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말에 급격한 산업화를 이룬 유럽 국가들과 미국은 민주주의 체계를 세우고자 노력했다. 미국과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난 뒤 사회정의와 개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헌법이 개정되었다.

자유주의 전통(좌파가 아닌 자유방임주의)은 에드먼드 버크의 보수적 자유주의와 애덤 스미스의 경제적 자유주의 속에서 출현했다

데이비드 흄은 경험주의적 지식의 문제뿐 아니라 정치철학에도 흥미를 보였고 특히 재화와 용역의 거래에 관심이 많았다

『국부론』 이후로 도덕철학은 한층 과학적으로 경제학에 접근할 수 있게 됐다.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개인의 이익을 위한 거래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사회 이익을 가져다준다. 따라서 스미스는 자유 시장에서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해 인간이 ‘타고난 자유’를 즐길 권한을 최대화해야 한다는 경제적 자유주의를 옹호했다.

자유와 권위 사이의 균형을 잡고자 하는 ‘전통 자유주의’는 정부가 시민의 자유에 최소한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벤담의 사상은 19세기 사회 개혁에 영향을 미쳤으며 후에 영국의 사회주의 운동의 토대가 되었다.

과학과 매우 흡사한 방식으로 벤담은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의 미적분학’을 통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으로 옳고 그름을 측정한다.’ 그는 같은 원칙을 정치에도 적용해 ‘모두가 한 사람에게 의지하면 아무도 한 사람 이상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벤담의 공리주의에서 행동의 타당성은 쾌락이나 고통이 어느 정도 생겨났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이 사상은 유럽 도덕 사상에 영향을 미친, 행동의 동기와 도덕적 ‘정언명령’을 토대로 한 임마누엘 칸트의 도덕철학 체계와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벌린은 소극적인 자유와 적극적인 자유 모두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적극적인 자유에는 위험이 따른다고 보았다

적극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개인은 폭군이 될 수 있는데 프랑스혁명 이후 로베스피에르가 대표적이다.

존 스튜어트 밀과 우정을 나누고 후에 결혼을 한 철학자 헤리엇 테일러는 여성의 동등한 권리를 수호하는 데 큰 발판을 마련했다.

프랑스와 영국 철학자들이 계몽주의 시대를 독식하는 동안 1780년대부터 철학은 독일어권에서 더욱 번성하기 시작했다.

임마누엘 칸트는 독일 철학 시대의 출발점을 연 위대한 독일 철학자다.

정반대인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관점을 하나로 통합하면서 칸트는 ‘선험적 관념론’이라는 형이상학을 제안했다

선험적 관념론은 우리가 감각을 통해 세상을 경험할 때 동시에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도 존재한다는 점을 인식하는 작업이다.

그의 사상은 셸링, 피히테, 쇼펜하우어, 헤겔 등에게 영감을 주었고 이들은 각각 자신만의 관념론을 발전시켰다

관념론은 또한 포이어바흐와 마르크스 같은 철학자들이 헤겔의 사상을 채택해 유물론적 관점에 대한 논쟁을 벌이게 만들기도 했다

이는 또한 종교에 대한 비판과 의구심을 증폭시켰으며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유명한 선언에 영향을 주어 무신론 철학을 촉발하기도 했다.

말년까지 합리주의자 위치를 고수한 임마누엘 칸트는 스스로 흄의 저서를 읽고 ‘독단’에서 깨어났다고 주장했다. 또한 과학의 진보에도 영향을 받아 경험에 기인해 얻은 증거의 중요성을 인정한다고 밝혔다.

우리가 감각을 활용해 세상에 대해 알아 가는 동안 경험 이전에 타고난 이해의 척도인 ‘범주’가 그 정의를 내린다는 것이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우리가 이해하고 추론하는 부분의 한계를 찾으려고 했다. 우리는 육체적 경험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지만, 우리가 경험할 수 없음에도 현실에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

칸트는 물자체와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을 분류했다. 물자체인 세상은 우리의 경험과 이해를 넘어 존재하기에 선험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감각을 통해 인식하고 이해하는 현상의 세계도 있기 때문에 두 가지 모두 경험적으로 실재하고 현상적, 선험적 이상이다.

