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이라는 인물은 그 이전이나 그 이후에 오는 다른 어떤 사람과도 쉽사리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의 출생과 어린 시절 이야기가 이미 이례적으로 상세하게 묘사되는 가운데 그의 시작의 특별함을 보여 준다. - P189

우선 사울과 다윗 사이에서 매우 파란 많은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것에 관해 보도하는 사무엘상 17장에서부터 사무엘하 1장에 이르는 기록들은 분명 여러 가지 종류의 전승 자료들이 결합된 것이며, 그것들은 다만 이따금씩 설명적인 암시들을 통해서 해석될 뿐이다. - P197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종교의 중심지가 된다. 나중에는 심지어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제의적 예배를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된다. - P204

현재는 이 모든 것이 아직 먼 미래의 일로 남아 있지만, 예루살렘으로 법궤를 가져온 것은 앞으로의 발전을 위한 기초를 놓는 첫 번째 조치였다. - P204

법궤가 지성소 안에 안치된 후 시내산에서 일어난 바 있는 그러한 일이 벌어진다. - P217

즉, "구름"과 그 안에 있는 "야웨의 영광"이 성전을 가득 채운다. - P217

그래서 일찍이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제사장들이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왕상 8:10 이하; 참조. 출 40:34 이하). - P217

이로써 하나님은 공식적으로 성전 안에 자신의 거처를 가지게 되신다. - P217

따라서 법궤뿐 아니라 전체로서의 성전이 시내산에서 이루어졌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근본적인 만남과의 연속성 속에 놓이게 된다. - P217

그러나 그런 다음 다시금 상세한 재앙 예고를 포함하고 있는 "만일"이 뒤이어 나온다(6-9절). - P222

이때 솔로몬을 향하던 호칭 "너"가 전체로서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너희"로 바뀐다. - P222

만약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난다면,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셨던 땅에서 추방되고 성전도 파괴될 것이다. 이 때문에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 P222

이로써 솔로몬 통치의 두 번째 시기가 안내되거나 준비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재앙 예고는 솔로몬의 시대를 훨씬 넘어서고 있으며, 벌써부터 성전 파괴와 포로에 대한 경험들이 감지될 수 있게 한다. - P222

다윗은 기준점을 제공하는 이상적인 인물로 지칭된다. 후대의 모든 왕은 이런 다윗을 기준으로 평가된다. - P224

동시에 솔로몬은 이런 이상적인 인물상에 완전히 부합되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 첫 번째 인물로 등장한다. - P224

이런 중대한 국면에서 이제 한 예언자가 출현한다. 다윗의 후계자로 솔로몬이 지명될 때 예언자 나단은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 P225

그러나 그 이후로 솔로몬의 이야기에는 어떤 예언자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제 실로의 예언자 아히야가 등장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왕의 대항 세력으로서 나타난다. - P225

이것은 바로 하나의 극적인 전환점을 제공한다. "궁정 예언자"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 - P225

지금으로부터 예언자들은 왕정에 반대하거나 개별 왕들을 반대하는 입장에 서서 행동한다. 아히야는 이런 예언자들의 긴 대열 중 첫 번째 사람이다. - P225

결국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 시기에 대한 총괄적인 회고는 그것의 시작과 끝이 예언자들의 말들을 통해 결정적으로 각인된다는 사실을 또한 보여 준다. - P229

말하자면, 그 예언자들의 말들은 이 시기에 대한 하나의 틀을 형성한다. - P229

다윗은 사무엘에 의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삼상 16:1-13). 그리고 그가 기름 부음 받은 것은 다윗이 하나님께 거절당한 사울에 대한 대안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통해 특별한 중요성을 획득한다. - P229

훗날 나단은 다윗에게 그의 왕조의 존속을 약속한다(삼하 7장). - P229

이스라엘 왕정의 첫 번째 시기에 대한 종결의 가능성은 우선 솔로몬에게 주어진 꿈의 환상 속에서 포착된다(왕상 9:1-9). - P229

그러나 그런 다음 실로의 아히야를 통해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다윗 왕조의 통치가 결정적으로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는 한 예언자가 등장한다(왓앙 11:29-39). - P229

이처럼 이 시기에 대한 시작과 하나님의 확증과 종결은 세 명의 예언자들에 의해서 각인된다.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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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 특별한 방식으로 선택된 백성, 즉 ‘제사장과 같은" 백성이요 "거룩한"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만났다. - P115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매우 장엄하게 그 백성과 한 언약을 체결했다. - P115

그리고 결국 그 백성 자신은 자신들의 대표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았다." 이보다 더 높고 강력한 하나님과의 만남은 더 이상 상상하기 어렵다. - P115

성막의 설립은 한 장소의 조성(造成)을 의미한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 가운데 "거주하신다." - P116

그렇게 함으로써 일회적이고 다시는 되풀이될 수 없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과의 만남이 그의 대표자들을 통해서(24:9-11) 이루어진 후에도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현존하시기를 원하신다(25:8).

