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철학을 통해 제대로 싸우는 존재가 된다. 지금 여기에서 나의 안에 품은 희망을 관념의 조각이 아닌 현실이 되게 하려 한다.

살을 찢고 현실이 되게 노력한다. 그 고난이 싫어 도망가는 존재는 철학이 아니다.

철학이란 ‘나‘가 ‘나‘로 존재하기 위해 ‘우리‘가 ‘우리‘로 존재하기 위해 저항하는 것이며, 그 저항으로 인간은 온전한 주체가 된다.

비록 물리적으로는 남의 아픔이지만 남의 아픔이 아닌 우리의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이 공감이 존재하는 순간 이미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고, 우리가 존재하는 그 바탕엔 이미 공감이 존재하는 것이다.

씨앗은 싹을 내기 위해 살을 찢어야 한다.

그것이 아프다고 말로만 염원을 말한다면 씨앗이 제대로 된 씨앗이 되지 않는다. 쓰레기다. 역사가 정화해서 버릴 쓰레기다.

내 안의 울림을 따라 울리면 된다. 너에게 나를 보고, 너의 울음에서 나의 울음을 보고, 너도 너의 울음도 나에게서 남이 아닌 우리 가운데 ‘나‘고 나의 울음일 때, 그렇게 실천하면 된다.

이 땅의 역사 안에, 그 아픈 고난 안에 나는 더욱 온전한 나를 너와 더불어 있음으로 마주하게 된다.

나와 너는 서로 더불어 있음으로 온전히 존재하는 서로주체성의 존재다.

나는 너의 고난 앞에서 깊이 생각하고, 너는 나의 고난 앞에서 깊이 생각한다.

그렇게 역사 안 고난은 생각을 깊게 한다. 철학을 철학답게 만든다.

"나는 우리 가운데 너와 더불어 있는 존재"라고 말할 때, 나는 우리 가운데 수많은 너의 고난을 남으로 두지 않고 함께 울고 분노하는 존재라는 말이 된다.

나는 나이면서 누군가의 도구가 아니며, 이 역사의 수많은 아픔에 울고 부조리와 부당함에 분노하는 그런 나다.

역사를 남으로 두지 않고, 민중을 남으로 두지 않고, 전체 속에서 나로 존재하는 그런 나다.

‘나‘의 자리에서 ‘나‘의 언어로 ‘남‘의 철학마저 ‘나‘의 자리에서 수용하고 고민하면서, 그렇게 ‘남‘의 철학에 대한 번역이 아닌 ‘나‘의 현실, ‘나‘의 고난, ‘나‘의 존재가 ‘나‘의 철학의 본바탕을 이루고 있어야 한다.

남을 배척하지도 않지만 나를 스스로 포기하지도 않는 그 자리에서 우리가 살아가듯이 우리의 철학도 그래야 한다.

뜻 있는 존재의 자리는 바로 ‘여기‘다.

살아 있다는 것은 진리 없는 동굴 속에서 미개하고 비참하게 살아 있다는 말이 아니다.

유럽의 밖에서 유럽을 그리워하며 있는 것도 아니고, 일본이나 중국의 밖에서 그들을 그리워하며 있는 것도 아니다.

정말 제대로 뜻 있게 있는 것은 바로 지금 여기 나와 너 그리고 우리에게 충실한 것이다.

바로 이곳에서 외치는 것이다. 그 당연한 외침을 외치며 시작하는 것이다.

함석헌은 ‘로고스‘가 ‘뜻‘이라고 한다. 민중은 ‘말씀‘을 들어야 하는 변두리에 있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이미 ‘뜻‘을 품은 존재다.

단지 스스로 자신의 가치와 뜻을 알아보지 못할 뿐이다. 더욱 치열하게 자기가 되어야 하고, 우리 가운데 나를 마주해야 한다.

나와 우리의 밖으로 도주하면 뜻으로부터 멀어질 뿐이다. 흩어진 존재, 홀로 있는 존재가 될 뿐이다.

함석헌은 ‘밖‘의 형이상학이 아닌 ‘안‘의 형이상학, 우리 자신의 형이상학, 나와 너가 ‘더불어 있음‘의 형이상학을 꿈꾸었다. 그 형이상학의 공간엔 영웅이 없다.

철학의 주체는 바로 이 땅 민중이다. 이 땅의 부조리를 가장 잘 알고, 그 가운데 가장 아파하고 가장 신성하게 그 부조리의 공간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이들은 바로 민중이다.

철학의 주체는 바로 민중이고, 대상은 그 민중의 존재론적 본질, 바로 신성함이다.

철학이 깊어지기 위해서는 그 철학의 공간과 시간을 채우는 아픔과 슬픔을 알아야 한다.

그 아픔과 슬픔을 품어야 한다. 이를 위해 그 아픔과 슬픔이 녹아든 언어로 구성되어야 한다.

발바닥 철학은 민중을 철학의 대상으로 여기자는 것이 아니다.

민중을 철학의 주체로 여기는 것이다. 민중이 철학의 주체가 되기 위해 그 민중의 언어를 포기해선 안 된다.