칸트는 자신의 이론을 ‘선험적 관념론’이라고 불렀다. 과학이 현상 세계를 발견하는 동안 경험과 별개인 실체가 항상 우리의 이해 너머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칸트는 ‘선험적 관념론’을 인식론, 형이상학, 윤리를 포함한 종합적인 철학 체계로 발전시켰다

칸트 도덕철학의 초석이 된 것은 이성적인 존재로서 우리는 타고난 선과 악의 개념을 지니며, 자유의지가 도덕적 선택을 하게 만든다는 믿음에 있다.

칸트는 전통을 깨고 도덕성이 결과가 아니라 의도나 동기에 따라 판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언가의 옳고 그름을 정하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보편적으로 타당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 요지다.

칸트의 관념론은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의 철학을 통해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칸트 추종자였던 피히테는 물자체에 대한 개념을 거부했고 외부의 현실은 지각이 창조한 것이라는 완전한 관념론 체계를 제시했다.

피히테는 도덕 자체가 생성한 현실은 근본적으로 도덕적인 특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독일 관념론의 시대는 예술에서 낭만주의 운동이 성장한 시기와 우연히 맞아떨어진다. 자연에 대한 매료와 감정을 강조하는 낭만주의는 과학적인 합리주의와 산업화에 대한 반발로 생겨났지만 루소의 자연 상태와 스피노자의 범신론적 관점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독일 낭만주의 예술가, 작가, 지식인 무리 중에서 프리드리히 셸링은 자연을 기반으로 한 철학을 발전시켰다.

셸링에게 인간의 창의성은 자연의 발전이 정점에 올랐다는 것을 지각함을 대변한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칸트를 엄청나게 존경했고 현상과 물자체에 대한 그의 사상을 열정적으로 흡수했다. 저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1818년)를 통해 그는 이 사상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켜 두 가지 별개의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 세계에 두 가지 측면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세상은 외부의 표상과 내부의 의지로 경험하는 것이다.

칸트와 마찬가지로 게오르크 헤겔은 철학 ‘체계’를 발전시켰지만 칸트의 사상을 토대로 하면서도 그 사상 속에서 근본적인 오류라고 생각한 부분을 고쳤다.

헤겔은 추상적인 사물 그 자체에 대한 생각을 부정하고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의식 속에 구현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헤겔에게 존재는 인식 주체 속 하나의 완전체이며 그 대상인 외부 세계와 동일하다.

헤겔이 지칭하는 정신은 우리의 직관과 자각을 포함해 비물질적인 현실을 아우른다.

헤겔은 또한 경험의 토대는 독보적이며 변하지 않는다는 칸트의 ‘범주’에 대한 생각을 거부했다. 대신 그는 우리를 구성하는 의식 자체를 믿었고 이는 진화 과정의 일부로 변한다고 보았다.

현실을 역사적 과정이라고 설명하면서, 헤겔은 정신이 지속적으로 진화하는 현실을 구성할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 내재된 체계가 있다는 사상을 발전시켰다

모든 생각에는 모순이 담겨 있고 두 반대되는 생각 사이의 대립 관계가 새로운 생각이 출현하면서 해소된다는 것이다.

합은 정이나 반보다 더 풍부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사건의 역사적인 추이뿐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자각을 포함하는 정신이 그 자체로서 더 낫고 진정한 이해를 할 수 있도록 해 준다.

헤겔은 하나의 현실이 존재하며 이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라고 믿었다.

우리가 인식하는 현상은 우리 자신의 생각과 의식이라 할지라도 정신의 한 부분에 불과하며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시간이 흐르면서 지속적으로 발달한다.

결과적으로 시대별로 각각의 다른 정신인 시대정신이 존재하며 우리의 사고와 의식 방식도 이 특정한 발달 단계에 있다.

헤겔에게 상당한 영향을 받았지만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는 완전히 반대되는 철학을 발전시켰다. 관념론자 헤겔이 현실은 궁극적으로 무형이라고 믿는 반면 포이어바흐는 유물론자로 비물질적인 범주의 존재를 부정했다.

