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중이라는 일터에서 목사로 사는 것이 온통 비옥한 농지와 매끄러운 푸른 언덕과 장엄한 지평선과 웅장한 산만 있는 삶이라고 내가 생각했단 말인가? 하나님이 보좌에서 다스리시는 풍요롭고 멋진 지평선과 봉우리가 있는 하나님 나라의 대륙이라기보다는, 황무지와 월 드러그에 더 가까워 보이는 미국 문화와 미국 교회에서 나는 목회를 하고 있었다.

나는 목사였다. 지금 이곳에서, 이 회중 안에서, 이 장소에서, 이 일터에서, 이 가족과 더불어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필요한 상상력을 얻고 믿음을 개발할 때까지 나는 이 사람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

모든 성장에는, 특히 성품의 성장, 영적인 성장, 교회의 성장, 그리스도의 몸의 성장,영혼의 성장에는 휴지기가 있다는 것을 이제는 나도 알 때가 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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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예배로 부름받을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현존과 말씀과 행동을 인식하게 되는 장소로 계속해서 들어갈 것이며, 깨어서 그 현존과 말씀과 행동에 동참할 것이다.

교회를 공식적으로 세울 준비를 하면서 우선순위가 정해지기 시작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지성소를 마련할 것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을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가는 핵심적 형성의 행위다.

단순히 거룩한 땅으로 가는 순례자들이 아니라, 단순히 역사 속에서 자신이 처한 위치와 상황에 따라서 규정되는 사람들이 아니라,하나님의 백성이다.

성막의 가구들은 그들이 드리는 예배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것이었다.

예배는 그 누구도 보지 못한 하나님과 관련된 일이다.

예배란 ‘숱한 세월의 희망과 두려움’을 지나 오면서 남자와 여자와 아기들의 몸에, 동네에, 가정에, 일터에 날마다 조금씩 형성되는 구원이라고 우리는 이해하게 되었다. 구원이 이루어지는 ‘산자의 땅’이 우리 동네에 창조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말씀을 통해서 우리와 말씀하시고, 우리가 기도와 찬송을 통해서 그분과 말하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떤 일도 이 안에서 일어나서는 안 된다"

예배의 북극은 "당신의 거룩한 말씀을 통해서 우리와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이고, 예배의 남극은 "기도와 찬송을 통해서 주님과 말하는" 우리의 말이다.

우리는 예배당의 건축 양식이 그 북극과 남극을 유지하고, 어느 각도에서 보나 하나님의 현존과 말씀이 존중되는 것을 느낄 수 있고, 우리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임을 인식하는 데 최대한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장로교 전통에서 ‘거룩한 말씀’은 성경과 설교를 통해서 ‘듣는 말씀’과 성경적 성례전인 세례와 성찬을 통해서 ‘보는 말씀’, 두 가지다.

말씀을 통해서든 성례전을 통해서든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동일한 것을 말씀하신다.

세례반. 세례는 기독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성례전으로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기 시작했음을 표시해 준다. 예배당에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세례반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첫 번째 말씀이 우리를 받아들이시고 용서하신다는 말씀이라는 뜻이다.

예배의 장소는 듣는 장소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다.

그러나 그곳은 또한 말씀으로 선포된 것에 대답하고 응답하는 장소이기도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대화를 촉발한다.

우리는 회중으로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며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기도와 찬송을 통해서’ 이야기한다.

예배드리러 올 때는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이다. 우리는 단지 보고 듣기 위해서만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함께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온다. 넉넉한 환대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 복도는 넓게 만들었다.

높이 달린 이 십자가가 하는 또 하나의 선언은, 우리가 망각해서 혹은 부주의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아래에서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면, 예배는 소원 성취를 위한 행위가 되고 찬송은 자기를 축하하는 행위가 된다는 것이었다

십자가를 통해서 시작된 행동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보다도 크고 포괄적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오직 관계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관계는 눈으로 볼 수 없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무엇을 만들거나 무엇을 하는 데 이용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힘이 아니다.

예배는 감각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신비를 인식하게 하고 그 신비에 집중하게 하는 예술이다

예배는 야웨의 구원과 계시에 푹 잠기는 삶을 실천하는 것이다.

아내 잰이 누구이며 무슨 일을 하는지, 그 관계의 복잡성을 설명하는 단 하나의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환대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잠자리를 마련하고 식사를 준비하는 것 이상의 환대였다.

