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현실이나 진실보다 더 다양하고 풍부하다. 이는 우리가 이야기를 필요로 하고 이야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근본 이유이다.

이야기는 죽지 않는다. 다만 때때로 경색되고 활력이 줄어들 뿐.

이야기는 인류의 원시적 충동 가운데 하나다. 또한 이야기는 인류가 주변 세계를 이해하는 최초의 수단이기도 하다.

이론과 분석의 능력을 충분히 발취하기에 앞서 인간은 신기하고 낯설고 무한의 공포나 최대의 희열을 일으키는 환경에 처했을 때 이야기로 대응해 나갈 수 있다.

거대한 사건일수록 현실에서 괴리되는 ‘초현실‘의 혼란이 생기기 쉽다.

우리는 그 속에 이입하지 못하고, 사건을 진실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때 우리를 도울 수 있는 것은 이야기뿐이다. 이야기가 거대한 사건 속에서 개개인의 세세한 사정을 드러내면, 한 생명의 극적인 이야기를 통해 거대한 것이 작아진다.

이때 우리는 그 거대함을 보고, 듣고, 심지어 품에 안을 수 있다. 그리하여 엄청난 사건과 숫자 앞에서 입을 벌린 채 어쩔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진정 울고 웃을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자꾸자꾸 이야기로 돌아가는 것은 원래 우리에게 속하지 않지만 잠시 구체성을 띠고 나타난 초월적 사물을 느끼기 위해서다.

이야기는 사람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 거대하고 추상적인 사물을 사람과 이어주는 작은 출렁다리와 같다.

이야기는 우리를 세속을 벗어난 곳으로 데려다 놓고, 소박하고 천진한 마음에 다가서게 해 준다. 소박하고 천진한 마음은 우리가 계산을 걷어 내고 사랑에 가까이 가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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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도 숨겨 놓지 않았지만,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서사는 아름답다.

철저하게 세속적이고, 철저하게 고독하며, 철저하게 방대한 훌륭한 서사는 하나하나의 서사가 무의미함으로써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강렬한 체험을 남에게 전하고자 할 때, 우리는 이야기 자체가 된다. 이야기가 우리에게 빙의하여 자기 자신을 이야기하게 만든다. 우리는 그때 이야기의 매개 또는 그릇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야기는 살아 있기 때문에 잘라 내면 피가 난다. 이야기를 도중에 갑자기 중단당한 그의 침묵은 끊긴 이야기가 지르는 조용한 비명이었다.

자기 자신이나 세계는 서사를 이야기할 뿐 아니라 서사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러한 서사는 갑자기 중단당해 찢겨 나갈 때가 있다. 또 서사는 때로 그 자체가 파탄을 내고, 다른 서사와 갈등하며 모순을 일으킨다.

서사는 ‘절대로 벗을 수 없는 안경‘ 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서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 자기 자신이나 세계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마주할 수 없다. 그러나 서사가 중단되어 찢겨 나가 모순을 일으킬 때, 서사의 바깥쪽에 있는 ‘무언가‘가 어렴풋이 이쪽을 엿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여기에는 없는 어딘가를 꿈꾸며 창이나 문을 열고 나간다. 원래 있었던 곳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고, 돌아가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러한 여행 도중에는, 더 이상 나아가면 두 번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르는 지점이 있다. 그런 경험이 때로 찾아온다.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시간이란 것이 있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시간‘이란 것도 있다는 단적인 사실을, 서로 알고 있다. 그것을 공유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누구도, 누구에게도 손가락질을 받지 않는, 평온하고 평화로운 세계, 자기가 누구인가를 완전히 망각한 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세계, 그것은 우리 사회가 꾸는 꿈이다.

우리 다수자들은 ‘국가‘를 비롯한 다양한 방벽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다. 그 때문에 벽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다.

벽이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벽에 의해 비호를 받고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국가에 의해 가정이나 동료로부터 찢겨 나가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것들을 국가와 떼어 내어 생각하는 일이 허용된다.

다양한 ‘특권‘에 의해 가장 개인적이고 내밀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런 생활에도 개인적인 고민이나 고통은 한없이 존재하지만, 다수자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문제로서 그것을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일이 ‘가능하다.‘

그렇게 벽에 의해 보호받으며 ‘개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 우리의 마음은 벽 바깥의 타자에 대한 까닭 없는 공포에 지배당하고 있다.

확실하게 우리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타자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그리고 불안과 공포와 두려움은 지극히 쉽사리 타자에 대한 공격으로 변한다.

우리는 먼 사람에게 냉혹하고, 가까운 사람에게 약하다.

우리는 각자 단편적이고 불충분한 자기 안에 갇혀 있다. 자기가 느끼는 것이 정말로 옳은지 어떤지 확신을 갖지 못한 채, 타자나 사회에 대해 개입한다. 그것이 가닿을지 아닐지는 알지 못하는 채, 끝도 없이 병에 담긴 언어를 바다로 흘려 보낸다.

우리는 각자 단편적이고 불충분한 자기 안에 갇혀 있다. 자기가 느끼는 것이 정말로 옳은지 어떤지 확신을 갖지 못한 채, 타자나 사회에 대해 개입한다. 그것이 가닿을지 아닐지는 알지 못하는 채, 끝도 없이 병에 담긴 언어를 바다로 흘려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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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복을 누린다는 뜻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나라를 회복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과 그분의 아들 예수를 통해 그 약속이 성취되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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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쯤이면 자기 시간을 오롯에 살아낼 수 있을까? 하루를 여원에 잇댈 때이다. 하나님이 품고 계신 역사의 꿈을 우리의 꿈으로 수용할 때 우리는 영원의 한 부분이 된다. 영생이란 시간의 무한한 연장이 아니라 질적으로 변화된 시간 경험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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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철학은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말했던 ‘환대의 윤리‘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이때 데리다가 말하는 환대(hospitality)는 초대와는 전혀 다릅니다.

초대가 내게 필요한 사람과 나와 친한 사람을 계획적으로 ‘준비된 상태‘에서 맞이하는 것이라면, 환대는 전혀 예상치 못한 낯선 사람의 방문을 기꺼이 아무 준비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반 일리치가 실천한 우정은 특정한 얼굴이 떠오르는 ‘친한 사람‘이 아니라 완전히 ‘낯선 사람‘을 향해 작동하는 커다란 사랑(charity)을 향해 완전히 열려 있는 마음입니다.

이기심은 자아를 방어하기 위한 강력한 심리적 무기이지만, 때로는 자아의 확장을 가로막는 강력한 장애물이 되기도 합니다.

정의란 누군가가 규정하고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매 순간 다시 창조해야 하는 열린 개념‘임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정의감의 밑바탕에는 항상 타인을 향한 사랑, 나 자신을 향한 믿음, 그리고 이 세상을 향한 무한한 사랑이 깔려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자아‘를 놓는 순간, 내가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을 놓아 버리는 순간에 다른 존재와 협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집니다.

내가 아닌 다른 존재와의 교감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할 때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합니다.

내 아픔과 상처와 슬픔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픔, 당신의 상처, 그들의 슬픔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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