문익환의 철학은 민중의 언어로 씌어 있다. 민중의 언어로 이루어진 철학과 신학은 결국 몸으로 살아감을 통해 완성된다.

지식으로 끝나는 철학과 신학이 아닌 몸으로 사는 철학이고 신학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자기 내어줌‘은 신이 강제로 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스스로 이루어야 할 존재론적 평등이다. 그 평등이 사회에 주어질 때, 그 사회엔 구원의 공간이 열린다. 그 사회는 아름다운 공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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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복음서에 포함된 예수 관련 자료들이 (i) 지금까지 언급한 모든 평가를 고려해 볼 때, 특정 증거들이 진정한 것으로 설명되고 역사적으로 개연성 있는 모습을 보여 주는지, (ii) 증거들 간의 차이가 고려되면서도 그 속에 어떤 일관성 있고 통합된 모습을 보여 주는지, (iii) 추종자들이 구성해 낸 예수의 모습에 어떤 것이 적절한 기초인지, 달리 말해 그것들이 교회의 예수상을 형성하는 데 필요한 기초인지 물어야 한다.

대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비록 세부적인 사안에 있어 많은 작업을 수행해야 하고, 앞으로도 이에 대한 모욕들에 맞서 끊임없이 방어해야 하더라도, 기독론을 위한 역사적 기초는 존재하며 언제나 가능한 대안이 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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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은 역사의 중심에 민중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민중의 아픔, 민중의 고난이 없는 자긍심의 역사는 거짓이다.

그런 자긍심의 철학 역시 위선의 철학이며, 거짓의 철학이다.

민중을 말 잘 듣는 사람으로 두고 민족지상주의니 국가지상주의이니 하는 것은 제대로 된 한국철학이 될 수 없다.

진정한 한국철학에서 민중은 통치와 교화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있어야 한다.

역사의 혁명은 스스로 생각하는 민중에게 있지 말 잘 듣는 민중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철학은 주체성 속에서 가능하다. 그 주체성은 지금 나의 반성적 자각을 무시하고 얻어질 수 없다.

나의 반성적 자각은 나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나는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그렇다면 나의 반성적 자각도 지금 여기 있는 ‘나‘에게서 시작되어야 한다.

지금 여기 ‘나‘의 본질이 외부에서 강제되고 그 강제된 본질 속에서 구금된다면, 과연 그런 철헉아 ‘나‘의 철학이 될 수 있겠는가?

‘나는 나다‘라는 기본적인 명제 속에는 나의 개체성에 대한 긍정이 있다.

한 사람으로 역사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전체‘가 역사를 만든다. 민중 말이다.

그 민중에 대한 철학적 고민 없이 그 민중을 철학의 주체로 삼지 않으면서 단군 기원만을 찾아서는 진정 참된 한국철학을 할 수 없다.

자기 삶의 주인은 바로 자신이다.

민중 역시 스스로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구경꾼도 아니고 발전하는 역사 옆에서 시중을 드는 노예도 아니다.

권력자와 경제인이 역사의 중심인 곳에서 민중은 언제나 변두리다. 언제나 제삼자다.

그저 권력자와 경제인의 말에 의존하는 존재일 뿐이다. 과연 이것이 바른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민중이 자신의 역사를 스스로 만들어갈 것이며, 어떻게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겠는가?

천명이라며 순종하는 민중이 아니라 생각하는 민중으로, 스스로의 생각으로 자기 인생의 구경꾼이 아닌 주체가 되어야 한다. 생각하는 나! 그것이 가장 큰 희망이다.

한국철학은 한국을 구성하는 일부 계층만의 자기인식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한국 민중 전체의 자기 돌아봄의 행위여야 한다.

이 땅 민중의 언어로 이 땅 민중의 고난 가운데 깊어지는 그런 이 땅 민중의 반성적 사유 속에서 시작되는 것이어야만 한다.

모두 한국의 밖, 동굴의 밖을 보았다. 한국학이라고 하면서 한국이 얼마나 유럽적인 것을 품고 있는지 이야기하는 이들의 논의는 그리 큰 울림을 주지 못했다.

결국 진리의 기준은 ‘밖‘이고, ‘우리‘라는 이름의 ‘안‘은 변두리에서 ‘밖‘을 그리워하는 존재일 뿐이었다.

함석헌 철학의 시작은 ‘지금 여기의 긍정‘이다. 삶의 긍정이고 역사의 긍정이다. 바로 여기 무엇인가 끝없이 부족한 결핍의 공간에 대한 긍정이다.

함석헌은 외적 초월이 결국은 민중을 무시하는 데로 이어질 것임을 알았다.

내적 초월의 형이상학에서도 한국은 결핍의 공간이며, 결핍의 공간이어야 한다.

답이 ‘남‘에게 있다는 의미에서 결핍이 아니다.

어떤 하나의 답으로 채워진 강요된 공간이 아닌 빛이 빛으로 뜻을 품을 수 있는 공간이란 의미에서 비워진 공간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와 너를 마주할 수 있는 공간, 빛이 빛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란 의미에서 비워진 공간이다.