정원 가꾸기는, 우리가 먹을 것을 기르고 조리하고 대접하는 일이 곧 창조계를 존중하면서 거기에 존엄성을 부여하는 행위가 되게 하고, 또한 인간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모두를 포함하는 살아 있는 창조계와 우리를 연결시켜 주는 행위가 되게 하는 데 전략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숙고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실천이 되었다

성만찬도 식사다. 주님의 식탁에 모여 앉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준비해서 내놓은 예수님의 살과 피다. 그것은 궁극적 환대이며, 모든 환대의 모체다.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이 서로 유기적인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새와 물고기, 흙과 공기, 검정색과 하얀색,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침, 점심, 저녁 등 우리가 집에서 하는 모든 식사는 강렬하고도 깊은 의미에서 주의 만찬에서 파생되었다.

잰이 하는 일에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대략 ‘하늘과 땅의 교차로에서 서성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살피는 것’ 정도가 될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자녀들에게 그리고 또 다른 누구에게나 예수님을 증언할 때 우리는 조언이 아니라 씨앗을 나누어 주는 겁니다. 그리고 씨앗은 싹이 틀 수 있는 땅을 필요로 하지요. 식사는 바로 그와 같은 땅이에요. 식사는, 우리가 하거나 하지 않는 모든 말과, 느끼거나 느끼지 않는 모든 것과, 하나님의 말씀과 잡담 몇 마디가 음식과 함께 흡수되어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는 관계의 환경을 날마다 마련해 줍니다.

함께 식사를 할 때는 추상성이나 보편성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사람들에게 간단한 지혜를 나누어 주지 않으셨어요. 그런 몇 가지 지혜로 사람들이 알아서 하나님이나 자기 이웃을 찾아가게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이 하신 대로 할 수 있습니다. 매일 저녁 여러분의 식탁에서 예수님의 생명을 취하고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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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더 많은 일들이목회로 보이기 시작했다. 주중에 일어나는 일은 더 이상 단절된 행위들의 집합이 아니었다.

우리는 주중에 우리가 하는 일들-무작위적이고 단절되어 보이는 기도와 이야기와 고통과 거절과 공동체-과 일요일 사이의 내적인 연결성을 보기 시작했다

교회 지도자들이 예배하고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를 조금이라도 비인격화할 때마다 복음은 약해지네.

특히 규모는 정말로 잘 비인격화시키지.

키르케고르의 비판은 지금도 여전히 설득력이 있네. ‘사람이 많을수록 진실은 줄어든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성숙해지는 유일한 길은 친밀감, 포기, 그리고 인격적 깊이뿐이라네.

목사는 그와 같은 성숙을 양육하는 핵심적인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네.

그러한 일이 큰 회중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하려면 무지 애를 쓰며 결을 거슬러 가야만 한다네. 큰 규모는 도움이 되기보다는 장애가 되기 때문일세.

군중은 과도한 술과 비인격적인 섹스만큼이나 철저하게 영혼을 망친다네.

초월성을 느끼게 해주지만 하나님을향하게 하는 초월성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멀어지게 하는 거짓 초월성이라네

종교적인 굶주림은 만족을 모르는 자아의 본성에 뿌리를 두고 있네.

회중을 규모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해 갈 수 있는, 군중이 아닌 공동체로 전략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키울 위치에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서 아마 목사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네.

목사가 된다는 것은 소명이지 직업이 아니다. 그러나 목사가 되었을 때 나는 내가 소명과 직업을 구분하지 못하는 문화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예술가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연결시키는 눈을 가지고 있고, 우리의 부주의한 눈으로는 부분밖에 보지 못하는 것을 완전히 다 보여 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나는 목사로 고용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목사의 일차적 책임은 내가 섬기는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내가 섬기는 하나님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섬기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보다는 자신들이 원하는 일을 해주는 우상을 종종 선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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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늘 제기되었고 또한 답을 내려야 했던 근본적인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왜 그리스도교 교회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바쳐야 할까요? - P7

유대교인은 태어날 때부터 유대교인으로 납니다.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그리스도교인으로 나는 사람은 없지요. 그리스도교인이 되려면 거듭나야 합니다. - P7

물론 4세기 이래 대다수 그리스도교인은 유아 때 세례를 받습니다. 이것을 보면 그리스도교인도 태어날 때부터 그리스도교인으로 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례받은 이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세례가 뜻하는 바를 자신의 것으로 삼아야만 합니다. - P7

누군가가 그리스도교인이 된다는 것은 온갖 독특한 이유와 요소가 어우러진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 P8

