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과 믿음이 율법에 순종함이 아니라 복음으로 들음으로 말미암아 온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공통으로 경험한 일이었다(갈 3:1-5). - P404

더 중요한 점은 성령과 믿음이 오직 이 길로만 온다는 것이다. 율법을 몰아낸 것은 이방인 문제와 바울의 구원론이 천명하는 유일주의이지, 율법에 관한 바울의 오해나 바울의 배경이 결정지은 견해가 아니었다. - P404

인간의 진정한 곤경은 사람들이 다른 주 아래 있다는 것이었다. - P409

아무리 열심히 참회해도, 참회가 주를 바꿔놓지 못한다. - P409

인간은 자신이 지은 범죄들에 책임을 져야만 한다. 이를 해결할 길은 하나님이 그 범죄들을 보아 넘기시든지 아니면 그리스도가 그 범죄들을 속하고자 죽는 길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들이 이 문제를 이루지는 않는다. - P409

인간의 문제는 그리스도라는 주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짜 문제다. - P409

바울 사상의 핵심은 인간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새 생명을 얻고 1차 변화를 겪으며 이 변화는 결국 부활과 궁극의 변화로 이어진다는 것이요, 이런 이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이자 그리스도와 더불어 한 영인 사람이라는 것이며, 인간이 그리스도와 이룬 연합과 양립할 수 없는 다른 연합을 형성하여 그가 참여를 통해 이룬 연합을 깨뜨리지 않는 한, 그는 계속하여 방금 말한 지위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 P422

바울은 이 두 점-즉 하나님의 정의는 범죄에 따른 형벌과 순종에 따른 보상을 요구하지만, 범죄에 따른 형벌과 순종에 따른 보상이 그의 구원론을 구성하지는 않으며, 올바른 행위도 "안에" 계속 머무는 데 필요한 조건이다-에서 우리가 유대교 문헌에서 발견한 내용과 완전히 일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 P427

바울이 자신이 의미하는 바를 말했고, 말한 바를 의미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좋다고 본다: 그리스도인은 실제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며 한 영이다. 현세의 외형은 실제로 지나가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실제로 이 단계의 영광에서 또 다른 단계의 영광으로 옮겨가고 있다. 마지막은 실제로 올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은 실제로 변화될 것이다. - P429

바울이 한 말이 바로 바울이 실제로 생각했던 것이다: 즉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 세우신 주이시요, 믿는 자는 다 주께 속하며 그와 하나이며, 믿는 자들은 주와 한 몸을 이룸으로 말미암아 주의 날에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이 바로 바울이 하는 말이요 하려 했던 말이다. - P431

바울이 구사하는 의 용어(righteousnes terminology)도 팔레스타인 유대교의 의 용어와 관련이 있다. 바울의 글에서는 그리스와 헬레니즘 시대 유대교처럼 의로움(인간/인간)과 경건함(인간/하나님)을 구분한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으며, 바울의 글에서는 의가 여러 미덕 중 하나이지도 않다. - P435

하지만 여기에도 역시 큰 변화가 있다. 유대교 문헌에서는 의롭다는 것이 토라에 순종하고 범죄를 참회함을 뜻하지만, 바울의 글에서는 의롭다는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 P435

요컨대, 유대교에서는 의가 택함 받은 자들로 이루어진 그룹 가운데서 지위를 유지함(maintenance of statris)을 암시하는 용어이지만, 바울의 글에서는 의가 옮겨감을 나타내는 용어(transfer term)다. - P435

즉 유대교는 언약에 헌신함을 "안에" 자리 잡게(들어가게) 해주는 것으로 보고, 순종(의)을 뒤이어 사람이 안에 계속 머물게 해주는 것으로 본다. - P435

반면, 바울의 용법을 보면, "의롭게 되다(bemade righteous" ("의롭다하심을 받다(be justified")는 구원받은 이들로 이루어진 몸 안에 들어감(getting in)을 가리키는 용어이지, 그 몸 안에 머(stayingin)을 나타내는 용어가 아니다. - P435

따라서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않는다는 바울의 말은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들로 이루어진 몸으로 옮겨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 P435

유대교는 율법에 순종하는 사람은 의롭다고 말했는데, 이는 사람이 그렇게 율법에 순종함으로 언약 안에 머문다는 뜻이다. 결국 의가 믿음으로 말미암느냐 아니면 행위로 말미암느냐를 둘러싼 논쟁은 "의롭다"는 단어 그룹을 서로 달리 사용한 데서 생겨난 결과임이 드러난다. - P435

바울이 논박하는 것은 무엇보다 유대교가 합당히 여기는 올바른 경건에 이르는 수단("율법의 행위로")이 아니라, 그보다 앞선 유대교의 근본 기초들이다: - P448