하나님은 이 언약을 목이 곧고 죄가 있는 백성에게 허락하신다. - P122

이것에 대한 토대는 순전히 하나님의 용서다. 여기에서 또 다시 노아 언약과의 평행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 P122

즉, "인간의 마음이 꾸며 내고 생각하는 것"은 여전히 악하다(창 8:21). 이와 같이 이스라엘도 "목이 곧은" 백성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은혜로 이런 장애물을 극복하시고 새롭게 자신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신다. - P122

그리고 첫 번째 언약의 보존이 사람의 행동에 존속되지 않는 것처럼, 시내산의 언약 역시 그렇다. - P122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죄성을 아심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복원시키셨기 때문이다. - P122

출애굽기 6:7 이하에 의하면 출애굽은 조상들에게 약속한 땅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기 위해서 일어났지만, 29:46에 의하면 "내가 그들 가운데 거주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 - P126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자신의 백성 가운데 하나님의 거주하심에 방향이 맞춰져 있다. - P126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의 거주하심은 동시에 그분의 "거룩함"의 지속적인 현존을 의미한다. - P127

그분의 "거처"는 그분이 직접 거룩하게 하시는(출 29:43 이하) "성막"이다. - P127

이제 이스라엘은 이 거룩함을 유지하고 또한 계속해서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이 거룩함을 유지하고 또한 계속해서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거룩함의 손상 이후 그 거룩함을 항상 다시 회복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 P127

이런 거룩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직접 이스라엘에게 보조 수단으로서 규정들을 주신다.

민수기가 보도하는 시기는 뒤따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역사를 위한 본보기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 P138

이 시기에는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받은 하나님의 계명들과 이 계명들을 지키기에 역부족인, 계속해서 밝혀지는 이스라엘의 무능 사이의 긴장이 지배한다. - P138

광야 세대가 하나님의 위대한 현현과 시내산에서의 율법 수요에 참여하는 가치를 인정받았지만, 그들은 이 계명들을 따라 사는 삶을 포기했다. - P138

그들의 운명에서 두 가지 사실이 표본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난다.
첫째, 사십 년의 고난의 시기에서 표현된 하나님의 징벌이다.
둘째, 그것을 통해 결국 자신의 언약에 신실하시며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다.
이 두가지는 이스라엘 백성 역사의 이어지는 시기들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반복된다. - P138

앞에 있는 오경의 다른 책들과는 달리 이 책, 곧 신명기는 서사적인 요소를 거의 포함하고 있지 않다. - P139

이와는 달리 연설뿐만 아니라 율법들도 이 낱말의 좁은 의미에서 "신학적인 것"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증거제시와 설명들, 그리고 논쟁적인 숙고들을 포함하고 있다. - P139

이런 점에서 신명기는 아마도 히브리어 성경 가운데 가장 신학적인 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P139

게다가 이 책은 중심적인 위치를 통해 오경에 대한 전체 이해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와 더불어 히브리어 성경에 대한 전체 이해를 위해서도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 P139

이스라엘은 토라를 통해서 규정된다. 이스라엘은 토라를 가진 백성이다. - P141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모든 다른 민족들과 구별되며(신 4:6), 동시에 이스라엘은 토라의 증여를 통해 동시에 자신의 하나님이 가까이하는 백성이다. - P141

이것은 그 어떤 "큰 민족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가까운 하나님의 모습이다(7절). - P141

이스라엘이 이를 통해서 바로 강대국들의 변화무쌍한 패권이 그 특징으로 나타나는 주변 세계 안에서 "큰 백성"이 되지는 않는다. - P141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작은 백성 이스라엘에게 관심을 기울이시고, 그분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은 이스라엘 조상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다(37절). - P144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심도(37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라는 요구처럼(40절), 이스라엘 조상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고 있다. - P144

이처럼 신명기 4:1-40의 단락은 신명기 신학의 중요한 기초들을 매우 상세하고 동시에 집중적으로 전개한다. - P144

한 장소에 희생 제사를 집중화하는 것은 신명기의 결정적인 원칙들 가운데 하나이다. - P149

언약책은 이미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특정한 장소들에서 "알리실"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말했다(출 20:24). - P149