헤겔이 우리가 자신의 생각을 ‘완전한 정신’인 신에게 투영한다고 말하는 반면 포이어바흐는 한층 더 나아가 실제로 우리는 이상을 투영할 가상의 존재를 만들고 이를 ‘신’이라고 부른다고 주장했다.

그는 신학은 단지 인류학이며 신의 지시를 따르고자 애쓸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진정한 미덕의 원천을 탐구해야 한다고 밝혔다

포이어바흐의 도덕철학은 신의 덕보다는 인간을 근본에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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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론의 특징들이 입혀진 서판은 가장 기발한 문학적 양식 중하나를 보여주는 데, 이것은 과거에 하나님으로부터 전해졌다고 여겨지는 메시지인 예언들을 해석하거나 혹은 다시 쓰고, 보다 정확히 설명하거나, 신지영 수정하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 P161

묵시론은 더이상 전통적인 지혜(지식, sagesse)를 뒤집어 놓기를 망설이지 않는데, [이 종래의 지혜는] 땅 위에서 장수하는 삶을 부여하는 선과 죽음이라는 귀결을 야기시키는 악에 대해 널리 알리는 것이었다. - P161

묵시론은 또한 삶과 죽음 그리고 선과 악의 관계의 관하여 인류에게 새로운 전망을 부여 하기도 한다. - P161

종말의 때에 있을 심판은 사람들 각자를 고양시킬 기다림의 지평이 되어, 선(善) 곧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가르침에 부합하는 행동양식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 P161

시 문학은 또한 땅위에 현존하는 악의 존재를 설명할 길을 모색한다. - P161

묵시 문학은 창조로부터 하나님이 의도한 천체와 자연의 질서가 있음을 확언하지만, 현재의 시간에 땅 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악은 세계의 질서를 손상시킨다. - P161

묵시적인 기록들은 어떻게 이 질서가 재정립되고 심지어 피조세계가 새롭게 되는지 이야기한다. - P162

이러한 의미에 따라 자기 행동을 완수하는 자들, 즉 정의로운 자들은 죽음 이후의 삶이라는 보상을 얻게 될 것이다. - P162

요컨대, 묵시론(l‘ apocalyptique)은 묵시서들(apoc-alypses) 간의 세세한 내용에서는 편차가 있을지라도 하나의 진정한 사유의 체계다. - P162

신적인 비밀의 계시는 새로운 이상들을 정당화하는데 있어 중심적인 근거가 된다. - P162

새로운 이야기들은 기록 되고 이후 유대교에서 또 기독교와 이슬람교에서 풍부한 문헌들을 생산 해낸다. - P162

사본들에 관한 연구들은 텍스트들이 서로 다른 다양한 시대에 기록되었고, 구절의 제거나 추가가 있었으며, 여러 상이한 사본들이서로 조화를 이루거나 혹은 이러한 사본들 간의 경쟁에서 [서로 다른] 구절들이 나온 것임을 보여준다. - P163

[요컨대] 어떤 복잡한 편집의과정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 최종적 형태의 사본으로 알려진 텍스트는 오랜 역사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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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성과 권위에 대한 편견이 덜한 로크는 정부가 자율적 자유를 보호하고 시민들이 독재나 비효율적인 정부를 타도할 권리를 제공받는 조건으로 통치자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한층 평등주의적인 체계를 제시했다.

문명사회가 권리나 자유가 아닌 개인의 자산을 보호하려 하고 제약과 공정하지 못한 법이 불평등을 키웠다는 것이다.

계몽주의의 첫 번째 혁명은 군주제가 폐지되고 권력이 의회로 넘어간 영국에서 발생했다.

사회계약론에 매료되어 변화의 필요성을 설명했으며 미국에서는 영국인 토머스 페인이 철학을 정치 행동주의로 바꿔 놓았다

미국과 프랑스의 혁명은 모두 계몽주의 철학에 영향을 받아 ‘삶, 자유, 행복의 추구’라는 상호 유사한 정치적 목표를 내걸었다.