선택, 언약과 율법, 그리고 이것들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율법에 따른 의"에 합당한 수단(토라에 순종함과 참회)도 잘못이라 주장하거나, 이 수단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요컨대, 이것이 바로 바울이 유대교에서 발견한 문제다: 유대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 P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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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는 언제나 새 피조물임(고후 5:17)을 말하기 전에, 성령을 소유함이 곧 보증이라고 언급했다(5:5). 따라서 우리는 바울 서신 어디에서도 종말론적 기대를 담은 간명한 구원론이 그리스도 안에 참여함이나 영에 참여함이라는 현재의 실재와 분리되어 있는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다. 오히려 이 둘은 함께 간다. - P378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세상의 주요 구주로 임명하셨다. 그를 믿는 이는 모두 미래에 이루어질 완전한 구원을 보증하시는 성령을 가졌으며, 현재는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이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영인 이로 간주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영을 따라 행해야 한다. 이는 또한 그리스도를 그들이 속한 주로 섬기는 것이기도 하다. - P378

바울의 강조점을 틀림없이 다른 곳에 있다: 그는 뒤로 거슬러 올라가 과거의 죄를 대속함으로 나아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 그리스도가 오실 때 살아있으나 죽어있으나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을 누리리라는 것을 확신시켜주는 쪽으로 나아간다. 바울은 이것이 그리스도의 죽음이 지닌 목적이라고 말한다. - P382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진 의미를 생각할 때 과거의 범죄를 속한다는 관점에서 생각하기보다는 주[主]인 이가 바뀜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며, 이렇게 주가 바뀜이 미래에 임할 구원을 보장한다고 생각한다. - P382

바울은 자신의 논리를 이와 같이 전개하는 것 같다: 하나님은 세상을 구하고자 그리스도 안에서 행동하셨다. 따라서 세상은 구원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율법도 함께 주셨다. 그리스도가 구원을 이루고자 주어진 분이라면, 율법은 구원의 길일 리가 없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목적에 어긋나는가? 아니다. 율법은 모든 인간을 죄에 건네줌으로써 결국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기능을 가진다. - P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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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를 이해할 때는, 그 종교 자신이 제시하는 내용이 명백히 무단 삭제되거나 정정되지 않은 한, 바로 그런 내용에 기초하여 이해해야지, 외부에서 그 종교를 논박하고 공격한 내용에 기초하여 이해해서는 안 된다. - P352

이런 점에 비춰볼 때, 우리는 기원후 70년 이전의 유대교가 은혜와 행위를 올바른 시각으로 파악했으며, 하나님의 계명을 시시한 것으로 만들지 않았고, 특히 위선이라는 특징을 갖지 않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 P352

결국 우리는 이 연구를 토대로 역사 속 여러 당파 및 분파의 관계, 바리새주의가 다른 당파 혹은 분파보다 우위에 있었다는 점 등에 관하여 결론을 끌어내지는 못하지만, 예루살렘 멸망 전에 유대교가 가졌던 특성에 관한 한, 몇 가지 결론을 타당하게 끌어낼 수 있다. 설령 우리가 언약적 율법주의가 표명했던 서로 다른 주제들과 모티프들을, 이후에 랍비 문헌이 이해한 그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언약적 율법주의가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전에 팔레스타인에 널리 퍼져 있었던 일반적 종교 유형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 P354

바울의 사상은 인간의 비참한 곤경에서 그 해결책으로 진행한다기보다 오히려 그 해결책에서 인간의 곤경 쪽으로 진행하는 것 같다. - P364

그는 인간의 죄와 범과에서 시작하지 않고,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구원 기회에서 시작했다(죄는 사람이 이런 구원 받을 기회를 갖지 못하게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바울은 인간을 설교하지 않고 하나님을 설교했다. - P365

사실, 바울은 그의 복음이 암시하는 의미들을 설명해야 할 일이 화급하다보니, "인간론"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것을 제시하는 데 신약 성경의 다른 저자보다 더 치중하는 것 같지만, 그것도 단지 그의 신학과 기독론 그리고 구원론의 결과에 불과하다. - P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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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세기 초부터 기원후 2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언약적 율법주의가 일관되게 유지되었다. - P351

때문에 우리는 언약적 율법주의가 기원후 70년 이전의 팔레스타인에 널리 퍼져 있었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다. - P351

따라서 언약적 율법주의는 예수가 아셨고 어쩌면 바울도 알았을 기본 종교 유형이었다. - P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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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NTC 맥아더 신약주석 : 야고보서 MNTC 맥아더 신약주석
존 맥아더 지음, 송동민 옮김 / 아바서원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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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분들의 땀과 시간, 열정. 그 결실로 단행본 한 권이 출간된다. 시리즈를 연속으로 출간하는 것은 더욱 힘겹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최고 난이도가 바로 시리즈 주석. 그 첫걸음을 시작한다. 더군다나 야고보서. 앎과 삶의 괴리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이때에 적실한 선택이 아닐까? 교회 됨과 그리스도인 됨이 모호해지고 희미해져 있는 이 시점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성경은 아닐까?