이 본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찾아 오셔서 그에게 복 주실 여러 장소를 추론하게 한다. - P149

그러나 여기 신명기에서는 이스라엘이 자신의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허락된 곳은 오직 한 장소이다. 다른 모든 장소는 명백히 배제된다(13절 이하). - P149

한 장소에 대한 제의 집중화의 요구는 ‘쉐마 이스라엘‘에서 설명되었던 바와 같이 첫 번째 계명에 대한 하나의 구체화이다. - P149

즉, 한 분 하나님, 하나의 제의 장소이다. 예루살렘으로의 제사 집중화는 신명기에서 가장 오랫동안 효력을 발생시키는 계명들 가운데 하나이다. - P149

정경의 첫 번째 부분, 즉 "토라"의 마지막에서 "예언자" 모세의 특별한 위상을 중요한 의미를 갖도록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어서 정경의 두 번째 부분, "예언서들"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통해서 토라에 대한 결정적인 강조점을 갖게 한다. - P163

현재 예언서는 토라 다음에 놓여 있고 동시에 토라에 귀속되며 토라 아래에 위치하게 된다. - P164

오경, 즉 "토라"는 정경으로서 히브리어 성경의 기초이며 핵심이다. - P165

정경으로서의 히브리어 성경의 다른 어떤 부분도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자기 이해에 관한 중심적인 진술들을 이렇게 풍부하고 집중적으로 포함하지 않고 있다. - P165

이뿐 아니라 다른 어떤 부분도 이렇게 집중적이며 다양한 방법으로 편집되고 형성되지 않았다. - P165

이런 생성사로 인해 오경은 끊임없이 놀라운 방식으로 다음 두 가지를 보여 준다. 즉, 내적인 긴장들과 심지어 대립들까지 그리고 동시에 거대한 통일성과 완결성을 보여 준다. - P165

오경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가장 먼저 정경적 최종 형태가 완결된 부분이다. - P165

이런 사실에서 오경 안에 포함된 전승들의 수집과 구성적인 형태를 갖추게 한 것에 인정되었던 중요한 의미가 드러난다. - P165

동시에 오경은 정경으로서의 히브리어 성경의 다른 부분에 대해 토대를 제공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 P165

대부분의 다른 책들은 오경에 대한 지식 없이 결코 완전하게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그 책들은 직간접적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오경과 연관된다. - P165

죄인된 인간은 이스라엘이 그랬듯이, 하나님이 언약 체결을 통해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긍휼하심 위에서만 살 수 있다. - P167

이것은 이스라엘 후대를 향한 모세 전승의 결정적인 메시지 중 하나다. 즉, 그것은 이스라엘이 오직 한 사람에 의해서 인도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 사람은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에 있고, 이 관계를 통해서 이 백성의 인도를 위해 필요한 지시 사항을 받는다. -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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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는 모세의 위치는 "자신의 주인에게 신실한 자이며 자기 주인의 모든 ‘살림‘을 위임받은 최고로 높은 종의 위치"와 비교된다. - P102

하나님은 세계의 창조자이시고, 이로써 동시에 열방의 창조자이시다. - P104

하나님은 자신과 특별히 관계를 맺기 위해 어떤 백성을 부를지를 자유롭게 결정하실 수 있다. - P104

이로써 이스라엘의 역사는 창조와 함께 시작된 세상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갖게 된다. - P104

이런 특별 위치는 아브라함의 부르심에서 이미 구상되어 있었고, 이제는 공식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확장된다. - P105

이런 이스라엘의 특별 위치의 결과는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 될 것이다. - P105

이스라엘의 해방은 그 자체로 자유롭게 하시는 하나님에대한 배타적 관계를 포함한다. - P106

다른 신들과의 모든 관계는 이스라엘에게 자유의 근거가 되고 또한 이로써 존재의 근거가 되신 이 한 분 하나님에게 직접적으로 대항하는 것이 될 것이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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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의는 그의 약속에 대한 신실함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런 신실하심을 믿었고, 그는 그것을, 말하자면, 자신의 "인정"을 통해 확인했다. - P57

여기에서 "언약"은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즉, 하나님의 약속과 인간의 응답이 그것이다. "언약의 징표"로서 할례(11절)는 언약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다. 그리고 그것의 이행은 무조건적인 의무가 된다. - P58