이성의 시대 혹은 계몽주의로 알려진 17세기와 18세기에는 종교나 관습적인 지혜를 받아들이기보다는 과학적 추론을 통한 지식이 발달했다. 이런 분위기는 유럽 대다수의 지역에서 합리주의라는 철학 사조로 등장했다

데카르트의 분명한 접근 방식은 수학적 방법을 철학적 물음에 접목시켜 철학사의 전환점이 되었다.

르네 데카르트는 형이상학과 인식론적 문제를 수학적 입증을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접근했다. 그는 의심스러운 모든 것들을 배제한 다음 분명한 진실과 수학적 이치 등 확실한 것부터 세워 나갔다.

많은 고대 철학자들이 인체 속 독립적인 ‘영혼psyche’의 존재를 믿었고 대부분의 종교 역시 불멸의 영혼이라는 범주를 지니고 있지만 이를 체계적인 방식으로 드러낸 인물은 데카르트가 처음이었다.

데카르트의 관점에서 동물은 단순히 물리적 세상의 한 부분으로 그 법칙에 따르며 기계와 같은 방식으로 행동한다. 따라서 동물의 행동을 자의식이나 정신적인 행동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러한 견해는 동물과 비슷하게 행동하지만 마음이 없는 기발한 로봇이 등장하면서 더욱 설득력이 높아졌다.

하나의 예시를 일반화하는 것은 잘못된 추정이다.

상식적으로 모든 인류〔와 심지어 동물까지〕는 내가 가진 의식과 비슷한 종류의 마음을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실제로 그렇다고 믿을 만큼 충분한 근거는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같은 물질로 이루어졌고 우주나 자연도 그렇기에 신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로크는 우리가 경험하는 객관적이고 측정 가능한 사물의 ‘주요 특성’과 주관적인 ‘부차적인 특징’을 설명한 반면 버클리는 우리가 실질적으로 전혀 경험을 할 수 없으며 오로지 그 특성만을 파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인과관계와 세상에 관한 지식의 확실성에 의구심을 품은 흄은 근대 과학의 방법론에 도전했다. 그는 항상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해서 그 일이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귀납의 문제’는 20세기 칼 포퍼가 해결책을 제시할 때까지 철학자들 사이에서 난제로 남아 있었다. 흄은 이 문제에 대해 우리가 확실함이 아니라 희망적인 가능성을 다루어야 하며, 관습이 우리를 이끌어 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고 흥미롭게 표현했다.

영국 경험주의의 두드러진 특징은 상식에 호소하는 점이다. 이 간단 명료한 추론의 전통은 불필요한 문제와 추상적인 부분을 배제하는 오컴의 방식과 프랜시스 베이컨의 증거를 토대로 한 방법에 뿌리를 두고 있다.

상식(세상에 대한 우리 경험의 일부)은 우리에게 경험에 모순되어 발생한 기적은 거짓이거나 감각이 잘못 인식한 결과에 가깝다고 알려 준다.

흄은 주변 세상을 살필 때 이성에 의존할 모든 부분을 효과적으로 없애 버렸다.

흄은 미래에 대한 기대를 관습이 이끌도록 내버려 두며 상식으로 보이는 ‘완화된 회의주의’를 옹호했다. 동시에 그는 우리가 이성이 아닌 ‘열정’이라고 부르는 감정과 직관에 이끌려 일반적으로 판단하고 결정을 내린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흄의 말을 빌리자면 이성은 열정의 노예이다. 우리는 가끔 잘못된 판단을 하지만 모든 것을 감안할 때 꼭 필요한 욕구를 부정하기보다는 열정을 만족시키는 편을 택한다. 잘못된 판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의사 결정에서 이성의 작용에 대한 흄의 회의주의는 그의 관점을 도덕철학으로 한층 발전시켰다.

그는 대다수의 도덕철학자들이 저술을 할 때 객관적인 설명에서 주관적인 설명으로 갑자기 넘어간다고 언급했다.

에이어의 정의주의emotivism는 도덕적 제의는 객관적인 진술처럼 보여야 하지만 실질적으로 주관적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실증주의의 대표 학자는 오귀스트 콩트이며 그는 형이상학적인 예측은 철학에서 더 이상 역할을 하지 못하고 과학적 질의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증주의는 과학과 철학 사이에서 점차 세력을 늘려 나갔고 콩트는 과학에 토대를 두고 그 방법론을 다양하게 적용하는 철학의 한 분과인 근대 과학철학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했다.