주석의 스펙트럼은 워낙 다양하여 평가가 쉽지 않다. 자신의 신학이 추구하는 목표나 서 있는 자리에 따라 평가는 상이하다. 주석의 난이도 또한 객관적이지 못하다. 독자의 지적 수준이나 그동안 배웠던 학문의 성격에 따라 이해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가령 지적 수준이 높을지라도 그동안 접하지 못했던 신학적 용어가 많다면 독해가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거칠게 평가해보자면 이 주석 시리즈는 학문적이기보다는 평이한 설명과 해석, 언어학적이거나 비평적이라기보다는 적용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 이미지는 한 편 한 편의 강해설교를 듣는 듯하다. 이미 맥아더 성경주석(단권)을 통해 입증된 간결하고 명료한 해석, 평신도의 눈높이에 맞춘 쉬운 문체가 눈에 띈다. 저자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시리즈 서문에서 밝히듯) 이 주석은 '성경을 설명하고 적용하려는 목표'를 지니고 있다. 


저자는 한 구절의 해석을 위해 구약과 신약에서의 다양한 구절을 인용한다. 가령 야고보서 1장 4절의 해석은 욥기에서 엘리바스의 선포와 시편에서 다윗의 기도를 인용한다. 또한 필요하다면 원어의 명료한 뜻을 밝힌다. 여기서 더 나아가 빌립보서, 갈라디아서, 베드로전서, 히브리서, 창세기, 로마서, 요한복음 등을 자유자재로 인용한다. 짧은 한 구절의 해석에 매우 다양한 성경말씀이 다채롭게 사용된다. 


또 하나의 특이점은 다른 주석과는 다르게 신학자가 아닌 사람들의 글이 많이 인용되어 있다. 대부분의 주석들은 그 분야에서 최고의 학자들의 의견들을 나열한다. 이후에 자신이 수용하는 점과 비판하는 점을 밝힌다. 하지만 이 주석은 설교 시에 설교자들이 인용하듯 독자들이 더욱 풍부하게 그 말씀을 경험하고 적용할 수 있는 방편을 선택한다. 가령 인도 선교사 에이미 카마이클(Amy Camichael, 1867-1951)의 시나, 19세기 초반 뉴욕에서 사역했던 복음주의 목회자 가디너 스프링(Gardiner Spring, 1785-1873)을 말씀을 인용하는 식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비교하여 살펴보자. 맥아더 신약 주석과는 다른 목적을 가진 NIGTC(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와의 비교다. NIGTC는 역사비평과 언어학적 석의에 근거하여 본문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제공한다. 


야고보서 말씀 중에서 흔히 아는 1장 22절 말씀이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이를 맥아더 신약 주석에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수용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우리가 그 진리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아무 유익이 없다. 오히려 그 말씀을 접한 이들에게 이 일은 추가적인 심판의 원인이 될 뿐이다. 복종하는 태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꼭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모든 참된 신자들에게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영적인 조건이며 신자 됨을 드러내는 공통적인 표지이다. 참된 영적인 생명의 요체는 순간적으로 동의나 헌신의 감정을 느끼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성경에 꾸준히 순종하는 삶에 있다(118)."


이를 NIGTC에서는 

The temptation in 1:22 is to assume that James is explicating the previous section: “When I say receive the word, I mean do the word, not just listen to it.” This may in fact be the case , but one should not put too much stress on the use of δέ. 

... 

Be doers of the word,” says James. The imperative γίνεσθε regularly substitutes for ἔστε  and so the verse has a continuous force with a charitable assumption (“continue being”) rather than the ingressive “become” which γίνεσθε might be thought to imply(96). 


접속사 δέ의 사용법에 대하여서 말하고 있다. 다음 문단은 더욱 그러하다. 명령형 γίνεσθε가 ἔστε 대신에 자주 사용됨을 말한다. 이렇듯 원어의 문법적 해석을 한다. 


다양한 주석이 있고, 그 주석들은 저마다의 목적이 있다. 대상이 다르고 목표가 다르다. 맥아더 신약 주석은 본문을 한 구절씩 분석하고 해석하는 주석이 아니라, 본문 자체와 그 본문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와 적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하다. 따라서 좀 더 심도 깊은 강해서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을 통독하면서 함께 읽어나가도 좋을 것 같고, 설교를 준비하는 목회자들에게 유용한 통찰을 줄 수 있는 주석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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