그러나 언약의 존재, 즉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약속의 유효성은 그것을 지키지 않을 때도 의문시되지 않는다. 그 결과들은 오직 개별적인 범죄자에게 닥친다. - P58

마지막으로 그는 하나님과 벌이는 신학적 논쟁 가운데 다음과 같은 물음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을 제시한다. - P61

그것은 하나님이 예루살렘이 파괴되도록 허용하셨을 때 하나님이 과연 의롭게 행동하셨는가의 여부에 관한 질문이다(18:16-33). - P61

"온 땅의 심판자"이신 그분은 소돔에 대한 것과 같이 예루살렘에 대해서도 모두 의롭게 행동하셨다. - P61

"그들이 생육하였고 ··· 수가 많아졌다"(7절)라는 표현은 족장들에게 주신 수많은 자손에 대한 약속(창 17:6; 28:3; 35:11) 뿐만 아니라 인류의 첫 번째 부부와 홍수 이후 살아남은 노아 가족들에게 하신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요청(1:28)을 분명하게 떠올리게 한다(창 9:1과 출 1:7에서 동일한 낱말 "충만하다"가 사용되었다). 그것은 이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위한 하나의 창조적인 새로운 시작과 같다. - P70

출애굽기의 3장과 6장은 여러 가지 면에서 하나의 본질적인 기능을 한다. 이 본문들은 여기에서부터 오경의 끝에 이르기까지 지배적인 인물로 나타나는 모세를 소개한다. - P86

이 본문들은 모세라는 인물을 이스라엘에게 야훼의 이름을 분명하게 고지하는 것에 관련시킨다. 그리고 이 본문들은 곧 닥칠 노예 상태에서 이스라엘의 해방을 예고한다. - P86

파라오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적대자이다. 그는 야훼가 함께 하실 것을 약속했던 그 백성 이스라엘을 압제한다. - P91

그는 매우 근본적인 방식으로 야훼를 "인지하는 것"을 거절한다. 즉, 그는 당초 야훼 알기를 원하지 않았고, 그를 알지도 못한다. - P91

또한 그래서 그는 야훼의 능력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을 더 강한 자라고 여긴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을 적대하는 신이 되게 한다. - P91

파라오는 하나님을 적대하는 신적인 세력을 대표한다. 이 세력은 강력한 왕의 형태로 등장하지만, 동시에 그 왕 안에서 "이집트의 신들"이 한 분 하나님을 대항하여 서 있다. - P92

그것들은 야훼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열방의 신들"을 대표하며 서 있다(시 96:5).

이스라엘의 출애굽 이야기에는 두 가지 정점이 있다. 유월절과 연결되어 있는, 이집트의 처음 난 것을 죽이는 마지막 "재앙"과 이집트 군대의 섬멸과 연결되어 있는, 이스라엘의 홍해 도하이다. - P94

두 가지 사건 모두 개별적으로 혹은 공통으로(예컨대, 시 136:10-15)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기 행하신 "표징과 이적"(신 6:22 외 여러 곳)으로서 회상될 수 있다. - P94

이집트로부터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신 -이스라엘의 관점에서 보면, 이집트로부터의 탈출, 즉 출애굽- 하나님의 행동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모든 미래를 위한 결정적 사건이다. - P94

시내산에서의 체류 전후 시기에 관한 보도들은 다시금 매우 복합적이다. - P98

한편으로 그것은 다양한 방식과 형태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시기이다. - P98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모세에게 대항하지만 결국 하나님께 대항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반항, 다른 말로 하면 이스라엘 백성의 반역에 관해 계속해서 보도된다. - P98

이 두 측면은 출애굽을 시작한 후 약속의 땅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모든 이야기를 통해 서로 얽혀 있고 유지된다. - P98

개별 이야기들의 유래와 그것들에게서 추론된 본래의 의미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본문들이 현재 맥락에서 어떤 중요성을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이다. - P100

이 이야기들은 모든 갈등을 다룬다. 그것들은 무엇보다도 "백성"과 "모세"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들이다. 그러나 모세는 바로 하나님의 대리인이다. - P100

