니다.

사르트르가 구현한 철학자는 바로 그 용어의 정확한 의미에서, 그러니깐 존재, 삶, 정치 등 온갖 문제에 포괄적으로 답한다는 점에서 예언자의 형상입니다.

우리는 이런 총체적 역할에 조금은 눌려 있었고 조금은 지치기도 했어요. 그런 탓에 우리 세대는 사르트르의 입장에서 멀어진 것이죠. 그를 닮는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적어도 사회과학은 중요한 질문들을 제기하고 있으며, 일상의 사회세계에서 제기하는 것보다 훨씬 더 훌륭하게 제기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언론계나 평론계, 또는 사이비 과학계에서 제기하는 방식보다 훨씬 더 훌륭하게 문제를 제기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회과학의 임무입니다.

부르디외: 제 작업이 기여한 바가 있다면, 그중 하나는 과학 그 자체에 과학적 시선을 돌려줬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사회학자는 [자기 자신의] 특수한 사례를 보편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회학자인] 저는 남성/여성, 뜨거운/차가운, 건조한/습한, 높은/낮은, 지배계급/피지배계급 등으로 구성된 저만의 고유한 사고범주, 분류체계, 분류틀, 구분법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보편화하는 것이죠. 이는 어떤 경우에 시대 착오를 빚어내고, 다른 경우에는 자계급 중심주의를 가져옵니다. 각각의 경우에 문제는 자기 자신의 질문체계를 문제화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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