실증주의는 과학적으로 검증된 지식만이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오귀스트 콩트에 따르면 이는 비단 자연과학뿐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행동을 결정하는 원칙에도 적용된다.

콩트는 물리적 세상이 물리적 법칙을 따르듯 사회 역시 눈에 보이는 법칙에 따라 운영되며 주관적인 자기 성찰이나 직관을 통해서가 아니라 객관적인 과학적 연구에 의해 사회적 지식을 습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콩트는 또한 인류학, 경제학, 정치학을 포함한 사회과학 분야의 토대를 정립하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

진화론이 철학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무엇보다도 인간이 신의 피조물이 아니라 자연 세계의 발전 과정에서 등장했다는 관념을 도출한 것이다.

다윈은 기독교인으로 자랐지만 자신의 이론을 정립하면서 점점 급진적이게 되었다. 그럼에도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유지했다. 아이작 뉴턴처럼 그도 신이 우주를 창조하고 자연선택과 같은 법칙을 만들었다고 믿었지만 그 이후로 더는 개입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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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과 인문학은 철학이라는 큰 나무에서 뻗어 나온 두 갈래 줄기로서 서로 무관한 독립체가 아니라 ‘네 속에 내가, 내 속에 네가 있는’ 융합체이다.

‘용공’容共이라는 두 글자로 마르크스사상을 일축하는 것은 단순화의 오류를 피할 수 없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집단 수용소의 죄수에서 조국이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대문호가 되기까지, 솔제니친의 일생은 정치 환경의 비정과 무도, 갈등과 모순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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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책임을 지닌 학자 계급이 출현했고 그중에서도 노자는 사회와 정치 조직의 토대가 되는 종합적인 도덕철학을 제안했다. 이 세계관은 곧 도교로 알려졌다.

노자는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은 상호 보완하는 상태로 구성된다고 믿었다.

빛과 어둠, 밤과 낮, 삶과 죽음 등 각각은 순환하는 주기에서 서로 발생하며 영원한 조화와 균형을 이룬다는 것이다.

도를 행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충동을 억제하고 직관적이고 신중하게 행동하면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단순하고 유유자적한 삶인 ‘무위’의 삶을 추구해야 한다.

노자가 도덕철학의 근간을 형성했다면 공자는 안정적이고 이상적인 정치 체계를 구축하는데 더 큰 노력을 쏟았다.

그는 정부가 덕과 선행을 토대로 해야 한다고 믿었지만 당대 관습과는 달리 도덕적 선함은 신이 준 것이 아니며 어떤 특정한 사회 계층으로 제약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덕은 배양할 수 있으며 그 모범을 보이는 것이 통치 계급의 역할이라 말했다.

통치자는 자애로워야 하고 그 국민은 충성심을 보여야 한다. 공자는 이 상호 간의 신념을 다른 관계에도 확장해 정이 많은 부모와 순종하는 자녀, 남편과 아내, 형제자매, 친구와 동료 사이의 관계에도 적용했다.

인간관계에서 상호 존중 모델에 대한 생각은 공자 도덕철학의 중심이다, 공자는 또한 타인에 대한 우리의 행동을 정의할 때 상호주의를 지침으로 세웠다.

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탄생과 재탄생의 주기에서 벗어나는 해탈이며 신에게 헌신하거나 업보를 깨닫고 법dharma을 통해 적절한 행동을 취해야 얻을 수 있다.

팔정도(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념正念, 정정진正精進, 정정正定)를 따르면 만족한 인생을 살고 윤회의 주기에서 벗어나 열반에 도달할 수 있다.

교회의 교리는 중세 유럽 철학을 주도했다. 기독교는 특히 초창기에 철학적 추론보다는 신념과 권위에 더 비중을 두었다.