그리고 백성의 탄식과 불평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자신을 향한 것이라는 사실이 그 이야기들 안에서 자주 언급된다(출 16:8; 민 11:1 외 여러 곳).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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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씨름하다 - 악, 고난, 신앙의 위기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
토마스 G. 롱 지음, 장혜영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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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문제는 신학적이고 성경적인 대답이 필요함과 동시에 더욱 실제적인 응답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 앞에 닥친 고통의 문제로 힘겨워하고 있다. 그들은 육체적 · 정서적 · 사회적으로 매우 구체적인 아픔을 겪고 있다. 그와 동시에 이러한 고통이 자신에게 발생하는 이유에 대한 선명한 대답을 듣지 못하여 더욱 혼란스러워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상황이 자신의 죄로 인해서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하나님의 큰 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고난 가운데 우리는 여러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가?', '하나님은 선하신가?', '하나님은 전능하신가?' 흔히 '신정론(theodicy)'이라 불리는 이 주제로 인해 많은 신학자와 철학자, 목회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들은 고통이 가득한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존재를 변호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저자인 토마스 롱(Thomas G. Long, 1946~)은 Witness of Preaching으로 이미 우리에게 친숙한 설교학의 대가다. 그는 지금까지 논의된 고난의 문제가 목회 현장에서 적실하게 적용되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진다. 그리하여 그는 신학적으로도 명료하면서도 고통의 한가운데서 울부짖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응답을 모색한다.


그동안 많은 신학자들은 네 가지 주요한 신학적 질문 중 최소한 하나를 포기하거나 축소하는 식으로 신정론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네 가지의 주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은 존재하신다. (2)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3) 하나님은 사랑이 많고 선하시다. (4) 무고한 고통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해롤드 쿠쉬너(Harold S. Kushner)는 이 문제를 하나님의 전능성을 양보함으로 극복하려 했다. 미국의 과정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정의에 수정을 가함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는 악의 기원을 피조물의 자유의지와 반역에서 찾았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의지론 또한 합리적인 여러 반박들 앞에 타당성이 크지 않음을 저자는 논증한다.


저자는 이러한 각각의 질문들에 대해 합리적이면서도 실제적인 해답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한다. 저자는 그동안의 접근방식을 모두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관점에서 배우고 계승해야 할 것들을 세심하게 분별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 사랑하심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특히 '무고한 고통의 경험'에 대한 문제는 조금 더 세심한 용어 사용으로 해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저자는 '무고하다'라는 용어보다는 '비극적'이라는 용어 사용이 훨씬 더 인간 삶의 실재와 일치함을 주장한다. 이러한 용어의 전환만으로도 꼬였던 실타래가 어느 정도 풀리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저자는 욥기를 새롭게 바라본다. 이를 통해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임을 역설한다. 신정론적 질문을 철학적으로 접근하고자 하면 우리는 질문에 대한 타당한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우리는 새로운 시각과 관점을 갖게 되고,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게 된다. 이러한 관점이야말로 그동안의 철학자나 신학자들이 갖지 못한 목회적 관점이며,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차이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알곡과 가라지 비유를 차근차근 해석함으로 고난의 문제에 대해 신학적이고도 실제적인  대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예수님의 이 비유를 통해 저자는 세 가지의 질문을 던진다. 이는 하나님께서 악에 대한 원인인지, 우리가 이러한 상황을 바로 잡을 수 있는지, 언제까지 이러한 상황이 계속될지에 대한 질문이다. 토마스 롱은 세 가지의 질문들에 대해 다각도로 분석하고 고찰함으로 매우 실제적이고 적실한 해답을 제시한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 선함,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악의 문제에 대해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상황과 환경이 변하고 한 사건에 얽혀 있는 많은 맥락들을 온전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가 접근하는 방식은 우리에게 많은 희망과 통찰을 준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방법은 모든 신학자와 목회자가 본받아야 할 모습이 아닐까?

신학적 용어로 볼 때 신정론은 비교적 새로운 것으로 겨우 삼백 년 전 철학자 라이프니치가 고안해낸 용어다. 어원적으로 신정론(theodicy)은 두 개의 그리스어 단어인 "theos"(하나님)와 "dikē(정당성)"가 합쳐진 것으로 본래 의미는 하나님의 정당성이다. 끔찍한 참사가 발생하고, 과도하고 정당하지 않은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설명하셔야 할 부분이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그 정당함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는 그럴듯한 변호가 필요하며 그것을 담당하고 나선 것이 신정론이다 - P16

어만은 하나님의 능력, 현존, 자비에 관해 성경이 주장하는 것과 인생의 엄연한 사실들 사이에 벌어지는 충돌을 대수롭지 않게 치부할 수가 없었다. 세상은 고통당하는 인간의 결핍과 고난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어만이 볼 때 하나님은 그것에 대해 어떤 일도 행하기를 꺼려하셨다 - P52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하나님은 선하고 사랑이 많으시며, 무고한 고통 역시 존재한다는 이 네 가지 가설 사이에서 일어나는 외형적 충돌은 라이프치니 시대로부터 신정론 문제와 관련하여 대표적인 공식을 형성해왔다. - P56