그러나 그 어떤 경우라도 결국 그 사람이 신앙을 가져야, 즉 신자가 되어야 하지요. - P8

그리고 그리스도교에서 이야기하는 신앙은 언제나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뜻합니다. - P8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것, 곧 하느님께서 예수 안에서, 예수를 통해 활동하셔서 인류를 회복시켜 그들과 화해하시며, 나아가 인류를 통해 당신의 피조물 전체를 회복시켜 그들과 화해하신다고 고백하는 것, 이 고백과 신앙이 그리스도교인을 만듭니다. - P8

우리가 경험을 통해 진리로 간주하는 것은 도전을 받게 되기 마련입니다. - P12

우리가 순간 확실하다고 생각하거나 느끼는 것에는 추가적인 검증과 해석이 필요합니다. - P12

그것의 참됨은 우리의 경험과 지식을 통합하여 이를 근거로 삼을 때만 확인됩니다. - P12

진리의 최종 기준을 규정하는 것은 일관성coherence입니다. - P12

일관성은 진리의 속성이기도 하기에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 P12

참된 것은 무엇이든 궁극적으로 다른 모든 진리와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 P12

진리는 하나이면서 모든 것을 아우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이는 한 분 하느님이라는 개념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 P12

신학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참됨 여부에 관심하는 것은 성찰의 차원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교적 체험과 그리스도교 공동체에는 신학이 필요합니다. - P12

신학의 과제는 그리스도교 신앙 및 교리의 기원과 본래 내용, 혹은 그 역사적 변천을 연구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전통에 담긴 진리를 밝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P13

진리의 내용은 체계로 제시되어야 합니다. 체계로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은 포괄적인 서술 안에 있는 특정한 주장들 각각이 내세우는 진리를 검증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진리는 그 자체로 체계적이기 때문입니다. - P15

(앞서 말했듯) 일관성은 진리의 특징입니다. 따라서 신학을 체계로 제시하려는 시도는 전통이 전하는 가르침을 탐구하는 것의 목적인 진리에 대한 관심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 P15

신학을 통해 하느님의 진리를 체계적으로 탐구하는 데서 나오는 흥분에 도취해 우리가 마치 진리 자체를 손아귀에 쥐고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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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을 문제로 대하는 것이 최우선 목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도록 그들을 부르는 목사였다.

내 회중을 이루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많은 것이 사실이고 그들이 많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지만, 회중은 자신의 집단적 문제로규정되는 존재가 아니다.

회중은, 자신들이 인식하건 못하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 살아 있는영혼이라는 사실에 의해 규정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들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존귀하게 대하고 존중해야 하는 신비다.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으로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자체로, 있는 모습 그대로 알려지는 회중 안으로 사람을 맞이하고 반기는 임무를 맡은 사람이 공동체에서 목사 말고 누가 있겠는가?

나의 일은 사람들을 고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일은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이고 그들이 거룩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예배를 드릴 때는서로를 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너머를 보았다. 그러면서 우리가 보지 못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주의해서 반응하려고 했다.

켈트식의 십자가와 성만찬 탁자와 세례반과 강단은 우리가 보거나 가늠할 수 없는 하나님께 주의를 기울이게 했다.

치료나 문제 해결이나 사람을 고치는 것은 우리와 관련된 일이었다. 예배를 드리고, 온전해지고, 우리가 통제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을 향해 우리의 삶을 여는 것은 하나님과 관련된 일이었다.

일요일의 의자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작용한다는 관점에서 사람들을 이해하는 법을 배웠다. 이와 같은 깨달음은 관찰 그 자체에서 온 것이 아니라, 내가 회중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존재로 지금 모습 그대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는 사람들로 보기보다는,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대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는 깨달음에서 왔다.

회중은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가면서 희생적인 삶을 살겠다는 대단한 열의를 가진 사람들의 예외적인 모임이 아니라, 바울이 자신의 고린도 회중을 설명한 것과 더 비슷하다는 것을 이제는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이고 오직 신비로서만 그것을 대할 수 있을 뿐이다.

내 회중을 문제로 대할 때는 내가 하는 일을 대체로 알 수 있다. 그러나 목사로서 그들을 대할 때는 나의 이해와 통제를 벗어나는 신비를, 하나님과 관련된 어떤 것을 대하는 것이다.

예배를 드리러 오는 사람 중에 문제 없는 사람은 없다. 목회적으로 돌보려면 그러한 문제에 적절하게 대응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것 자체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내 회중을 문제로 규정하고 그렇게 대하는 습관에 빠져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어떻게든 손 써 보기 위해서, 아니면 적어도 도울 수 있는 누군가에게 의뢰하기 위해서, 그들을 문제로 축소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서서히 사람들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대하는 목사가 아니라, 사람들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다루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들을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축소시킴으로써 나는 그들의 인생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하나님과 그들의 영혼을, 그리고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목사의 소명을 배제시켜 버렸다.