교회는 실질적으로 학문을 독점했지만 일부 기독교 사상가들은 특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리스철학 요소를 도입했다

로마제국 말기부터 15세기에 이르기까지 두드러진 기독교 철학이 발전했고 아우구스티누스를 시작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러 철학이 집대성되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에 인본주의 관점이 다시 대두되면서 교회 권위자들, 특히 교황직이 위태로워졌다. 과학적 발견이 종교적 핵심인 믿음과 모순되고 인쇄의 발달로 교회는 더 이상 정보를 통제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룬다고 믿었다. 기독교는 믿음을, 철학은 추론을 따르지만 종교와 이성은 양립할 수 있고 상호 보완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기독교가 신학 체계에 합리적인 토대를 제공하려면 중심 믿음에 모순되지 않는 플라톤 철학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제시했다.

중세 기독교에서 반복되는 쟁점은 하느님의 존재를 철학적, 이성적으로 입증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최초의 기독교 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역설에 대해 신이 우리에게 선과 악 중에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고 반박했다

신은 모든 것의 창조주이지만 악을 창조한 것은 아니며 악은 결핍, 즉 합리적 인간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으면서 생겨난 선의 결함에서 유래한다고 주장했다

기독교에 철학의 자리가 생겨났다는 것은 곧 보에티우스의 작품이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입증한 셈이다.

스콜라철학은 신학을 가르치고 그 내용을 변증법적 추론으로 면밀히 살폈다.

스콜라철학은 철학 사상을 기독교와 통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기독교 교육과 신학의 뚜렷한 기풍으로 남아 있다가 르네상스 시대에 인본주의 사상으로 대체되었다.

아벨라르는 공통적인 특질이 특정한 상황에 내재한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을 받아들여 보편은 실체가 아닌 개념으로 우리의 생각 속에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개념론으로 알려진 그의 철학은 처음에는 반대에 부딪혔지만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사상을 기독교 교리로 융합하는 운동을 이끌었다.

안셀무스는 우리에게 가장 완벽한 존재를 상상해 보라고 요구한다. 그런 존재가 실재하지 않는다면 그 존재는 가장 완벽할 수 없고 존재하는 완벽한 것보다 열등할 것이다. 따라서 가장 완벽한 존재는 반드시 존재하며 안셀무스의 말을 빌자면 ‘그건 바로 신이고 그보다 더 위대한 존재는 있을 수 없다.’

이후 등장한 철학자들 중 토마스 아퀴나스와 임마누엘 칸트는 이 논쟁이 하느님의 본질에 대한 사상을 드러내고 있지만 실존에 대한 증거를 제시해 주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중세 기독교 철학자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요 업적은 상당히 모순적으로 보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통합하고 이들을 기독교 교리로 결속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준 것이다.

기독교 철학자들은 도덕철학을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설명하는 용도로 활용했지만 이를 정치철학에 적용할 때, 인간이 만든 법이 신의 법과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지를 두고 의구심을 가졌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을 통해 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세속적인 사회와 신의 왕국을 플라톤의 세계와 이데아의 관계와 비슷한 방식으로 비교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법이 신의 영원한 법과 분리되어야 한다고 제안했지만 신의 법의 일부인 인간의 행동, 도덕, 덕을 토대로 한 자연법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자연법에서 중요한 부분은 ‘정당한 전쟁’에 대한 개념이다. 기독교(와 많은 다른 종교들)는 평화주의를 주장하지만 정치적으로 가끔 전쟁이 필요하다.

보편적인 용례에서 ‘윤리’란 우리 행동의 도덕성을 판단하는 방법을 지칭한다.

스콜라 철학자들은 엄격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론을 채택했지만 우주의 문제에 대한 그의 관점은 교회의 가르침에 모순된다고 보았다. 피에르 아벨라르는 자신의 개념론(우주는 마음속에만 존재한다는 사상)에 입각해 실재론(우주는 실재하며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상)에 도전한 최초의 철학자다

둔스 스코투스와 오컴과 같은 13세기 철학자들은 이 논쟁을 더 발전시켜 우주는 실제 세상의 사물의 특성을 언급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많이 받은 오컴은 이성적인 논쟁의 토대로 관찰과 경험적 증거를 활용해야 한다고 믿었고 이것이 후에 ‘과학적인 방법’이 되었다.