이런 공간에서 가장 우리다운 우리는 우리의 ‘밖‘ 본질에 답이 있지 않다. 우리 ‘안‘에 있다.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마주한 우리 자신은 우리 스스로 우리의 주인이 되려 하지 다른 주인을 찾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다운 ‘나‘가 되기 위해 나는 나의 ‘안‘에 충실하면 된다.

나다운 나가 되기 위해 나를 더욱 긍정하며 나의 살을 찢고 싹을 내야 한다.

고난을 이기고 희망을 ‘나‘의 안에서 내야 한다.

내적 초월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외부에서 나를 억누르는 그 억압의 존재론적 속박을 이기고 ‘나‘의 안에서 ‘나‘의 살을 찢고 안으로부터 희망의 싹을 내는 그 초월, 더욱 나다운 ‘나‘가 되기 위해 ‘나‘의 안에 더욱 충실한 바로 그런 의미에서의 초월이 내적 초월이다.

고난의 주체는 ‘우리‘이고 ‘나‘다. 그러면 그 고난으로 만들어진 ‘우리의 역사‘와 ‘나의 삶‘은 남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고 나의 것이 되어야 한다.

남의 답으로 지금 여기 ‘나‘와 ‘우리‘의 아픔을 치유할 수 없다.

고난의 주체인 ‘우리‘와 ‘나‘가 온전히 ‘우리‘와 ‘나‘의 철학에서 주체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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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역사 속에서 자기 주체성을 만들어낸 것이 이 땅의 민중이다.

그리고 고난 속에서‘나‘라는 인간의 주체성을 만든 것이 나란 존재다.

고난의 언어를 알지 못하는 철학은 이 땅 민중과 나에 대한 어떤 철학적 행위도 온전히 할 수 없다.

한다 해도 그것은 가짜 철학일 뿐이다. 진짜 철학은 이 땅 가득한 고난, 그 고난의 언어를 알아야 한다.

가만히 앉아 자해(自害)한 역사가 아니다.

수난의 역사, 당함의 역사, 억울함의 역사를 살았다.

정말 이 땅에서 이 땅 민중을 위한 철학을 하기 위해서는 그 고난의 역사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그 고난의 주체성 앞에 마주 서야 한다.

한국철학의 ‘회임‘과 ‘출산‘은 한국 사회의 부조리 속에서 가능했다.

낡은 시대의 고난 속에서 가능했다. 그 고난은 죽으라는 고난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새로운 것이 스스로 출산해내는 과정이다.

고난은 새로운 희망을 품은 공간이며, 진짜 한국철학은 바로 그 품은 공간에서 새로운 질서와 정신을 출산해냄으로 가능하다.

이 땅 민중의 ‘고난의 언어‘로 민중의 이성으로 치열하게 고민함으로 스스로 "너 자신을 알라"는 철학의 명령에 반응하는 진짜 한국철학은 바로 그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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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주체성은 자기반성으로 가능해진다.

그러나 반성과 돌아봄, 바로 그 회상은 나와 더불어 있는 ‘너‘없이는 불가능하다.

너를 만난 ‘나‘가 진짜 나이며, 너와의 시간과 공간이 비록 지난 일이라도 지난 일이 아닌 ‘나‘란 존재의 한 부분이 되어 있는 것이 바로 ‘나‘이다.

우리 가운데 ‘나‘는 ‘너‘와 더불어 존재하며, 너의 고난을 ‘남‘의 고난으로 두지 않고 ‘우리‘의 고난으로 두며, 고난 앞에서 더 깊게 ‘우리‘를 사유하게 한다.

우리가 한낱 ‘사유의 존재‘(ens rationis)가 아닌 ‘현실의 존재‘(ens reale)가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조건이 있을 때 가능하다. 그때 고난 앞에서 우리는 더욱더 단단해진다.

고난의 역사는 이어진다.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고난은 절망의 순간이 아니다. 아픔의 순간이고 슬픔의 순간이지만 절망의 순간이 아니다.

고난은 희망의 시작이다. 희망은 ‘나‘의 앞에 누군가를 ‘우리‘ 가운데 ‘너‘로 부르며 시작한다.

손잡고 나갈 이가 있다는 것에서 시작한다. ‘홀로 있는 나‘가 아닌 ‘더불어 있는 나‘가 되면서 시작한다.

역사 속 ‘나‘는 오직 홀로 있지 않다.

더욱 깊어지는 철학이란 그 슬픔 가운데 아파하는 이들의 슬픔, 그 슬픔 기억으로 아파하는 이들의 슬픔. 그 슬픔을 남의 슬픔으로 돌리지 않는 철학을 말한다.

‘남’의 슬픔이 아니라 ‘우리’ 안에 ‘너’의 슬픔으로 안아주는 철학이어야 한다. 이들을 안아주지 않는 철학 앞에서 민중은 ‘철학의 부재’ ‘생각의 부재’를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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