회중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일은 매우 복잡한 일인데 그것을 명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 문제로 축소시키고 있었다. 꽤 자주 말이다.

성장이 대체로 느리고 한동안은 그 성장이 보이지도 않을 회중의 모호함을 안고 살아가겠는가? 진단할 수 있고 정면으로 다룰 수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감정적인 만족에 안주할 것인가, 아니면 구원과 거룩함의 신성한 신비를 함께 탐험하는 동료가 될 것인가?

오랜 잉태 기간 끝에 최근에야 비로소 확실하게 다시 보게 된 소명이었다. 그 소명에서 회중이회중으로 회복된 것, 화요일이 아니라 일요일이 규정하는회중으로 회복된 것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나의 내면에서 단호한 결의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요청받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리라.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속화의 시대는 하나님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다. 하나님은 주변적 존재다.

하나님은 선하지만(혹은 그다지 선하지 않지만) 중심을 차지하지는 못한다.

사람들이 부모 때문에, 자녀 때문에, 혹은 감정 때문에 도움을 받고 싶을 때 그들은 보통 자신이 하나님과 관련해서 도움을 받고 싶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목사라는 소명에 진실하다면, ‘시장’이 내가 하는 일을 결정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사람들과 함께 그리고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할 방법을 찾을 것이고, 그들에게 기도를 가르칠 것이다.

보통은 조용히 그리고 종종 그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전복적으로 가르칠 것이다. 하지만 요청받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목사다.

자신의 옛 도시 회중과 나의 비(非)도시 회중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의 본질은 지리나 인구 통계가 아니라 성령이라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성령의 사역과 현존이 두 회중 안에 똑같이 있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닌 것에 매여 살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우리의 일터를 적으로 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일요일에나 월요일에나 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러한 연속성을 자명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우리 회중에는 혹은 지역사회에는 별로 없었다.

우리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우리가 회중의 기대에 맞추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주일 내내 우리는 같은 목사였지만 일요일의 그 분명한 정체성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 일요일이 우리의 존재를 규정해 주고 나머지 6일 동안 우리가 일하는 방식을 규정해 준다는 사실은 인식하지 못한다.

바로 기도가 모든 것의 핵심이라는 것 말이다. 예배당에서건 길거리에서건, 내가 생각하거나 말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대화와 교차해야 했다.

동료 목사회에서 처음으로 합의한 것은목사의 소명을전적으로 성경 본문에 근거해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요일의 성경 본문을 통해서 목사와 예배하는 회중은 구원 공동체로 형성된 하나님의 백성과 살아 있는 관계를 맺는다.

목사와 회중, 그것이 바로 우리 관계의 본질이다. 설교와 가르침, 찬송과 기도, 세례와 성만찬.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 설교, 그리고 성례전이 목사와 회중인 우리를 부활의 공동체로 형성했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사시는 것이다.

홍해에서 성취된 구원의 축제인유월절은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탈무드 시대 유대인들의 기도서 역할을 한 아가서와 짝을 이룬다.

시내 산에서 계시로 받은 율법을 축하하는오순절은 룻기와 짝을 이룬다.

구원의 삶을 어떻게 일상적인 나날의 삶으로 끌어오는가? 바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현존하신 사건이다.

기도는 그러한 하나님 앞에 우리가 개인적으로 현존하게 해주는 행위다.

성과 성전의 상실, 그리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상실로까지 보이는 사건을 슬퍼하며 금식하는아브월 9일은 예레미야애가와 짝을 이룬다.

예레미야애가는 적막함과 상실감을 쏟아 내며 고통의 경험으로 깊이 들어가는 책이다.

성도들과 함께 그 고통을 직면하지요. 고통 가운데 인내하며 그들의 동료가 되어 줍니다.

성막절에는 옥상이나 마당에 성막처럼 임시 공간을 설치해서 광야 생활을 재현한다.

성막절과 짝을 이루는 본문은 전도서다.

거절하는 연습이다. 목사들이 어떤 행동과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성경의 종교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종교가 아니다.

부림절에는 페르시아에서 대학살로부터 구원받은 것을 축하하고 즐긴다

부림절과 짝을 이루는 본문은 에스더서다.

구원은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집단적이다. 목사는 개개인의 영혼만이 아니라 공동체에 관심을 둔다.공동체 안에 있는 영혼들에게 관심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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