오늘날 우리가 설교하는 대상은 천사나 스랍이 아닌 사람들이다. 이들 중 다수는 교회에 소속된 만큼이나 확실히 세속적인 세상에 소속되어 있으며, 신앙에 한쪽 발을 딛고 있을 수는 있지만 다른 한쪽 발은 과학과 이성의 세상에 굳건히 내려놓고 있다. 우리가 그들에게 복음을 믿으라고 할 때, 이 복음은 어떤 식으로든 그들에게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을 현대적이고 합리적인 과학의 범주에 맞추어 축소시켜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반대로 복음이 때로는 바로 이 범주들에 도전하며, 사람들에게 이해되는 것과 사실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의 가능성을 확장하기 위해 시도한다는 의미다 - P59

신자들이 울부짖음의 형태로 우리 목회자들이 제공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기대할 때, 함께함의 사역을 넘어서야 하는 이유는 더욱 커지게 된다. 영문도 모른 채 고통 당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임재와 역할은 단순히 추상적인 난제나 신학적인 게임이 아니다. 매일 매일 우리 교인들은 고통을 마주하고 있으며, 이들의 신학은 충분하지 않다. - P71

신정론 문제와 관련하여 하나님과 악, 고통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통찰이나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해도, 그것이 깊은 상실과 비통 속에서 고통 받는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아니라면 그것은 이런 "지혜"가 실제로는 복음이 아니며 따라서 전혀 언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믿을 만한 표시다 - P81

세상의 실제적인 고통, 곧 가설적 문제로서의 고통이 아니라 실제 인간의 고통 앞에서 그것이 하나님이 영혼을 빚기 위해 창조의 일부로 주신 도구라고 주장하는 신학은, 거기에 제아무리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종말론이 가미되었다고 해도 기독교적이라 할 수 없다. 세상을 구속하기 위한 필수 요인으로 어린아이가 고문당하는 것을 요구하거나 허용하는 하나님은 악의 주체이며 도덕적 괴물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 P142

아이의 죽음은 "무고하다"라기보다는 "비극적"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 이런 용어의 전환은 아이의 죽음이 인간의 삶의 실재와 전적으로 일치한다는 점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비록 이런 비극이 인간의 삶이 마땅히 그래야 하는 바에서는 멀리 벗어나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말이다. 아이는 도덕적 책임으로부터 무고할 수는 있지만 인간이라는 조건으로부터 벗어나 있지는 않다. 이 조건은 인간으로서의 상태에 내재된 모든 위험과 가능성을 동반한다. 아이는 고난을 당했고 아이를 사랑하던 사람들 역시 고통을 당했지만, 이것은 아이가 무엇을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들의 고난은 그들이 인간으로서의 경험에 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 P149

욥기는 선하신 하나님과 무고한 고통이 어떻게 공존하는지에 대한 철학적 설명을 제공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또 하나님이 진정한 하나님으로서 바르게 이해되었을 때 우리가 인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위대한 책은 세상에 대해 희망을 가지도록 그림을 조작한 다음, 이런 세상을 인자하게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상상하는 우리의 도덕적 질서의 투영 앞에 엎드려 예배하고자 하는 편만한 종교적 충동에 대해 저항한다 - P156

우리의 경험이 우리의 신학적 우주를 붕괴시킬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엘리바스의 대답은 우리의 경험을 부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경건의 체계는 신적 섭리의 조건을 조작하도록 허용했고, 경건의 공식에 도전하는 경험은 무엇이든 위협 요소로 신속하게 걸러내야 했다. 엘리바스는 과거의 길을 따라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표지판을 그리느라 분주한 나머지, 새로운 고속도로가 뚫렸으며 이전 도로는 사용이 금지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 P166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은 영원에서 시간 속으로, 미래에서 현재와 과거로 들어오셔서 외견상 악이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 심지어 우리 기억과도 전쟁을 벌이신다. 악에 속한 모든 것, 마지막 승리에 대한 헛되고 거짓된 주장, 현재에서 야기된 아픔, 우리 기억과 역사를 장악한 악은 모두 불살라질 것이다. 악은 승리할 수 없다. 이 악의 진짜 정체가 드러날 것인데, 바로 그것은 "무"(nothingness)다. -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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