오컴은 오컴의 면도날이라는 원칙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무언가를 설명하는 두 가지 대안이 있다면 모든 것이 동일하다고 가정했을 때 단순한 설명이 더 정확하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론적, 경험주의적 철학은 중세 시대 말에 이르러서야 점차 기독교에 통합되었다. 문제가 된 부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접근 방식인데, 감각을 증거로 활용하고 논리적인 추론에 기대는 방식이 너무 세속적이라 신비로운 종교적 요소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네덜란드의 철학자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 는 개인에 중점을 둔 인본주의에 동조해 개인과 신의 관계가 가톨릭 교리보다 더 상관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독교 교리에서 강조하는 단순함의 가치, 순수함, 겸손함은 인간의 근본적인 특성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철학에서 논의하는 지식은 그리스도가 몸소 보여 주는 ‘훌륭한 삶’으로 가는 장애가 되며 종교적 신념에 방해가 된다고 주장했다.

새로운 인본주의 사상은 처음에는 르네상스라는 문화와 예술 운동으로 구현되었지만 과학과 철학에도 비옥한 토대를 제공해 근대 철학과 과학의 시초가 된 18세기 ‘이성의 시대’를 열게 해 주었다.

이슬람교는 당대 기독교와는 달리 학문을 권장했고 종교와 이성적인 질의가 나란히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했다.

과학과 철학, 신학 교육까지 받은 박식한 이슬람 철학자들은 그리스 문헌(대다수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들)을 보존하고 번역했고 인도의 과학과 수학적인 업적도 받아들였다. 그래서 기독교 세계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천문학, 의학, 수학, 연금술과 같은 분야가 발전했다. 두드러진 이슬람 ‘철학파’가 생겨났고 주요 인물인 아비센나와 아베로에스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이슬람교의 신학에 접목했다.

아비센나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공부했지만 플라톤의 사상을 비롯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는 별도로 무형의 범주가 존재한다는 이원론의 영향도 받았다. 그는 이원론적 사상을 더욱 발전시켰고 신체와 정신에 반응하는 우리의 감각과 이성도 마찬가지로 분리된다고 주장했다.

11·12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받아들인 아비센나의 신플라톤주의가 이슬람의 주요 철학이 되었지만 반발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알가잘리와 같은 강경파 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쿠란에 반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의 이의 제기는 역설적으로 이슬람 철학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인본주의는 이후 철학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지만 마키아벨리와 교회 개혁론자들 같은 정치철학자들을 제외하고는 당시 철학보다는 과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마키아벨리는 개인의 도덕성과 통치자와 국가의 편의를 구분하면서 이상적인 정치 사회를 이론화하는 일은 성과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통치자는 필요할 경우 항상 폭력과 속임수를 활용해 비도덕적으로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얻어야 할 결과를 생각하는 것이 실행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뼛속까지 공화주의자였고, 『군주론』은 프랜시스 베이컨의 말을 빌자면 ‘사람이 할 일이지만 꼭 해야 하는 일은 아닌 것’을 풍자하는 책이라고 볼 수 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속 정치적 현실주의에 내포된 메시지 중 하나는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한다’이다. 이 말은 정치철학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도덕철학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쳐 의도나 목적보다는 결과로서 행동의 도덕성을 판단하게 해 주었다

르네상스 시대 인본주의에서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동은 더 이상 종교적 권위에 따르는 것이 아니며 선과 악에 대한 사상도 기독교 교리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극단적이지 않다.

유럽 사상 속에 이슬람의 ‘황금시대’가 남긴 유산 가운데 일부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관찰, 분석, 분류 방식을 토대로 한 풍부한 과학 연구로 특히 의학과 연금술 같은 분야의 실험에 있어서는 두드러진 이슬람 전통을 보여 준다.

베이컨은 관찰의 과정, 즉 자료를 축적하고 분석하며 가설을 세우고 중요한 실험을 통해 이를 확인하는 방식을 옹호했다. 일련의 사례에서 일반적인 규칙을 도출하는 추론 과정은 근대 과학적 실천의 토대를 형성했으며 증거를 강조하는 베이컨의 방식은 또한 영국의 경험주의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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